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칠 일간의 휴가 중 첫날은 심신이 쉴 틈도 없이 고된 하루였다.
현무가 일으킨 눈보라 속에서 한참을 헤맸던지라 체력이 바닥난 채로 악몽을 복기하는 것은 심적 소모가 컸다.
[때로는 강렬한 기억이 올바른 생각을 가로막기도 하지.]
의미심장한 현무의 말이 자꾸 신경 쓰인다. 하지만, 악몽을 곱씹고 또 곱씹어 봐도 현무가 장담한 것처럼 막힌 생각에 물꼬가 트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도화는 몇 시간 동안 머리를 쥐어짜며 적은 메모들을 처음부터 쭉 읽어 내려갔다.
‘이상해.’
이상하단 생각을 지금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노트에 적은 내용은 대부분 스승에 대한 의문점이었다.
스승은 본인에 대한 정보를 절대 풀어놓은 적이 없었다. 이름, 나이, 고향은 물론이고 인간인지 귀물인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도화가 궁금해하면 난처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게 전부였다.
‘이상하단 말이야.’
스승과 함께 지낸 세월이 약 40년 정도이다. 스승은 그 시간 동안 도화에게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았고 도화는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스승은 스승이고 나를 인간과 도깨비들의 포악질에서 구해 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존재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바로 오늘 현무를 만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질 못했어.’
그리고 지금도 메모를 읽으면서 ‘그게 뭐가 이상한데?’라는 심정이었다. 직감은 40년이나 함께 지내면서 스승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수상쩍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직감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스승님이라면 그럴 만하다는 주장을 강렬하게 펼쳤다. 조금이라도 의문의 싹이 솟으려고 하면 싹과 함께 씨앗까지 없애 버릴 기세로 ‘그것이 정상이다.’란 생각이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스승을 향한 끝없는 감사와 죄책감, 채무감이 도화의 정신을 잠식하려 했다. 마치 너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처럼.
“윽…….”
계속 머리를 쥐어짰더니 두통이 인다. 날카로운 것이 머리 깊숙한 곳을 쿡쿡 찌르는 느낌에 도화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흘렀다.
‘오늘은 그만해야겠다.’
정 안 되면 다시 현무에게 물어봐도 될 일이고. 시간이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도화는 노트를 치우고 침대에 누웠다. 담마에게 연락이라도 해 볼까 휴대폰을 켠 그는 탄식했다.
통신이 터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와이파이 신호는 아주 빵빵했으니까. 문제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도화는 영귀의 등껍질을 힐끔 쳐다봤지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자고 등껍질을 두들겼다간 그런 사소한 일로 불렀냐며 듣지 않아도 될 타박을 듣고 싶진 않았다.
데이터를 켜면 될 일이었지만, 도화의 휴대폰 요금제는 무료 제공 데이터 양이 없는 수준이라 고작 안부 묻는 일로 소비할 순 없었다.
‘문자나 보내 놓자.’
결국, 도화는 문자를 택했다. 현무별저에 있다는 이야기는 빼고 공기 좋고 물 좋은 산장에서 머리 쉬다 돌아갈 테니 전화 연락은 하지 말라고 짧게 보냈다.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여기는 걱정 마시고요.
말을 잘 듣는 담마답게 전화 대신 답 문자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묵범에게도 잘 쉬고 있다고 전해 달라고 적었다.
묵범의 번호가 있으니 따로 문자를 보내면 될 일이지만, 담마와 달리 묵범은 문자를 받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 게 뻔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니까 조심해야지.’
도화가 있는 방은 현무의 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목소리를 낮춘다 해도 심각하게 조용한 이곳이라면 목소리가 현무의 귀에 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오후 10시 50분.
잠이 들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도화는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일렁이는 게 보인다.
현무별저는 공기뿐 아니라 밖의 빛마저 현무를 닮아 서늘한 것 같다. 곧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릴 시간이건만, 어슴푸레한 빛은 아침을 맞이하려는 새벽빛 같았다.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올린 도화가 잠이 들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승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니 신음을 흘릴 정도였던 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예기치 못한 폭설 속에서 등산을 하느라 체력도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
현무와 영귀가 없으니 긴장할 필요도 없어진 몸과 마음은 공기가 서늘한 만큼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 속에서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그렇게 험난했던 휴가의 첫날이 끝이 났다.
* * *
“두통약을 챙겨 올 걸 그랬나.”
아침 식사로 시리얼을 먹고 어제 복기하다 만 노트를 펼쳐 보던 도화는 다시 시작된 두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살면서 이런 식의 두통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으면 겪긴 했지만, 지금은 스트레스는커녕 일과 묵범에게서 벗어나 매우 편한 상태였다. 두통이 생길 건덕지가 없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아팠다.
‘영귀를 부를까?’
잠시 거북이 등껍질을 쳐다보던 도화는 이번에도 고개를 돌렸다. 어제 잠시 겪은 힐책을 또 겪고 싶진 않았다.
대신 직접 영귀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만나면 두통약도 얻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알아내고 식사를 시리얼 말고 다른 것으로 받을 수 있는지도 물어볼 작정이었다.
방에서 나오니 어제 처음 도착했을 때와 별다를 거 없는 적막이 펼쳐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선 현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똑똑.
