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Op. 6 Tempo Giusto (上) (8/12)

하지만 봄은 그리 쉬이 오지 않는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여전히 시렸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영인은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늘 같은 하늘이다.

하지만 다르다. 하루하루가 다를 바 없어 보여도 분명 계절은 흐르고 있다. 시곗바늘이 움직이듯 서서히, 아주 천천히. 초침을 따라 분침이, 이어 시침이 서서히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이내 시각을 바꾼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봄이 올 테고, 또 언젠가는 다시 겨울이겠지.

눈이 녹고 봄이 내리듯, 마음이 변하는 것도 순리다. 들끓던 감정도 언젠가는 식고 기억이 풍화되어 자취조차 없어질지 모른다. 영인은 딱히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그 대상이 문규화라면 새삼스럽지 않다.

모든 것이 변하는 와중에도 분명 무언가는 변치 않을 테고, 또 변하여 더 좋을 것도 있다. 사위어가는 것은 꽃잎이 더 좋아 볕에 말리듯, 낡은 것은 그 나름대로 유구한 의미를 머금는다.

문규화가 그랬다. 여덟 살의 문규화, 그리고 스물셋이 되어 만난 문규화. 지금은 한 해가 지나 스물넷인 문규화. …영인과 입을 맞추며, 몸을 내주었던 문규화까지. 예전 그대로라면 제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 규화는, 십여 년을 건너와 분에 넘치는 행복을 안겨 주었다.

피아노 덕분이었다.

영인은 한평생 피아노 곁을 맴도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 모든 것을 앗아 갔음에도 어째서 놓지 못할까. 남들이 묻는 말에는 선선히 웃었지만 그 자신도 의문이었다. 끝이 보이는 길을, 그 낭떠러지를 보고서도 걸어가는 이유를.

후회가 두렵지 않은 이유는 후회할 치기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어리석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의 원천은 모두 문규화가 갖고 있었다.

유일한 접점이었다. 규화에게 피아노는 인생이었다. 어떤 순간의 규화이든지 피아노 앞에서만은 늘 같았다. 그건 그의 오랜 버릇이었고, 생활이었다. 문규화는 피아노를 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영인으로선 헤맬 이유가 더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수 있다면, 쥐는 게 당연했다. 낭떠러지를 만나도 뛰어내리면 그만이다.

그 단 하나의 해답을 위해, 영인은 단단한 각오를 머금고 공방의 문을 두드렸다.

“포기해라.”

하나뿐인 제자를 반기는 신 씨의 말은 냉정하기만 했다. 하지만 영인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이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진작 예상했다는 눈치였다.

“우리 기술로는 그 애의 연주를 뒷받침할 수 없어.”

“해 봐야 아는 거죠. 아직….”

“이미 봤지 않니.”

영인의 말을 도중에 끊는 신 씨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고작해야 한 곡 버텼어. 그것도 짤막한 에튀드다. 고작해야 한 곡 버티는 현으로 프로 피아니스트의 부속을 담당할 순 없다. 그건 내 기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신주호는 장인에 가까운 기술자였고 동시에 장사꾼이기도 했다. 훌륭한 기술을 지닌 만큼, 그 값어치를 정확히 매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장사치라 할지라도, 질 낮은 물건을 내다 팔지는 않았다. 그것은 장사가 아닌 사기였다.

영인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두 사람은 저음부 현을 제작했다. 스타인웨이의 부속과 수제 현의 정보를 총동원해 실제로 구현해 봤지만, 그저 감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예상했던 대로 어려웠고, 또 그 이상으로 난항을 겪었다. 아무튼, 수지맞지 않는 장사였다. 그래서 신 씨는 영인에게 포기를 권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더 해 봐야 알죠.”

“이제까지도 최선이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겁니다.”

“그래, 네 귀가 먹을 때까지 해 볼 생각이냐?”

갑작스러운 신 씨의 말에 영인은 입을 다물었다. 여태껏 영인은 신 씨에게 제 귀 상태를 이른 적이 없었다. 경로야 뻔했다.

“…규화가 그러던가요?”

“그래. 네가 이렇게 생떼를 부린다면 돌려보내 달라 하더구나.”

