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도화는 국장실 술 창고에서 두통과 광증에 관련된 미해결 사건을 모두 정리했다. 그것을 시기, 장소, 피해 유형별로 구분했다.
두통과 광증과 관련된 미해결 사건은 예상보다 많진 않았다. 하지만, 그 예상은 술 창고에 쌓인 사건 서류 전체에 비하면 많진 않다는 것이지, 혼자 감당하기에는 가혹한 양이었다.
어쨌든 묵범과 청우의 도움으로 분류까지 완벽하게 끝냈다. 그리고 그 뒤는 온전히 도화의 몫이었다.
‘정말 이것들이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 건가.’
도화는 여행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왔다. 노트에 적어 둔 것은 이곳에 와서 적은 단편적인 생각일 뿐. 제대로 된 정리본은 노트북에 있었다.
“어디까지 했더라.”
사실 도화는 휴가를 떠나기 전, 자신과 관련된 미해결 사건에 대한 정리를 절반 정도는 해 둔 상태였다. 휴가지에서 최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우선 두통과 광증 사건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고 타임라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느 지역에서 어느 시기에 얼마 정도 머무르다 이동했는지를 기억해 내어 겹치는 타임라인 옆에 차근차근 적기 시작했다.
1250년 9월. 천구성. 함평의 한 마을에서 불붙은 돌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꿈을 마을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꿈.
(유일하게 피해 없는 사건. 기이한 꿈 때문에 추가)
1339년 7월. 천우인. 하늘에서 사람 얼굴을 한 우박이 떨어짐. 우박을 머리에 맞고 피를 흘리며 죽음.
죽지 않은 자는 광증이 돌아 짐승 행동을 함.
* * *
사실
이때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남.
* * *
의문
사람 얼굴을 한 우박?
천우인?
1394년 12월. 집단 수장. 평안도 해안 마을 사람들이 자신은 물고기라며 뭍에선 숨을 못 쉬겠다고 꺽꺽대다 바닷물로 뛰어듦. 물속에서 전원 사망. 모두 웃는 얼굴.
* * *
사실
평안도 해안가에서 머물고 있었음.
이동금지령이 내림.
* * *
의문
모두 웃고 있다는 것은 최면? 광증?
1452년 1월. 시체병. 황해도에서 퍼진 돌림병. 걸리면 사흘 내로 머리가 터져 죽음. 두억신의 저주라 하여 머리를 검은 천으로 가리고 다녔으나 효과無
* * *
사실
황해북도에 있을 때 황해남도에서 일어남.
황해북도까지 검은 두건을 쓰는 사람이 생김.
* * *
의문
모두 웃고 있다는 것은 최면? 광증?
1519년 11월. 환시 살인. 용인현 관아에 신임 부임한 사또가 마을 사람들을 보고 산적이 숨어든 것이라 주장. 사살 명령을 내림. 불복하는 관졸은 직접 베어 넘기니 사또의 명에 따른 관졸로 인해 마을에 피바람이 불음.
살아남은 마을 사람과 관졸이 함께 사또를 처치.
* * *
사실
용인현 신임 사또는 인자하다는 소문이 있었음.
같은 마을에 있다가 휩쓸려 죽을 뻔함.
사또의 광증은 죽어서 끝남.
* * *
의문
환시? 환청?
1592년. 2월. 모함, 선동 살인 교사. 진주 전란 중 무당의 모함으로 마을 사람들이 군졸을 서른을 참수함. 무당은 군졸로 위장한 왜군이 와 마을을 해할 것이라 말했고 그걸 믿은 사람들은 독을 탄 물을 마시게 한 뒤 참수. 어딜 봐도 조선군이었으나 강력한 암시가 방해.
참수 후에도 깨어나지 않음. 무당이 참수당한 뒤 풀림.
* * *
사실
그때 진주에 있었음.
휩쓸려서 참수당할 뻔
* * *
의문
무당이 사건의 범인X
무당도 피해자
이것도 정신 관련? 세뇌?
1635년 8월. 교인 떼죽음. 흡곡현 바닷가에 열댓 마리의 머리가 터진 교인 시체가 밀려옴. 근처에 부딪힐 만한 바위 無
* * *
사실
흡곡현 위 안변에 머뭄
마을 사람들은 겨울에 쓸 기름을 얻어 기뻐함
* * *
의문
황해도 시체병과 비슷.
이것도 두억신의 저주?
동선이 거의 일치하는 사건들만 나열하다 보니 정체 모를 범인이 자신을 쫓아다니는 것인지, 이쪽이 범인을 따라다니는 것인지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정신 차리고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메모했다. 신기한 것은 스승을 의심할 때는 그렇게 두통이 난리 법석을 부리더니 다른 일에 몰두하자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감히 스승님을 의심한 벌을 받는 걸까.’
이런 생각은 또 괜찮았다. 아무래도 스승을 나쁜 쪽으로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러는 것 같았다.
“흠. 그런데 두억신이라. 두억신이 뭐지?’
미해결 사건의 타임라인과 자신의 타임라인을 맞춰 보던 도화는 ‘두억신’이라는 단어가 종종 눈에 들어오는 게 신경 쓰였다.
“두억신? 두억시니는 아는데.”
딱히 어떤 특정 귀나 귀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사납고 못된 자라면 두억시니라 불렀다. 의미만 들어맞는다면 대상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신선이든 귀물이든 간에 두억시니 같다고 말했다.
