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아무래도 당신은 위험한 귀물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놈이?’
[현천.]
참을성이 바닥난 도화가 현천에게 말을 걸었다. 현천에게 한 것처럼 묵범에게도 말을 할 순 있지만, 이 상태로 묵범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간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싱글거리는 묵범의 태도에 홀로 욱해서 바닥인 기력이 완전히 고갈되는, 그런 상황 말이다.
[내가 하는 말 좀 저 자식한테 전달해 줘.]
[네가 직접 말하면 되잖아.]
[힘없어.]
힘이 없는 도화를 위해 흔쾌히 수락한 현천은 도화의 말을 듣자마자 후회했다.
[시끄러우니까 닥치고 네 집으로 꺼져.]
[…….]
이를 어쩐다?
도화의 과격한 말에 난감해진 현천은 차마 묵범에게 그대로 전할 수 없었다.
[이봐. 홍도화. 네가 자고 있어서 저자가 무얼 했는지 몰라서 그러나 본데…….]
[뭘 했겠어. 몰래 내 몸이나 만지려고 기회나 봤겠지.]
[야,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널 위해서—.]
[됐고. 당장 내 방에서… 아니, 내 집에서 꺼지라고 전해.]
[…….]
묵범은 도화의 잔뜩 인상 쓴 얼굴과 안절부절못하는 듯한 현천을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고 현천에게 닦달하고 있겠지.
‘몸은 많이 아파 보이긴 해도 꿈에서 멀쩡히 깨어났으니 한시름 놓아도 되겠군.’
기력이 많이 쇠한 게 느껴졌으나 의식은 또렷하니 되었다. 괜히 도화의 신경을 긁어 스트레스를 받게 하느니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려는데.
꼬르르르르르륵—.
“……?”
“……?”
[……?]
작지만, 어째서인지 우렁차게 느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묵범과 담마, 그리고 현천이 놀라서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도화가 있었다. 그것도 얼굴이 붉게 물든 홍도화가.
“아… ㅆ… 젠ㅈ…….”
당황한 도화의 입에서 거친 욕이 튀어나오려다 말았다. 도화의 반응에 셋은 소리를 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바로 파악했다. 하지만, 아무도 소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도화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잠시간의 침묵을 깬 사람은 묵범이었다. 그의 입이 열리자 도화가 크게 움찔했으나 묵범은 도화가 아닌 담마를 불렀다.
“담마야.”
“네. 아저씨.”
묵범의 부름에 담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쪼르륵 그의 곁으로 다가와 대답했다.
“네 삼촌이 깨어났으니 이제 돌아가 봐야겠다. 하루 종일 먹질 않아서 배가 많이 고플 거야. 아까 가져온 거 반드시 삼촌한테 다 먹이렴. 알았지?”
“알았어요.”
묵범이 기특하다며 담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화는 눈이 샐쭉이 위로 올라갔다.
‘뭐야. 언제부터 둘이 저렇게 친해졌지?’
도화가 묵범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담마는 자연스럽게 묵범에게 쌀쌀맞게 대했다. 그런 담마의 태도를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사자인 묵범만 빼고.
그랬던 담마였는데.
하루 사이에 태도가 180도… 아니, 180도까진 아니고 약 159.8도 정도 바뀌었다. 담마의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도 몸이 좋지 않으면 제게 연락 주세요. 대신 병가 내 드리겠습니다.”
묵범은 도화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바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사라지자 갑자기 침실이 넓어진 느낌이다. 워낙 덩치가 커서 그런가? 아니면 여기 모인 사람 중 가장 말이 많은 놈이라 그럴지도.
어쨌든 묵범이 돌아가자 도화는 좀 더 편하게 누워 있을 수 있었다. 묵범이 자신의 침실에 머문 시간은 채 10분도 되지 않았지만, 10분이 10시간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불편하고 거북한 10시간.
“담ㅁ…ㅏ….”
“따뜻한 물부터 가져올게요. 그러면 목이 좀 편해질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도화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담마는 도화의 배가 더 요동치기 전에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갔다.
코끼리가 온몸을 밟고 지나간 것처럼 아파서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하지만, 한번 크게 꼬르륵거리고 나니 뒤늦게 허기가 몰려왔다.
‘어릴 땐 며칠을 굶어도 참을 만했는데…. 고작 하루 굶었다고 이러다니. 너무 편하게 지냈어.’
사실 도화는 여전히 며칠을 쫄쫄 굶어도 견딜 수 있었다. 단지,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굶었다는 게 아니라 몽식에게 하루 종일 시달렸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도화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그 점을 전혀 짚어 내지 못했다.
“삼촌. 앉을 수 있겠어요?”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 담마가 들고 온 것은 베드 테이블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죽 그릇과 물컵이 올려져 있었다.
“으….”
“도와 드릴게요.”
아까보다는 좀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혼자 몸을 움직이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담마의 도움으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도화는 무릎 위에 올려진 테이블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새하얀 쌀죽.
반찬은커녕 간장도 없이 뜨거운 쌀죽에 뜨거운 물이 전부다.
[아까 가져온 거 삼촌이랑 같이 먹고.]
문득, 아까 묵범이 담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아까 가져온 거’라고 했지. 그렇다면 이 죽이 그건가?’
도화는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의심 가득한 눈으로 하얀 죽을 노려보았다. 직접 만든 건가? 아니면 죽집에서 사 온 걸까?
‘뭐가 됐든 마음에 안 들어.’
직접 만들었든, 사 왔든 간에 그저 부담스럽기만 했다. 뭔가 크게 빚을 진 기분이 들었다.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다는 말이 있다. 묵범이 주고 간 죽을 보는 도화에게 그 말은 받아 버렸으니 갚아야 한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혼자 드시기 힘드시면 제가 도와 드릴까요?”
