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달이 밝다.
아침보다는 밤에 가까운 새벽, 야윈 초승달이 그의 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었을까, 굳게 닫힌 눈꺼풀이 마법처럼 뜨였다. 몸을 일으킨 그는 베개 밑에 둔 휴대폰을 살폈다. 알람이 울릴 시각까지는 아직 3시간이 더 남아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은 이미 아침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의문은 쉽게 풀렸다. 내다본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의 끝을 알리는 봄눈이었다.
홀린 듯 그는 자연스레 창문을 열었다. 바깥에서 옹송그리며 떨던 달빛이 조심스레 그의 손가락 끝에 스며들었다. 그 뒤를 따라 매달린 눈송이들은 자취도 없이 사르르 녹았다.
빛이라고는 흑과 백뿐인 아름다운 세상. 높은 건물 하나 없는 시골 마을. 그 알록달록한 지붕들은 흰빛에 가려 제 색을 잃었다. 검푸른 하늘에 뜬 달은 넘실대는 겨울 바다를 떠도는 조각배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가냘픈 달빛에도 세상은 온통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귀가 자유를 되찾은 날에도, 이토록 눈이 내렸었다.
겨울의 초입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눈을 뜬 순간, 적막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다른 데 홀려 있었다. 온 세상을 뒤덮은 하얀 눈은 세상을 새하얀 도화지로 만들었다. 그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한참이나 뒤늦게 깨달았다, 이 오롯한 자유를.
이 섬뜩한 고요가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해 주었음을.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삶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한정된 환경과 친절한 사람들. 그들은 대답 없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바닥을 크게 두 번 구르거나, 전등을 껐다 켜는 데 능숙했다. 하나하나 감동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이곳은 이러한 배려가 당연한 세계였다.
덕분에 삶의 질도 나아졌다. 머리를 뒤흔드는 이명도 어지러움도 한결 나아졌다.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귀에 초조해하거나 덜컥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
달빛을 등진 채 그는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바탕화면의 영상 하나를 재생시키자 연결해둔 2채널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면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는 그가 스피커를 소지하다 못해, 또 사용한다는 사실에.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거친 손끝이 전원이 켜진 스피커의 입구에 닿았다. 천으로 감싸진 무언가 툭툭, 찌르르. 전해져 온다.
오른손보다는 굳은살이 덜 박였다고는 하나, 둔탁하기 짝이 없는 손끝으로도 미세하게 전달되는 진동. 화면 속 자막이 친절하게도 진동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 그중에서도 로맨틱한 선율로 유명한 18변주 부분이었다. 20세기 최고의 피아노곡이자, 혹자로부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선율을, 누구보다 가장 아름다운 이가 선보이고 있었다.
종전까지의 비통했던 선율은 관현악이 잠듦과 동시에 감미로운 꽃으로 피어난다. 지휘자마저 숨죽인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피아노의 독무. 고결한 손가락은 창밖에 흩날리는 눈처럼 유유히 건반 위를 물들인다.
하나하나는 작지만, 지나치고 보면 창틀 위 소복이 쌓이는 눈처럼 손가락이 빠짐없이 어루만지고 간 선율은 이윽고 저마다 메아리를 안고 돌아온다.
손끝을 간질이는 작은 진동들이 모이고 모인 끝에 관현악과 다시 어우러지는 순간. 소리는 귀를 넘어서 가슴을 뒤흔드는 눈보라가 된다.
허나 피아니스트만은 지극히 고요하다. 바삐 건반을 오가는 손가락은 마치 제 것이 아니라는 듯 보인다. 속내를 숨긴 시선, 길게 내리깐 속눈썹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눈동자에 그는 문득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는 충동적으로 다음 영상을 틀었다. 이번엔 연주가 아닌 인터뷰 영상이었다.
종전까지 피아노를 연주하던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상대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친절하게도 자막이 대화의 맥락을 알려 주었지만 그의 시선은 딴 곳에 가 있었다.
오로지, 남자의 입술에 꽂혀 있었다. 닳도록 보다 못해 외워버린 모든 답변을 떠올리며, 그는 입 모양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크지 않은 입술은 웃을 때 가로로 시원스레 열린다. ‘아’ 발음은 유독 웃을 때의 얼굴과 비슷해, 예쁘게 연구개가 열린다.
턱은 아래로는 잘 내려가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원순 모음을 발음할 때는 삐쭉 튀어나오는 입술이 귀엽다. 특히 우, 발음에서.
턱이 작고 얄쌍한 탓일까, 그 두 모음 외에는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말하는 템포가 빠르지 않아 읽기 어렵지는 않다.
비음을 낼 때는 묘하게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의문문을 말할 땐 어깨 한쪽을 으쓱하는 버릇이 있다. 내키지 않는 질문이나 불쾌한 언사가 오갈 땐 입술을 일자로 앙다물고는 한다….
