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이름은 남의 것이든 제 것이든 간에 특별한 의미를 넣어 지을 텐데. 너는 개똥이란 단어가 그럴싸하게 들리면 이름을 개똥이라 지었을 거냐? 아니면 소똥이?”
만첩홍도를 보던 현무가 도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개똥이, 소똥이 타령을 하는 현무의 외관은 강림 도령보다 훨씬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지만, 새카만 눈동자는 그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아 온 자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내 이름에 뭔가 있는 건가? 스승과 연관이 있다거나.’
어제는 생각이 막혔다고 하더니 오늘은 이름 가지고 트집이다. 무슨 의미로 이러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도화는 이것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막힌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게 아닐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혹시… 제 스승이 누군지 아시는 겁니까?”
“네 스승을 네가 알지 내가 어찌 알아?”
현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표정을 깰 정도로 내 질문이 쓸데없었나? 그게 아니면 정곡을 찔려서 그런 건가?
도화는 현무가 지은 표정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쪽이 뼛속까지 다 파헤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제 귀에는 흑제께서 하시는 말마다 스승을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들려서요.”
도화의 질문에 현무의 찌푸려진 눈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의외로군. 마냥 둔할 줄 알았는데.”
“…아시는 겁니까?”
아시는 거냐고 크게 소리치고 싶었으나 시끄럽게 굴지 말란 경고를 떠올리고 꾹 참았다. 기대감을 최대한 억누른 목소리의 끝은 볼썽사납게 흔들렸다.
하지만, 현무의 대답은 도화의 기대를 와르르 무너트렸다.
“애석하게도 네 스승은 모른다.”
“그러면 어제 제게 해 주셨던 조언은—.”
조언은 무엇이었냐고 물으려던 도화는 이어진 현무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너와 관련된 사람은 알고 있지.”
“저와 관련된 사람……?”
“그래. 내가 널 이곳으로 부른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도화는 자신과 현무, 둘 다 관련된 사람이 누가 있는지 생각했다.
“현천입니까?”
“…그 녀석은 절대 아니니까 입에 담지도 마.”
현무가 질색하며 현천을 부정했다. 현무가 말이 많긴 하지만, 영귀와 비교하면 현천이 훨씬 나은 것 같은데.
도화는 현무가 현천이라면 질색부터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평소에는 현천을 그리도 구박하던 도화였지만, 현천이 자랑스럽게 말하던 옛 주인이 저러니 현천을 두둔하고 싶어졌다.
어쨌든 현천은 아니라는 현무의 대답은 도화를 미궁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 누구입니까?”
“네게 이름을 준 사람이라고 하면 되려나?”
“……?”
내 이름을?
도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이름은 제가 지었습니다만.”
“기억이란 게 무조건 다 맞다는 보장은 없지.”
“어제부터 제 기억에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제 기억은 온전합니다.”
“네 기억이 정말 온전하다고 믿는가?”
이쯤 되니 도화도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될 것을. 스무고개를 하는 것처럼 본질은 보여 주지 않고 겉만 빙빙 도는 대화는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이쪽이 먼저 직설적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제 기억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저와 관련된 사람이 누구인지 그냥 알려 주시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겉돌기만 하던 대화의 핵심만 골라 질문하자 현무가 작게 침음하며 턱을 매만졌다. 고민하는 눈치인 것을 보니 뭐라도 알려 줄 것 같았다. 매끈하고 동그란 어린아이의 턱을 고사리손으로 만지는 모습은 탐정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나도 말해 주고 싶지만… 함부로 말했다간 크게 잘못될지도 모를 사람이 있어서 그런다.”
“그게 누굽니까?”
“네 이름을 지어 준 사람.”
“…….”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오히려 의문점만 더 늘어났다.
‘내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 크게 잘못될 수 있어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아, 그러시군요. 하고 순순히 믿고 넘길 사안이 아니다.
“저만 모르는 일입니까?”
“음… 너도 모른다라고 하는 게 맞겠지. 대부분 모르고. 아마 거의 모를 거다. 안다 한들 표면적인 것 중에서도 일부만 알고 있겠지.”
또다시 실체 없는 것을 묻고 답하는 형식의 대화가 되어 버렸다.
“다 아는 사람은 당신뿐입니까?”
도화의 질문에 현무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내가 그런 일에 참견할 리가.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일부만 알게 된 거다.”
“알게 된 일부에 제가 관련이 있다는 것이군요.”
“일부일 수도. 전체일 수도.”
“…….”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가다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만첩홍도를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만 이 자리를 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왜. 차사국으로 돌아가게?”
몸을 틀며 말하자 현무가 물었다. 방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미로 한 말인데, 묘하게 가지 말라고 잡는 것처럼 들렸다.
“그건 아니고…….”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바람이 세게 일었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바람은 이상하게도 도화에게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주위가 붉게 물들었다. 마치 도화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막는 것 같았다.
‘이상해.’
이건 절대 평범한 바람이 아니다. 혹시 현무가 한 짓인가 싶어서 흩날리는 꽃잎을 최대한 손으로 치우며 현무를 확인했다.
‘뭐 하는 거지?’
현무는 나가려다가 바람에 방해받고 있는 도화가 아닌 만첩홍도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꽃잎 때문에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만첩홍도를 향해 말을 하고 있었다.
