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도화의 피는 순식간에 검날에 흡수되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그은 것이라 피가 철철 난 것은 아니지만, 현천은 좋아 날뛰었다. 평소에는 피 한 방울은커녕 아예 콕 찌르지도 못하게 하던 도화였다. 정말 드물게 현천의 힘을 좀 더 끌어내기 위해서 피를 내야 할 때만 몇 방울 내어 주는 게 전부였다. 그런 홍도화가 손가락 끝이 쩍 벌어질 정도로 날을 눌러 그었으니, 현천이 날뛰는 건 당연했다.
현천의 첨예한 검 끝이 수귀를 향해 쇄도했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수귀의 머리카락이 도화를 막아섰지만, 검날이 닿기도 전에 힘없이 썰렸다. 아까는 수귀의 공격을 방어하다 뒤로 물러섰지만, 지금은 당장이라도 수귀를 두 동강 낼 기세로 거침없이 전진했다.
[내가 가만히 당할 줄 알고?]
목숨이 경각에 달한 것을 깨달은 수귀가 재빨리 몸을 돌려 묵범을 방패로 썼다. 현천이 움찔하며 속도를 줄이는 게 도화의 손에 전해졌다. 하마터면 수귀가 아니라 묵범의 심장을 찌를 뻔했다.
몸을 돌려 수귀를 마주하려 해도 놈은 깔깔대며 묵범으로 도화를 막아냈다. 수귀의 머리카락에 싸여 미동도 없는 묵범은 죽은 사람 같아서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제 속을 벅벅 긁던 놈이 시체처럼 있으니 뭔가 억울한 느낌이다.
선계의 진인, 추혼부 수석인 놈이 고작 수귀 따위에게 당해? 도화는 자신이 수귀보다 못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짜증이 치밀었다.
‘그나저나… 이걸 어쩌지? 그냥 베어 버릴 수도 없고.’
도화는 현천을 거두고 이 난관을 어찌 풀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사이 수귀의 머리카락이 바닥을 기어 도화의 다리를 노리고 다가왔다. 까딱했다간 도화도 묵범 꼴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래는 내가 맡을 테니 너는 네 짝이나 구해.]
‘……짝?’
보통 파트너라고 부르지 않나? 묵범과 자신의 관계를 ‘짝’이라고 부르는 현천에게 왜 그렇게 부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 하는 수 없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의 손에서 빠져나온 현천이 아래로 내려가 도화를 위협하는 수귀의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그사이 도화는 손으로 묵범을 감싼 머리카락을 끊어 내려고 했다.
‘젠장. 미끄러워. 물미역도 아니고…!’
틈을 비집고 들어가 끊어 내려 했지만, 젖은 머리카락은 미끈거려 도화의 손을 자꾸만 미끄러트렸다. 이로 물어뜯을까? 손보다는 나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점액질의 정체를 모르니 함부로 입에 넣기 꺼려졌다.
“야, 묵범.”
“…….”
혹시 의식이 있는 걸까. 묵범의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 이러다 묵범이 정말 질식해서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미치겠네.’
결국, 도화는 손 대신 입을 쓰기로 했다. 저게 입에 들어가도 당장 죽진 않겠지. 차사국에 정화부와 치유부가 있으니 몸에 문제가 생겨도 알아서 잘 치료해 줄 것이라 믿고 입을 벌렸다.
아직 머리카락이 입에 닿지도 않았는데 축축한 한기가 얼굴에 닿았다. 수귀가 이렇게 기분 나쁜 악귀였구나. 물에 빠져 억울하게 죽은 불쌍한 영혼이라 여겼었는데. 당해 보지 않아서 할 수 있었던 해맑은 생각이었다.
도화는 머리카락이 곧 입에 닿을 것 같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왕이면 턱 말고 입술에 해 주면 좋겠는데.”
“……?”
뭐지?
두 눈을 번쩍 뜨니 묵범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 머리카락이 사라진 거지? 놀라 뒷걸음질 치며 묵범을 살펴보니, 어깨 아래로는 여전히 수귀에게 붙들린 상태였다. 그는 여유롭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현천. 괜찮으니까 제 몸에 감긴 물미역 좀 잘라 줄 수 있겠습니까?]
