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묵범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보거나 들은 사람들은 도화가 귀물의 힘을 실어 명령했던 것보다 훨씬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도화의 명령을 들었을 때는 무언가에 억눌려 억지로 사진을 지우는 듯한 모습이었다면, 묵범의 명령에는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다 하신 분은 이쪽은 신경 끄고 하던 일을 하면 됩니다.”
사진을 지운 사람들은 다시 물놀이를 하러 강으로 들어가거나 먹던 음식을 마저 먹으러 뿔뿔이 흩어졌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도화는 묵범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그러자 땅에 뿌리 내린 거목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묵범이 등에서 스르륵 내려왔다.
더워 죽겠는데 다 큰 남자가 등에 찰싹 달라붙을 거란 상상은 꿈에도 해 보지 못했던 도화는 등에 남아 있는 묵범에 체온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춥습니까?”
그 모습을 본 묵범이 손을 뻗어 도화의 이마를 만지려고 했다. 물론, 도화가 순순히 이마를 내어 줄 리 없었다.
찰싹! 매서운 소리와 함께 묵범의 손이 튕겨 나왔다. 굉장히 기분 나쁜 거절 방법이었지만, 묵범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거부당한 손을 거뒀다.
“방금 그거. 나도 할 수 있는 건가?”
“아, 이거요?”
도화의 질문에 묵범이 웃으며 손가락을 탁탁 튕겼다. 저거, 나한테 수 쓰는 건가? 도화가 인상을 쓰고 묵범의 손을 노려보았다. 기억을 지우는 술법이 사람에게만 적용되리란 확신이 없어서였다.
[저승차사의 기억도 지울 수 있는 건가?]
[나도 몰라. 그래서 알아보려고.]
“그거 지금 나한테 쓰는 거야?”
“그럴 리가요. 이 술법은 같은 저승차사에겐 통하지 않습니다.”
묵범의 대답에 도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언제 저 변태 새끼가 제게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신경이 곤두선 채로 지내는 도화였다. 그런데 만약, 저 술법이 저승차사에게도 효과가 있다면…?
‘내가 싫어하는 짓이란 짓은 다 하고 저 술법으로 기억을 지워 버릴 게 분명해.’
소름이 돋고 몸이 떨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또 몸을 떨었다간, 열을 재려는 묵범의 손에 이마를 내어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정말 걱정이 되어 열을 재려는 것인지, 그 핑계로 몸을 만지려고 하는 것인지는 분간할 방법이 없으나 묵범의 전적으로 보아 후자일 게 뻔했다.
[다행이군. 그런데 자네도 쓸 수 있는 거 아닌가?]
[몰라. 안 배웠어.]
저승차사는 저런 술법도 쓰는구나. 걱정이 사라지자 뒤늦게 술법을 어찌 쓰는지 궁금해졌다.
“신입 딱지 떼면 나도 쓸 수 있어?”
“못 씁니다.”
“……왜?”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던 도화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안 된다는 대답을 한 묵범의 멱살을 잡고 싶어졌다. 당연히 강림 차사나 그 위의 인사가 정한 규칙이겠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만만한 상사에게 짜증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 멱살을 잡아도 안 됩니다.”
“…….”
묵범은 도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기억 소거술은 백 년 차 차사부터 쓸 수 있는 술법이거든요.”
“넌 왜 쓸 수 있는데?”
“그야 이 짓을 한 지 백 년이 넘었으니까요?”
묵범의 대답은 도화가 더는 짜증을 낼 수 없게 만들었다. 얄밉지만, 묵범은 조건이 되어서 쓰는 것이고 자신은 차사가 된 지 겨우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사내 규칙이 그러하다는데 어찌하겠는가.
“됐어. 일이나 하자.”
도화는 묵범을 뒤로하고 강가로 향했다. 자잘한 돌멩이가 도화의 발바닥을 자극했다. 운동화는 평상에 벗어 둔 상태라 도화의 발은 맨발이었다.
묵범이 도화의 뒤를 쫓다 그의 손목을 낚아채며 말했다.
“이런. 제가 신발은 깜빡했군요. 바닥에 깨진 유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제가-.”
“그만.”
도화는 묵범에게 손목이 잡힌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기가 차다 못해 막힐 지경이다. 아무리 인간과 같은 외양인들, 자신은 귀물이었다. 튼튼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워할 도깨비의 피가 반이나 섞였는데. 설마 깨진 유리 조각에 상처 입을 리가.
“내가 저들과 똑같은 사람처럼 보여?”
“그럴 리가요.”
“알면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수귀나 찾아. 일하려고 온 거 아니었어?”
“물론 수귀는 잡아야 하지요.”
묵범은 턱을 매만지며 유유히 흐르는 강을 쳐다봤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눈빛이었다.
[벌써 수귀가 나타난 건가?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데? 이봐, 도화. 강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수영복 바지 주머니 속에서도 외부가 훤히 보이는지 현천은 강으로 가 보자고 성화다. 안 그래도 강 속에 들어갈 작정이었던 도화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묵범을 지나쳐 다시 강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내 또 묵범에게 붙잡혀 몇 걸음 다가가지 못했다.
“왜 이래?”
“쉿.”
“?”
묵범이 손가락으로 도화의 입술을 꾹 눌렀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고 대꾸하려는데 뒤에서 ‘풍덩’ 하고 물소리가 났다.
[뭔가 나타났어.]
현천이 작게 속삭였다. 현천이 목소리를 낮추자 괜히 도화도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없는데?]
