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ke Schön(고맙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자 소금기 어린 바람이 그를 반겼다. 주위를 둘러본 뒤 규화는 트렌치코트의 깃을 올렸다. 바닷가 도시는 날씨 변화가 잦다. 퍼부을 듯 잔뜩 찌푸렸던 하늘은 다행히 비 몇 방울을 뿌리는 데 만족했는지 다시금 해를 드러냈다.
함부르크 공항에서도 세 시간은 더 차를 끌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 마을. 근처에는 대학교가 몰려 있는 대도시도 있지만, 그 경계에 있어 이곳은 ‘도시’라기보다 ‘마을’에 가깝게 느껴졌다. 머리로 느끼기 전에 사람들이 시선부터 그러했다. 외부인 출입이 잦지 않은지 낯선 동양인이 등장하자 마켓 안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규화로서는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또 익숙해질 수는 없는 시선들이었다. 그는 차분히 생수와 담배 한 갑을 샀다. 계산하는 동안 규화는 연신 메모를 보여 주었다. 신 씨에게 ‘빚’ 대신 받은 주소지였다.
마침 그 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한 남자가 규화의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혹시 쟝의 친구인가?]
그의 목소리에 계산원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석하게도 규화의 독일어 실력은 프랑스어와 달리 그리 능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분부분 단어를 알아듣는 정도는 가능했다. 규화는 서둘러 휴대폰으로 독일어 문장을 만들어 내 서툴게 그것을 읊었다.
[혹시 그 쟝이 한국인인가요?]
[맞아.]
[만약에 그가 피아노를 다룬다면, 그는 제가 찾는 사람이에요.]
두 사람을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논의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흔쾌히 그를 ‘쟝’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나섰다. 그는 마트 앞에 놓인 노란색 자전거로 그를 이끌었다.
남자는 자신을 소개한 뒤, 이모저모 이야기를 전하며 운전을 시작했다. 아무튼 과묵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자네는 운이 좋아. 내가 마트에 오는 날은 한 달에 딱 하루로 정해져 있거든. 사실은 그게 오늘도 아니야. 원래는 어제였는데 불가피하게 오늘 장을 보러 나온 거지. 우리 안나가 어제 급히 병원에 가서. …안나는 우리 집 강아지일세. 올해로 여덟 살이지.]
한스의 말은 속도가 빠른 데다가 사투리 억양까지 섞여 있었다. 때문에 규화는 그의 말을 절반 이상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낡은 자전거 뒤에 탄 채로 성심성의껏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서! 또 동양인이야.]
그리고 구부러진 길의 끝, 주변과 마찬가지로 지붕이 삼각형인 집 앞에 섰다. 때마침 공방 주인 아서가 정원에 물을 주던 중이었다. 한스의 외침을 듣고 다가온 그는 낯선 동양인의 방문에 눈을 찌푸렸다.
[오!]
하지만 별다른 사정을 토로하기도 전에 아서는 규화를 알아보고 악수를 청했다. 한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마찬가지로 얼뜬 표정을 지은 규화를 마주한 장신의 북유럽인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당신을 알아. 우리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지.]
분명 처음 만난 이이거늘, 마치 막역지우처럼 반겨 주는 인사에 규화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자연스레 떨리는 입술을 다시 한 번 굳게 악물었다.
겉보기엔 가정집과 다름이 없어 보였지만, 사과나무로 가득한 정원 한구석에 컨테이너가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킨 그는 규화의 뒤를 따르기보다 손짓만 했다. 아무래도 둘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서툰 영어로 나직이 경고했다.
[조용히 다가가는 게 좋아. …그는 섬세하니까.]
규화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확히 아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듣지 못했다. 이미 그의 영혼은 실내로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육신이 이해와는 괴리된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윽고, 철문은 무겁게 진동하며 세계와의 길을 텄다.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짙은 쇠 냄새였다.
순간 든 거부감에 그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 밑에 자욱이 깔린 나무 진액 냄새가 규화를 어르고 달랬다. 높은 천장에서 수직으로 새어 드는 볕에 실내의 먼지 입자가 올올이 빛을 반사해 내고 있었다.
흡사 자연의 카메라 세례였다. 그 빛에 흠뻑 젖은 손을 쥐며, 규화는 누군가를 찾아내 섰다.
