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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37화 (38/146)

37화

‘이제 뭘 해야 하지?’

도화는 텅 빈 추혼부에 홀로 멀뚱히 있었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나고 차사들은 모두 외근을 나갔다. 오늘치 일을 빨리 끝내고 산월관에 가야 한다며 얼마나 요란하게 외근 준비를 하던지. 도화는 앞으로 자신도 저래야 하나… 살짝 걱정이 들었다.

도화는 의자에 앉아 괜히 바닥을 발로 퉁퉁 찼다. 그가 앉은 자리는 추혼부에 마련된 그의 업무 자리였다. 차사국은 복지만 좋은 게 아니라 사내 환경도 끝내 줬다. 추혼부에 들어오자마자 느낀 것은 파티션이 엄청 넓게 나누어졌다는 점이었다. 책상이 넓어서 그런지 서류와 사무용품이 엉망으로 널려 있었지만, 심각하게 어수선하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다들 일을 열심히 하는구나, 싶었다.

도화는 컴퓨터와 키보드, 마우스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자신의 책상을 톡톡 두들기다 슬쩍 바로 옆 책상으로 관심을 돌렸다. 다른 차사들의 모니터처럼 옆자리 모니터도 화면 보호기가 띄워져 있었다. 파란 바탕에 흑립이 동동 떠 있는 게 흑립이 차사국 인장인 듯했다.

‘그런데 이건 누구 책상이지?’

아까 소개받았던 차사들의 책상은 모두 반대편에 있었다. 도화의 책상이 없었다면 옆 책상의 주인은 추혼부 차사들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그런 자리였…….

‘설마. 이 자리의 주인이… 그 변태 새끼는 아니겠지?’

불길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화는 옆자리의 모니터를 확인했다. 자신의 모니터에 ‘수습 차사 홍도화’라고 작은 이름표가 적혀 있으니 옆 모니터에도 자리의 주인 이름이 붙어 있을 터.

재빨리 이름을 확인한 도화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모니터에는 ‘수석 묵범’이라 적힌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반도깨비도 잡아 버렸다.

‘당장 자리를 옮겨야 해.’

그냥 가까운 것도 아니고 아예 찰싹 붙어 있다. 이대로는 절대 업무를 볼 수 없단 생각에 책상을 들어 옮기려던 도화는 옆자리 책상까지 드르륵 끌려오는 것을 보고 기함했다.

‘파티션이 왜 이래?’

다른 책상은 자리 이동이 용이하도록 개별 파티션으로 되어 있는데, 이건 두 자리가 아예 세트로 연결되어 있어서 따로 떼어 낼 수 없었다.

“자리가 마음에 안 듭니까?”

“!!!”

자리를 어찌 이동할지 고민하던 도화의 뒤에서 묵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도화가 뒤를 돌아보자 양손에 테이크아웃 컵을 든 묵범이 서 있었다.

“그거 제가 특별히 주문한 파티션인데.”

“왜 이딴 짓을 한 거지?”

“이딴 짓이라니요. 당신은 제가 스카웃 한 인재이니 제가 옆에 딱 붙어서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요 없어.”

“자, 받아요.”

묵범은 도화의 거절을 무시하고 들고 있던 컵 하나를 내밀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이는 얼음이 달각 소리를 냈다. 마침 목이 말랐던 도화는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하지만, 바로 입에 가져가진 않았다.

“시럽은 안 넣었습니다.”

그 말에 안심하고 한 모금 쭈욱 빨아들인 도화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묵범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묵범은 미안해하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밀었다.

“이런. 제 것과 바뀌었나 봅니다.”

“미친….”

이딴 걸 마시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단맛에 혀가 마비되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단맛을 좋아하진 않지만, 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이건 혀를 마비시키는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당신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으나, 단맛에 마비된 혀를 돌리기 위해서는 뭐라도 마셔야 했다. 묵범과 컵을 바꾼 도화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아주 살짝, 혀에 닿을 정도로만 빨았다. 혀끝에 닿은 커피는 다행히 쌉쌀했다. 사막에서 물 한 모금 못 마신 사람처럼 커피를 들이켠 도화는 흡족한 표정으로 빨대를 물고 있는 묵범을 발견했다.

