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하계의 인간들에게 백화대 병원은 본관과 별관, 암 센터, 어린이 병원, 그리고 의학연구센터까지 총 다섯 건물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본관이 제일 크지만, 다른 네 채의 건물들도 최소 15층이고 면적 또한 넓었다.
하지만, 백화대 병원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
“주차장이 빼곡하군요.”
묵범이 지하 주차장 코너를 돌며 말했다.
“인간은 항상 아프니까.”
도화는 대수롭지 않은 눈으로 빈자리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차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주차 공간이 없는데도 묵범은 주차장 구석에 있는 관리실이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은 주차를 할 수 없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묵범의 차는 그대로 관리실을 향해 달렸다.
묵범의 바로 뒤를 따라오던 차는 앞의 차가 주차 공간이 아닌 관리실로 들어가는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앞에 차가 있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허상을 뚫고 들어가듯 관리실을 통과한 묵범의 차가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주차장이었다. 방금 전의 주차장과 달리 매우 한산한 것만 빼고는 똑같은 구조였다.
이곳은 인간은 볼 수 없는 백화대 병원의 여섯 번째 건물. 귀물 전문 치료 병동 지하 주차장이었다. 아까 묵범의 뒤를 따라오던 차가 관리실로 들어가는 묵범의 차를 인지하지 못한 것도 모두 여기 병원장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다.
묵범은 대충 아무 곳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다. 도화도 내리려고 안전 벨트를 푸는데, 먼저 내린 묵범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
미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친절하게 배려하는 행동이긴 한데. 내가 왜 저 자식한테 친절과 배려를 받아야 하지?
도화는 기분 나쁘단 표정을 숨기지 않고 조수석에 앉아 묵범을 올려다봤다. 사실 그를 올려다보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 왠지 자신이 변태 새끼보다 낮은 것 같아서였다.
“내리시죠.”
“다음부터는 알아서 내릴 테니 이런 건 하지 마.”
“오… 다음부터라. 제 제안을 수락한 겁니까?”
“아직이야.”
젠장.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도화는 웃는 낯의 묵범에게 웃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죽은 듯 미동도 없는 다온을 품에 안고 성큼성큼 주차장과 이어진 병원 입구로 들어갔다.
* * *
“기운은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하혈이 너무 심했고 제때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해서, 앞으로 아이를 갖진 못할 겁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한껏 인상을 쓰고 도화에게 다온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렇군요.”
다온의 상태는 생각보다는 나았으나 앞으로 남은 인생을 생각하면 그다지 좋진 않았다. 죽진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앞으로 평생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골골대다 생을 마감할 것이다. 어쩌면 명부에 적힌 대로 죽어 저승에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지금 남편 입에서 태평하게 그런 말이 나옵니까?”
“……네?”
의사의 지적에 도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이선후가 병원에 온 건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렇군요.’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자신이란 것을 깨달은 도화는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는 저 여자의 남편이 아닙니다.”
“그래요? 그러면 남편은 어디 있습니까? 아, 저기 저 남자가 남편인가요?”
의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람은 묵범이었다. 저승에 보고할 것이 있다며 좀 떨어진 곳에서 전화를 하고 있던 묵범은 도화가 자신을 쳐다보자 금방 가겠다며 손짓했다.
“저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환자의 개인 사정을 의사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곧 보호자가 올 테니 그때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휴대폰 시계를 보니 슬슬 화린이 도착할 시간이다. 도화는 병원에 도착하기 직전에 화린에게 연락을 넣어 둔 상태였다. 그녀는 아직 호골로 돌아가기 전이라며 당장 오겠다고 답했다.
“뭐라 합니까?”
“뻔하지. 살아서 다행이지만, 예후는 좋지 않을 거라고.”
“그것참 안됐군요. 젊은 나이에.”
안타깝다는 듯이 쯧, 혀를 찼지만, 묵범의 얼굴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이다. 도화는 자신과 묵범의 눈높이가 묘하게 차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덩치만 저보다 큰 줄 알았는데 키도 묵범이 더 컸다. 도화는 저보다 큰 사람을 보니 스승이 생각났다. 스승은 날렵한 육식동물 느낌의 묵범과 달리 산적처럼 우락부락하게 컸다.
“도방 선생!”
스승을 떠올리던 도화의 귀에 화린의 부름이 들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복도를 걸어 도화 앞에 섰다. 정말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이 가빠 보였다.
“다온은요? 다온이 왜 병원에 있는 건가요?”
“그것이… 말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우선 의사에게 현 상태를 설명 들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리된 연유에 대해서는 그다음에 이야기하지요.”
도화의 말에 화린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린에게 다온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사와 화린이 대화를 하는 사이 도화는 묵범이 서 있는 반대쪽 복도로 이동했다. 벽에 쭉 나열된 의자에 앉아 어서 화린과 의사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빨리 완수금을 받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제 제안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잠시 한숨 돌리려고 했는데 기척도 없이 다가와 옆에 앉는 묵범 때문에 한숨이 났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지 아직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보통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지 않나?
도화는 묵범의 재촉에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보았다. 보통 도화의 이런 시선을 받으면 잡귀는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 원귀는 눈치를 보았고, 악귀는 움찔댔다. 하지만, 묵범은 아무렇지 않았다.