뒷모습과 피아노가 보였다. 남자는 납작이 피아노에 귀를 댄 채로, 몇 번이고 소리를 듣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너른 어깨는 분명 낯이 익었다. 강건한 목도, 약간 곱슬기가 있는 갈색 머리칼도. 희미한 먼지 너머로 건반을 두들기는 낯익은 손가락에, 순간 규화의 전신이 전율했다.
규화는 숨을 죽이고 문을 두 번, 정중히 두드렸다. 하지만 텅 빈 곳에서의 공명은 생각보다 컸다. 마치 철을 주먹으로 두들긴 것처럼 딱딱한 울림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눈앞의 환경은 놀랍게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건반만을 매만질 뿐, 그저 태연자약했다.
규화는 문에서 몸을 떼곤 비척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좀 더 자세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역시, 그의 귀에는 어떠한 선도, 보조 장치도 없었다. 보청기라고는 없었다.
그래…. 그는, 듣지 못한다.
규화는 제가 직감한 사실에 눈을 부릅떴다. 햇빛으로 흠뻑 젖은 속눈썹이 물을 먹은 듯 무거워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하지만 꿈이 아니길 바라는 현실에 그는 터무니없이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의 두 귀가 멀쩡하더라도 듣지 못할 만큼. 아주 작게. 가능한 한 가장 작은 목소리로.
“…영인아.”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적이라 하기엔 너무나 사소한 일이었기에.
하지만 다른 말로는 근거를 댈 수 없는 현실이 규화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노크 소리에도, 어느 마찰 소리에도 무감했던 그림자가 자신을 부른 아주 작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서서히 몸을 튼 남자는, 자신을 부른 쪽을 향해 흔들림 없이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빛줄기와 그 역광에 상대가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가늘게 뜬 남자의 입술이 망설이며 열렸다.
“…Wer ist das?”
느릿하고 단단한 저음이 낯선 독일어로 그더러 누구냐 물었다. 규화는 울컥 밀려든 설움에 쓰러질 뻔했다. 그의 두 다리가 휘청거리며 속도를 가했다. 느리게, 아니. 점점 빠르게.
안개가 걷힌 숲속을 거침없이 헤쳐 나가듯, 이윽고 규화는 그 강건한 턱에 무작정 제 젖은 뺨을 비볐다. 그 품에서는 누긋한 땀 냄새가 났다. 서울 어느 한복판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그 훈기가, 땀 냄새가 낯선 이 독일 땅을 안식처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Jean이라 불리던 영인은,
쏟아지는 빛과 함께 품에 안겨든 체온을 엉거주춤 안았다. 제 품에 안긴 것이 실체인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어 안지 못하는 그 손아귀 안에, 규화는 제 몸을 스스로 안고 부대꼈다.
트렌치코트를 그러쥔 손끝은, 이제는 상처도 파고들지 못할 만큼 단단히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손끝에 휘감긴 옷자락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하지만 규화는 더욱 자신을 강하게 쥐라는 듯, 그의 열 손가락을 힐난하듯 그의 귓가에 연신 같은 말들을 속삭여 댔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주 작고 여렸다. 아주 가까이에 가지 않고선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영인은 제 귓가에 불어닥친 바람을 느꼈다. 그것은 피아노의 진동보다 더욱 섬세했으며, 문득 숲에서 나부끼는 바람에 밀려드는 새의 지저귐보다 더욱 드높았다.
어설프게 감싸 안은 손바닥 너머로 전해지는 가슴 고동과 맞부딪힌 온몸 가득한 열기. 그 열기가 두 사람을 문득 봄의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영인은 짙게 신음했다. 확인하듯 규화의 입술을 매만지다 미처 다 보지도 못하고 그를 그러안았다. 목덜미에 숨을 쏟았다.
처음 어미 품에 안긴 아이처럼 잔뜩 어리광을 부리던 그는, 제 거친 손끝으로 아름다운 남자의 눈 밑을 쓸었다. 뜨거운 눈물이 굳은 손가락 끝을 적셨다. 마른 대지를 적시는 봄비처럼, 물기는 그의 굳은살을 쉽게도 말랑하게 만들었다.
담이 무너져 내렸다. 부르튼 입술이 열렸다. 그는 오랜 시간, 열한 살부터 서른이 되도록 품고 왔던 말을 기어이 그 앞에 내려두었다.
미처 몇 글자 되지 못하는 단어들을.
아주 여리게.
<끝, 외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