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담마를 차사국에 떨궈 준 묵범과 도화는 추혼부에 들르지 않고 바로 홍천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는지 묵범은 도화의 차사복까지 미리 차에 실어 둔 상태였다.
늦은 휴가를 떠나는 사람이 많다더니. 거의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 도착한 홍천강은 피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강가에 즐비하게 세워진 평상은 빈자리가 없었고 평상을 못 구한 사람들이 친 텐트도 수두룩했다.
“홍도화 씨는 올해, 어디로 휴가를 다녀왔습니까?”
주차할 곳이 없어 빈자리를 찾으러 빙빙 돌던 묵범이 대뜸 물었다.
“일했어.”
“일이요? 휴가 기간에 일?”
“귓구멍이 막혔냐? 바로 옆에서 말했는데 왜 또 물어?”
도화의 퉁명한 대꾸에 기분이 상할 만도 하건만. 묵범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여강진이 당신은 버는 족족 사람 찾는 일에 다 쏟아붓는다고 하더군요. 찾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강진이 그런 말까지 해?”
도화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여강진의 입이 가볍긴 해도 초면에 남의 사생활을 나불거릴 사람은 아니었다.
“너, 여강진하고 아는 사이였어?”
“불래의 여각주 말입니까? 저번에 만난 게 처음이었습니다.”
뭐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여강진의 입이 더 가벼워진 건가?
도화가 잔뜩 인상을 쓰자 주머니 속 현천도 쯧쯧 혀를 차며 거들었다.
[여강진, 그자. 조만간 민들레 홀씨처럼 하늘을 둥둥 날아다니겠군.]
그렇게 여강진의 더욱 가벼워진 주둥이를 걱정하는 사이 간신히 묵범은 간신히 주차할 곳을 찾았다. 쓰레기 분리수거장 바로 옆이라 다들 피하는 곳이었다.
차에서 내리니 후끈한 공기와 강에서 나는 미세한 물비린내, 그리고 바로 옆, 쓰레기장에서 나는 냄새까지 한데 섞여 불쾌함을 선사했다.
저 멀리 강가에서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데서 노는 게 정말 재미있나? 한 번도 휴가를 즐겨 본 적이 없는 도화는 그저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게 전혀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다. 뭔가 다른 특별한 것이 있나 싶어 물에서 노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재미있어 보이면 들어가서 놀아도 됩니다. 갈아입을 옷은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니까요.”
물놀이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도화를 옆에서 관찰하던 묵범은 도화가 저들처럼 놀고 싶어 한다고 오해해 버렸다. 그래서 도화가 무슨 개소리냐는 눈빛으로 자길 쳐다보자 의아해했다.
“아, 텐트를 치고 싶다면 사러 가죠. 오는 길에 대형 마트가 있던데. 피서지에 있는 마트이니 피서 용품은 많을 겁니다. 원한다면 텐트도 사고, 흠… 고기도 구울까요?”
“…미쳤냐?”
결국, 도화의 입에서 미쳤냐는 말이 나왔다. 일하러 온 놈이 물놀이는 무슨 물놀이인가. 수귀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1분 1초도 방심하지 않고 예의주시하진 못할망정. 물놀이?
“수귀 잡으러 온 거 아니야? 물놀이하다 수귀를 놓치면 어쩌려고.”
“겸사겸사입니다. 기왕이면 수귀가 인간이 아닌 우리를 타깃으로 삼으면 놀면서 일도 하는 일석이조 아니겠습니까?”
듣다 보니 그럴싸하다. 수귀는 물, 뭍 가리지 않고 사람이라면 무조건 물속으로 끌어들이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물속에 사람이 많은 경우라면 번거롭게 뭍에 있는 사람을 현혹할 필요 없이 물에 있는 사람을 끌고 들어가는 게 편할 터.
하지만.
“이렇게 입고 물속에 들어가라고?”
도화가 입은 옷은 청바지에 티셔츠였다. 출근 첫 주는 꽤나 힘주어 입고 다녔었는데 다른 차사들의 차림새를 보니 좀 더 편하게 입고 다녀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묵범이 좀 과하게 차려입는 편이었다.
“그거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수영복은 이미 준비해 왔으니까요.”
“너… 애초에 놀 생각으로 온 거지.”
“그럴 리가요. 그냥 준비성이 철저한 것일 뿐입니다.”
홍천강은 피서지로 유명한 곳이니까요. 묵범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동차 트렁크에서 수영복과 비치 타월이 든 비닐 팩을 꺼내 도화에게 건넸다. 그리고 커다란 아이스박스와 돗자리도 꺼냈다. 그는 아이스박스 안을 열어 도화에게 보여 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배고플까 봐 먹을 것도 준비했습니다.”
현천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놀러 왔군.]
[그러게.]
묵범은 아이스박스를 들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평상을 대여해 주는 가게로 들어간 묵범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기양양하게 나왔다. 때마침 빈 평상이 나와 종일 쓰기로 했다나.
빌린 평상으로 가는 묵범의 뒷모습은 여름휴가를 온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도화는 저자의 머릿속에 ‘일’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기는 한지 궁금해졌다. 저러다 일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닐지 불안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묵범은 평상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어젖혔다. 저승차사면 차사복을 입어야 하건만. 묵범은 주변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얼굴부터 몸까지 어디 한 군데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두 남자의 등장에 강가에서 놀던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묵범이 시원시원하게 옷을 벗어 버리니 주변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저자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현천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도화도 차마 평상에 올라가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묵범을 쳐다봤다. 아무리 중요한 곳은 가렸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브리프만 남기고 홀랑 벗을 줄이야.
