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도화-96화 (97/146)

96화

묵범의 죽 덕분일까.

월요일 아침. 도화는 아주 가뿐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몽식이 월요일 출근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어제 죽과 담마의 간호가 없었더라면 결근했을 게 분명했다.

어디 한 군데 아픈 곳없이 일어난 것은 좋은데. 문제는 아주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면담!!!’

월요일, 오늘은 추혼부 부장과의 1대1 면담이 있는 날이다. 선배 차사들의 농간과 막내라는 불리한 포지션 때문에 첫 면담자가 되었다.

‘젠장. 주말을 앓느라 다 날려 버리는 바람에 준비를 제대로 못 했어.’

조금만 더 일찍 깨어났다면 묵범에게 조언이라도 얻었을 텐데. 늦게 깨어난 데다 묵범이 가져온 죽과 씨름하느라 면담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냥 아프다고 쉴걸.’

뒤늦은 후회였다. 차라리 병가를 냈다면 자연스럽게 면담은 뒤로 밀렸을 것이다. 하지만, 멀쩡하게 두 다리로 걸어 묵범의 차에 올라탄 뒤에 떠오르는 바람에 병가는 물 건너가 버렸다.

‘우선 부장이란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부터 알아야 할 텐데. 잠깐 인사한 게 전부라 전혀 모르겠어.’

부장이 온 날, 차사들의 반응만 봐서는 그다지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닌 듯했다. 온화한 사람이었다면 면담 순서를 정할 때 다들 최대한 늦게 하고 싶어서 안달일 린 없을 테니까.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까?’

도화는 말없이 운전만 하고 있는 묵범을 힐끔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묵범이 조용하다. 평소에는 궁금하지도 않은 본인 이야기를 꺼낸다거나, 주말에 무얼 하고 지냈는지 끈질기게 물어보던 그였는데.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앞만 보고 있었다.

‘어제 일 때문에 화가 났나?’

어제, 죽을 먹으며 담마와 현천에게 이야기를 들은 도화였다. 자신이 숨도 너무 가늘게 쉬고 안색도 좋지 않은데 잠에서 깨어나질 않아서 담마가 묵범에게 먼저 연락했다고 했다.

급히 도화의 집으로 온 묵범은 도화가 무슨 이유로 몽식과 거래를 했는지 파악하고는 불같이 화를 냈더랬다. 몽식은 탐욕스럽고 변덕이 심해서 좋게 끝낼 수 있는 거래도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며 잠에서 깨지 않는 도화에게 화를 내듯 설명했다고 했다.

그리고 깨어나면 기력이 바닥났을 거라며 본인이 직접 죽을 만든 것도 모자라 산월에게 연락해 온갖 산해진미 보양식을 배달시켰다.

도화는 그런 묵범의 노고도 모르고 당장 꺼지라고 내쫓은 것이었다.

‘화날 만하긴 해.’

그는 묵범이 삐져서 말을 안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지금 당장 도화에게 중요한 것은 부장과의 면담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이제 곧 차사국에 도착할 텐데. 큰일이네.’

묵범의 차는 벌써 성수대교에 진입 중이다.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초조해진 도화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묵범을 불렀다. 우선 사과라도 하고 물어볼 셈이었다.

“이봐. 저기 말이야.”

“음? 무슨 일입니까?”

다행히 묵범은 도화의 부름에 착실히 응했다. 목소리도 평소와 같고 도화와 시선을 맞추며 슬쩍 웃기까지 했다.

뭐지? 화가 난 게 아닌가?

묵범이 제게 화가 난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도화는 얼떨떨해졌다. 화는 나긴커녕 웃고 있는데 사과를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려나?

“홍도화 씨?”

묵범은 저를 불러 놓고 갑자기 인상까지 쓰며 생각에 잠긴 도화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혼자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건가?’

그는 끙, 소리까지 내며 고민하는 도화를 지켜보다 푸핫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얼굴은 참 진지하게 생겼으면서 행동은 영락없는 애다.

어떨 때는 담마보다 더 어리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자신과 대화할 때나, 자신과 식사할 때. 또는 함께 임무 수행을 할 때도 그러했다.

‘그러고 보니 다 나랑 함께 있을 때네?’

묵범은 도화의 엄격, 근엄, 진지한 얼굴을 오로지 자신만이 허물어트릴 수 있는 것 같아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마치 도화에게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아쉽게 됐습니다. 병가를 냈다면 면담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요.”

사과를 할지 말지에 대한 도화의 고민은 묵범이 먼저 면담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으로 깨끗하게 해결되었다. 그래도 도화는 묵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거… 지금 병가 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지?”

묵범은 도화가 제 눈치를 보는 게 귀여워서 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묵범이 웃자 살짝 움츠러들었던 도화의 어깨가 점점 펴지는 게 보였다.

“병가 내도 어차피 면담은 해야 하니 그냥 하세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면 정보 좀 줘 봐.”

“안 그래도 홍도화 씨에게 무얼 알려 줘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서 말 한마디 안 하고 운전만 하고 있던 것이구나.

도화는 그제야 묵범이 왜 평소와 달리 조용했던 것인지 이해했다. 화가 난 게 아니었단 사실에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부장님의 면담은 시기를 정해 두고 하진 않습니다. 본인이 차사국으로 귀환하는 기간이 면담 기간입니다. 1년에 두 번일 수도 있고 5년에 한 번일 수도 있지요.”

“너도 면담 해 봤겠네?”

도화의 질문에 묵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없습니다. 그냥 임무 중 기억에 남는 귀물이나 악귀를 물어본다거나.”

추혼부 부장으로서 물어볼 만한 사안이다. 도화는 묵범이 말해 주는 정보를 토대로 자신이 할 대답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어진 다른 질문 예시에 시작도 못 하고 중단되었다.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보기도 하고.”

