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아아, 켜 주면 안 돼요?”
“켜 주는 건 바이올린이고, 피아노는 쳐 주는 거.”
“쳐 주면 안 돼요? 반짝반짝이요.”
“마자요, 반짝반짝.”
영인은 고개를 돌렸다. 피아노를 쳐 달라 아우성치는 아이들의 앞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그는 넝마가 된 제 손에 단념하고 그저 미소로 화답했다.
영인은 아이들에게 덩치 큰 형아로 불렸다. 덩치 큰 형아는 희망원에 올 때마다 두 손 가득 선물을 들고 오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호식할 고기는 물론이고 골라 먹는 아이스크림에, 가끔은 장난감까지.
간혹 마법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성당의 낡은 피아노는 늘 둔탁한 소리를 냈는데, 그가 매만지고 나면 신기하게도 예쁜 소리를 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율의 개념은 몰라도, 아이들의 순수한 귀는 균형 잡힌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의 차이를 대번에 알아챘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입가에 잔뜩 묻힌 채 영인의 조율을 구경하곤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매달려 피아노를 쳐 달라 졸랐다. 그럴 때마다 영인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변주곡>을 연주해 주곤 했다. 아이들은 그 곡조에 맞추어 반짝이는 별들을, 간혹 가사를 까먹으면 알파벳을 붙여서 저희의 노래를 성당 가장 높다란 꼭대기까지 쏘아 올렸다.
오늘도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말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희망원 대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영인은 두 손 가득 선물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매일같이 사 올 필요 없다는 수녀님의 잔소리에도 허허 웃으며 영인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늘 그랬던 것처럼 성당에 처박혀 피아노와 씨름했다.
아녜스 수녀는 아이들에게 영인을 방해하지 말라 경고했지만, 그렇게 쉽게 꺾일 호기심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듯 숨을 죽이며 성당 안으로 진입했다.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마침내 아이들은 예배당 맨 앞줄에 나란히 줄 맞추어 앉아 영인을 구경했다.
하지만 노래는커녕 소리도 나지 않는 지루한 작업에 아이들은 제법 실망한 모양이었다. 작은 관객들의 야유를 벗 삼아 영인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던 와중이었다.
“너네, 형아 괴롭히지 말랬지.”
출입문 쪽에서 들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아이들은 깜짝 놀라 영인 뒤로 몸을 숨겼다. 험상궂은 표정을 지은 은혜를 보고 꼬맹이들은 모두 겁에 질렸다.
“괜찮아, 놔둬.”
“빨리 내려가. 어서. 수녀님 밑에서 기다리신다?”
“힝….”
영인이 어설프게 편을 들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군기 반장을 했던 은혜의 겁박은 제대로 통했고, 아이들은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성당 문틀을 붙들고 하염없이 손을 흔들던 아이들이 사라지자, 예배당 안엔 정적이 깃들었다.
반가운 침묵이 도래했다. 꼬맹이들이 나간 쪽을 바라보던 영인은 다시 등을 돌리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다 대고 은혜는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피아노만 붙들고 있을 거야? 저녁도 안 먹었다며.”
“괜찮아. 밥 먹고 하면 더부룩해서 집중 안 돼.”
은혜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표정은 극히 조심스러웠다. 여전히 장현1)에 한창이었던 영인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무심히 답했다. 그마저도 사실 최선이었다.
장현 작업은 몹시 섬세한 작업이기 때문에 집중력을 요했다. 아무리 노련한 조율사라 한들 작은 관객의 아우성을 내내 듣거나 잡담을 나누면서 할 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그것도 다 낡은 프레임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이 피아노를 작업한다면 더더욱.
거의 부품 모두를 바꾼 셈이나 다름없지만, 바꾸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피아노 자체를 지지하는 프레임은 사람으로 따지자면 심장과 같았다. 요새는 의학 기술이 발달해 심장도 이식한다지만 애석하게도 피아노의 경우 프레임이 부러지면 악기로서의 생명은 끝나게 된다.
이 피아노의 심장은 몹시 허약한 상태다. 새로이 꽂은 튜닝핀과 현의 장력을 부디 잘 버텨 주길 바라며 그는 조심스럽게 해머를 돌렸다. 사실 은혜의 말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맨날 괜찮다, 괜찮다 말만 하고. 병원은 다녀왔어?”
“…애들더러 방해하지 말라더니, 네가 제일 방해하고 있는 거 알지.”
한숨 섞인 영인의 책망에 은혜는 종알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늘 너그러운 영인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이 희망원의 군기반장은 영인이었다. 그만큼 모두가 영인을 따랐고 믿고 의지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희망원을 나온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에게 의존하고 또 기대하게 되는 까닭은.
“오빠는 나한테, 아니 우리한테 원래 관심 없잖아.”
“뭐?”
“그러니까 나라도 물어보지 않으면 아예 아무것도 안 알려 줄 것 아냐.”
“…내가 왜 너희한테 관심이 없어.”
“그럼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도 않으니까 그런 거 아냐?”
