126화
도화는 남은 휴가 이틀 중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서 쉬기만 했다. 도화의 방과 만첩홍도가 있는 정원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진한 복숭아 향이 도화의 방까지 흘러들어 왔다.
“여기는 계절의 영향이 없는 곳인가? 열매 열릴 시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의아하긴 했지만, 이곳은 현무의 의지대로 돌아가는 곳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루라도 편히 쉬자.’
이미 돌아갈 준비는 다 해 둔 상태다. 담마에게 내일 돌아간다는 문자를 남긴 도화는 +999 표시가 뜬 메신저 어플에 시선이 갔다.
“미쳤나. 하룻밤 사이에 메시지를 999개나…….”
전화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더니 문자와 메신저를 보내기 시작해서 묵범의 번호는 알람을 무음으로 바꿔 버린 도화였다.
몇 번 온 문자는 읽었지만, 언제 오냐, 빨리 돌아와라, 홍도화 씨가 없으니 차사국이 너무 휑하다 등등의 헛소리만 남발하길래 이후로는 아예 읽지도 않았다.
차단해 버릴까 싶었지만, 혹시 모를 비상 상황으로 연락이 올지 몰라서 차단까진 안 했었다. 묵범은 도화가 연락을 매우 귀찮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몇 번 연락이 씹힌 이후로는 잠잠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많이 쌓였지? 혹시… 나 없는 사이에 무슨 큰일이라도 터졌나?’
하룻밤 사이에 메시지 폭탄을 보낸 묵범에게 화를 내려던 도화는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메시지 어플을 누르고 묵범의 대화창을 누르는 순간까지, 도화의 머리는 불안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역천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국장님이 중요한 문서는 특별히 관리하던데. 혹시 차사국을 급습했나? 아직도 하늘개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는데 차사국에 나타났을지도…….’
강림 도령에게 들었던 역천과 개운하게 해결하지 못한 임무가 머릿속을 스쳤다. 무슨 일이 터졌든 간에 묵범이나 강림 도령은 알아서 잘할 테니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
도화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차사국에 담마도 있기 때문이었다. 현천을 붙여 놓긴 했지만, 현천의 진가를 발휘하려면 검을 쓸 줄 알아야 했다.
‘젠장. 평소에 검 쓰는 법 좀 가르칠걸.’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묵범이 보낸 메시지를 툭 눌렀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화를 최대한 정제해서 한마디 중얼거렸다.
“드디어 미쳤나.”
묵범의 메시지 창을 누르자마자 도화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장소는 익숙하지만 낯선 욕조였다. 모양은 도화의 욕조와 똑같았지만, 주변 인테리어가 다른 것으로 보아 묵범의 집 욕조인 듯했다.
그냥 욕조 사진만 덜렁 보냈으면 이게 또 무슨 헛짓거리지? 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 속 욕조에는 묵범이 들어가 있었다.
물에 뭘 탔는지 사골 육수처럼 뽀얀 색 물속에서 묵범이 반쯤 누워 도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화가 아니라 카메라 렌즈를 보고 찍은 사진이겠지만, 사진을 보는 쪽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 같은 구도였다.
“옷이…….”
휴대폰 화면 속 사진을 보던 도화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속에서 찍은 사진이니 묵범은 옷을 벗고 들어간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었으나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묵범의 잘생긴 얼굴이었다. 잘생겼다는 말로 퉁 치기 미안할 정도로 살벌하게 생겼다.
‘진짜 얼굴은 끝내 주게 생겼는데…….’
저 주둥이가 문제란 말이지.
문제인 그 주둥이도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가서 당당하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게다가 도톰하기까지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꿀꺽.
“…!!”
도화는 침을 삼키며 난 소리에 흠칫 놀라 다급히 묵범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다른 손으로는 본인의 입술을 방어하듯 틀어막았다.
‘저 입술로 나한테 그… 그걸 했었지.’
홍천강의 수귀를 잡으러 갔을 때 일이 불가항력으로 뇌리를 스쳤다. 그러자 도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만첩도화 사이에 끼어 있으면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물들었다.
인공호흡을 키스라도 한 것처럼 구는 묵범을 죽일 기세로 대한 것은 도화, 본인이었으면서 이제와 묵범의 입술만 보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점점 생생하게 떠오르자 도화는 손을 펴서 얼굴을 짜악! 소리 나게 쳤다. 고작 사진 한 장 가지고 이런 망상이나 해 대다니.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간신히 묵범의 입술에서 벗어난 도화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넓은 어깨였다. 한눈에 봐도 곧게 쭉 뻗은 빗장뼈와 그 밑으로 단단해 보이는 가슴이 도화의 눈을 어지럽혔다.
‘운동을 따로 하는 게 있나?’
어깨와 가슴이 넓은 것뿐만 아니라 흉곽도 두툼했다. 도화는 티셔츠 목 부분을 쭉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크기는 내가 더 크긴 한데…….’
가슴 볼륨은 도화가 압도적이었으나,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왜 불편하지? 저 자식 어깨가 더 넓어 보여서?’
괜히 심장이 있는 가슴 부분을 손으로 꾹 누른 도화는 다른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
살짝 움직인 것뿐인데 도화의 손가락이 멈췄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생각도 멈췄다.
‘이게 뭐지?’
이번에도 사진이었다. 방금 본 사진과 구도만 바뀐 사진. 휴대폰을 위로 들고 찍은 것인지 얼굴은 입술과 턱만 나오고 상체와 뽀얀 물이 찍혀 있었다. 가슴이 부각되어 보이는 것도 신경 쓰이는데 도화의 시선은 자꾸만 그보다 아래, 잔잔한 물결로 쏠렸다.