“시선이 뜨거운 것을 보니 제 제안이 무척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추혼부의 정식 차사가 되면 혜택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거기서 더 늘어난다고?”
재촉 좀 하지 말라고 화를 내려던 도화는 혜택이 더 늘어난다는 말에 화가 스르륵 사라졌다. 거기서 뭘 더 준다는 건지 궁금했다.
“업무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취미 생활비도 한도 없이 지원합니다. 중참비 또한 한도가 없더군요.”
“한도가 없다고?”
“써 보진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합니다.”
“…….”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이보게. 자네의 원수는 저승차사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저승차사 전체가 내 원수는 아니니까.]
[저자가 자네 원수면 어쩌려고?]
[저자가 내 원수라는 증거도 없잖아?]
도화의 반박에 현천이 허허, 웃었다.
[돈에 넘어가다니. 이런, 쯧쯧.]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사람답게 좀 살고 싶으니까. 그리고 차사를 돕다 보면 원하는 정보도 얻을 수 있겠지. 어쨌든 저승을 오갈 테니까.]
현천에게 하는 말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이 선택의 타당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당장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하는 것은 좀 없어 보이겠지?
도화는 대답을 요구하는 묵범의 눈빛을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화린이 의사와의 상담을 마치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화린의 얼굴과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을 감싼 기운은 그렇지 못했다. 겉보기에 표정 변화 없이 냉랭하기만 했으나,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날카로운 기운이 일렁였다.
“손각시가 적당히 손을 봐 둔 상태입니다.”
“손각시가?”
“이선후가 숨어 있던 곳 근처에 손각시가 있더군요. 단번에 씹어 삼키려는 것을 적당히 하라고 일러두고 왔습니다.”
“이선후…. 손각시가 좋아할 만한 업보를 가졌으니, 지금 가도 당장 손을 쓸 순 없겠군요.”
화린은 병원 벽에 설치된 핸드레일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적당히 길고 매끈하게 정돈되었던 그녀의 손톱이 점점 길고 날카로워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녀의 머릿속은 이선후에게 가장 끔찍한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녀의 손톱이 닿을 때마다 핸드레일이 설탕 과자 부서지듯 힘없이 부서져 떨어졌다.
도화는 바닥에 투두둑 떨어지는 플라스틱 조각을 보며 가만히 있었다. 이선후는 지금쯤 반죽음 상태로 백운산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을 게 뻔했다. 손각시는 제게 진 빚이 있어 적당히 하고 물러났겠지만, 그 적당히라는 게 손각시 기준이지 이선후 기준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죽진 않았겠지.
“머리 좋은 손각시이니 인간 틈에서 일을 벌이진 않았을 겁니다. 백운산에 있을 테니, 해가 지기 전에 찾아보세요.”
도화의 제안에 화린은 위협적으로 길어진 손톱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만 않으면 된다. 여우족의 귀하디귀한 아이를 저리 망가트려 놓고 감히 세상 편안하게 죽는단 말인가. 저승에 가면 팔열지옥을 돌며 숨 쉴 틈도 없이 불타는 고통을 받을 테지만, 그것은 저승에 간 다음의 일이고.
아직 이승에 숨을 붙이고 있을 땐 이승의 벌을 받게 할 것이다.
“고마워요. 도방 선생. 완수금은 오늘 내로 입금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도화 옆으로 묵범이 다가왔다. 또 제안 승낙을 재촉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도화가 아닌 화린에게 말을 걸었다.
“새끼 여우가 훔쳐 간 꼬리 세 개를 다시 회수할 겁니까?”
“그것은 왜 물어보는 거죠?”
묵범의 질문에 화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우족의 가장 어린 여우가 제 후견인의 꼬리를 훔쳐 달아났다는 이야기는 알음알음 퍼진 상태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자랑거리는 아니니 말이다.
당연히 화린의 심기가 구겨질 만했다. 엉망이 된 다온이 저리된 것은 안타깝지만, 여우족의 명예를 실추한 것도 사실이긴 했으니까.
“곧 꼬리 하나가 더 날 듯하여 물어보는 겁니다. 도둑 당한 꼬리를 회수하면 구미호가 되겠군요.”
“…….”
구미호란 말에 더 크게 화를 내려던 화린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둘이 싸우든지 말든지 먼저 자리를 뜨려던 도화도 멈칫했다.
‘구미호?’
[구미호라니. 오오. 800년 만에 새로운 구미호가 탄생하는 겐가!]
현천이 주머니 속에서 부르르 떨었다. 여우족도 아닌데도 저리 신기해할 정도면 여우족은 얼마나 더 경사일지 보지 않아도 훤했다. 하지만, 지금 다온에게서 꼬리를 회수한다면 다온은 식물인간으로 지내다 죽을 것이다. 그나마 묵범이 명부를 수정했기에 목숨만 부지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과연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제가 알려드릴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니 알아서 하시길.”
묵범은 손을 살짝 들어 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몸을 돌렸다. 오히려 도화가 자리를 뜨지 못하고 화린을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엔 걱정과 함께 갈피를 잡지 못한 고민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