결국 영인은 작업을 포기하고 해머를 내려놓았다. 그 서늘한 눈빛에도 은혜는 한번 터진 투정을 그치지 못했다. 여태껏 꾹꾹 눌러온 서운한 말들이 봇물 터지듯 마구 흘러나왔다.
“그때 우리 삼겹살 먹은 뒤에 어떻게 됐는지 한 번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민성이 공부 어떻게 됐는지. 나…. 나 기껏 그렇게 캐물어 놓고서, 뭐야. 걱정 같은 거 하나도 안 하면서 왜 그렇게 물어보고 혼냈던 건데.”
희망원 안에 있을 때만 해도 모두가 가족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였지만 함께한 삶과 믿음으로 쌓은 울타리는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사이 영인은 수상했다. 자취방에도 거의 들르지 않았고 문자 연락도 뜸했다. 늘 바쁘다는 소리뿐이었다.
귀가 한쪽 들리지 않음에도 조율사를 꿈꾸는 그가 은혜는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밤낮으로, 밥까지 굶어가며 몰두하는 필사적인 모습은 여태껏 제가 알던 영인과 달라 혼란스럽기만 했다. 늘 여유롭고 느긋한 영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딘가 조금씩 변해가는 영인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연정을 떠나 가족으로나마 곁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마음에 자꾸만 불안이 깃들었다. 그래서 여태껏 그래왔듯이 은혜는 영인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멀어지지 말라고, 낯설어지지 말라고.
그 아이 같은 투정에 영인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무언가 결심한 듯 날이 선 얼굴로 그는 물었다.
“…좋아. 그럼 내가 먼저 물어볼까?”
“그래.”
“은혜 너는, 나 아직도 좋아하니?”
“…뭐?”
생각지도 못한 영인의 질문에 은혜는 경악하다 못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커다랗게 치켜뜬 눈에 금세 습기가 차올랐지만, 은혜는 울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너한테 진짜 묻고 싶은 말이었어.”
처음 은혜가 영인에게 고백한 건 까마득한 옛날, 언제부터인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과거의 일이었다. 은혜는 말이 트인 어느 순간부터 늘상 영인더러 오빠 좋아해. 오빠 좋아를 외고 다녔다. 제게 찰싹 달라붙는 꼬맹이의 애정이 귀여워 영인도 늘 웃으며 예뻐해 주었다.
하지만 좋아한단 말의 무게가 제 생각과 다르다는 걸 깨닫고 난 뒤부터, 영인은 그 고백에 점차 대답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 종국에는 ‘미안해’까지.
마지막 고백은 은혜가 고등학교 3학년일 시절이었다. 무려 수능 시험 바로 전날, 수험생의 신분으로 은혜는 영인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어떻게든 동정심이나마 얻어 보자 고민한 결과였다. 하지만 영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미안하다는 말에 내일 시험 잘 보라는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물론 성적은 볼 것도 없었다. 어차피 대학 진학은 생각도 없었기에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은혜는 수능 시험지보다 더 어려웠던 영인의 대답에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골몰해야만 했다.
‘나는 너를 여자로 본 적이 없고, 만약 여자로 봐도 사귈 수가 없어.’
그 아리송한 말이 품은 의미를, 은혜는 지극히 최근에 깨달았다. 그러니 이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능청스럽게 답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영인의 시선이 가시라도 돋친 듯 따갑게 느껴졌다.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
“…오빠 진짜 왜 그러는데?”
“말했잖아. 궁금하다고. 대체 내가 왜 좋은데?”
오늘의 영인은 지극히 낯설었다. 늘 고백하려는 낌새를 보이면 피했을뿐더러, 붙들고 고백을 해봐도 여태껏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여지는 주지 않았지만 이렇게 이유까지 따져 물은 적은 없었다. 궁지에 몰린 은혜는 참담한 마음으로 제 마음을 변명해내야 했다.
“…잘생겼고 다정하니까, 착하고.”
“세상에 그런 남자는 많잖아.”
“그게 다가 아냐! 나한테 남자는, 늘 오빠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오빠는 날 잘 아니까. 나한텐 오빠가…. 꼭 아빠 같은 존재가 있다면, 분명 오빠 같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 인생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믿음직했어?”
영인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처럼 무감한 눈으로 은혜를 바라보았다. 떠보는 것도 놀리는 것도 아닌 진중한 말에 은혜는 조금씩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겨우 수면 아래로 감추어 애써두었던 마음들이 불쑥불쑥 들끓어 뿌옇게 떠오르고 있었다. 한편으로 불안했다. 왜 이제 와 이런 걸 물을까. 다 지나간 이야기인데. 혹시나 싶은 마음보다도 이대로 영인이 멀어질까 덜컥 겁이 났다.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는데. 내가 뭔가 잘못했어?”
“아니, 여태껏 내가 잘못했구나 싶어서.”
“…….”
“난 너한테 희망 고문한 적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닌 걸 알았어.”
그리고 은혜의 예감은 적중했다.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귀에 들릴 듯했다. 고즈넉한 예배당. 아이들이 미처 닫지 못하고 간 입구에서부터 스며든 밤하늘의 달빛이 성모 마리아상의 오른쪽 뺨을 고요히 빛내고 있었다.