“…갑자기? 음식은 왜?”

“저도 모릅니다. 말하면 나중에 사 주는 건가 싶었으나 그것도 아니었거든요.”

“그게 다야?”

“그럴 리가요. 부장님은 제가 차사국으로 오기 전부터 계속 추혼부 부장이었습니다.”

면담 시간이 아무리 짧다 한들 누적된 질문은 쌓였다는 의미였다.

“나이, 가족구성, 고향,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이성에 관심이 있나, 아이는 좋아하는가.”

‘뭐지, 대체?’

묵범이 늘어놓는 질문은 면담이라기엔 너무 하찮은 질문들이었다.

‘아무리 내가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을 해 본 적은 없다지만, 이게 면담 시간에 상사가 할 만한 질문은 아닌 건 확실해.’

질문이 하찮아도 너무 하찮다. 게다가 이성과 아이에 대한 질문은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은 아니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게 추혼부 차사들이 한결같이 부장과의 면담을 미루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아닌 듯했다.

“대답하기 쉬운 질문들인데 왜 다들 면담하기 싫어하는 거야?”

“그야 본인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대답을 하면 부장님 직속 비서가 되어야 하거든요.”

“부장님 직속 비서? 그런 게 있어?”

처음 듣는 이야기에 묵범은 살짝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묵범의 반응이라 긴장한 도화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부장님이 어딜 가든 붙어 다녀야 합니다.”

“?”

“아직까진 직속 비서에 당첨된 차사가 없지만, 그래도 대답은 신중히 하세요.”

“거, 걸리면 어떻게 되는데.”

“말한 그대로입니다. 부장님이 좀 더 추워지면 까치를 찾으러 간다고 했었죠?”

“그랬었지.”

“그겁니다. 직속 비서에 뽑히면 부장님과 단둘이 까치를 찾으러, 찾을 때까지 붙어 다녀야 한단 의미입니다.”

“…….”

뒷좌석에서 담마가 ‘미친….’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거 아니냐?!]

가만히 듣고 있던 현천도 어이가 없었는지 담마가 채 끝맺지 못한 말을 대신 외쳤다.

그렇게 면담 정보를 얻는 사이 묵범의 차는 한강 대교 중앙에 도착했다.

‘추혼부 수석 차사 묵범. 차사국 출입을 청합니다.’

묵범이 속으로 중얼거리자 차 앞에 거대한 입을 벌린 천하대장군이 불쑥 솟아올랐다. 묵범은 속도를 높여 천하대장군의 입 속으로 차를 몰았다.

* * *

담마가 일시적으로 추혼부 부장의 비서가 되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화는 면담 안내를 담마에게 받는 중이었다.

강림 도령 비서로 있을 때는 업무 관련으로 만날 일이 없으니 문제 될 게 없었는데.

“홍 차사님. 부장님께서 부르십니다.”

하루아침에 같은 부서에 있게 되니 이렇게 어색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껄껄. 담마가 너를 삼촌이 아니라 홍 차사님이라고 부르다니. 아주 닭살이 돋는구나.]

[닥치지 못해?]

현천의 놀림에 도화는 주먹으로 바지 주머니 위를 후려쳤다.

[어이쿠! 무슨 손이 이렇게 맵냐!]

[시끄러워.]

되지도 않는 엄살에 한 대 더 맞은 현천은 결국 도화의 책상 서랍에 갇히고 말았다. 현천의 힘이라면 서랍이고 나발이고 다 부시고 나올 수 있었지만, 그랬다간 책상 서랍이 아니라 깊은 땅속에 묻힐 것 같아서 참았다.

부장실에 들어간 도화는 서류로 가득 찬 내부를 보고 하려던 인사를 잊을 뻔했다. 그래도 면담이라고 책상은 깨끗이 치운 듯했다.

다행히 부장실에서 나가던 담마가 옆구리를 쿡 찔러 준 덕분에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신입 차사 홍도화입니다.”

“거기 앉아.”

“…네.”

시작부터 굉장히 강압적인 명령어다. 도화는 저를 죽이겠다고 도깨비들이 칼 들고 달려들던 상황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고 느껴졌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다.

“홍도화. 도방 선생이라 불렸다지?”

“네.”

면담은 자연스럽게 도화의 신상에 대한 질문부터 던져졌다. 하지만, 이어진 질문에 도화는 말문이 막혔다.

“나이는?”

하계에서 사용 중인 신분증 나이를 물어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는 그러니까. 나이가…….”

“본인 나이도 모르나?”

한심하단 듯한 말투에 울컥할 법도 했으나 도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몰랐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정확하게 언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대략 600살은 된 것 같습니다.”

“……그래?”

도화의 솔직한 대답이 먹혔는지 부장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더는 나이를 묻지 않았다.

“나이는 그렇다 치고. 부모 말고 다른 혈연은 없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반여우 담마와 단둘이 사나?”

“검 한 자루도 같이 삽니다.”

“아, 현천이랬나. 흠. 알았다.”

다행히 묵범이 알려 준 것과 같은 질문을 받고 있지만, 이게 진짜 면담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대답 중인 게 맞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뭐라도 하나 거슬리면 까치 찾기에 동원된다고 하니 불안했다.

추혼부 부장은 도화의 개인 정보가 적힌 서류를 살펴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도토리묵과 막걸리를 좋아하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래? 반도깨비라더니. 희한하군.”

아니, 반도깨비라 도깨비 취향이 옅어져서 그런 건가?

부장은 서류에 도화의 대답과 자신의 의견을 메모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도화는 괜히 불안해졌다. 부장과 함께 까치를 잡으러 여행을 떠나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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