빠른 귀가를 보채다 못한 영인이 택시를 부르러 나가 버린 사이, 그는 굳은 얼굴로 신 씨에게 그간의 정황을 말했다. 덧붙여 절대 영인이 이곳에서 작업하지 않게 도와 달라고, 제자를 내쳐 달라며 신 씨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신 씨는 놀라기보다 괘씸했다. 아무리 영인이 영특하고 귀한 제자라 한들, 그가 귀를 먹게 도울 순 없었다. 그러나 단호히 내치는 말에도 영인은 고집스러웠다. 스승이나 제자나 다를 바 없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현을 감는다면 딱히 필요 없으니까요.”

“나더러 널 방관하라는 소리구나. 나는 뭐 양심도 없는 줄 알고?”

“제대로 들어 줄 사람만 있다면, 굳이 제가 들을 필요는 없죠.”

“…이 녀석이.”

“쓸 만한 저음 현, 얻고 싶으시잖아요.”

호통치려던 핵심을 먼저 찌른 영인의 말에 신 씨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인하는 말 대신 그는 혀를 찼다. 담배를 찾으려 안주머니를 몇 번 뒤지던 그가, 이내 부질없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얻고야 싶지. 하지만 현실과 타협하는 것도 일이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알지…. 너도 단념해라. 난 너에게 그걸 가르칠 능력이 없다.”

“굳이 가르쳐 주지 않으셔도 돼요.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어떤 걸 어떻게 도와 달라는 말이냐.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

신 씨의 다그치는 말에도 영인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평소에도 감정의 진폭이 적은 성격이긴 했지만, 오늘의 영인은 어딘가가 묘하게 달랐다. 신 씨의 말에 조바심을 내지도, 또 절망하지도 않았다. 이미 확고해진 생각을 표하듯, 굳게 다문 턱이 자못 결연해 보였다.

이어 영인은 장갑을 벗었다. 고급스러운 장갑에 감춰져 있던 손끝이 드러났다. 어느덧 굳은살이 떨어져 나간 자리의 살갗이 연했다. 상처가 아문 그곳엔 더 깊은 흉터가 패일 예정이었다. 그 손을 가리기에, 규화의 선물은 제격이었다.

“그냥 절 놔두세요. …규화가 뭐라고 했든 간에.”

곱게 접은 장갑을 주머니에 넣은 영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를 닮은 그 시선의 끝은, 그날 처참히 무너진 스타인웨이에 닿아 있었다.

***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가랑비로 시작한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더니, 돋아난 잔디를 헤집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하지만 서늘한 공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영상 기온에 눈이 아닌 비가 내린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비는 그 자체로 봄을 알리듯, 규화의 정원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반쯤 열린 암막 커튼 사이로 엿보이는 세상은 정오를 지난 시각에도 안개 낀 새벽녘처럼 흐리멍덩했다.

조명이 없이 어둑한 실내, 너르다 못해 휑한 거실에는 오직 그랜드 피아노와 그, 단 둘뿐이었다. 소파에 앉은 규화는 모포를 둘둘 감고 있었다. 탁자 위는 사보 중인 악보를 비롯한 종이들로 어지러웠다.

내리는 비 때문인지 미진한 두통이 일었다. 규화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유리창 너머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정원 한구석, 휜 가지 끄트머리에 망울진 작은 꽃에 가 있었다.

엊그제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문득 그를 발견했다. 꽃이 피다니, 이렇게 추운데 벌써 봄이 오나 싶어 잠시나마 설렜었는데, 역시나 성급했던 모양이었다. 마치 힐난하는 것처럼. 작은 봉오리에 비하면 지나치게 무거운 빗방울들이 연신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규화는 이름도 모를 그 꽃나무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꺼트리고는 눈을 감았다. 시각이 꺼진 틈을 타 청각이 기민하게 그를 지배했다. 귓가에 스며든 빗소리가 생경했다. 소파를 두드리던 규화의 긴 손가락이 이내 멎었다.

르 아브르든 서울이든, 창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달라졌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규화는 어느 악상도 떠올리지 못한 채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제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따뜻한 실내에 있는데도 손끝은 차가웠다.

동그랗게 깎인 손톱은 늘 그렇듯 단정했다. 손만이 아니었다. 규화의 온몸은 모난 데 없이 그저 부드러웠고, 살아생전 어느 흉터도 받은 적 없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돌아와 버린 제 몸에, 규화는 왼손을 움켜쥐었다.

이윽고 제 허벅지를 느슨히 쓸던 손길은 조금은 더 깊은 곳으로 향한다. 시선은 여전히 메말라 있었다. 비가 오고 있다고는 생각도 하기 힘들 정도로 건조한 입술이 나지막한 신음을 토했다. 그다지 춥지도 않았기에, 그다지 따스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겨울에 비해, 지독히도 서늘한 이 기운은 대체 어디서 온단 말인가.