은혜를 향해 한 글자 한 글자 읊는 그 목소리는 마치 성경을 낭독하듯 흐트러짐 없이 맑았다. 까마득히 높은 첨탑 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십자가를 향해 고백하듯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까, 알겠더라.”
“…….”
“정말 제대로 좋아해야겠다고 마음먹으니까, …알게 됐어.”
길었던 짝사랑의 종지부를 알리듯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은혜는 서둘러 눈가를 닦아 냈다. 한편으로 홀가분하기도 했다. 당하고도 미처 몰랐던 그 희망 고문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누구를 절실히 사랑한다는 영인의 말에, 이제야 그를 포기할 마음이 생겼다.
두 사람은 종전의 꼬맹이들처럼 예배당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고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은혜는 굳이 그 대상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영인이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을뿐더러 아예 짐작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호텔에서 마주했던 그때 당시는 잘 몰랐다. 늘 동생들을 우선하던 영인이 순간 제 손을 놓고 가던 뒷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 철렁 내려앉았던 가슴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그 남자가 영인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
그리고 그 큰 눈동자에 서렸던 경계심을 생각해 봤을 때, 어쩌면….
속도 없는 년이라 자신을 힐난하면서도 은혜는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그래서 오빠는 어떻게 할 건데?”
“글쎄…….”
“고백해 봐. 그 사람도 오빠랑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잖아.”
“…내가 잘생기고, 다정해서?”
“…응.”
“하지만 한쪽 귀도 안 들리는 데다 변변찮은 직업도 없고. 벌어놓은 재산도 없는데?”
은혜가 꼽아 주었던 장점, 그리고 그에 맞서는 단점을 영인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읊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나열한 것뿐인데, 마치 남 일처럼 담담하게 제 결점을 읊는 목소리에 은혜는 울컥했다.
“그래도 좋아할 수 있지. 사랑은 그런 거 재고 따지는 거 아니잖아. 분명 그 사람도….”
섣부른 말에 은혜는 말을 미처 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뱉지 못한 그 말들까지 온전히 닿았다는 듯 영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어슴푸레 비치는 푸른 달빛이 그의 높은 콧대에 그늘을 지웠다. 깊은 눈동자가 더욱 슬프게 빛났다.
“…행복해지네. 상상만으로도.”
그 목소리는 뜻과 다르게 지독히도 쓸쓸해서, 은혜는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직감했다. 영인의 행복하다는 말이,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이 그가 마주한 암담함을 달리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오빠 난데없이 사람 차 놓고 되게 뻔뻔하다.”
빈정거리는 말에도 씨익 웃어버리는 그 미소마저 위태롭게 아름다웠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직감한 은혜의 뺨에 다시 한 번 새로운 물기가 차고 올랐다. 그 또한 제가 줄 순 없는 행복이라는 걸 알기에 포기가 되었다. 마음은 수만 갈래로 찢어졌지만, 이걸 영인에게 기워 달라 응석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 말대로 내가 너희한테 소홀했다는 건 인정해. 미안하다. 내가 그럴 겨를이 없었어.”
“…….”
“당분간 힘들겠지만, 너도 마음 잘 추슬렀으면 좋겠고….”
“됐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까 오빠나….”
다 헤어져 피투성이인 손끝은 제 가슴도 기우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언제까지 투정을 부릴 순 없었다. 은혜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올려다보는 영인 특유의 곧은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울음이 섞이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오빠나 마음껏 좀 행복해져 봐.”
힘겹게 토해낸 말을 끝으로 은혜는 몸을 돌려 성당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불러 세우지 못한 영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쩌면 이 또한 인과응보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행복이라.”
은혜가 두고 간 숙제 같은 단어에 영인은 피아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제가 작업하던 저음부 현을 재차 어루만졌다. 현을 휘감아 둔 튜닝핀의 높이를 확인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조금은 긴장된 얼굴로 제 왼손을 저음부 건반 위에 놓이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건반을 두들기자, 해머에 두들겨 맞은 현은 이내 피아니시모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A minor. 아주 작은 힘으로도, 곧고 긴 공명이 주변을 메꾸었다.
순간 영인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연달아 트릴을 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현은 버티지 못하고 툭 튕기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는 이전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또 실패작이었다.
축 늘어진 현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은 영인은, 그에게 고백하라던 은혜에게 뱉지 못할 변명을 뒤늦게 읊조렸다.
“…마음이 같다고 해서 꼭 함께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문규진의 ‘잘 부탁하겠다’는 마치 한정적인 면죄부를 부여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동안은 무엇을 하듯 눈감아 주겠다는 뜻일까. 가을이 재차 영인을 찾아오기까지는 앞으로 반년의 시간이 남았다. 과연, 그리고 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규화는 빛이 났다. 무언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몰래 삐죽거리는 입술도, 제 아버지를 꼭 빼닮았던 호박색 눈도 그대로였다. 아마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다 해도 분명 변치 않을 규화의 파편들이었다.