‘뭐지? 왜 저렇게 웃어? 그것도 날 보고?’

묵범의 미소가 찝찝했으나 왜 웃냐고 시비 거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도화는 1/3 정도 남은 컵을 책상 위에 놓고 말했다.

“파티션 바꿔.”

“왜요?”

“불편해.”

“어차피 서류 작업도 외근도 다 저와 함께해야 할 텐데. 붙어 있는 게 편할 겁니다.”

“차라리 불편한 게 나아.”

“직접 자재부에 신청하든가요. 그래 봤자 남은 자리는 제 옆자리밖에 없습니다.”

묵범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사무실을 둘러보니 파티션을 새로 집어넣을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작은 사이즈의 파티션을 자재부에 신청해 볼까.

“아, 참고로 부장님은 오와 열이 맞지 않는 걸 싫어하십니다.”

“부장님?”

도화가 텅 빈 부장실을 쳐다봤다. 추혼부장은 차사국으로 출근하는 날이 1년 중 일주일도 채 안 된다고 들었다. 부장이 출근할 때만 파티션을 바꾸면 될 일 아닌가? 고작 일주일을 위해서 나머지 358일을 변태 놈과 붙어 있어야 할 고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

묵범은 도화가 억지로 옮기느라 흐트러진 책상을 정리하며 말했다.

“저도 눈치라는 게 있고 자제도 할 줄 압니다.”

“아는 놈이 그때 거기서 그랬냐?”

눈치와 자제. 묵범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도화는 잊고 있던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라 울컥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엉덩이와 허리를 확인하는 이유는 저 자식의 손아귀 힘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져서였다.

“그때는 보는 눈이 없었잖습니까. 제 이상형이라 눈이 좀 돌아간 것도 있고요.”

“이상형…?”

“아, 당신의 허리와 골반, 엉덩이 라인이 난생처음 보는 파격적인 예술 작품이라 그런 겁니다. 당신이 좋아서가 아니니까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묵범의 너무나도 당당한 변명에 도화는 어이가 상실되다 못해 저 자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한국어가 맞는 걸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아는 단어로 만든 문장인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화의 허리, 골반, 엉덩이는 당연히 도화의 것이건만. 묵범은 별개의 것을 대하는 것처럼 말했다. 도화는 미친놈한텐 매가 약이라며 주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이내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주먹을 내렸다.

‘어쨌든 날 좋아하는 건 아니라잖아. 그렇다면 더는 만지지 말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도화는 출근 첫날부터 묵범과 대판 하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좋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묵범은 이 이상 첫 만남을 상기시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외근은 내일부터 나갈 겁니다. 물론 저와 함께요.”

“알았어. 그런데 담마는?”

국장실로 가더니 함흥차사다. 술주정뱅이 국장이 애한테 억지로 술을 권하고 있는 거 아냐? 걱정이 된 도화는 담마를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같이 국장실로 가죠. 담마 다음은 당신 차례니까.”

“왜 나를…….”

“몇백 년 만의 신입 차사인데 면담은 당연한 겁니다.”

“파견직이라면서 정식 입사한 사람처럼 말한다?”

“파견직이라 해도 수석이 된 이상 깍두기처럼 지낼 순 없으니까요. 통장에 꽂히는 액수가 달라졌는데 그만큼 할 일은 해야죠.”

“하긴.”

굉장히 현실적인 대답에 도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 해도 저승차사는 질색이면서 엄청난 복지와 초봉에 넘어갔으니 말이다.

묵범이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슬슬 면담이 끝날 때가 되었군요. 갑시다.”

도화는 앞장서는 묵범을 따라 추혼부를 나섰다. 그의 옆구리에는 귀령면이 든 가방이 끼워져 있었다.