…그의 상념은 난데없는 벨 소리에 끊겼다. 꿈에서 깬 듯 몽롱한 눈을 몇 번 깜박인 규화는 이내 걸어가 초인종을 누른 이를 확인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어언 두 시. 백인환 선생이 올 시각이었다.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 준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어지러운 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전 연습은?”

“두 시간 정도 하고 쉬고 있었습니다.”

“나쁘지 않네요. 살만 찌면 딱 좋을 텐데 말이야.”

빠른 회복세를 보인 규화의 손목 상태는 거의 정상에 가까워졌다. 부상 전의 연습량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었다. 연습 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매일같이 고주파 치료와 마사지를 받았으며, 주치의가 이틀에 한 번씩 방문해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이대로만 유지된다면 쇼팽 콩쿠르까지도 순조로울 것이다.

“나름대로 많이 먹고 있습니다.”

“그걸로 부족해요. 보조제도 같이 먹으라니까.”

“…아무래도 맛이 없어서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만 다른 곳에서 비상이 걸렸다. 바로 체중과 체력이었다. 준비한 레퍼토리는 지금 규화의 체력으로 소화하기 어려웠다. 먼저 체중이라도 늘릴 필요가 있었다.

쇼팽 콩쿠르까지는 아직 18개월 정도가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올해 가을 규화는 바르샤바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었다. 예민한 식성 탓에 규화는 거주지를 바꾸면 한동안 심하게 물갈이를 하곤 했다. 한국에서도 물갈이 이후 식욕이 돌아오지 않아 고생했다. 바르샤바에서도 마찬가지일 게 뻔했다. 그를 대비해 최대한 살을 찌워 두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요즈음 규화의 식단은 삼시 세끼 고기뿐이었다. 잠시 살이 찌나 싶더니, 요사이 한 달은 도로 빠지고 있었다. 의외의 복병에 재형을 비롯한 규화의 스태프들은 난색이었다.

규화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원래부터 입이 짧았지만, 피아노를 위해서라면 입맛이 없더라도 의욕 있게 노력해 주었다. 분명 그때와 다를 바가 없는데 살이 찌기는커녕 도리어 빠지고 있다니. 배가 볼록 나올 정도로 먹였는데도 대체 어디로 그 영양소가 사라졌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어디, 마음 쓰이는 데라도 있나?”

조심스러운 인환의 질문에 규화는 형식상 갖추었던 미소를 서서히 지웠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완벽한 조건이었다. 사방에 훈기뿐이라 마치 온실 같은 이 집. 연주자와 피아노에게 완벽한 온도와 습도, 바깥의 비 따윈 다른 세상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만큼 안온하고 따스한 공간.

이 모든 안락함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사실 규화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답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 개운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답답해졌다. 삶의 답을 알고 있음에도, 선뜻 그것을 택할 수만은 없는 자신의 처지, 이 삶의 궤도가.

“…선생님은 제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아시잖아요.”

묵직하게 받아치는 말에, 역시나 인환은 난처한 듯 눈을 굴렸다. 반면 규화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가면 아래 얼굴은 몹시나 정교해서, 흡사 차갑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아시다시피 내 권한으로는.”

“그냥, 어떻다는. …좋다 나쁘다. 이 말 한마디도 불가능한가요?”

“…….”

침묵으로 일관하는 상대에 규화는 제 고집을 이내 꺾었다. 슬며시 들어 올린 입꼬리가 위태로웠다. 쓰게 웃은 그는,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좀 어리광을 부렸네요. 죄송합니다.”

긴장이 풀렸는지 규화는 피곤한 듯 고개를 젖혔다. 드높은 천장이 보였다. 울림이 잘 모여 좋다고 생각한 저 동그란 지붕 모양이 꼭 새장과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집의 주인도 이곳을 버리고 떠난 걸까.

왼손에 닿는 파라핀 액체의 눅진한 촉감을 느끼며, 규화는 힐끗 시선을 돌렸다. 2층 빈방. 한 번도 주인을 맞이한 적 없는 그 애처로운 방을 바라보며, 규화는 오늘도 거기에서 잠들어야지 생각했다.