최대한 살짝 거북살문을 두드린 도화는 안에서 현무나 영귀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방에는 현무와 영귀, 둘 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나?’
영귀니까 현무의 시중을 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간 현무의 방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재차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볼일을 보러 간 듯하여 몸을 돌렸다. 괜히 여기서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간 현무가 입을 얼리러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현무의 방을 지나친 도화는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현무별저는 거대한 솟을대문만큼이나 내부도 무척 넓었다. 내부는 60%의 과거와 40%의 현대가 적절하게 섞여 있어 생활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대로 숙박업을 한다면 문전성시를 이룰 것 같단 잡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디선가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혹시 현무와 영귀가 산책 중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향기를 따라가 보니 커다란 정원이 나왔다.
“…….”
도화는 아무 말 없이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눈을 의심할 정도로 붉은색의 꽃나무들이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은은한 향기의 정체였다.
눈을 비빈 도화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처음에는 붉다고 여긴 꽃은 자세히 보니 붉을 정도로 진한 분홍색이었다.
몇 겹일지 모를 정도로 겹겹이 피어난 진분홍색 꽃이 빼곡히 달려 만개하니 가지가 휘영청 늘어질 수밖에 없어 보였다.
한 그루만 있어도 온통 시선을 빼앗을 만한 꽃나무가 정원 한편에 무리 지어 심겨 있으니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꽃나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늘하던 기온이 점점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꽃나무 무리 주위만 봄이 온 것 같았다.
‘무슨 꽃일까.’
도화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서서 이름 모를 꽃나무를 감상했다. 옅은 바람이 불 때면 아래로 축 늘어진 꽃가지가 흔들렸다. 그 모습은 곱게 물들인 천이 하늘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내일 아침까지 그렇게 서 있을 기세군.”
“!!!”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뒤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란 도화가 몸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현무였다. 그는 도화의 발을 쳐다보며 말했다.
“발은 멀쩡하네.”
“…발이요?”
“그래. 한참을 꿈쩍도 안 하고 서 있길래 뿌리라도 내린 줄 알았지.”
“아…….”
무표정한 얼굴로 한 농담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도화는 정말 자신의 발에서 뿌리라도 나왔나 싶어서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다행히 발은 멀쩡했다.
현무는 도화의 옆에 서서 뒷짐을 지고 꽃나무를 쳐다봤다. 때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 가지가 크게 휘청거렸다. 겹겹이 붙어 있던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다 한두 장씩 떨어져 바람에 따라 흩날렸다. 형태 없는 바람이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아름답지?”
한참을 도화와 함께 구경하던 현무가 물었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닌 게 뻔히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예. 무척이나. 그런데 무슨 꽃나무입니까?”
“홍도화(紅桃花)다.”
“…네?”
도화는 현무가 대답 대신 제 이름을 부르자 당황해서 반문했다. 그러자 현무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붉은 복숭아꽃이라 홍도화라고 부른다. 저렇게 가지가 늘어진 것은 수양만첩홍도(水楊萬疊紅桃)라고 하지.”
“그렇군요.”
“왜? 내가 뜬금없이 네 이름을 불렀다고 생각했나?”
“제 이름도 홍도화니까요.”
도화의 말을 끝으로 둘의 대화가 뚝 끊겼다. 어제 처음 만난 사이라 어색해질 법도 하건만.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전경에 시선을 뺏겨 어색할 틈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던 둘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현무였다.
“홍도화.”
“…….”
“귀가 먹었나?”
“예…? 저를 부르신 거였습니까?”
“그러면 여기서 대답할 사람이 너밖에 더 있나?”
“그렇긴 하지만…….”
도화는 억울함과 함께 말끝을 삼켰다. 제 이름이 홍도화라지만, 눈앞에 있는 꽃나무 이름도 홍도화다. 현무가 뜬금없이 ‘홍도화’라고 부르는데 이걸 대답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괜히 대답했다가 ‘네 이름 부른 거 아닌데?’라고 해 버리면 무안해질 것 같아서 고민하다 이리되고 말았다.
‘좀 평범한 이름으로 지을 것을.’
도화는 제 이름을 그리 지은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지금 네 이름을 홍도화라 지은 걸 원망했지?”
“…!!!”
도화가 어찌 알았냐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현무를 쳐다봤다. 그에 비해 현무는 도화가 아닌 꽃나무를 계속 쳐다보며 말했다.
“네 이름 말이다. 누가 지었을 것 같나?”
“제가 지은 겁니다.”
도화는 어제부터 현무가 던지는 의미심장한 질문이 자꾸만 거슬렸다. 막힌 생각의 물꼬를 틔우라고 하질 않나, 이름을 지은 사람이 누구였을 것 같냐고 묻질 않나.
“저 꽃이 마음에 들었나 보지?”
“?”
그럴 리가. 도화는 지금껏 살며 저런 꽃은 처음 구경했다. 600년이란 세월 동안 어찌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정말 그러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볼, 한숨 돌릴 여유 따윈 없었으니까.
“어렸을 때 주워 들은 단어 중 그럴싸한 것으로 지은 기억이 납니다.”
이름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짓지 않았다. 내 것이라 한들 남이 부르는 것이 이름이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