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강림 도령은 도화의 입에서 교맥국이란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도방이 도깨비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는 것은 도방을 아는 자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도깨비들은 자신들이 도화를 오점으로 여기고 없애고 싶어 한다는 것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가장 심했던 시기에는 도방에게 현상금까지 걸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깨비들이 도화를 없애고 싶어 하는 것은 여전했다.
교맥국(蕎麥國).
교맥이라 함은 메밀의 한자어이다. 곡물 중 가장 찬 성질을 가져 여름에는 열을 떨구는 음식으로, 겨울에는 약으로 쓰이는 식재료이다.
그리고 도깨비가 가장 좋아하는 메밀묵을 만드는 재료이기도 하다. 얼마나 메밀을 좋아했으면 나라 이름을 교맥국이라 지었을까.
도깨비 하면 메밀. 메밀 하면 도깨비임을 잘 아는 강림 도령은 내심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더위는 잘 타나?”
묵범이 도방을 차사국으로 스카웃 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궁금했던 것이었지만, 도화에겐 무척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도화는 눈썹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더위와 추위 모두 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봅니까?”
“반도깨비니까 궁금해서. 도깨비들은 몸에 열이 많아서 메밀이라면 환장을 하잖아?”
“정말… 당신은 편견의 화신이라 해도 할 말이 없군요.”
도화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저런 편협한 사고로 국장까지 된 거지? 아니면 내 심기를 긁으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진심으로 묻는 건지, 떠보려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 화를 내기도 뭐했다.
“도깨비 혼혈을 보는 것은 네가 처음이라 궁금한 게 많아서 그런 거니 네가 이해 해.”
단순히 호기심이라기엔 반짝거리는 눈동자 너머로 꿍꿍이가 일렁이는 것 같아서 도화는 잔뜩 경계했다.
“뭐 더 궁금한 게 있습니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다 끝내도록 하죠.”
“오. 그래도 돼?”
“대신 오늘 이후로는 궁금한 게 생겨도 질문하지 마세요.”
도화의 철벽에 강림 도령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질문 따윈 하지도 말라고 딱 잘라 말하고 싶었지만, 어느 정도 호기심을 해결해 놓지 않으면 만날 때마다 지대한 관심을 보일 것 같아서 급한 불이라도 꺼 놓자는 방지책이었다.
[이봐. 도화. 정말 저자가 물어보는 대로 다 대답할 텐가?]
주머니 속 현천이 작은 목소리로 도화에게 말을 걸었다. 도화가 저승차사를 어찌 생각하는지 알기에 하는 질문이었다.
[못 할 건 뭐 있어. 솔직히 나도 나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어.]
[어… 그…렇긴 하지…….]
현천의 말 줄임에 무슨 뜻이 함축되어 있는지 알아차린 도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둘의 대화를 알 리 없는 강림 도령은 도화가 저를 보고 그러는 줄 알고 발끈했다.
“아니, 내가 그러하겠다고 대답했는데 믿지 못해서 그래?”
“아닙니다. 그냥 저도 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래…?”
도화의 자조적인 대답이 강림 도령의 성질머리를 꾹 눌렀다. 도방 선생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은 차사국 차사라면 익히 아는 사실이다. 형제자매는 고사하고 도깨비가 도방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쳐도 보호해 줄 부모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뭘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긴 어렵겠군.”
“뭐, 그렇죠.”
“흠. 인적 사항 같은 건 물어볼 필요도 없겠고.”
“이게 궁금해서 절 부른 게 아닙니까?”
도화는 강림 도령이 자꾸만 대화를 빙빙 돌리자 가방에서 귀령면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강림 도령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맞아. 다른 것도 궁금한 게 많지만, 이게 가장 궁금했어. 귀령면. 이거, 어디서 구한 거야?”
“스승님의 유품입니다.”
“스승? 네게 스승이 있었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강림 도령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이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기에 그냥 오래된 장식품인 줄 알았습니다. 한참 뒤에 여강래가 귀령면이라고 알려 주더군요.”
“여강래라면 불래의 여각주 아닌가? 성격이 굉장히 괴팍하여 친분 쌓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괴팍하니 저를 가까이 두는 것이겠지요.”
안 그러면 누가 반도깨비에 교맥국의 미움을 받는 자신을 챙겨 주겠는가. 도화의 말에 강림 도령은 그럴싸한 대답이라며 수긍했다.
“내 눈에도 볼품없는 나무 가면처럼 보이는데, 어찌 이게 귀령면인 걸 알았을까.”
“불래의 주인이니까요.”
“하긴. 그러긴 해.”
온갖 귀물이 모여드는 여각 불래의 주인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불래에는 온갖 귀물이 모여드는 곳이다. 귀물뿐인가? 선인들도 종종 찾곤 했다. 그런 여각을 까마득한 세월 동안 운영했으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세어 보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이거 내가 써 봐도 되나?”
“됩니다.”
강림 도령은 귀령면을 들고 이리저리 꼼꼼하게 관찰하며 말했다
“오, 생각보다 무척 가볍네. 이게 기척을 지워 준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야?”
“네.”
[어이. 저거 내버려 둬도 되는 겐가?]
당황한 것은 현천이었다. 오히려 도화는 강림 도령이 귀령면을 마음대로 만지는데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강림 도령은 자신이 귀령면을 멋대로 만져도 별다른 제지가 없자 신이 나서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뺏지만 않으면 괜찮아.]
강림 도령이 귀령면을 빼앗을 이유는 없다. 귀령면이 차사의 흑립보다 성능이 뛰어나다면 모를까. 강림 도령은 귀령면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두근두근. 도화는 강림 도령의 표정만으로 그의 기대에 찬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저래도 되는 거냐…?]