애초에 규화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큰 집이었다. 적어도 4인 가족 정도가 살면 적당했을 공간. 주방도 쓸데없이 컸고, 식탁도 마찬가지였다. 그 주방에 혼자 앉아 밥을 먹느니 차라리 굶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규화는 평상시 제 방에서 식사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만큼은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원래 오늘은 걸출한 레스토랑에서 부자간 식사를 함께할 예정이었다. 때마침 비가 내려 날이 쌀쌀했다. 규화가 먼저 자리를 미루려 했으나, 그가 이 집에 직접 오기로 계획이 바뀌었다.

넓고 커다란 식탁은 두 사람이 앉아도 변함없이 황량했다. 요리사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뒷모습을 흘끔거리며, 규화는 입이 말라 연신 물을 들이켰다.

식탁 맞은편에서 문규진이 문서 자료를 보고 있었다. 규화는 차라리 음식이 빨리 나왔으면 했다. 팔을 뻗어도, 몸을 내밀어도 닿지 않을 거리감에 이미 체한 듯 속이 불편했다. 도무지 밥이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몇 년 만에 가족끼리 식사하는 자리가 단란하기는커녕 바늘방석처럼 불편했다.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음식이 식탁 위를 채우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고급이었으나 하나같이 규화의 흥미와 멀었다. 대부분 고기 요리, 그와 비슷한 고열량 메뉴에 샐러드 약간이었다.

요사이 규화는 삼시 세끼 한번을 빼놓지 않고 식단을 완벽히 통제받고 있었다. 살을 찌우기 위한 철저한 관리였다. 그러나 그의 식욕은 도무지 감흥이 없는 듯했다. 깨작거리던 식전용 빵과 애피타이저가 채 반도 줄지 않았다.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가 눈앞에 놓여도 규화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를 알아챈 문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걱정이 많더구나. 네 체중 문제로. 좀처럼 살이 붙지 않는다면서.”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먹으니 살이 안 찌지. 왜, 고기가 입맛에 안 맞나?”

한창 주방 뒷정리를 하던 요리사가 어깨를 움찔했다. 규화가 작게 고개를 젓고는 눈앞의 스테이크를 큼지막하게 잘라 한입에 물었다. 문규진은 제 아들이 음식을 먹고 삼키는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마치 보란 듯한 시위였다.

부드러운 소고기가 입 안에 가득 차는 느낌이 불쾌했다. 물론 고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적당하게 구워진 최고급 부위는 입에 넣으면 크림처럼 녹아내렸으나, 규화에게는 그저 부담스럽기만 했다.

어째서일까. 비곗덩어리에, 냄새 나는 돼지고기도 맛있게만 먹었는데. 그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고급스러운 스테이크에는 왜 식욕이 들지 않는지 규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투정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혀 위를 맴도는 고깃덩어리를 억지로 잘게 씹어 겨우 목울대 뒤로 넘겼다. 그러고선 거의 삼킨 고기만큼 물을 마셨다.

“…천천히 먹거라.”

문규진은 문규화가 고기를 삼킨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네, 하는 짧은 대답이 대화의 끝이었다. 부자간의 저녁 식사 자리는 그저 침묵뿐이었다. 규화는 눈썹 옆으로 흐르는 땀을 냅킨으로 닦아 내었다. 감내해야 한다. 애초에 이 식사를 제안한 사람은 규화 자신이었다.

“그래서 네가 하고픈 말이 뭐냐.”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문규진이 말문을 열었다. 규화가 간신히 그릇을 비우고 난 뒤였다.

애초부터 교류가 많지 않은 부자간이었다. 우선 문규진이 한국에 머무르는 일부터가 이례적이었다. 한국 지사 일정을 소화한다는 핑계가 있었으나 문규진의 일차 목적은 문규화였다. 규화는 그게 달갑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가 아들을 챙기는 건 당연한 도리이며, 아들 또한 반갑고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 부자는 경우가 달랐다. 규화는 제 안일함을 탓했다. 쉬기로 한 1년이 고스란히 자유 시간이 되리라고 기대한 제가 어리석었다.

“너무 갑갑합니다.”

부자간의 증표와 같은, 호박색 눈동자에 설핏 의문이 사렸다. 불쾌감이 더했다.

“왜 저를 이렇게 보호하시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좀 더 바깥바람을 쐬고….”

“정원을 걸으면 되지 않으니.”

“…….”

“물론 매일같이 집과 병원만 오가면 지루하겠지. 그래도 어쩌겠니. 네 맘을 생각해서 일부러 너른 집으로 구했지. 원한다면 꽃을 심든, 동굴을 파든 상관없다. 막말로 집을 부숴도 좋아.”

부친의 상냥한 대답에 규화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작게 떨렸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의 현실에 닥치니 몸과 마음이 얼어붙었다.