도화가 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을 힘이 없어서 못 먹는 것이라고 오해한 담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라고 고개를 흔든 도화는 먼저 컵을 잡았다. 여전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죽처럼 폴폴 김이 나는 물을 마시자 바짝 마른 식도가 통증을 호소했다. 물을 마시는 것인지 용암을 마시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뜨거웠다.
그래도 몇 모금 마시니 금방 목소리가 돌아왔다.
“휴우…. 살 것 같다.”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여도 말을 할 수 있으니 답답함이 어느 정도 가셨다. 도화는 숟가락을 들고 죽을 한 큰술 떴다. 손이 살짝 떨렸지만, 흘리며 먹을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다.
“혼자 먹을 수 있으니 너도 가서 좀 먹어.”
“삼촌 죽을 왜 제가 먹어요?”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게 불편해서 한 말을 담마는 야무지게 거절했다.
“환자 취급하지 말고. 불편해.”
“환자 맞잖아요?”
“허어?”
“빨리 뜨세요. 안 그러면 제가 먹여 드릴 테니까.”
‘이 녀석이?’
도화는 혹시 자신이 하루 동안 잠든 게 아니라 한 1년은 의식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변해 버린 담마의 성격에 도통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혹시 그 자식 때문에 변한 건가?’
의심의 화살은 자연스럽게 묵범에게 향했다.
‘도대체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냐…….’
당장 담마를 붙들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고소한 죽 냄새 때문에 뱃속이 더욱 아우성이다.
‘우선 먹고 보자.’
뱃가죽이 등에 붙은 느낌과 어서 먹으라는 압박이 담긴 담마의 시선을 이겨 내지 못하고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손에 어느 정도 힘이 돌아왔으니 후루룩 마셔 버릴 심산이었다. 고작 죽, 그것도 쌀죽인데 맛을 음미할 필요도 없다. 음미 따위—.
“……!”
맛있다.
‘뭐 넣었나?’
첫입이 충격적으로 맛있어서 도화는 다시 한술 떴다. 착각이겠지. 너무 배가 고파서 뇌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 아니면 혀가 고장이 났던지.
정신 차리라며 혀를 콱 씹고 다시 먹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여전히 맛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도화의 숟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죽이 줄어들수록 도화는 몸이 점점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고팠던 배가 어느 정도 차서라기에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도화의 식사량이 적다지만, 덩치가 덩치인지라 고작 한 그릇 가지고는 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도화의 숟가락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담마가 다시 죽을 한가득 채웠다.
“…….”
도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담마를 쳐다보았다. 담마는 국자를 흔들며 물었다.
“더 드릴까요?”
“이미 가득 채워 놓고…….”
“먹고 더 드시라고요. 묵범 아저씨가 한 솥 가득 만들어 왔거든요.”
“그렇군.”
사 온 건지 만든 건지 상관없다던 도화는 만들었다는 담마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지가 뭔데 죽을 가져오냐고 불편해했으면서 뒤늦게 고마운 마음이 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두 번째 그릇을 비운 도화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배는 고프니 아예 주방으로 가 먹을 생각이었다. 넘어질지 모르니 그냥 침대에서 먹으라고 만류하던 담마는 도화가 멀쩡히 일어서 움직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실에서 나온 도화는 거실에 한가득 쌓여 있는 상자를 보고 멈칫했다.
‘묵범 짓인가?’ 싶었으나 모든 상자가 고운 비단 보자기로 포장된 것을 보니 산월관의 주인- 산월이 떠올랐다.
‘산월관에서 뜬금없이 음식을 이렇게나 많이 보냈다고? 왜?’
의문은 담마의 설명으로 금세 풀렸다.
“산월 언니가 묵범 아저씨한테 연락받았다면서 이렇게나 많이 보내왔어요. 냉장고 정리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삼촌은 어서 죽이나 더 드세요.”
담마의 손에 밀려 주방으로 간 도화는 식탁 위에 올려진 거대한 검은 물체를 보고 두 눈을 깜빡였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깜빡여도 그대로라 손으로 비볐지만, 여전히 그대로였다.
“왜… 가마솥이 식탁 위에 있는 거지…?”
식탁 위에 있는 검은 물체는 가마솥이었다. 그것도 가정집에서 쓰는 작은 크기가 아니라 부뚜막에 올리는 사이즈였다.
“묵범 아저씨가 여기다 한가득 죽을 만들어 왔더라고요. 이거 다 삼촌 먹이라고 신신당부했으니 저는 절대 손 안 댈 거에요.”
“아니, 이걸 어떻게 다…….”
맛은 있는데. 그렇다고 죽만 먹고 살 순 없다.
“담마야. 삼촌이 말이다. 몸이 많이 괜찮아졌거든? 그러니까 이제 죽은 그만 먹고 산월관에서 보내온 음식을—.”
“그건 가마솥을 다 비우고 나서요.”
“…….”
아무래도 담마가 묵범한테 뭔가 잘못 배워도 단단히 잘못 배운 것 같다. 거기다 남의 말은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하는 것이 강림 도령의 영향도 있는 듯했다.
‘묵범과 강림 도령. 최악의 조합이잖아.’
후회해 봤자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자, 자. 조금만 더 드시고 쉬세요.”
“으…….”
담마는 싱글싱글 웃으며 국자로 가마솥을 휘휘 저었다. 담마의 미소가 묵범의 미소와 겹쳐 보였다. 제발 착각이길 간절히 바라며 도화는 세 번째 죽 그릇을 받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