난처할 땐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기도 한다, 지금처럼.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영상이 멈췄다. 자막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연주 중 무엇을 떠올렸는지.’ 까다로울 것 없이 흔한 질문이지만 살짝이 나온 혀가 그의 심리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스피커를 떠나 화면 위에 닿았다. 그리고 액정 넘어 야윈 뺨에 머무르다, 이내 그 붉은 입술 주변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괜찮으니, 부디 나를 난처하게 여겼기를.
지금보다 아침이 더욱 일렀던 그 어느 겨울의 한가운데, 영인의 두 팔 아래에서 연신 난처해하던 그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귀까지 새빨개진 채로도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피하던 그 남자를. 그 깨물린 아랫입술 위를 제 입술로 감싸면, 커다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선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 예뻤다.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
사랑하다 못해 분에 겨워서, 작은 얼굴 한가득 입맞춤을 퍼부어 대곤 했다. 곧게 뻗은 콧등과 코가 짓눌리고, 뺨과 귓불을 물어대는 턱을 쥐곤 제 앞으로 끌어대던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전해지던 고동 소리가, 맞닿은 가슴과 가슴이 절로 전달해주던 그 사랑 고백이 온전한 화음이었고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진동이란 어느 하나 느껴지지 않는 액정의 촉감에 그는 쓰게 웃었다. 다시 시작된 영상 속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를 언급하고 있었다.
단어와 단어 사이, 자음과 모음 사이. 활자로는 드러나지 않을 작은 숨소리와 떨림들.
그는 이 모두를 충분히, 그리고 넉넉하게 익혀야만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마치 엊그제 헤어졌다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당신’을 읽어 내야 했기에.
…하지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
속이 빈 행복은 아주 작은 가정에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그는 책상의 가장 아래 서랍을 열고 소포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조심스레 꺼낸 얇은 책자에는 정갈한 한글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문규화 리사이틀>, 그리고 그 아래의 서명, 그리고… ‘장영인 님’까지.
이제는 어떻게 불리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해진 그 이름이 분명히 적혀져 있다.
이 이름을 쓸 때의 너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싸인을 받는 지훈 씨의 얼굴을 보며 실망하지는 않았을까. 난처한 듯 또 입술을 핥았을까.
액정 속 큰 얼굴을 두고서도 그는 생각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내 눈으로 보고 싶다고.
그는 다급히 책상을 뒤졌다. 고장 나서 켜지지 않는 스마트 폰과 빛이 바랜 계약서를 헤치고 맨 아래 깔려있던 봉투를 꺼냈다. 르 아브르로 보냈다가 모조리 반송당한 편지들을 그는 버리지 못하고 보관해 두고 있었다.
처음엔 잘못 적었나 싶었고, 두 번째엔 오기가 생겼다. 세 번째는 쓸쓸했고 네 번째엔 서러웠다. 그 이후론 관성이 되었다. 봉투는 점점 커졌고 무게는 늘어났다. 반송된 우편을 배달해 오는 한스의 힐난은 점점 매서워졌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그에겐 다른 이의 항변 따윈 두렵지 않았다.
다만 이 모두가 거절의 의미일까 생각한다면 그것만은 두렵다. 귀머거리를 기꺼워할 피아니스트란 없을 테니까. 당연하다. 제가 가장 빛나는 순간을 공감해 줄 수 없는 사람을 어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니 더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듣지 못해도 그를 도울 수 있도록.
그는 수첩을 꺼내고 펜을 쥔다. 그리고 수신인을 적은 게 전부였던, 쓰다만 편지의 뒷부분을 이내 적어 내린다.
내일 이 편지를 부치자. 이 편지가 돌아올 즈음, 한스는 또 한껏 열변을 토할 것이다. 재화의 낭비이자 인력의 소모, 나아가 자연 보호에 어긋난 일이라 힐난할 그를 알지만 이미 상관없었다.
이것은 하나의 변명이었다. 듣지 못하더라도 늘 그와 그의 소리를 그리워했음을 증명할 악보였다.
언젠가 모든 꿈이 완성되어 그의 앞에 선보일 순간, 부치지 못한 이 모든 글귀가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리라. 활자가 아닌 멜로디로, 소리로.
그리고 그 소리는 분명, 자취가 남을 것이다.
***
다 쓴 편지를 밀봉하던 그는 책상 위를 잘게 흔드는 진동에 고개를 들었다.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곧 해가 뜰 시각이었지만 사위는 어두웠다.
눈발은 더욱 거세어졌다. 짙게 낀 구름에 달은 결국 자취를 감추어 버렸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믿었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는 분명 겨울의 끝을 알리고 있었기에.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
달도, 달빛도. 다가올 봄도.
늘 그렇듯 소리도 없이, 그렇게 찾아올 것이라고.
***
그로부터 보름이 걸렸다. 어느덧 봄의 한가운데.
오직 단 하나의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그의 품에 안길 때까지.
늘 그렇게, 소리도 없이 여리게 찾아오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