“그러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매니저나 김 비서에게 말하고….”

“좀 더, 멀리 나가고 싶어요.”

규화는 용기를 내어 문규진의 말을 끊었다. 그가 불쾌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그래. 근처에 산이 있다. 하지만 등산을 하기에는 아직 시기가 이르지. 날이 좀 더 풀리면 네 매니저에게 등산 코스를 일러 주마.”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다시 한번 힘을 낸 규화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격앙되었던 마음은 입을 엶과 동시에 이내 가라앉았다. 열기를 잊어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적어도 자유롭게 다니고 싶습니다. 좀 더 이것저것 즐기고 보고 다니고 싶어요. 이왕 서울에 왔는데….”

그 결연했던 다짐과 달리, 막상 규화는 제 부친에게 대들지 못했다. 대드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아들을 사랑했지만 막상 아들을 사랑해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규화는 제 아버지가,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쓸데없음’을 제게 온전히 퍼붓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당신 나름대로 아들을 키우는 방식이라는 것도, 그게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도.

규화는 그 사랑을 제게 유리하도록 영리하게 써먹을 줄 알았다. 가까워질수록 서로를 상처 주기 마련이다. 특히 문규진의 방식은 그랬다. 지독스런 과보호.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대부분 그렇듯, 그 역시도 자기 방식만이 옳다고 여겼다. 그는 비효율적인 인사치레를 혐오했고 사업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신에 비교해 예술가인 아들을 미련하고 어리게만 생각했다.

아이는 온순했다. 엄마를 닮았는지 예술적인 재능에 더불어 아버지와 같은 꾸준함과 끈기, 악착스러움을 타고났다. 피아노 하나에 매달리기 시작하자 아이는 일취월장했다. 지기를 싫어하는 승부욕마저 마음에 들었기에, 어미가 버린다기에 냉큼 품었다. 엄마 없이 자란 아이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아이가 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도와주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말을 듣지 않도록 철저히 차단했다.

그래서 규화는 사람 사귐에 서툴렀다. 사교계에서 의례상 치르는 말이나, 웃어른을 대하는 예의범절은 능숙했지만 그게 아니라면 누구에게든 제 곁을 열지 않았다. 과잉보호의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문규진은 흡족스러웠다. 피아노는 배신하지 않지만, 사람은 언젠가 배신한다. 제 어미가 그러했듯이. 감수성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을 그대로 외탁한 아이. 그토록 여리기만 한 규화가 혹여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주고 속아, 제 어미처럼 감정적으로 돌변하는 모습만은 지켜볼 수 없었다.

제 눈을 빼어다 박은 자식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패하는 것을 그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규화를 지원하고 자유를 주되 그만큼의 속박을 전제했다. 규화의 선택은 늘 성공적이고 효율적이어야만 했다. 일부러 실패하도록 놔두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어린 아들은 익숙지 않은 실패의 후폭풍에 지레 겁먹고 안전한 둥지로 돌아오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너도, 나와 한 약속은 지켜야지 않겠니.”

“…….”

“네 입으로 먼저 약속했었지. ‘그 친구’의 치료를 위해서라면, 내가 하자는 대로 곱게 잘 따르기로.”

부친의 말에 규화는 초점을 흐렸다. 쥐고 있는 찻잔에선 더 이상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논리정연한 반박에 규화는 전의를 상실했다. 문득 고개를 떨군 시선 끝, 그날 영인이 쓰러져 내렸던 화장실 앞, 러그가 깔린 바닥이 보였다.

쓰러지던 영인의 모습이 날것처럼 재생되었다. 괴롭게 토악질을 하던 영인은 옆으로 머리부터 처박혔다. 제가 몸으로 받지 않았다면 뇌진탕이라도 당했을지 모른다. 흰자위를 보이며 기절한 그를 아무리 불러도 영인은 웃어주지도, 그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주지도 않았다.

두려웠다. 결국 규화는 이성을 잃고 전화기를 부여잡았다. 부끄러움도 없이 아버지를 부르고 호소했다. ‘그따위 녀석’이라 영인을 지칭했던 아비를 경멸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아들은 존재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저 애걸복걸해댔다.

뭐든 할 테니,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영인을 도와달라고.

부친의 눈은 정확했다. 문규화는 나약했다.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결해 본 적 없는 그는 결국 절체절명의 순간에 맞서자 아버지를 부여잡았다. 그렇게 VIP실과 완벽한 사후 처치를 약속받았다. 그 대가로 응당 자신의 자유를 담보 잡혔다.