또한 정신을 쏙 빼놓는 요란한 짓을 하는 사람에게도 두억시니가 붙었냐고 물었다. 그것의 연장선으로 정신 사나워서 머리가 아프다는 표현을 두억시니가 머리에서 쿵쿵 뛴다고도 했다.
“두억시니. 두억신. 이름이 흡사한 걸 보면 분명 연관이 있어 보여.”
도화는 타임라인 정리를 마무리 짓고 마지막으로 제일 하단에 [두억시니≒두억신]을 붉고 큰 글씨로 적었다.
‘두억시니에 대해선 나중에 조사해 봐야겠어. 두억신은… 아무래도 신 같은데. 국장님이나 묵범한테 물어보면 잘 알려나?’
그렇게 도화의 약 두 달이 걸린 미해결 사건 정리가 슬슬 마무리되고 있었다.
확실히 강림 도령이 말했던 대로 이 사건들은 자신과 관련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깊게.
‘날 이 사건들의 범인으로 만들고 싶은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세우려는 의도로 느껴졌다.
먼 훗날, 이렇게 미해결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날이 생기면 홍도화란 귀물이 자꾸만 동선이 겹친다는 게 밝혀질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유력 용의자가 되어 버릴 게 뻔했다.
문득 강림 도령의 술 창고에서 청우가 던진 질문이 떠올랐다.
[옮겨 간 지역마다라. 요즘도?]
TV나 신문을 볼 틈도 없이 일만 해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리고 흉흉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아무리 일만 하고 살아도 귀에 들어왔을 테니까.
하지만, 묵범은 아니라고 했다.
[요즘 두통 없이 사는 인간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정신질환을 앓거나 심신미약인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건도 많습니다.]
그때는 강림 도령이 갑자기 크게 웃어 버리는 바람에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묵범이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싸했다.
‘나만 해도 두통이 심해지니까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어려웠어.’
그러니 평범한 인간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머리가 터지거나 광증이 이는 것일 터.
자신의 두통은 스승 때문에 겪은 것이니 미해결 사건과는 관련이 없지만, 분명 피해자들이 겪은 통증이 이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 같다.
“좋아. 마무리 짓자.”
도화는 [두억시니≒두억신] 밑에 결론을 썼다.
※ 이유는 모르겠으나 홍도화(도방)을 미해결 사건(광증, 두통 유발)의 유력 용의자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의도가 다분함.
* * *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두 달간 야근의 원인이자 휴가를 받게 된 이유인 미해결 사건 정리가 일단락되었다.
그래서 살짝 가벼워진 마음으로 정원 산책 좀 할까 했는데 정원에는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두통이 있다 들었는데. 좀 괜찮아졌나?”
현무였다. 영귀에게 도화의 상태를 들었는지 몸 상태를 물어왔다.
“영귀 님의 약손과 약 덕분에 다 나았습니다.”
“그래? 영귀는 자네가 주술이나 저주에 걸린 것 같단 말을 하던데. 영귀의 손이 약손이긴 하나 그런 쪽에는 영 재능이 없거든.”
예쁜 것을 보며 한숨 좀 돌리려고 나왔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나 보다. 그냥 방에서 잠이나 더 잘 것을. 도화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대답 대신 침묵으로 받아쳤다.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싫다는 의미였다.
“그런 건 역시 차사국의 정화부나 치유부가 잘 알겠지. 차사국에 돌아가는 대로 한번 검사받아 봐.”
“알겠습니다.”
다행히 현무는 자신이 봐 주겠다거나 또 의문을 품게 만들 확실치 않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도화는 만첩홍도를 감상하는 척, 방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았다.
도화의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현무는 장의자까지 준비해서 본격적으로 만첩홍도를 감상할 자세를 잡았다.
“이리 와 앉아. 자네도 저걸 감상하러 온 거 아니었나?”
“맞습니다.”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꽃나무다.”
“그만큼 덧없어 보이기도 하군요.”
“덧없다라. 그런 말은 인간에게나 어울리는 거 아닌가?”
“따로 인간만 지칭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숨이 붙어 있고 시간의 흐름에 평등한 생명체라면 마지막은 모두 덧없을 테니까요.”
도화의 말에 현무는 동의한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든 경중의 차이는 있는 법. 현무의 눈에는 그저 그런 들꽃잎이 떨어져 날리는 것보다 만첩홍도의 진한 분홍빛 꽃잎이 날리는 게 훨씬 가치 있어 보였다.
도화는 서늘한 현무별저에서 이곳만 유독 봄바람이 살랑이는 것이 마치 신선과 선녀들이 노니는 천계에 온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을 깬 것은 현무였다.
“자네 스승의 꿈 말이야. 복기는 해 보았나?”
“이제 막 차사국 일을 마무리 지은지라….”
“혹시 자꾸 집중이 흐트러진다면 내가 한 가지 조언을 해 줄까?”
“조언…?”
현무는 도화의 반문이 그러하란 대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로 조언을 해 주기 시작했다.
“그 악몽 속에서 알아내야 할 정보는 네 스승을 해친 두 남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는 스승님이 아니라 범인이다. 이 말입니까?”
“그렇지.”
바로 그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인 현무는 잠이나 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화도 따라서 일어나자 무슨 일인지 강제로 의자에 다시 앉혔다.
“좀 더 있다 가.”
“?”
의아해하는 도화에게 현무가 턱으로 만첩도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쟤가 저래 보여도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가.”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