묵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래에서 도화를 지키고 있던 현천이 위로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묵범의 몸에 감겨 있던 검은 터럭들이 힘없이 후두둑 끊어졌다.
[내, 내 머리카락이!!!]
꽤 심혈을 기울여 묵범을 잡아 두었던 수귀가 비명을 질렀다. 단번에 잘려 나간 타격이 컸는지 머리카락은 바로 재생하지 못하고 소금 맞은 미꾸라지처럼 꿈틀대다 서서히 움직임이 둔해졌다.
“홍도화 씨. 아직도 이거, 못 풀겠습니까?”
머리카락은 제거했지만, 도화의 부용삭은 여전했다.
“어, 그게. 잠깐만.”
도화는 부용삭에게 명령을 내리는 대신 손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지지리도 말을 안 듣던 부용삭은 도화가 직접 손으로 잡자 그제야 스르륵 풀렸다. 정말 기가 막힌 장면이었다. 진작에 풀렸으면 이 고생은 안 하는 건데.
도화의 부용삭이 풀리자 묵범의 등에 같이 묶여 있던 수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부리나케 강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도화가 뒤따랐다. 부용삭으로 묶으면 될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부용삭은 한동안 실전에선 써먹지 못할 것 같아 현천을 들고 수귀에게 달려들었다.
묵범은 수귀를 따라 강으로 들어간 도화를 느긋하게 따라갔다. 그의 허리춤에 묶여 있던 부용삭이 부드럽게 풀려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아까 도화의 부용삭의 움직임과 똑같았지만, 다른 점은 묵범의 의도대로 정확하게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부용삭을 본 수귀가 강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용삭에 꽁꽁 묶인 수귀가 수면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자갈과 모래투성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거 놔!!!]
풀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오히려 거세게 옥죄였다. 아까 도화의 부용삭에 묶였던 것은 장난이라 느껴질 정도로 묵범의 부용삭은 수귀의 팔과 다리를 거칠게 파고들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머리카락으로 공격하려 했으나 현천의 검날이 수귀의 뒷목에 바짝 붙어 위협했다. 조금만 허튼짓을 하면 당장 목을 날려 버릴 기세였다. 당연히 머리카락도 목덜미 밑으로 숭덩 잘려져 나갔다. 새로 쑥쑥 자라나도 바로 잘렸다.
“탈모 환자들이 보면 환장을 할 장면이군요.”
묵범이 웃으며 수귀에게 말했다. 저 머리카락에 뒤덮여 큰일 날 뻔했던 사람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속수무책으로 머리카락에 붙들렸던 놈이 어떻게 풀어낸 거지? 그것도 얼굴만 빠져나왔다. 마치 도화가 구해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설마. 저 자식. 일부러 그런 건가……?’
저 자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속았다는 생각에 도화는 울분이 치밀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귀를 봉인석에 가두는 게 먼저다. 따지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도화는 잠시 잊고 있던 자신의 침착함을 일깨웠다. 정확하게는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보통 수귀는 즉결처분하기 마련인데. 무한대로 자라나는 머리카락은 꽤 쓸 만해 보이니 무구부로 보내야겠습니다.”
묵범이 품에서 붉은색 구슬로 만들어진 팔찌를 꺼냈다. 수습 차사인 도화는 아직 지급 받을 수 없는 봉인석이었다. 처음에는 붉은색이라 루비나 가넷인 줄 알았는데, 특수한 경면주사로 만든 봉인석이라 했다. 한 알 당 악귀 하나를 담을 수 있는 팔찌는 수습 딱지를 떼어야 받을 수 있었다.
‘잘 봐 둬야지.’
나중에 저승차사를 때려치우더라도 저런 식으로 원귀나 악귀를 봉인해 볼 만했다. 아니면 보호해야 하는 영을 잠시 담아도 되고.
