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꽃나무가 외로움을 탄다는 현무의 황당한 말을 무시하려던 도화였지만, 가지 말라고 잡는 것처럼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바람 때문에 결국 좀 더 있기로 했다.
별저 밖은 한겨울일 텐데, 이곳은 어찌나 따뜻하고 포근한지. 바람마저 은은하나 꽃향기를 품고 살랑거리니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밤새 머리를 쥐어짜며 미해결 사건을 일단락 짓느라 피로가 누적된 도화가 까무룩 잠에 든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
누가 흔들어 깨운 것도 아닌데 도화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예정에 없던 잠을 자던 몸이 뒤늦은 반응을 보인 탓이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나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되어 버렸다.
장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도화는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위험 요소가 없다 한들 고작 두 번 온 것이 다인, 탁 트인 공간에서 무방비로 잠이 든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정신 차려. 홍도화. 아무리 휴가여도 그렇지. 경계심이 너무 흐트러졌어.’
우선 방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선 도화는 자신의 몸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사고가 멈췄다.
‘누가 이런 짓을……?’
진분홍 꽃잎이 어디서 났는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안다.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눈 내리는 것처럼 꽃잎을 떨어트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바람이 부니 당연히 벌어지는 일이고. 지금처럼 자신이 잠든 사이 꽃잎이 몸 위에 수북이 쌓이는 것은 절대 당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건 누군가 일부러 한 것이 분명했다.
‘현무? 영귀?’
현무별저에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저 둘이 전부이다. 그러나 둘 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현무는 귀찮은 짓은 하지 않을 테고 영귀라면 아직도 꽃잎을 모으러 기어 다니고 있을 것이다.
‘묵범이라면 충분히…….’
현무와 영귀를 제외한 도화는 자연스럽게 묵범을 떠올렸다. 그라면 온갖 플러팅을 해 대며 잠든 제 몸에 꽃잎을 덮어 주고도 남을 놈이었다.
“…….”
갑자기 도화의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귀 끝부터 시작해서 목덜미, 볼까지 천천히 만첩홍도의 꽃잎으로 물들인 것 같았다.
‘미쳤지. 그걸 왜 상상해.’
당황한 도화는 손으로 마구 얼굴을 문질렀다. 당장 방으로 돌아갈 것처럼 일어서놓고는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의자 위에 떨어진 꽃잎이 도화가 일으킨 바람에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낙하했다.
도화는 그가 잠든 제 몸 위에 붉은 꽃잎을 모아 덮어 주는 상상을 해 버렸다.
‘그 자식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당연히 없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상상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떠오르니 문제였다.
“하아… 미치겠다.”
도화는 정원에 아무도 없는데도 붉어진 제 얼굴을 누가 볼세라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상체까지 푹 수그렸다.
드러난 목덜미에 오른 열을 식혀 주려는 듯, 바람이 살랑 불어 피부를 스쳤다. 그렇게 도화는 정원에 남아 막아도 막아도 꾸역꾸역 떠오르는 상상을 없애느라 한참을 보냈다.
* * *
-삼촌! 잘 쉬고 있어요?
오랜만에 듣는 담마의 목소리다.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석 달은 지난 것처럼 목소리가 애틋했다.
“그래. 너는 차사국에 잘 다니고 있고? 국장님이나 부장님이 괴롭히진 않지?”
-그야 당연하죠. 제가 누군데요. 조금이라도 일을 더 늘리려고 하면 칼같이 차단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누굴 닮아서 저리도 똑똑할까.’
도화는 주책없이 딸자식 자랑한단 소릴 들어도 문제없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그렇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도화가 담마에게 말랑한 이유는 호윤 때문이었다. 생김새부터 성격, 말투부터 식성까지. 무엇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둘이었지만, 딱 한 가지는 똑같았다.
‘내가 지켜 줘야지.’
도화가 지켜 줄 대상이라는 것.
어렸던 호윤과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뻔하고 태어나서는 산채로 원귀가 되었던 담마.
호윤은 자신보다 어려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살기 험난한 하계에서 호윤의 존재가 도화에겐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러니까 도화가 살기 위해서는 호윤을 지켜야 했다.
그에 비해 담마는 제대로 살아 보기도 전에 저승 차사에게 잡혀 지옥으로 떨어질 뻔했다. 그런 녀석이 살겠다고 찾아왔으니 매정하게 밀어낼 수가 없었다.
담마를 보면 호윤이 생각났다. 호윤에게 해 주고 싶었던 것들을 담마에게 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반면에는 담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담마에게 호윤을 겹쳐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었다. 둔하고 고지식한 도화였지만, 이런 건 또 예민하게 신경 썼다.
가끔 현천이 도화에게 ‘안 그래도 고생만 하는 놈이 이젠 사서 하냐?’라고 타박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 도화는 담마의 밝은 목소리를 사흘 만에 들어서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삼촌.
“왜.”
-언제 와요? 야근한 거 정리는 얼추 됐어요?
“음… 그건 대략 된 거 같은데…….”
-무슨 다른 문제라도 생겼어요?
도화가 확답을 하지 않고 말끝을 흐리자 눈치 빠른 담마가 놓치지 않고 이유를 물었다.
“해결해야 할 게 좀 생겼거든.”
-휴가 연장해야 하는 거면 제가 국장님이랑 부장님께 전달해 드릴게요.
“아니. 아니야. 그 정도까진 아니고. 나머지 기간 동안 해결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아.”