수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본 강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디 한 군데 튀어 오르는 물살 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뭔데 그래?”
묵범의 손가락을 끌어 내린 도화가 물었다. 자신은 강을 등지고 서 있었지만, 묵범은 계속 강을 보고 있었으니 무엇이 낸 소리인지 알 텐데. 무슨 일인지 그는 흥미롭단 표정을 지을 뿐, 대답 없이 계속 아까 보던 강의 수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람이 낸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가벼웠어. 그렇다면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소리 아니야?”
수귀가 물고기로 변했을 수도 있었다. 본디 수귀는 물에 빠져 죽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동물이 오랜 세월 살다 영물이 되는 것처럼 귀신도 오래 묵으면 한 차원 발전하기 마련이다.
보통은 인간을 홀릴 만한 모습으로 변한다. 수귀라면 물고기나 다슬기 같은 것으로 변할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이 강의 수귀가 그 정도로 오래 살았던가?’
홍천강은 피서지로 유명하지만, 그만큼 물놀이 사고로도 유명하다. 차사국에서 이렇게 특별 관리를 하는 걸 보면 머리가 조금만 굵어져도 차사들이 잡아가는 것 같으니 오래 묵은 수귀가 이 강에 있을 것 같진 않아 보였다.
“흠…. 혹시 귀걸이나 반지 같은 거 있습니까?”
“내가 그런 걸 할 사람으로 보여?”
주머니에 현천을 넣고 다니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몸에 무언가 달고 다닐 리가 있나. 도화의 대답에 묵범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잠시, 이쪽으로.”
“?”
수귀를 찾는다던 묵범은 강으로 가지 않고 다시 평상으로 도화를 이끌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려던 도화는 웃음을 지운 묵범의 얼굴을 보고 순순히 따라갔다.
평상으로 돌아온 묵범은 아이스박스에서 시원한 맥주 캔 하나를 꺼내 도화에게 건넸다. 공무 중에 무슨 술은 당연히 금지겠지만, 늦더위에 목이 탄 도화는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받아 들었다. 묵범은 맥주가 아닌 초코 우유를 집어 들었다.
저 큰 덩치로 초코 우유를, 그것도 빨대로 쪽쪽 빨아 먹는 모습은 도화의 눈엔 해괴하게 보였다. 저건 지나가던 개도 신기해서 사진을 찍을 만한 모습이었다. 다행인 건 아까 묵범이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라는 단서를 붙인 덕분에 누구도 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귀는 안 찾고 갑자기 귀걸이와 반지는 왜 찾는 거야.”
“저길 보세요.”
묵범이 어느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따라가 보니 아까 그가 쳐다보던 강이었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낸 물소리가 나던 그 자리.
“안 보이는데?”
“집중하고 잘 보세요. 뭔가 보일 겁니다.”
집중하란 말에 도화는 안력을 높여 그가 가리킨 곳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란 것 외에는 딱히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
‘어?’
시야에 순간적으로 무언가가 스쳤다. 아주 찰나였지만, 하얗게 반짝였다. 유속이 느린 강이지만, 강 속은 알 수 없다. 특히 저곳은 물도 탁해서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바닥이 모래인지 바위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수면에 햇빛이 반짝였다고 하기엔, 너무 눈에 띄게 밝았다.
“수심이 꽤 깊어 보이는데. 저 정도로 반짝일 만한 물건이 있나?”
“그럴 리가요. 자,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정체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묵범은 뭔가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답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듯한 태도라 도화는 기분이 묘했다. 스승이 죽은 뒤로 이런 가르침은 처음인지라 그런 거라 생각한 도화는 어색함을 감추려고 조용히 무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묵범이 가리킨 곳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수귀가 아니라 사람인데?]
현천의 말대로 사람이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사람으로 변한 귀물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몇 번이고 다시 봤지만, 평범한 사람이 맞았다. 저게 네가 기다리라고 한 이유냐고 물으려던 도화는, 얕은 물가를 서성이던 사람이 점점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도화. 저 인간, 뭔가… 이상하군.]
현천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도화에게 말을 걸었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그저 물놀이를 하러 물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도화에겐 무언가에 홀린 듯 끌려 들어가는 남자로 보였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하얀 빛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처음 한 번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남자의 시선과 이동 방향이 정확하게 빛이 빛나는 곳인 것을 보면 저 빛이 남자를 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수귀가 반짝이는 것으로 사람을 홀린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어. 그렇다는 건… 다른 귀신이 있다는 건가?’
물속에서 반짝이는 것으로 사람을 홀리는 귀신이 뭐가 있었더라. 평소 퇴마 의뢰를 받아도 도심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결했지, 수도권을 벗어나 피서지까지 온 적이 처음인 도화는 좀처럼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껏 인상을 쓰고 무슨 귀신인지 떠올리려는 도화와 달리 현천은 바로 정체를 파악했다.
[도화. 달구다.]
[달구?]
[그래. 달구. 제주도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여기까지 와서 수귀랑 붙어먹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달구가 맞는 것 같다.]
[아…!]
제주도란 말에 도화는 달구가 무엇인지 떠올렸다. 제주도 도근천에 있는 폭포 아래, 깊은 못에 사는 귀鬼다. 수달과 비슷하게 생긴 이 귀는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여 사람의 장신구에 환장을 하는 녀석이었다.
“달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도화의 질문에 묵범이 살짝 놀란 듯 눈을 떴다. 도화가 맞출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달구의 정체를 맞춘 것은 자신이 아닌 현천이었지만, 도화는 사실대로 말하진 않았다. 묵범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