현천은 강림 도령이 귀령면을 들고 튈까 봐 걱정을 하는데, 정작 도화는 현천의 말투가 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단 생각을 했다. 조선 시대 선비나 쓸 법한 말투였는데 담마와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요즘 말투로 살짝 진화한 것 같다.
[괜찮아. 아마 아무 반응 없을 거야.]
[그래…? 네가 그렇다면 뭐, 할 말은 없다만.]
도화는 상기된 얼굴로 귀령면을 관찰하는 강림 도령을 무덤덤하게 구경했다. 강림 도령이 이렇게 신기해하는 이유는 귀령면의 공급이 아예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었다.
저승차사의 흑립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차사의 흑립은 차사만 쓸 수 있기에 기척만 숨기는 애매한 성능이라 해도 귀령면의 수요는 항상 끝이 없었다. 하지만, 공급 자체가 없으니 귀령면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조차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도화가 귀령면을 쓰고 있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강림 도령이 엉덩이를 들썩거린 이유였다.
이것 때문에 차사들한테 들키지 않고 공무 집행을 방해할 수 있던 거구나! 도화 때문에 공무를 실패한 차사들이 들었다면 울화통이 치밀 말이었지만, 지금 강림 도령에겐 그런 것 따윈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엔 이걸 연구하여 차사의 흑립을 좀 더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래서 성능 확인 겸,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귀령면을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
검은 탈을 얼굴에 밀착했는데 딱히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살짝 떼었다가 다시 써도 얼굴에 밀착되는 느낌이 없다. 혹시 머리나 귀에 걸어 고정하는 끈이 있나 싶어서 살펴봤지만, 그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홍도화는 귀령면을 어떻게 쓰고 다니는 거지?
강림 도령은 그래도 다른 숨겨진 기능이 있지 않을까, 하고 얼굴에 귀령면을 올린 뒤 손을 뗐다. 그러자 귀령면은 힘없이 테이블로 뚝 떨어졌다.
“이거 왜 이래?”
“뭐가 말입니까?”
“얼굴에 안 붙잖아.”
“그야 저만 쓸 수 있으니까요?”
“어째서?”
“저도 모릅니다.”
도화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강림 도령의 눈썹이 위로 휙 높게 올라갔다. 그러더니 도화에게 귀령면을 내밀며 말했다.
“써 봐.”
참으로 귀찮은 직장 상사다. 부디 오늘만 이러고 내일부터는 이렇게 마주할 일이 없길 바라며 도화는 귀령면을 받아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강림 도령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던 귀령면이 스르륵 도화의 얼굴에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진짜네?”
귀령면의 변화에 강림 도령은 신기해하며 손을 뻗어 귀령면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귀령면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겨져서 틈이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도화의 얼굴과 하나가 된 것처럼.
“대단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있지 않았다면 도화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기척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벌떡 일어난 그는 뒤를 돌더니 도화에게 뛰어 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화는 순순히 그의 명령대로 뛰었다. 강림 도령이 무얼 궁금해하는지 알기에 발로 바닥을 세게 구르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치기도 했다. 한 5분 정도 그러고 있자 강림 도령이 놀란 눈을 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도화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거, 한 일주일… 아니, 아니다. 한 달만 무구부가 연구하면 안 될까?”
“…무구부요?”
“아니야. 한 달은 너무 짧아. 두 달은 어때?”
“…….”
탐탁지 않아 하는 도화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강림 도령은 한 달에서 두 달로 기간을 늘렸다. 싫다고 거절하려던 도화는 이어진 강림 도령의 질문에 멈칫했다.
“자네 연봉이 4,800이었지?”
“그렇습니다만.”
갑작스러운 연봉 확인에 도화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 이거 출근 첫날부터 연봉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는 것을.
현천도 똑같이 느꼈는지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댔다.
[이봐. 도화. 너무 세게는 부르지 마.]
[나도 알아.]
5천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강림 도령의 입에서 의외의 숫자가 나왔다.
“1.5배 어때?”
“…1.5배요?”
잠깐만. 4,800의 1.5배면 얼마지? 암산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친 도화의 머릿속에 7,200이란 숫자가 커다랗게 떠올랐다.
[콜일세.]
[콜해야지.]
드물게 현천과 도화의 의견이 일치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높은 연봉이었다.
“딱 두 달만 빌려 줘. 흠집 하나 내지 않고 돌려준다고 약속하지.”
“알겠습니다.”
“좋아. 수정된 계약서는 내일 중으로 보내 줄게. 이건 내가 바로 가져간다?”
“그러세요.”
도화의 쿨한 허락에 강림 도령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좋다고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아, 내일부터 담마도 데리고 출근해.”
“담마는 학교에 가야 합니다.”
“인간 학교는 나중에 보내. 귀물로서 기초적인 교육이 먼저야.”
싱글벙글하던 강림 도령이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원래는 호골에서 배워야 하지만, 그 녀석이 질색을 해서 내가 대신 가르치기로 했어. 그렇게 알아 둬.”
“담마와 거래라도 한 겁니까?”
담마를 차사국으로 데려오라고 한 것으로도 모자라 1대1 면담을 하겠다고 했을 때, 강림 도령이 담마가 하계에서 지내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었다. 분명, 호골로 가라고 하겠구나. 그리고 담마는 싫다고 거절하겠지. 여기까지가 도화가 예상한 범위였다. 둘 중 어느 쪽의 의견이 이길지는 미지수였다.
그런데 아까 국장실에 들어왔을 때, 의외로 담담했던 담마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던 강림 도령을 본 도화는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눈치챘다.
“이상한 거래는 아니야. 그 녀석이 왜 네 곁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대신, 호골로 보내지 않기로 했지. 거기다 크게 인심 써서 호골에서 배워야 하는 귀물 교육도 내가 해 주기로 했고.”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담마가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