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수락한다. 거절한다.
수락한다. 거절한다.
수락한다. 거절한다.
쿵-!!
침대에 누워 데굴대던 도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쓰읍.”
얼얼한 어깨를 주무르며 일어섰다. 컴퓨터 책상에 올려 뒀던 현천이 껄껄 웃었다.
[거 돈도 많이 벌었는데 침대부터 바꾸지 그러나? 덩치에 비해 너무 좁지 않은가.]
[…나도 알아.]
도화의 침대 사이즈는 싱글이었다. 슈퍼 싱글도 아니고 그냥 싱글. 차라리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자는 게 나을 정도로 좁았다.
[집부터 구한다고 했던 것 같았는데. 자동차는? 여유가 있으니 나도 편히 누울 푹신한 방석 하나 장만해 주지 않겠는가?]
현천이 은근히 도화에게 제 쉴 곳도 마련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화는 현천의 부탁에 대답은 하지 않고 바닥에 누운 상태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집과 차. 그리고 식비까지 해결 가능.
연봉, 복지, 혜택. 무엇 하나 빠짐없이 좋기만 한 직장인데 자신의 원수가 있는 저승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다.
‘현천의 말대로 그 변태가 내 원수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어.’
바닥에 엎드려 고민하던 도화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스르륵 눈을 감았다. 요 며칠간, 묵범의 제안을 고민하느라 잠을 설쳐서 그런지 잠이 몰려왔다. 이대로 딱 한 시간만 푹 자고 일어나면 피로가 풀릴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원수 생각을 해서 그런가. 눈을 감아 펼쳐진 어둠을 배경으로 피투성이가 된 스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승님.’
도화는 아직도 왜 스승이 억울하게 죽어야 했는지 모른다. 알고 싶어도 알려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도화가 아는 것은 스승을 죽인 자가 도깨비라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저승차사는 명부에 스승의 이름이 없는데도 도깨비가 스승을 해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게 전부다.
그 도깨비와 저승차사는 무슨 관계인지, 둘은 스승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끔찍한 짓을 벌인 것인지 알아낼 방도가 없다. 심지어 도깨비와 저승차사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 내리던 한여름 밤은 도화의 눈과 귀를 가렸다.
‘스승은 어찌 그들이 올 줄 알고 날 돌무더기 속에 숨긴 걸까.’
그날은 스승이 별거 아닌 일로 도화에게 심한 벌을 내린 날이었다. 종종 인간 마을로 내려가 사고를 치던 도화에게 벌을 내리긴 했으나, 장작 패기라든가 산딸기 따오기 등의 소소한 잡일거리를 시키는 게 다였다.
하지만, 그날은 벌을 받는 도화가 스승을 걱정할 정도로 이상한 날이었다. 키우던 닭 중 한 마리가 닭장을 뚫고 도망쳤다. 당장 가서 잡아 오면 될 일이었으나 스승은 집 앞 서낭당 옆에 있는 당집에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나무로 만든 당집은 비좁았으나 어린 도화가 들어가 있기엔 충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라고 할 줄 알았건만. 해가 지고 달이 뜨는데도 스승은 도화를 부르지 않았다. 하늘이 우릉우릉 성을 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바늘 같은 장대비가 하늘에서 쏟아져도 서낭당 근처 바위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좁은 곳에 갇혀 좀이 쑤시던 도화였으나, 스승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르릉-.
저 멀리서 하늘이 성내는 소리가 들렸다. 장마 기간이라면 질리도록 듣는 천둥소리지만, 도화에게는 이 소리가 그날의 비극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래서 눈을 뜨고 싶었다.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기억이지만, 그렇다고 반복하여 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피곤이 누적되어서인지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이건 깨어 있는 정신으로 악몽을 꾸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가위에 눌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누가 옆에서 깨우지 않는 이상 이 악몽에서 깨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기 때문이었다.
“으…….”
[이보게. 도화.]
도화가 깨어나지 못하고 끙끙대자 현천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일어나게. 눈을 뜨게나.]
“…….”
[쯧쯧. 또 그 꿈을 꾸는 겐가.]
혀를 찬 현천은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뼘 길이 은장도가 가볍게 공중을 날아 누워 있는 도화 옆에 섰다.
[좀 따끔할 걸세.]
미리 경고한 그는 스스로 검집에서 나와 날카로운 검 끝으로 도화의 손가락을 찔렀다.
“윽….”
어찌나 날카로운지 살짝 찔렀는데도 작은 상처에서 피가 퐁퐁 솟아나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흘렀다. 그러자 도화의 귀에 우르릉- 하늘이 성난 소리가 사라졌다. 가위처럼 온몸을 누르던 잠도 수마도 저 멀리 도망갔다.
그리고 사라진 우릉우릉 소리 대신 현천이 부르르 몸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크으. 언제 먹어도 끝내 주는 피구먼.]
“아, 젠장.”
깨워 줘서 고맙긴 한데. 고작 피 몇 방울에 좋다고 몸을 부르르 떠는 꼴이 너무 보기 싫어서 고맙다는 인사 대신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도화의 거친 말에도 현천은 기분 나빠하긴커녕 신이 나서 바닥에 고인 피 위로 아예 누워 버렸다.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을 수도 없이 들어서 젠장이란 말은 애교로 들렸다. 현천이 몸을 떨 때마다 진동으로 해 둔 휴대폰에 전화가 온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몸을 일으켜 앉은 도화는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흡수한 현천을 집어 검집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침대 위로 던졌다. 싸구려 매트리스가 현천을 몇 번 퉁퉁 튕겨 냈다. 여전히 진동 소리는 났지만, 바닥에 있을 때보다는 소음이 훨씬 줄어들었다.