한편 영인은 무참히도 망가졌다. 귀도 들리지 않고 손도 떠는 데다 아직 이렇다 할 기술도 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뿌리가 없는 꽃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세파가 이끄는 대로 떠밀려 다닌다. 열한 살, 제 생애 가장 빛나던 시기가 최선이었다. 이후의 자취야 뻔했다.
규화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질 것이다.
이대로 또 1년이, 10년이 흐르고 나면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어떻게 될까. 과연 마주칠 수 있을까. 우연을 빙자하지도 못할 만큼 서로 다른 세계를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자신은 규화의 연주를 들을 수라도 있을까. 어쩌면 저를 부르는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겹쳐 드는 상념을 털어버리려는 듯 영인은 고개를 저었다. 불안정한 미래를 가늠할 만큼, 쥘 수 있는 지금의 행복이 지극히 소중해진다. 그리고 과분해졌다. 그리고 제 그릇이 감당 못 할 만큼 과분한 행복은, 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영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제 몸에 남은 감당할 것은 눈앞의 기쁨과 비교하자면 몇 배가 될지도 모른다. 고작해야 몇 달의 기쁨을 위해 이후 수년, 수십 년을 고통받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고 싶다. 미련하게도 또 욕심이 났다. 갖지 못할 이름과 아버지를 탐냈던 과오를 잊은 사람처럼 또 영인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어 애가 탔다.
…그러니까, 더 강하게 얽매이고 싶어. 다신 풀어지지 못하도록.
혼잣말에 가까운 영인의 나직한 목소리는, 이미 끊어져 버린 현을 대신해 성당의 적막을 고요히 가로질렀다. 첨탑 위, 십자가에 걸린 달이 그를 따라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
규화의 손목은 꽤 호전을 보였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데다가 본인의 회복 의지가 강했던 덕분이었다. 그래서 제한적으로나마 연습을 재개할 수 있었다. 정밀한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백 선생과 협의를 마친 끝에 연습은 정해진 시간 내로 제한되었다. 하루에 두 번, 한 시간씩. 모자라다 싶으면 이미지 트레이닝과 오른손에 한정한 연습을 추가 시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영인의 출퇴근 시간도 적절히 조정되었다. 아침부터가 아닌 낮부터 저녁까지. 한 시간 남짓의 연습과 중간의 긴 휴식시간, 그리고 다시 연습. 그 모두를 감시하고 돌보는 게 영인의 역할이었다. 규화의 컨디션이 나쁘다 싶으면 바로 연습을 중지시켰고, 규화 또한 그 명령에 잘 따랐다. 덕분에 연습을 재개한 뒤 규화의 손목은 이렇다 할 통증 없이 회복 중이었다.
그날도 예와 같은 일정이었다. 정오를 지나 영인이 출근하면 두 사람은 늦은 점심 식사를 치렀다. 식사를 마치고 영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규화는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방에 들어갔다. 싱크대와 테이블을 행주로 말끔히 훔친 영인이 안방 쪽을 흘낏 살피곤 주머니에 있던 약을 삼켰다.
병원에 들른 게 무색할 만큼, 요사이 귀의 상태가 무척 나빠졌다. 이유가 짐작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퇴근 후 매일같이 성당에 들러 장현 작업을 연습하느라 과로한 탓이다. 일부러 출근하기 전 진통제를 먹어 두었음에도 치미는 통증 덕분에 영인은 맛도 모르고 배를 채웠다.
빨리 약효가 돌길 바라며 물을 삼키는데, 난데없는 규화의 목소리가 거실로 향하던 영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필요 없다니까!”
문득 기시감이 일었다. 규화와 대기실에서 재회했던 그날, 제게 소리를 지르던 그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반응하듯 삼킨 약이 우습게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영인은 순간 비틀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버티어 섰다. 규화의 목소리는 그 꼬리를 물고 연달아 이어졌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간섭하지 말라고, 제발!”
하필이면 닫고 들어갔을 안방 문이 살며시 열려 있었다. 규화는 영인이 엿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방문에 등을 돌린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잔뜩 날이 돋쳐 있었다.
“…제발 좀!!!”
통화는 무참히 끊겼다. 침대에 휴대폰을 떨군 손은, 그리고 전신은 마치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던 영인은 이내 규화가 쓰러지듯 침대에 주저앉자 반사적으로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제 어깨를 붙든 이의 얼굴을 확인한 규화의 눈동자는 분노에 물들다 못해 주변 흰자위까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예삿일이 아니라 여긴 영인이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냐, 아무것도.”
하지만 규화는 답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영인 역시도 그 말에 머뭇거리던 입술을 다물었다. 그 이상 캐묻지 않는 영인에게 규화는 한 마디를 보탰다.
“…미안해, 놀라게 해서.”
대답을 얻지 못한 대신 영인은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규화가 통화할 상대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재형일까. 이곳을 들른 지 거의 한 달째임에도 불구하고 영인은 단 한 번도 재형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만나면 더욱 어색할 테지만 이토록 자리를 비우는 것도 수상했다. 또 어떤 말로 그를 화나게 한 걸까.
아니면, …문규진일지도 모르지.
지난 바나흐 내한 때의 반응과 비슷한 것을 고려하자면, 그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짐작한다고 해서 내용까지 유추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춘, 영인은 우선 말문을 돌렸다.