“성급히 굴지 말아라.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

“난 아직 널 뉴욕으로 데려가지도 않았고, 막말로 내일모레 떠날 처지도 아니야. 그리고 너는 아직 환자야. 그리고 피아니스트이기도 하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피아노와 피아노를 쳐야 하는 네 몸이다. 그걸 우선 충족하고 나면 나머지 이야기들 하자.”

물론 규화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기본적으로 받아야 할 지원과 완벽한 식단, 치료 과정. 콩쿠르를 준비하는 과정에선 당연한 것들뿐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틀린 말은 없었다. 규화가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자신의 건강과 피아노, 그리고 결과를 일구려는 노력뿐이었다.

그래, 어쩔 수 없었잖아. 그래서 영인이가 치료를 받았잖아. 받고 있을 거잖아. 다 잘된 거야. 그 안에 보면 되니까.

…나약한 반항의 불꽃은 부친의 강한 논리 앞에 불씨마저 사그라들었다. 어쩔 수 없다. 이미 선택하지 않았는가. 자유는 물론이고 무엇이든, 영인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의 희생 따위야 감내할 수 있었다. 지나간 기회비용을 따져 보았자 아무 소용 없음을, 장사꾼의 아들인 규화는 태생적으로 알고 있었다. 생각을 멈추어야 했다.

“왜, 요새 연주가 잘되지 않으니?”

“…조금요.”

“피아노가 마음에 들지 않으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로 사 주마. 전에 소개한 스타인웨이 마이스터에게 연락을 해 보마.”

상냥하고 나긋한 말투에는 분명 아들을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공식적인 후원사가 아니기에 사적으로 퍼붓는 그 부친의 사랑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규화는 거부하고만 싶었다.

왜 순수히 그 사랑을 받을 수 없는가. 규화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아버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닐까. 그리고 떠올렸다. 누군가의 이름을.

너는, …아버지가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는데.

이제는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규화는 신경질적으로 찻잔을 놓은 뒤, 티 푸드로 나온 비스코티를 물었다. 까칠한 식감이 입 안을 가득 찔렀지만, 그는 힘들여 꼭꼭 씹었다. 다문 규화의 입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이 낱낱이 분해되고, 갈가리 찢길 때까지. 그의 이름마저도.

***

아무리 연습량이 많다고 한들 매일같이 조율사를 대동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조율사가 영인이 아닌 이상 규화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주에 한 번, 스타인웨이 본사 소속의 마이스터가 방문해 규화의 피아노를 조율하기로 했다.

이번 조율사는 문규진이 직접 섭외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보증된 사람이라는 이유가 컸다. 다른 부연 설명 없이도 소속과 경력이 증명하는 사람이었다. 스타인웨이사가 보증하는 마이스터는 그 수가 많지 않다. 피아노 한 대 수리에 기술료 만 유로를 호가하는 실력파만이 마이스터라는 호칭을 얻는다.

그 정도의 고급 기술자가 주마다 직접 규화의 집에 방문하기로 하다니, 문규진의 입김을 빼고는 설명하기 힘들 계약이었다. 간단한 조율 건에 도가 넘는 공임비를 내걸었을 거란 확신은 타당한 추론이었다.

규화는 조율사를 소개받으며 그의 이력서를 살폈으나,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눈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깔끔히 정돈된 한 장의 문서 속엔 막상 중요한 조율사의 귀와 손이 적혀 있진 않았다.

그를 홀대하지는 않았다. 규화는 방문한 조율사를 거실로 안내해 적당한 차를 대접했다. 그게 끝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늘 방에 들어가 쉬었다. 딱히 곁에서 할 일도 없었을뿐더러, 새삼스럽게도 그 맥놀이가, 멜로디라고는 없는 그 미묘한 화음들이 그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감흥 없는 음률들은 그저 소음일 뿐이었다. 지루했다. 시끄러웠다.

영인이 조율했던 수개월 간은 느낄 새 없던 감각들이었다. 그와 마음이 통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설픈 계약을 하고 밀폐된 레슨실에서 쭈뼛거리던,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조율사를 살피며 어색하게 소파에 앉아 있던 때만 해도 몰랐다.

그의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작업을 살펴보느라 잠시 청각을 잊은 걸지도 모른다. 해머를 돌려 조이고 푸는 그 동작들이 하나같이 흥미롭기만 했다. 가끔은 그의 조율이 끝나지 않길 바랄 정도로, 재미있었다.