“체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차에서 갈아입어야 하는 거 아냐?”
보다 못한 도화가 한 소리 했다. 벌건 대낮에, 쳐다보는 눈이 저리도 많은데 속옷 차림을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는 묵범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어떻습니까? 속옷까지 벗은 것도 아닌데요. 어차피 수영 바지나 브리프나 그게 그거잖아요. 당신도 어서 갈아입어요. 물에 들어가게.”
브리프와 수영 바지의 차이점은 속옷과 활동복이라는 것부터 아주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걸 설명해 봤자 묵범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을 알기에 도화는 말없이 근처 화장실로 향했다. 거기서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그러자 뒤에서 묵범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같은 남자끼리 뭘 그렇게 내외합니까?”
“내외 같은 소리 하네.”
도화는 묵범의 말을 단번에 잘라 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쓰레기장에 이어 좁고 냄새나는 화장실은 도화에게 여름휴가의 나쁜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도화가 평상으로 다가가자 누워 있던 묵범이 벌떡 일어나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휘파람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묵범에게서 도화로 옮겼다.
[난봉꾼 같군.]
현천이 도화의 속마음을 대변했다. 하지만, 난봉꾼의 얼굴과 몸이 극상이라 가벼워 보이는 태도마저 매력적으로 보이는 게 문제였다. 도화의 눈에도 그런데 보통 사람의 눈엔 어찌 보일지 안 봐도 훤했다. 여기저기에서 찰칵찰칵 소리가 나는 게 촬영 온 연예인인 줄 알고 몰래 사진을 찍는 듯했다.
도화는 사진 찍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짐짓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몰래 묵범을 찍고 있던 여자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앗…! 내 폰!!”
휴대폰을 빼앗긴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어 도화를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당신이 뭔데 내 폰을 가져가냐고 따질 듯했지만, 도화와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허락 없이 타인을 함부로 찍는 것은 범죄입니다.”
“…여,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도화의 매서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사람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휴대폰을 갑자기 빼앗아서 화가 났나? 도화는 자신이 너무 강압적으로 행동했나 싶어서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저 사람은 연예인이 아니니 찍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허락받고 찍어도 되나요?”
“네……?”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도화에게 질문했다. 예기치 못한 질문에 도화가 당황하자 휴대폰을 돌려받은 여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도 되냐고 물었다.
“안 됩니다.”
너무 강압적이었나, 했던 방금의 걱정은 기우였다. 좋게 해결하려던 도화는 결국 목소리에 기운을 실어 경고했다.
“여기서 저 남자를 찍은 것은 모두 삭제하는 게 좋을 겁니다.”
따로 불이익을 주겠다는 건 아니지만, 도깨비 기운을 살짝 실은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 주는 것은 간단했다. 평범한 인간이 귀물의 기운을 맞닥뜨리면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였다.
히이익!
누군가 겁먹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사진을 지우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좋은 말로 해선 말을 듣지 않는구나. 그래도 어쨌든 ‘말’로 해결하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팔이 도화의 어깨에 걸쳐졌다.
‘누구?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놀라서 돌아보니 묵범이었다. 묵범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도화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는 사진을 지우다 멈춘 사람들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사진만 지우지 말고 이쪽 분 사진도 다 지우셔야 합니다.”
“내 사진? 무슨 소리야.”
도화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하지 말라고 타박을 하며 어깨에 걸쳐진 묵범의 팔을 걷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묵범은 오히려 팔에 힘을 주어 도화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졸지에 목이 묵범에게 감겨 그에게 기댄 꼴이 되어 버린 도화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폭력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여기서 이 새끼를 패면 더 복잡해지려나?]
사진 삭제로 끝낼 수 있는 것을 괜히 복잡하게 만들 것 같단 걱정이 들었다.
[차사들에겐 인간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군.]
[하긴. 예기치 못하게 정체가 노출될 수도 있으니 없을 린 없겠네.]
그러면 그냥 패도 되겠다. 걱정이 해소된 도화는 목에 둘린 묵범의 팔을 양손으로 세게 붙잡았다.
“음…?”
그리고 상체를 숙이면서 묵범을 앞으로 엎어 메쳤다. 어깨와 등에 묵범의 무게가 묵직하게 달라붙었다. 한번 거하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면 정신 좀 차리겠지. 아니, 차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당겼다. 하지만.
“뭐 하는 겁니까?”
‘꿈쩍도 안 해…?’
도화의 안간힘에도 묵범은 발뒤꿈치도 살짝 들리지 않았다. 묵범이 도화보다 크긴 해도 방심한 사이에 기습적으로 들어 올린 건데, 미동도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발이 땅에 박혔나? 아니면 네가 힘을 덜 쓴 거 아냐?]
[그럴 리가.]
[좀 더 힘 좀 써 봐.]
현천도 믿기지 않는지, 도화에게 다시 한번 해 보라고 부추겼다. 도화는 빠득, 이를 갈고 다시 묵범을 들어 올리려고 힘을 주었다.
“아, 갑자기 절 업고 싶어진 겁니까?”
“…?”
“좀 당혹스럽긴 한데… 홍도화 씨가 그리하고 싶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영차.
묵범은 당황한 도화의 말을 무시하고 가볍게 발을 굴러 어깨에 매달렸다. 갑작스럽게 뒤로 쏠린 무게감에 도화는 휘청거리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도화의 등에 매달린 묵범은 이 상황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우리 둘의 사진을 모두 지운 사람은 머릿속에서도 지우시기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