“오늘 연습, 하지 말까요?”
“아냐. 괜찮아.”
“무리하지 말아요.”
“…알잖아, 나 이제 무리 같은 거 안 해.”
담담한 목소리는 예의 평정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영인의 가슴 한구석은 욱신거렸다. 불안함과 참담함을 애써 감춘 영인이 조금은 높은 톤으로 물었다.
“기억나요? 저번에 그 달고나 먹고 싶다고 했었죠. 오는 길에 그 비슷한 사탕을 팔길래 사 왔거든요. 먹어 볼래요?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조금은 좋아질지도 모르니까.”
“응.”
원래 단 걸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점심도 배불리 먹은 뒤라 딱히 후식이 끌리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인은 규화를 거실로 이끌어 소파에 앉힌 뒤 제 가방에서 사탕을 꺼냈다. 규화도 망설임 없이 건네받은 사탕을 입에 물었다. 평가는 늘 그렇듯 냉정했다.
“그때 먹은 게 더 맛있긴 하다.”
“아무래도 갓 만든 거에 비해서는 못하죠. 다음에 발견하게 되면 사 올게요.”
“그런데 이것도 맛있어. 그 맛이 나.”
혀 위에 녹아내리는 달짝지근한 맛. 특유의 탄 맛이 순간 규화를 그날 밤의 기억을 데려가 주었다. 이리저리 불빛이 뒤엉키던 밤거리, 귀를 어지럽히던 소음들. 큰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로 영인에게 이끌렸던, 인파로 넘실거리던 좁은 골목까지. 생각해 보면 불쾌하고 혼잡하기만 했을 밤인데, 마치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인 것처럼 규화는 덜컥 그리워졌다.
“…신기해. 네 말대로 진짜 기분이 좋아졌어.”
빈말이 아니었다. 규화는 불현듯 몸을 일으켜 곧장 피아노 앞으로 갔다. 그리고 이내 연주를 시작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영인 역시 사탕을 하나 집어삼켰다. 달고나 특유의 싸구려 단맛이 입 안을 맴돌던 약의 쓴 기운을 덮어씌웠다. 겨우 힘이 돋았다. 영인은 이명으로 둔한 청력의 나머지 공간에 규화의 소리를 꾹꾹 밀어 넣었다.
연습 때의 규화는 그나마 제 감정에 조금은 솔직해진다. 같이 한 시간이 헛되지 않은지 영인은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규화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늘은 즐겁구나, 아니면 화가 났구나, 평온하구나. 조금은 나른하거나….
게다가 달라진 레퍼토리 탓일까. 처음 강의동 교수실에서 마주했던 규화와 지금의 규화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맞췄던 레퍼토리와 일변 쇼팽의 곡으로만 준비한 지금은 음악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섬세하고 유연했으며 감정의 진폭을 늘렸다. 악보에 쓰인 그대로의 표지를 지키긴 했지만, 조심스럽게 제 나름의 해석을 싣는 시도 또한 그치지 않았다. 그 과정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같은 프레이즈를 한 시간 내내 반복하기도 했다. 130에 가까운 빠르기를 70도 안 되는 속도로 반복하며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그 진지한 모습을 감상하며, 영인은 어느덧 이명마저도 그의 연주처럼 즐기는 수준이 되었다.
오늘의 규화는 준비한 쇼팽 레퍼토리 중 하나인 소나타 2번. 특히 장송 행진곡으로도 유명한 3악장을 연거푸 치고 있었다. 유려하게 멜로디를 이어 나가던 초반과 달리, 30분쯤 지났을까. 혀 위를 맴돌던 단맛이 사라진 탓일까. 타건이 몹시 거칠어졌다.
이상을 감지한 영인이 바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집중하고 있던 규화가 살짝 어깨를 떨었지만 연주를 멈추지 못했다. 인상을 쓴 영인이 바로 규화의 팔뚝을 잡았다. 커다란 손아귀에 두 팔이 붙들리자, 위태로이 허공을 맴돌던 멜로디가 신기루처럼 사그라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쉬도록 하죠.”
“싫어.”
규화는 사탕을 빼앗긴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나 괜찮아.”
“무리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
서툰 반박 대신 규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영인을 올려다보는 규화의 연갈색 눈동자는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비단 손목의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떨구어진 그 시선은 이내 거실 벽에 걸린 시계에 가 닿았다. 거실 정 중앙의 시계의 짧은 침은 고작해야 숫자 3을 지나고 있었다.
…너무 빠르잖아.
해가 짧다지만 아직도 밖은 환했다. 굳게 쳐 둔 커튼 너머로 언뜻 비치는 겨울 볕이 선연했다. 해가 지기엔 부지런히 분침이 돌고 돌아도 몇 바퀴를 기다려야 할까.
“내 부탁 들어주면.”
“…부탁?”
귀를 의심하듯 되묻는 말에 끄덕이는 눈엔 웃음기라곤 없었다. 다만 규화는 길고 가느다란 왼손이 연달아 건반 위 공중을 맴돌았다. 혀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말이 낯선 것처럼 영 주제를 모르고 헛돌았다. 자칫 잘못 하면 씹을 뻔한 소맷부리에 달린 장식이 이리저리 빛났다.