단장된 피아노 앞에 앉아 섬세해진 소리와 터치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영인의 자취를 살피려 노력했었던, 그때 규화와 지금의 문규화는 분명 다르다.

애초에 그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이 제 악기를 매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도 전속 조율사를 고용하지 않았을뿐더러 크게 관심도 없었다. 누가 오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장영인이 아니라면.

다만 이번 손님은 조금 특별했다. 덕분에 규화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머리도 만지고 아끼는 정장도 옷장에서 꺼내 갖춰 입었다. 거울 속 제가 조금이나마 초췌해 보일까 싶어 그는 무척 신경을 썼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피아노가 탐탁지 않다는 규화의 말에 문규진은 바로 마이스터를 교체하려 들었다. 스타인웨이 한국 지사에 언질을 주겠다는 그를 가까스로 말려, 그 대신 권위자인 권 교수를 모시기로 합의했다.

예정된 시각에 정확히, 재형이 권 교수를 모시고 왔다. 바나흐 내한 공연 때 함께한 식사를 마지막으로 몇 달 만에 규화 얼굴을 본 권 교수가 반색했다. 둘만의 조우는 아니었기에 그는 하고픈 말 대신 규화의 등을 몇 번이고 쓸어내릴 뿐이었다. 그 온기에 규화는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얼굴이 좀, 좋아졌나?”

“좋아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를 살피는 권 교수의 시선에는 걱정이 담뿍 묻어났다. 규화는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찾아가 뵈어야 했는데.”

“아닐세. 출장 조율인데. 피아노가 있는 곳에 조율사가 가야지.”

순서를 따지자면 도움을 요청할 규화가 직접 그의 교수동에 찾아가 인사를 올렸어야 했다. 아무리 차로 모신들 무턱대고 제 쪽으로 권 교수를 오게 한 점부터가 결례였다. 심지어 휴대폰도 없어서 전화 한 통 없이 권 교수를 무턱대고 초대했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피아노에 문제가 있다면서.”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규화는 몹시 계면쩍어했다. 사실 말 그대로 피아노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피아노가 아닌 문규화 본인에게 있었다. 그를 헤아려 줄 사람으로는 어떤 마이스터보다도 그나마 권 교수가 적합했다.

권 교수 또한 정황을 대강은 헤아리고 있었다. 영인을 대동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영인의 얼굴을 아는 재형이 그를 사전에 차단했을 터였다.

작업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규화는 평상시와 다르게 거실의 소파에 앉아 권 교수의 작업을 지켜보고 설명을 들었다.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거실엔 둘뿐만 아니라 재형도 함께였다. 그의 눈과 귀가 무서워 규화는 영인에 대한 말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었다.

규화의 부탁으로 권 교수는 조율을 마치고도 저녁 늦게까지 집에 머물렀다. 메뉴 구성을 떠나 규화는 실로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했다. 자상한 어른 앞이기도 했을뿐더러, 마음 편한 상대와의 식사여서인지 평소보다는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부른 배로 그를 배웅할 때까지, 결국 장영인에 대해서는 한마디를 묻지 못했다. 재형은 권 교수를 모시기 위해 함께 집을 떠났다. 드디어 혼자 남은 규화는 탈력감을 느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미처 묻지 못한 말들이 뒤늦게 혼잣말로 튀어나왔다.

치료는 어떻대요. 아무 해코지 안 당했겠죠. 연락이 안 되어 걱정할 것 같은데, 어떻게 소식은 전해 주셨나요. 잘 지내나요….

그래도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제 근황만은 영인에게 전해질 터였다. 그 사실에 그나마 위로를 받아서인지, 규화는 금세 노곤해졌다. 식사에 곁들인 와인 탓일지도 모른다. 소파에 한참 몸을 묻고 있던 규화는 이내 몸을 일으켜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이런 복잡한 감정은 다른 말보다 피아노로 해갈하는 게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런데, 스툴에 앉자마자 규화는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랜드 피아노 안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피아노는 조율을 마친 뒤 뚜껑을 내려둔 상태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규화는 뚜껑을 들어 올렸다. 역시나, 안에서 울리고 있는 한 스마트폰이 보였다.

규화 것은 아니었다. 영인과 만난 이후로 휴대폰을 재형에게 뺏긴 지 오래였다. 물론 재형 것도 아니었다. 낯선 휴대폰을 보다가 혹시나 하고 받아보니, 수화기 너머 상대방의 목소리가 역시나 귀에 익었다.