* * *

“그러면 내일부터 삼촌과 함께 차사국으로 오면 되죠?”

“그래. 안 그래도 추혼부장이 꽤 괜찮은 물건을 하나 보내왔는데 너랑 붙여 주면 되겠군.”

“?”

담마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강림 도령을 빤히 쳐다보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처음, 날 선 경계를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친해졌다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이제 네 삼촌과 면담할 시간이니 나가서 차사국 구경이나 해.”

강림 도령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밖에서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방문자는 묵범과 홍도화였다.

“끝나면 연락해요.”

묵범은 담마를 데리고 나가며 도화에게 작게 속삭였다. 도화는 간지럽게 무슨 짓이냐며 손으로 귀를 벅벅 문질렀다. 키가 작은 담마는 밑에서 그런 둘의 모습을 구경하다 국장실을 나갔다.

“…애 앞에서 술을 마신 겁니까?”

도화는 강림 도령의 책상 위에 있는 빈 술잔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보면 네 딸인 줄 알겠어.”

도화의 지적에 강림 도령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와. 애 앞에선 자제했는데 어른이 왔으니 그럴 필욘 없겠지.”

강림 도령은 빈 술잔을 들고 국장실과 연결된 술 창고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간 도화는 국장실보다 더 넓은 공간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인테리어며 들여놓은 집기가 하나같이 국장실보다 좋아 보였다.

“술 좋아해? 도깨비는 술과 메밀이라면 환장한다던데.”

“싫어합니다.”

“어? 왜? 너 반은 도깨비 아닌가?”

“도깨비라고 다 그렇다는 편견은 버리시죠.”

변태도 싫지만, 편견 덩어리도 싫다. 그런데 변태와 편견 덩어리가 있는 회사에 입사하고 말았다. 과연 잘 버텨 낼 수 있을까?

도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강림 도령은 어서 이리 와 앉으라고 손짓했다.

“메밀은 그렇다 치고. 좋아하는 술은 없어?”

강림 도령은 의자에 앉은 도화 앞에 다양한 술잔을 쫙 깔며 물었다. 맥주잔, 와인잔, 온더락잔에 소주잔까지. 병나발이 취향이라면 병째 줄 수 있다고 선심 쓰듯 말했다.

하지만, 도화는 무엇 하나 고르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술도 즐기지 않습니다.”

“아니, 즐기지 않더라도 꼭 마셔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래도 마실 만한 술이 있을 거 아니야. 독한 걸 싫어하면 막걸리는 어때? 아니면 맥주?”

“꼭 마셔야 합니까? 지금, 업무 중 아닌가요?”

“아, 그러네. 업무 중에는 마시면 안 되지. 나는 되지만.”

본인이 말해 놓고 웃겼는지 강림 도령은 낄낄 웃으며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술병이나 들고 테이블로 와 앉았다.

“도깨비가 술도 싫다, 메밀도 싫다. 그러면 뭘 줄까? 물? 커피?”

“물이요.”

커피는 아까 묵범이 줘서 마셨으니 충분했다. 그리고 강림 도령이 주는 음료가 불안했던 이유도 있었다. 묵범이 단맛에 미친 것처럼 강림 도령은 술에 미쳐 있으니 커피에도 술을 탈 확률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 마셔.”

도화는 투명한 잔에 가득 담긴 투명한 액체를 잠시 관찰하다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것을 보아 소주가 아닌 물이었다.

“참 도깨비답지 않단 말이야. 의심이 너무 많아.”

“국장님이야말로 편견으로 너무 똘똘 뭉친 것 아닙니까? 도깨비라고 입맛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닐 겁니다.”

“아닐 겁니다?”

강림 도령이 도화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애초에 교맥국(蕎麥國)에서 지낸 적도 없는데 도깨비에 대해 아는 게 있을 리가요.”

도화의 대답에 강림 도령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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