“바쁜 건 알지만, 혹시나. 정말 만약에 가능하다면 묻는 건데….”
“저녁 먹고 갈까요?”
뜸을 들이는 말이 정도가 지나치게 길었다. 도리어 먼저 물어오는 말에 규화는 머뭇거리던 입술을 굳게 닫았다. 바로 나오지 않은 대답에 영인은 빙긋이 웃으며 다음 질문을 읊었다.
“아니면, …자고 갈까요?”
저녁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규화는 예상 못 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주한 영인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애초에 제 부탁이었다는 것도 잊고서 규화는 마치 애써 허락을 하듯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뭐, 네가 괜찮다면.”
“내 방, 아직 비어 있어요?”
“당연하지. 내가 말했잖아. 거긴 너 아니면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니까.”
“…알겠어요.”
불안에 시달리던 규화의 두 눈이 깜박임을 더하자 차츰 맑아졌다. 피아노를 벗어나 2층으로 올라가는 그 가벼운 걸음걸이를 지켜보는 영인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떠올랐던 미소는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전화 통화를 마쳤던 규화의 불안한 상태를 생각하자니 차마 이 넓은 집에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영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기만 해 보였던 드높은 천정이 도리어 휑하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영인은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왼쪽 눈두덩이 미세하게 떨렸다.
***
다행히 저녁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대로 영인은 피아노를 이것저것 손을 봤다. 사실 연습이 극도로 제한된 이상 매일 같이 공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영인에게 고가의 스타인웨이를 마음껏 만질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던 규화의 핑계였다.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리사이틀이 끝난 무대 위에서 스타인웨이의 피아노 소리에 감탄하던 목소리를, 규화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즈넉이 시간이 흘렀다. 소파에서 영인의 작업을 지켜보던 규화는 끄적이던 악보를 들고 안방으로 갔다. 문을 굳이 닫지 않은 채 거실에서 흐르는 그 밍밍한 멜로디를 따라 괜한 화음을 콧노래로 넣기도 했다. 간혹 도레미파솔라시도, 한 옥타브를 치는 손길에도 규화의 귀는 연신 쫑긋거렸다. 그게 선율이 되기를, 프레이즈로 변모하기를 내심 바라기도 하면서.
소원해진 피아노와 영인 사이의 중매쟁이라도 된 것처럼, 흘러드는 음악에 설레며 규화는 침대에 누워 느긋한 오후를 즐겼다.
그러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잠든 규화를 일깨운 건 코를 간질이는 냄새였다. 낯선 향에 덜컥 겁이 나 규화는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은 텅 비었지만, 부엌에서 무언갈 달그락거리는 이의 정체는 다행히도 영인이었다.
“뭐 해?”
“아, 일어났어요?”
돌아보는 영인에게 걸린 앞치마는 격일로 오시는 가정부 아주머니의 것이었기에 조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았다. 그와 달리 냄비에서 보글거리는 찌개에서는 제법 그럴싸한 냄새가 났다. 늘 시켜 먹던 김치찌개였다. 호기심 어린 눈빛에 영인은 조금은 계면쩍은 얼굴로 말했다.
“저녁이나 해 볼까 해서요. 주방 함부로 써서 미안해요.”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어느덧 규화가 잠든 것을 눈치챈 영인은 즉시 피아노 작업을 중단하고 시간을 보내던 중, 저녁이나 마련해 볼까 싶었다. 보통 식사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거나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데워 먹곤 했다. 냉장고와 찬장을 살핀 영인은 가득 차 있던 재료를 꺼내 어렵지 않게 찌개를 끓이던 중이었다.
“배 안 고파요? 벌써 여섯 시 넘었어요.”
“벌써?”
그러고 보니 허기가 지는 것도 같았다. 규화는 씻고 오겠다며 우선 자리를 떴다. 교활하게도 이제는 빠르게 흐르는 시간에 조바심이 났다. 영인에게 보여 주려 정갈히 갖춰 입었던 옷을 벗고, 샤워를 마친 그는 가운만 걸친 채 내려가려다, 고개를 젓고는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식탁은 꽤나 성대했다. 냉장고에 있던 밑반찬과 더불어 영인의 야심작이 가운데를 차지했다. 그 맛은 일품이었다. 연신 걱정 어린 눈빛의 영인을 안심시키듯 규화는 평소보다 반 공기는 더 먹었다. 제가 한 것이라곤 김치를 썰어 넣고 물 부어 끓인 게 다라는 영인의 말에도 그는 좀처럼 믿지 못했다. 늘 이것만 먹어도 좋겠다는 과분한 칭찬에 더불어 저녁상이 끝났다.
그리고 설거지를 마친 뒤. 두 사람은 TV 하나 없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냈다. 제 왼손을 영인에게 맡긴 채 규화는 때마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마왕>에 오른손을 빠르게 까딱였다. 그리고 반주 위를 노니는 테너의 목소리를 따라 노래의 가사를 흥얼거렸다.
“노래도 잘 부르네요.”