“보이는… 건가? 아닌가?”
물이 워낙 뿌예서 허리와 다리의 형체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으음…….”
보일 듯하면서도 보이질 않으니 도화는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고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사진과 씨름하던 중 새로운 메시지 도착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방금 막 도착한 메시지는 묵범이 보낸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도화는 자신이 묵범의 하체를 휴대폰 액정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친 건 나였나….”
머리를 흔든 도화는 묵범이 새로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묵범
내 거기 잘 안 보이죠?
“내 거기? 잘 안 보이죠?”
육성으로 문자를 잘 안 보이는 묵범의 거기가 무엇인지 바로 파악한 도화는 들고 있던 휴대폰을 냅다 던졌다. 그래도 휴대폰을 망가트리면 안 된다는 정신은 있어서 푹신한 침대 위로 던졌다.
“CCTV라도 달아 둔 거 아니야?”
그럴 가능성은 0%겠지만, 자신의 행동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것 같은 문자에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침대 위 휴대폰을 노려보던 도화는 검게 꺼진 화면이 갑자기 번쩍이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또 무슨 희롱을 하려고.’
희롱은 물속에 잠긴 묵범의 거기를 보려고 했던 자신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도화였다.
묵범
드디어 제 메시지를 보는군요. 일은 어느 정도 끝냈습니까? 내일 돌아오는 거 맞지요?
단순히 휴가 일정을 확인하는 내용인데 어째서인지 어서 돌아오라는 묵범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손으로 귀를 만지작거리던 도화는 짧게 -내일 갈 테니까 연락 그만해.-라고 보냈다.
그리고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화면을 위로 쭉 올렸다.
묵범
고작 하루 혼자 일한 것뿐인데… 홍도화 씨가 없으니 한 시간이 24시간인 것 같습니다.
휴가 그거 그냥 집에서 보내면 안 됩니까?
제가 정말 엄청나게 좋은 곳을 준비했는데 거긴 어떱니까? 별천계에 있는 곳인데 제 이름만 대면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현천이 자꾸 담마에게 술을 달라고 합니다. 저러다 담마까지 술꾼이 될지도 몰라요. 걱정 안 됩니까? 빨리 와서 현천 좀 막아 봐요.
‘현천 이 자식이…?’
밀린 메시지를 읽던 도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담마를 지키라고 붙여 둔 건데 안 좋은 영향이나 끼치고 있다니.
돌아가면 단단히 혼쭐을 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묵범
오늘은 동정귀를 잡았습니다. 혼자 일하는 것도 슬픈데 동정귀를 잡자니 살면서 이렇게 우울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홍도화 씨는 곁에 제가 없는데 외롭지 않습니까?
국장님이 저만 보면 홀아비라고 합니다. 옆에 홍도화 씨가 없으니 제가 저런 놀림을 받고 삽니다. 하하.
묵범은 메시지로 온갖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하소연뿐인가? 하루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도 하고, 도화에게 어서 돌아오라고 회유도 했다.
반짝반짝.
자꾸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번쩍였다. 읽은 만큼 새 메시지가 쌓이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하고 읽어 내려갔다.
묵범
요즘 손각시가 자꾸 앞에 알짱댑니다. 당신과 친분이 있다 하여 없애진 않았는데 매우 귀찮습니다. 어서 돌아와서 손각시 좀 어찌해 주세요.
‘손각시?’
묵범
손각시가 당신을 찾더군요. 무슨 이유인진 모르지만, 제 예상으로는 담마의 친아버지와 관련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꾸 제게 추파를 던져서 당신 핑계를 댔습니다.
‘추파? 내 핑계?’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메시지가 줄줄 이어지고 있었다.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는 도화의 눈동자와 손가락이 분주해졌다.
내 핑계를 댔다고 하니 예감이 좋지 않다. 손각시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잘생기고 몸 좋고 한 사람만 좋아하는 일편단심인 남자를 좋아한다. 저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빠지면 손각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전에 손각시가 담마의 친부인 이선후를 질색했던 이유는 이선후가 저 세 가지 조건 중 무엇 하나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선후의 얼굴이 잘생긴 것은 도박과 술에 빠져 옛말이 되었고 당연히 몸도 엉망이었다. 게다가 일편단심은 개뿔. 다온을 돈줄로만 여기고 있었으니 손각시가 질색하다 못해 분노할 수밖에.
어쨌든, 묵범의 메시지만 보면 그는 손각시의 레이더망에 아주 정확히 걸린 것 같았다. 하지만, 묵범의 핑계를 들은 손각시는 도화가 예상 못 한 반응을 보였다.
묵범
하하. 손각시가 저희를 응원하더군요. 나뭇잎으로 궁합을 봐 주기도 했습니다. 저와 당신은 천생연분으로 나왔습니다.
“뭐라는 거야…….”
어이 털린 도화가 메시지 사이 사이에 끼어 있는 묵범의 셀카를 보고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아무래도 묵범은 자신의 외모가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 잘 아는 것 같다.
손각시에게 둘이 사귄다는 가짜 제보를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던 도화였으나, 묵범의 셀카를 보고 나니 분노로 들끓던 마음이 갑자기 평온해졌다.
광징히 독한 진정제를 여러 대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도화는 경계할 틈도 없이 메시지 사이에서 묵범의 다양한 사진이 튀어나왔다.
대부분 셀카였고 모두 얼굴이 잘 나오는 구도였다. 계속 메시지를 확인하다간 묵범의 얼굴 때문에 정신이 사나워질 것 같아서 메시지를 끝으로 쭉 내렸다.
그러자 방금 도착한 묵범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묵범
보고 싶으니까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