아직 수습 딱지도 떼지 못했으면서 그만둘 생각을 하는 도화에게 묵범이 말했다.
“뒤로 물러서세요. 봉인할 거니까.”
도화는 대답하는 대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묵범이 경면주사 구슬에 악귀를 봉인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끄윽. 안, 안 돼!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죽을 수 없어!!]
“이미 죽은 귀신이 죽기 싫다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멀쩡한 인간은 잘만 죽여 놓고.”
묵범이 피식 웃으며 팔찌에서 구슬 하나를 골라 꾹 눌렀다. 그러자 수귀의 몸이 흐물흐물하게 변하더니 구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수귀를 모두 빨아들인 경면주사 구슬이 살짝 움직였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수귀를 봉인한 구슬이 처음보다 색이 훨씬 짙어진 게 보였다. 팔찌에 경면주사 구슬이 대부분 밝은색인 걸 보면 묵범이 일을 얼마나 안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달구처럼 그냥 죽이는 게 낫지 않아?”
귀찮게 뭐 하러 봉인까지 하냐는 도화의 질문에 묵범은 손가락으로 본인의 머리를 톡톡 치며 대답했다.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자라는 게 신기해서요. 무구부에 던져 주면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아서 소멸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달구의 혼도 여기에 잘 보관해 뒀습니다.”
묵범의 손가락이 수귀를 봉인한 구슬 바로 옆의 것을 톡톡 쳤다. 달구를 봉인한 것은 보지 못했는데. 어느 틈에 봉인한 건지 모르겠다.
“제주도에 있어야 할 달구가 홍천까지 오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래.”
도근천 지박령인 달구가 뜬금없이 홍천까지 와서 수귀와 2인 1조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은 조사해 볼 만한 일이었다.
“이제 슬슬 철수하도록 하지요.”
묵범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에 흑립이 나타났다.
“다 끝났는데 흑립은 왜?”
“수귀가 사라졌으니 곧 물안개가 완전히 걷힐 겁니다.”
“아. 그러겠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저기 강 건너 나무가 또렷이 보일 정도로 안개가 걷혀 있었다. 피부에 물기가 맺힐 만큼 축축했던 습기도 정상으로 내려간 게 느껴졌다. 도화는 방금까지 악귀가 만든 영역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도화가 손가락을 튕겨 흑립을 썼다. 수영복 바지에 도포 차림이었던 도화의 모습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기 전에 써서 망정이지, 조금만 더 늦게 썼다면 강가에 산책 나온 마을 사람들에게 괴상한 차림새를 들킬 뻔했다.
둘은 평상에 둔 물품을 모두 챙겨 차사국으로 향했다.
오늘 잡은 것은 달구와 수귀. 달구는 원귀나 악귀는 아니어도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귀물이고 수귀는 잡귀치고는 힘을 꽤 모은 악귀였다. 아마 거기서 좀 더 사람을 해쳤다면 수살귀가 되었을 것이 자명했다.
“피곤하군요. 담마만 픽업해서 바로 집으로 갑시다.”
“그러도록 하-.”
꼬르륵.
도화의 대답을 끊고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어찌나 우렁차던지 귀에 너무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도화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주먹으로 자신의 배를 퍽퍽 쳤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군요. 역시, 컵라면 하나 가지고는 많이 부족했나 봅니다.”
“……닥쳐.”
빠드득 이를 갈며 대답하는 도화의 목덜미와 귀 끝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어설프게 익다 만 딸기 같아 보였다.
그걸 본 묵범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도화의 귀 끝을 만졌다. 뜨끈한 체온이 손에 달라붙었다.
“뭐, 뭐야. 손 안 떼?!”
도화가 묵범의 손길을 피해서 몸을 창문 쪽으로 붙이며 으르렁댔다. 이 자식. 잠시도 방심할 틈을 안 주는구나.
질색하는 도화와 달리 묵범은 저를 피하는 도화가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며 손을 거뒀다. 다시 핸들을 잡은 손에는 스치듯 살짝 만진 촉감이 손가락 끝에 여운처럼 남아 한참을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