“…이거 치면 오른손이 정말 아파. 마지막에 엄청 빠르게 쳐야 하거든.”
난데없는 칭찬이 부끄러웠다. 질문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는 답변에 영인은 씨익 웃었다. 영인은 독일어를 알지 못했고 당연히 그 가사는 몰랐지만, 제 왼쪽 귀를 물들이는 불협화음의 멜로디는 그 비통한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었다. 언뜻 규화를 따라 콧노래로 반주를 흥얼거리는 영인에 규화가 눈을 깜박였다.
“이 곡이 좋아?”
“그냥 반주가 유독 멋져서요. 직접 반주하면서 하는 노래는 어떨까 싶기도 하고.”
“이걸 반주하면서 어떻게 노래해? 하나 제대로 하기도 벅찬데.”
<마왕>의 핵심은 피아노가 단순한 반주에 그치지 않고 테너의 목소리와 더불어 노래하는 2중주 차원의 연주라는 데 있다. 4분 남짓의 짧은 길이에도 치고 나면 탈력감이 일 정도인데 노래까지 가능할 리 없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규화는, 문득 제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쪽 손, 주물러 줘.”
“마사지해 주면, 쳐 주게요?”
“우선 생각은 해 보고.”
딱 잘라 거절은 않는 말에 영인은 웃으며 오른손을 받았다. 영인이 매만진 손바닥부터 피어오르는 온기에 규화는 나른히 눈을 깜박였다. 얼얼한 왼손으로 반복 재생 버튼을 누르며 그는 다시금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전 짧게 중얼거렸다.
“…꼭 내가 노래를 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네?”
“아냐. 아무것도.”
어리광을 부리듯 규화는 어깨를 으쓱이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영인은 피식 웃으며 규화의 손바닥을 적신 미진한 땀을 닦아 주었다. 규화는 느른히 깜박이며 느슨히 제 몸을 영인에게 기대었다. 영인은 무방비한 규화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편으로 귓가를 때리는 말발굽 소리 같은 조급한 피아노 선율에 마른 침을 삼켰다.
동생들의 어리광에는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늘따라 묘하게 기대오는 그 무게감이 반가우면서도 묘하게 경직되었다. 폭풍전야를 알리는 듯한 멜로디 덕분인지, 유독 오늘따라 나사가 빠진 것처럼 느슨한 규화가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눈을 뗄 수 없었다.
배불리 밥을 먹은 탓인지 무겁게 깜빡이는 눈꺼풀, 그 끄트머리에 인형처럼 곱게 곡선을 그린 속눈썹. 깨끗한 흰자에 더불어 그 위에 짙은 노을을 물들인 눈동자. 졸음에 눈꺼풀이 닫히면, 안타깝다 못해 순간 눈썹을 찌푸릴 정도로, 영인의 시선은 규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마왕>이 끝나고 다음 트랙으로 넘어갔을 즈음, 규화가 감았던 눈을 떴다. 마주한 시선에도 영인이 피하려 들지 않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봐?”
“예뻐서요.”
“…어?”
“눈이, 볼 때마다 예뻐요.”
칭찬치고는 어조가 무심했다. 사실 듣는 규화도 눈 칭찬은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상황이 묘했다. 왼손과 달리 오른손을 맡긴 규화는 거의 영인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서로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빠르게 깜박이는 눈꺼풀을 따라 숨었다 드러나는 눈동자는 이리저리 좌우로 구슬처럼 굴렀다.
“흠…. 난 내 눈 싫어.”
“왜요?”
“그냥, 너무 밝잖아. 눈에 띄고. …기자들이 조롱도 많이 하고.”
“아, 본 것 같아요. 뭐라고 했더라….”
“나 우승 못 했다고 놀리는 내용이었을 걸.”
쑥스러워 무작정 내뱉은 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진심인 모양이었다. 변명처럼 내뱉은 말에 조근조근 살을 붙였다. 그 와중에도 감흥 없는 눈에서 영인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떠오른 기사에 재삼 감탄하고, 또 공감하며 말했다.
“맞아. 금보다 더 아름다운 눈이라고 했었죠.”
“원래 그 나라 애들은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들 많이 써.”
“미안해요. 사실 나는 그 기사에 조금 공감했는데.”
“…응?”
“어떤 보석이나 금붙이보다도 예쁠 거라는 말. 이렇게 가까이서 본 사람 아니면 공감 못 할 걸요.”
낯간지러운 영인의 말에 피식 웃은 규화는 고개를 갸웃하곤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일부러 눈을 느긋이 깜박인 뒤, 고작 두 뺨 앞에 와 있는 영인의 두 눈을 주시한 규화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흠…. 난 네 눈이 더 좋은데.”
규화의 말에 영인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냥 평범하잖아요.”
“그런 게 좋아.”
“가진 자의 여유처럼 들리는데요.”
“그런 거 아냐, …정말이야. 절대 평범하지 않아.”