아니다. 안 괜찮다. 나머지 기간이라고 해 봤자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악몽 속 두 남자에 대해서 알아내야 하고, 홍도화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자에 대해서도 알아내야 했으며 스승을 조금이라도 의심할 때마다 밀려드는 두통의 정체도 알아내야 했다.
“나흘 후에 보자. 저녁쯤에 도착할 거야.”
-네. 저녁 같이 먹어요!
저녁 식사를 약속하는 것으로 담마와의 통화는 끝이 났다. 휴대폰을 내려놓자 담마와 통화할 때는 괜찮았던 머리가 다시 지끈지끈 아파 오기 시작했다.
악몽을 복기하려고 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스승 때문이었다. 현무는 스승은 무시하고 두 남자에게만 집중하라는 조언을 해 주었지만, 그게 말이 쉽지.
그 꿈의 주연이 스승인 이상, 무시하려 해도 어떻게든 끼어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둘기가 많은 공원에서 비둘기가 나오지 않게 사진을 찍으려고 갖은 노력을 해도 사진 한 귀퉁이에는 반드시 비둘기 꼬리라도 찍혀나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도 처음처럼 깨질듯한 두통은 아니니까 참을 만해.’
도화는 악몽을 제대로 복기하기 위해서 바닥에 쓰러져 죽어 가는 스승을 커다란 곰 인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연습했다.
‘저건 스승님이 아니라 곰 인형이다. 곰 인형. 검에 찔렸지만, 곰 인형이니까 괜찮아. 신경 쓰지 말자. 곰 인형이 중요한 게 아니야.’
이 방법은 영귀가 알려 준 것이었다.
[스승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두통이 생긴다니. 어떤 멍청한 자가 그런 웃기지도 않은 주술을 건답니까? 정말 그런 이유로 다른 것은 아예 생각도 못 하는 것이라면… 두통을 유발하는 이유를 스승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인식해 버리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했다.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도 있고 감히 스승을 다른 무언가로 바꿔서 생각하는 것 자체를 스승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하루 종일 머리는 깨질 것 같고 누가 뒤통수를 툭 치면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을 겪다 보니 조금이라도 통증을 줄이기 위해 저도 모르게 영귀의 방법을 시도해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온종일 두통과 싸우며 노력한 결과.
두통은 절반 이하로 떨어트릴 수 있었다. 하루 고생한 결과가 꽤 유의미해서 도화는 영귀의 쉬지 않는 TMI도 감내했다.
“이제… 제대로 해 볼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눈을 감았다. 영귀는 방금 왔다 갔으니 내일까지는 올 일이 없을 것이고 현무는 정원에 가지 않는 이상 만날 일은 없다. 내일 아침까지는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인 것이다.
‘막힌 생각. 왜곡된 기억.’
스승을 죽이던 남자, 스승의 죽음을 기다렸던 남자.
그리고 스승님…이 아니라 쓰러진 곰 인형.
도화는 재차 심호흡을 하며 스승을 곰 인형으로 만들고 악몽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 * *
“여기 숨어 있으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산발한 남자의 손에 들린 붉은 장검. 원래 붉은 것인지, 붉게 물든 것인지 확신이 안 선다. 덩치 큰 스승… 곰 인형을 쓰러트리기엔 버거울 것 같은 체격.
그는 드디어 내 손으로 널 죽였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뒤이어 흑립과 검은 도포를 차려입은 남자가 등장했다. 어딜 봐도 저승 차사의 복장이다.
“드디어 숨이 끊어졌구려.”
숨이 끊어지길 기다렸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남자의 중얼거림에 속이 울컥거린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곰 인형이다. 곰 인형.’
두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도화는 열심히 곰 인형을 떠올렸다.
정체 모를 저승 차사는 뒷짐을 지고 쓰러진 곰 인형 주변을 맴돌았다.
“곧 차사들이 올 걸세. 어디 도망갈 생각은 하들 말어.”
도화는 남자의 차사복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내 기억의 어느 부분이 왜곡이 되어 있는 것일까.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이유로 제대로 된 생각을 못 하게 방해하는 걸까.
몽식의 밤에서 보았던 대로 저 저승 차사가 입은 도포는 지금 입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색은 똑같이 검었으나 지금은 없는, 도포를 여민 술띠가 둘려 있었다.
모든 것이 검었기에 평소 꾸는 악몽에서는 술띠와 장신구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역시. 그때 내가 본 게 맞았어. 연화문 장식.’
도화는 잊지 않으려고 중얼거렸다. 차사복을 차려입은 저승 차사. 술띠에 달린 장신구는 연화문 장식.
어쩐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잡힐 듯 말 듯 했다.
세월이 세월인 만큼 도포와 흑립의 모양이 지금과 다른 것은 이상한 건 아니니까 연화문 장식 술띠가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잠깐만.’
저승 차사의 차사복과 술띠 장식에 집중하던 도화는 순간, 머릿속에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앞이 캄캄해야 하건만, 번개가 치는 것처럼 하얀빛이 스쳤다.
‘저 저승 차사… 흑립을 썼잖아.’
저승 차사가 흑립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흑립과 도포가 한 세트인 차사복은 저승 차사의 트레이드 마크니까.
‘너무 당연해서… 그래서 완벽하게 놓치고 있었어.’
그제야 도화는 현무가 했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깨달았다. 강렬한 기억으로 인해 생각의 흐름이 막혔다는 게 이런 것이었구나.
‘스승님의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데 집중하느라 저승 차사가 흑립을 쓰면 모습과 기척이 지워진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
저승 차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시절이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저승 차사가 된 지금은 생생한 그 순간에 선명하게 박힌 엄청난 오류가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