옆모습이라 입 모양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행동만 본다면 만첩홍도와 대화라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고 그들마다 각기 다른 능력이 있으니 꽃나무와 대화하는 것쯤이야 이상하게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 도화는 현무가 그런 능력을 쓰고 있는 게 아닌 만첩홍도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중요했다. 자신과 똑같은 이름의 나무가 이곳에 있는 것부터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까지. 모든 게 다 수상쩍었다.
내게 이름을 준 사람.
나를 이곳으로 부른 진짜 이유.
내 이름과 똑같은 나무.
그 나무를 보고 말을 하는 현무.
‘이 정도면 저 나무가 나한테 이름을 줬다고 할 기센데?’
도화는 손을 뻗어 바람을 뚫고 현무의 어깨를 잡았다. 감히 오방대제의 몸을 허락도 없이 만진다고 영귀가 난리 법석을 떨 행동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말하려고 입을 열면 꽃잎이 입 안으로까지 날아들기 때문이었다.
“음?”
현무는 자신의 어깨를 잡은 도화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웃었다. 도화는 얼굴이며 몸이며 온통 진분홍빛 꽃잎으로 도배가 된 상태였다.
-이제 그만 진정해. 저쪽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네가 이럴수록 거부감만 커진다.
현무는 도화의 귀에는 들리지 않게 만첩홍도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멈췄다.
“…어?”
갑자기 멈춘 바람에 당황한 도화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현무는 제 어깨에 올려진 도화의 손으러 탁 쳐내면서 말했다.
“가 봐.”
어딜 가라는 것이냐고 물으려던 도화는 자신이 꽃잎 바람에 방해받기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만 먼저 가 보겠다고 했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지.
“방금 이건 설명해 주지 않으실 겁니까?”
“나중에. 때가 되면.”
“그때가 언제인지요.”
“네 기억이 온전해질 때.”
“……?”
그 말을 끝으로 현무가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갔다. 가 보라고 할 땐 언제고 도화만 덩그러니 내버려 두고 사라졌다.
“하… 이게 다 뭐냐. 진짜.”
도화는 질린 얼굴이 되어 몸에 붙은 꽃잎을 떼어 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떼다 보니 살랑거리는 바람이 도화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또 꽃잎 범벅으로 만들려고?’
바람에 된통 당한 탓에 경계를 하며 뒤로 물러서니 화해라도 하자는 것처럼 바람은 더욱 숨을 죽이고 도화의 몸을 스쳤다. 그러자 도화가 채 떼지 못한 꽃잎이 하나둘, 바닥으로 나풀나풀 떨어져 나갔다.
‘꽃잎을 떼어 주는 건가?’
도화는 평화롭게 잔잔히 흔들리는 만첩홍도를 기묘한 눈으로 관찰했다.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물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저리도 많은 꽃송이를 만개하고 있으니 살아 있는 나무가 맞다.
도화가 말하는 살아 있다는 것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의미였다. 수백, 수천 년을 살아남은 신목神木이라면 가능했다.
‘아니야.’
하지만, 도화는 신목이라는 가능성을 지웠다. 신목이 저렇게 수백 그루가 뭉쳐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대체 정체가 뭐냐.”
나무에게 말을 건 도화는 이내 몸을 탁탁 털고는 정원을 벗어났다. 현무가 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서 혹시나 하고 정체를 물은 것인데 돌아오는 건 부드러운 바람뿐, 대답은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일지도.’
그게 아니면 현무하고만 대화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무가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으니 이 또한 그것의 연장선일지도.
도화가 정원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살랑거리던 바람이 뚝 그쳤다. 신이 난 것처럼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던 떨어진 꽃잎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하늘은 여전히 새파랗고 만첩홍도도 눈이 아리도록 붉은데. 정원에서 도화가 사라지자마자 생기가 사라졌다.
도화가 방으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현무가 정원에 나타났다.
“너도 참. 고작 바람 좀 일으켰다고 이리되어 버릴 거면 그냥 가만히 있지.”
현무는 죽은 듯 미동도 없는 만첩홍도를 향해 타박하듯 말했다.
“내가 널 여기까지 복구하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하긴.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녀석을 직접 만났으니 난리 날 법도 하지.”
현무가 만첩홍도와 대화하는 것 같다는 도화의 생각과 달리 현무는 일방적으로 혼자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까 도화에게는 말은 못 해도 바람으로라도 의지를 보여 주던 것과 달리 현무에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쯧. 대답으로 꽃잎 한 장 떨어트릴 힘도 없나 보군.”
현무는 아까의 거센 바람으로 낙화한 꽃잎을 보며 혀를 찼다. 꽃잎이 얼마나 많이 떨어졌는지 원래부터 붉은 바닥이라고 해도 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지기 직전의 만개한 홍도화라.”
그는 손을 들어 만첩홍도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이 현무의 손짓을 따라 허공으로 떠올랐다.
“원래대로 돌아가라.”
현무의 명령에 공중에 부양한 꽃과 꽃잎이 홍도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들은 도화가 정원에 나타나기 전, 멀쩡히 가지에 붙어 겹겹이 아름다움을 뽐내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고생인지. 원.”
만첩홍도를 원래대로 되돌린 현무는 피로가 짙게 물든 얼굴을 한 채 몸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