도화는 손끝에 매달린 핏방울을 입으로 쪽 빨고 컴퓨터로 향했다. 의자에 털썩 앉으니 낡은 의자가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 댔다.
컴퓨터 전원을 누르자 위이이잉-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늙은 몸으로 일한다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이걸 언제 샀더라.’
기억을 거슬러 보니 5년 전이다. 시위할 만했다.
어쨌든 컴퓨터는 무사히 켜졌다. 인터넷 창을 켜고 블로그로 들어갔다. 한동안 관상 의뢰는 받지 않는다는 공지 글에 열다섯 개의 리플이 달려 있었다. 특별히 확인해야 할 있나 훑어보니 언제 다시 의뢰를 받느냐, 내 것까지만 봐주면 안 되냐, 따블로 주겠다, 배때지가 불러서 장사 안 하냐? 같은 내용이 전부였다.
이번에는 메일함을 확인했다. 스무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제목부터 구구절절 자신의 의뢰를 받아 달라는 메일은 읽지도 않고 삭제했다. 제목부터 방금 본 리플과 다를 게 없었다.
도화가 삭제하지 않은 메일은 오늘 아침에 온 단 한 통의 메일이었다.
화린입니다.
단순하게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리는 제목이었지만, ‘날 읽어라.’라는 압박이 느껴졌다. 도화는 살짝 힘이 들어간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따각.
“……?”
따각. 따각.
“…음?”
메일함이 열리지 않는다. 방금까지 이것저것 잘만 누르고 다니던 마우스가 클릭이 먹히지 않았다. 슥슥 흔들어 보니 커서는 정상적으로 움직이는데 클릭만 되지 않았다.
“고장 났나?”
마우스가 맛이 가면 물리 치료가 정답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서 마우스 패드 위에 탕탕 소리 나게 쳤다. 그러자 마우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도방 선생. 화린입니다. 어제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달이 지고 해가 떠서야 이렇게 메일을 보내게 되어 죄송합니다.
늦게 연락을 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병원을 나오기 전, 묵범의 뜬금없는 그 말 때문일 터였다.
다온에게서 꼬리 3개를 회수하고 구미호가 되느냐, 꼬리를 회수하지 않고 구미호가 되는 시기를 기약 없이 뒤로 늦추느냐. 이건 고작 밤을 한 번 새우는 것 가지고는 결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쨌든 용건이 있어서 메일을 보낸 것일 테니 계속 읽어 내려갔다.
완수금은 확인하셨는지요. 죽을 수도 있었던 다온을 살려 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조금 더 넣었습니다. 다음에는 좋은 일로 의뢰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러면 이만 줄이겠습니다.
나머지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하지만, 도화는 홀린 듯이 어느 한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조금 더 넣었다고?’
세 번은 더 읽은 도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낡은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아까는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던 의자는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등판과 좌판이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평소라면 돈도 없는데 의자까지 말썽이라며 한탄했을 도화였지만, 지금은 명을 달리한 의자에게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자, 잔액 확인…!”
충전 중이던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도화도 화린과 마찬가지로 밤새 고민에 빠져 있느라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하필 진동으로 해 놓아서 문자가 온 줄도 몰랐다.
[Web 발신]
신화09/30 9:00
132—946-76582
입금 400,000,000
잔액 723,958,000
화린-불래
“일… 일억이나?”
입금 문자를 확인한 도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휴대폰을 든 손도 떨렸다. 잔액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끝자리 0부터 시작해서 일십백천만 십만백만천만… 중얼거리며 숫자를 셌다. 완수금 3억에 보너스로 1억이 더 들어온 걸 확인한 그는 서랍에서 통장을 꺼냈다.
[응? 통장은 왜 꺼내나?]
매트리스 위에 얌전히 누워 있던 현천이 물었다. 도화는 대답 대신 현천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ATM기였다. 문자로 확인하는 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아 통장에 직접 잔액을 찍어 보고 싶었다. 600년이 넘는 세월을 사는 동안 수중에 이런 큰돈이 들어온 적은 처음이라 심장이 떨렸다.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귀령면도 모자도 챙기지 못했다. ATM기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통장만 정리하고 집에 돌아갈 것이니 괜찮았다.
커다란 기계에서 지지고 볶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곧 기계가 뜨끈해진 통장을 뱉어 냈다. 마지막으로 정리된 잔액 밑으로 자잘한 출금 내역이 보이고, 끝에 7억이 넘는 잔액이 선명하게 찍힌 게 보였다. 멍하니 통장만 쳐다보던 도화의 정신을 깨운 것은 현천이었다.
[내 침대도 사 주게나. 방석도 괜찮고.]
[알았어.]
[오오. 드디어 나도 손수건 생활에서 벗어나는구나!]
현천이 주머니 속에서 침대, 침대~ 노래를 불렀다. 평범한 인간은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지만, 인간이 아닌 것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사양이다. 도화는 좀 닥치라고 주머니를 한 대 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현천을 때리는 손은 매서웠지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아직 묵범의 제안에 대한 답을 내지 못했으나 풍족해진 통장이 잠시나마 고민을 날렸다. 집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한 봉지 가득 샀다. 탄산음료와 과자. 달콤한 크림이 발린 빵. 그리고 다양한 맛의 우유까지.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편의점을 나오는 도화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보였다. 무척이나 보기 힘든 도화의 미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