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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74화 (75/146)

74화

“자신을 망하게 만든 그림이라 복수하고 싶어서 간 건가?”

우선 가장 먼저 든 생각부터 말했다.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법한 생각이었다. 묵범은 도화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자신만 망하게 만든 게 아니죠. 그다지 친하진 않았지만,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친구의 인생도 망가트리고 죽음까지 몰고 갔으니까요.”

“거기다 죽은 친구한테 죽임까지 당했지. 하지만, 오창석이 그 그림을 없앨 수 있을까? 국장님 말로는 금섬이 아니라 업신이라며.”

타락했다 한들 신은 신이다. 오히려 타락해서 받고 있던 제약과 지키고 있던 선도 넘을 수 있으니 더욱 위험하다.

“왜요. 걱정됩니까?”

“내가? 누구를?”

“업신에게 공격받을 오창석의 영혼이라든가. 강민진의 가족도 피해를 입을 수 있겠군요.”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걱정은 네가 하고 있는 것 같네. 난 신경 안 써. 나만 다치지 않으면 그만이야.”

묵범은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며 라디오를 켰다. 귀가 터질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이 차 안을 강타했다. 깜짝 놀란 도화가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고 라디오를 노려보았다.

“뭐, 뭐야.”

“아, 볼륨을 안 줄이고 껐나 봅니다. 미안해요.”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로 사과한 묵범은 주파수를 바꿔 뉴스를 틀었다. 고막 터트릴 일 있냐고 화를 내려던 도화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익숙한 이름에 멈칫했다.

-실종되었던 배우 강민진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폐가에서 신원미상의 남성 시신이 발견되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발견했나 보군요.”

“…그러게.”

치솟던 짜증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오창석과 강민진. 둘의 의도치 않은 악연의 결말이 감정이 배제된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듣게 되자 기분이 이상했다.

“오창석은 누가 더 미울까.”

“음?”

도화는 멍하니 라디오를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질문이었지, 묵범을 향해 한 질문은 아니었다. 복잡해진 마음과 이상한 기분을 풀어 보려고 한 행위였다.

“자신을 죽인 강민진? 아니면 강민진을 만나게 한 업신?”

“홍도화 씨?”

“아니면 어릴 때부터 학대하던 부모? 따돌리고 괴롭히던 학생들?”

“홍도화 씨.”

묵범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지 도화는 대답도,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치 오창석과 강민진, 둘의 악연에 본인의 과거를 겹쳐 보는 듯했다.

‘홍도화의 과거에 저 둘과 같은 악연을 맺은 자가 있던 건가.’

여전히 라디오를 응시하며 생각에 푹 빠진 도화를 보며 묵범은 홍도화에 대해선 남들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게 자만임을 깨달았다. 애초에 남이 아는 홍도화는 대부분 이 사람 저 사람 입을 통해 와전된 것이 모여 만들어져 홍도화 모습을 한 가짜일 뿐이다. 그들보다 좀 더 진실된 홍도화를 안다 한들 수박 겉핥기보다 더 얕은 정보뿐이었다.

여강진이 알려 준 것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도화가 왜 이러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물어볼까? 입이 근질거렸지만, 입술을 깨물어 감각을 죽였다. 물어 봤자 대답해 줄 홍도화가 아닌 것을 아니까.

‘…….’

순간, 묵범은 주먹으로 제 명치를 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방금은 입술이 근질거리더니 이번엔 명치 깊은 곳이 간질거렸다.

‘진짜 내가 이 남자한테 미친 건가……?’

그는 속으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입 밖으로 새어 나갈까 두려워 입술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명치 깊은 곳이 간지러웠던 이유는 단순했다. 물어 봤자 대답해 줄 홍도화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다들 홍도화의 겉만 보고 냉정하고 무뚝뚝한 남자로 알 텐데. 자신은 그게 아님을 잘 알기에, 우월감에 간지러웠다.

어린 것에 약하고 동물을 좋아하고 사소한 것에 화를 잘 낸다. 어릴 적부터 힘들게 살아온 탓에 말투는 거칠지만, 내면은 섬세하다. 그리고 방금 안 사실은, 과거사가 무척 어둡다는 것이다.

스승이 안 좋은 일을 당했다는 것은 들어 안다. 그러나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느낌상 지금 도화가 보이는 모습은 단순히 스승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뭘까.’

묵범은 숙어진 도화의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정수리에 콕 찍힌 가마가 어찌나 옹골찬지 꼭 주인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참나. 이제 하다 하다 정수리에 난 가마 가지고 홍도화를 연결 짓냐. 한심하다. 묵범.’

스스로 한심하다고 타박해도 자꾸만 시선이 도화의 정수리 가마에 박히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손가락으로 콕 찔러보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묵범은 운전대를 단단히 잡고 속도를 올렸다. 이대로 도화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교통사고를 낼 것 같았다.

운전에 집중하자. 내가 아무리 홍도화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다지만, 그렇다고 정수리 구경하느라 사고를 낼 순 없지. 그는 굳은 다짐과 함께 액셀 페달을 밟았다.