- 미안하네. 나일세.

“아, 선생님. 잘 도착하셨습니까.”

- 그래. 방금 도착하고 보니 휴대폰이 없어서. 내가 자네 집에 두고 간 모양이지.

권 교수였다. 휴대폰을 찾으려 자기 번호로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네. 피아노 속에 있었습니다. 아마 조율하실 때….”

말을 잇던 규화가 위화감에 머뭇거렸다.

그랜드 피아노는 내부가 크기에 작업 도중 무언가를 곧잘 떨어뜨리기 쉽다. 그게 잡음을 유발하는 원인이기도 해서, 조율사들은 마지막 과정에서 빠뜨린 기타 부속이 없는지 조율의 한 절차로 반드시 확인한다.

오늘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권 교수가 조율을 마치고서 규화가 시범 삼아 연주를 했을 때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뒤에 빠트렸다는 말이다. 닫힌 뚜껑까지 다시 열어서.

게다가 휴대폰이 떨어진 위치가 절묘했다. 피아노의 고유 일련번호가 있는 부위. 소리에는 거의 영향이 가지 않으며 누구든 손쉽게 꺼낼 수 있는 곳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떨어뜨려도 웬만하면 모르기가 어렵다.

마치, 규화에게 발견되기를 바란 듯한 위치.

“어떻게, 바로 보내드릴까요?”

- 급하지 않으니 놔두게. 오늘은 시간이 늦었고. 내일이라도 교수동으로 보내 주면 나야 고맙지.

“네. 그럼 내일 매니저에게 맡겨서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통화 끝나고 바로 꺼 두도록….”

- 아, 안 그래도 내가 부탁할 것이 하나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 전화가 한 통화 올 텐데, 자네가 대신 받아 주게나.

“…아. 그럼 어떻게 제가 안내를 해 드릴까요? 아니면 내일….”

- 그냥, 받기만 하면 되네.

전화를 두고 간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느긋한 말투에 규화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는 확신했다. 비밀번호도 걸려 있지 않은 권 교수의 휴대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마음에 규화는 애써 목을 가다듬었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 아닐세.

마지막까지 위로하는 권 교수의 말이, 그 어떤 호화로운 만찬보다도 규화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긴 손가락이 확인하듯 제가 쥔 휴대전화를 매만졌다. 불길하게 가슴이 뛰었다. 진정시키고자 하는 마음에 그는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금세 차오른 물 안에 푸른 입욕제가 퍼졌다. 실내를 가득 채운 수증기마다 은은한 향이 깃들었다. 규화는 욕조 속에 몸을 담근 뒤 이내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마치 설탕이라도 된 듯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잠시간 멈춘 듯한 시간 가운데 그는 전신의 촉감에 집중했다. 긴장에 곤두세웠던 목덜미가 느슨해졌다.

왼손은 반신욕 중에도 혹여 무리가 갈까 봐 물에 담그지 않는 편이었다. 다만 그 마른 왼손 반대편, 푹 젖은 오른손은 물속 제 다리 사이로 향했다.

잠시간 바르작거리던 손이 이내 움직임을 그쳤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몸이 채 달아오르기도 전에 욕조에서 벗어났다.

마치 누군가에 쫓기듯, 욕조에서 화장실 선반까지 물 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권 교수의 휴대폰은 갈아입을 속옷과 가운보다 더 소중히 감싸여 있었다. 물기 하나 묻지 않았음에도 규화는 연신 주름 생긴 손끝으로 그 액정을 매만졌다. 액정 속 시계는 어느덧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물기를 닦고 가운을 걸친 규화는 새하얘진 발가락을 오므리며 슬리퍼를 신었다. 그리고 계단에 내려서기도 전, 기어이 울린 진동에 그는 하마터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 얕은 진동이 그에게는 마치 지진처럼 강력하기만 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손을 뻗었다가 급하게 추슬렀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가운에 물기 어린 손을 닦았다. 다행히도 휴대폰은 서툰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규칙적인 메트로놈처럼 일정하게 반복되는 진동이 점차 빨라지는 그의 심장을 추스르고 다독였다. 심호흡을 하고 통화 버튼을 누른 그는 눈앞이 흐려져 액정에 뜬 이름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 …죄송합니다, 교수님. 늦었습니다.

받침이 나오는 곳마다 꾹꾹 눌러 발음하는 그 단정한 말투와 목소리.

규화는 직감했다. 그 모든 음률을 잃어도, 이 목소리만큼은 평생을 그리워할 것을.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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