부우우웅- 묵직한 배기음이 창밖으로 울리는 게 들린다. 평소라면 사고 내려고 작정했냐고 화를 낼 도화였으나 잠잠하다.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강민진과 신원미상의 남성 시신에 대해 떠들었다. 시끄러운 음악 채널로 바꿀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그만두겠지. 괜히 끼어들어서 멈추게 했다간 더욱 그 생각에 집착하게 만들 뿐. 지금 속도로 경주까지 달리면 2시간 좀 넘게 걸릴 듯하니, 그때까지 얼추 정리가 되길 바라며 핸들을 돌렸다.

* * *

강민진의 본가는 경주 시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논과 밭, 그리고 산으로 둘러싸인 전원주택은 멀리서 봐도 공들여 지은 티가 났다.

“집은 좋은데 마트 한 번 가려면 한나절은 걸리겠네요.”

“…….”

“아, 요즘은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도착하는 배달 서비스도 있으니 마트 갈 일이 없으려나?”

“…….”

“저기. 홍도화 씨?”

차에서 내려 강민진의 본가로 향하며 도화에게 말을 걸던 묵범은 그가 여전히 생각에 잠긴 것을 확인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흠.”

저 집에 들어가면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도화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묵범은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도화를 정신 차리게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홍도화 씨. 이건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

얌전히 도화의 목에 걸려 있던 현천은 묵범의 뜬금없는 말을 듣고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야. 도화야. 저 자식 이상해.]

“…….”

하지만, 도화는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의 고민은 처음엔 단순했다. 강민진과 오창석의 원래 인연은 아마 고등학교 졸업 때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현 사건의 범인이 개입하면서 끊어진 인연이 억지로 연결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것도 둘 다 죽음이라는 결말을 맞이하게 할 악연으로.

도화는 제일 먼저 스승을 떠올렸다. 자신은 스승을 만난 게 진흙 같은 불행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만난 것이었지만, 과연 스승은 어떠했을까. 그게 고민의 시발점이었다.

만약 스승이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처참하게 죽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스승이 한 군데 정착한 이유는 자신을 돌보기 위함이었으니까.

도화의 고민은 보다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만약 자신을 낳지 않았다면. 아니, 둘이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사정 없는 사연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건 당사자들의 변명일 뿐,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도화에겐 사연이고 나발이고 중요하지 않았다. 제 고통을 그들이 덜어 줄 것도 아니니까.

강림 도령 덕분에 크게 덜었던 시름은 덜어 낸 만큼 다시 채워졌다. 가벼워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배는 더 묵직해진 느낌이다. 도화는 이게 다 본인의 성격 탓임을 알면서도 쉽사리 털어 내질 못했다.

오창석의 영혼을 찾기 위해 경주까지 내려왔는데. 타락한 업신의 위력을 모르니 잔뜩 경계해도 모자랄 판에 다른 생각에 푹 빠져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가항력이었다.

[어이. 홍도화. 너 그렇게 방심하다 또 당한다?]

[……어? 뭐를—.]

뭐를 당하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도화의 허리를 세게 움켜잡았다.

“!!!??”

깜짝 놀라 몸을 돌리려는데 이번에는 손이 허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올라왔다.

“윽…! 너, 묵범, 이 새끼가!”

처음에는 놀라서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떠올릴 틈이 없었지만, 뒤에서 풍기는 시고 달달한 향기에 범인을 바로 떠올렸다. 차에 있던 레몬 사탕을 쉴 새 없이 까먹더니 몸이 레몬 사탕이라도 되어 버린 걸까.

도화는 가슴에 올려진 묵범의 손을 떼어 냈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날 묵범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반대쪽 팔이 도화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떼어 내면 들러붙길 수차례. 이름을 묵범이 아니라 문어 빨판이라고 바꾸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 좀!!!”

결국 도화가 현천을 잡고 휘두르고 나서야 묵범이 뒤로 물러섰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도화는 묵범이 멀찍이 떨어졌음에도 분을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장 어디 한 군데라도 찔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죽진 않더라도 죽을 만큼 아픈 곳이 어딜지 가늠하며 달려들던 도화는 묵범이 환히 웃으며 건넨 말에 멈춰 섰다.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왔군요. 강민진의 본가에 들어가기 전에 정신 차려서 다행입니다.”

“아…….”

그제야 도화는 묵범이 제 몸을 만진 이유를 깨달았다. 하긴. 정신 차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질 못했으니 묵범이 아니었으면 현천이 정신 차릴 때까지 찔렀을지도 모른다.

‘현천한테 찔리는 게 나았으려나?’

도화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묵범을 노려보았다. 화를 내는 게 맞는 거 같긴 한데… 정신 차리게 해 준 건 고마웠다. 그런데 꼭 그런 방법을 써야 했냐고 따지자니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입을 열 수 없었다.

결국 도화는 현천을 쥔 손을 아래로 내렸다. 묵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우지 않고 도화의 옆에 다가와 섰다.

[멍청아. 넌 저 멀리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정신수양 좀 해야겠다. 이 쪼그만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이리 많누.]

현천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생긴 것은 안 그렇게 생겨 가지고 물러도 너무 물렀다고. 그러다 곪아 터지면 어쩔 거냐고 타박했지만, 도화는 아무 말 없이 현천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저기가 강민진의 본가입니다. 주차장에 차가 있는 걸 보니 집에 사람이 있는 것 같군요.”

묵범이 어서 들어가 보자며 도화의 팔을 툭 치고 앞서 나갔다. 도화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빠른 걸음으로 뒤따랐다. 그가 만져 댄 허리와 가슴보다 방금 툭 친 팔이 더 신경이 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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