가까이서 바라본 영인의 눈은 큼지막하지는 않지만 그 테두리는 또렷했다. 가까이 볼수록 그 촘촘한 선이 두드러졌다. 특히 위 속눈썹이 길고 가지런해, 눈망울을 조금 가리긴 하지만 미소를 지을 때면 뚜렷한 눈썹에 아울러 묘한 음영을 자아낸다. 그림자가 질 정도로 뚜렷한 눈썹뼈와 콧대 아래. 웃게 되면 끝이 내려간 순한 인상이 되는 것도 그 탓일까.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왼손을 들어 영인의 눈가를 어루만진 규화는, 조금은 씁쓸한 미소와 더불어 나직이 속삭였다.
“만약 선택할 수 있었다면, 나는 네 눈을 택했을 거야.”
때마침 스피커는 <겨울 나그네>를 노래하고 있었다. 음울한 멜로디를 따라 영인의 눈자위를 쓸던 규화의 손길이 이어 우뚝 선 콧대와 그 아래 입술에 가 닿았다. 마치 낯선 것을 어루어 살피듯 규화는 그 입술을 한참을 매만졌다.
손가락 위로 나지막한 코의, 비강의 호흡이 닿았다. 간질이는 숨은 절대 빨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긋해졌다. 까칠하게 메마른 영인의 입술을 적시듯, 규화의 왼손에 진땀이 배었다. 그 손길에 영인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자리했던 미소가 사라졌다. 비통한 테너 노랫말 뒤로, 규화는 저를 바라보는 선연한 시선 속의 불안을 감지하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나…. 피아노, 그만둘까?”
갖가지의 소리가 이명과 뒤엉켜 위태로운 귀를 넘나들고 있었다. 거실을 채우는 <겨울 나그네>는 어느덧 중반부를 넘고 있었다. 옥타브를 오가는 테너의 절규와 더불어 낮게 깔린 규화의 질문은 불협화음이 되어 영인에게 닿았다.
“넌, 내가 피아노를 안 치게 되면 다신 안 볼 거야?”
영인은 참을 수 없는 이명에 얼굴을 구겼다. 여전히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아 있었고, 태연자약한 얼굴의 규화는 팔을 뻗으면 안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낯설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내가 쇼팽에서 바나흐를 이길 수 있을까?”
“…….”
“넌 나랑 바나흐 둘 다와 작업해 봤으니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 어떻게 생각해? 네 의견이라면 나는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규화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영인은 대답에 앞서 그 의중을 살피려 애썼다.
물론 바나흐는 우습게 볼 만한 적이 아니었다. 리허설을 지켜보면서 그 또한 바나흐에 감탄했다. 서정성이 엿보이는 그의 연주는 큰 덩치에서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섬세했다. 그만큼 소리가 풍부했다. 다소 제멋대로고 정확도가 다르다는 단점만큼, 곡 전체를 이끌어가는 흡인력과 쇼맨십이 독특했다.
무엇보다 인종의 차이에서 오는 체력이 절대적인 강점이었다. 전개부에서 감정을 쏟아도 종반까지 이끌어갈 스테미너가 있었다.
쇼팽 콩쿠르는 3주간 바르샤바에서 펼쳐진다. 레이스에서 연주자의 체력은 가장 중요한 요소다. 게다가 규화의 강점인 견고한 타건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모두 스케일이 큰 곡들이 필요했고, 준비하는 레퍼토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웅장한 소리를 내기 위해선 그것을 소화해 낼 만한 체력이 필수다. 하지만 지금의 규화는 최상의 상태와 요원하다. 어찌 보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보다 더 뼈아픈 패배를 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우승만을 전제하자면 그랬다. 하지만 문규화가 우승을 하든 못하든, 설사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바는 없었다. 문규화는 문규화 나름의 연주를 하면 된다. 그리고 영인은 그런 그를 응원할 생각이었다.
“굳이 바나흐를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콩쿠르의 우승 여부가 실력을 가늠하는 건….”
“영인아.”
문득, 들려온 이름이 낯설었다. 받는 하대야 여태껏 당연했음에도 이름을 직접 불린 경우는 딱 두 번밖에 없었다. 처음 말을 낮추기로 했던 그 호텔 방과 지금. 어조와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고요히 영인을 바라보는 규화의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운 금빛이었으나 분명 이채異彩가 돌고 있었다. 귀가 아닌 가슴으로부터 무분별하게 박자가 쪼개어졌다. 불길했다.
고작해야 사탕 따위로는 잠재울 수 없었던 파도가, 기어이 방파제를 넘었다.
“그날, 무슨 일 있었지.”
문장의 끝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질문이 아닌 단언에도 영인의 입술은 대답 없이 닫혀 있었다. 부정도 긍정도 않은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규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한테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 무슨 일이었냐고. 왜, 그렇게 힘들어했었냐고.”
바나흐의 내한 공연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은 불문율처럼 그날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회피해 왔다. 먼저 물어본 사람도 없이 그냥 없던 일처럼 지나갔다.
각자의 이유는 있었다. 영인으로선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규화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 넌 원래 잘 묻지 않는 편이니까. 내가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난 아니야. 아니어야 할 것 같아.”
“…….”
“다시 한 번 물을게. 그 사람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나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했어? 돈이라도 쥐여 줬어? 아니면….”
“그런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런 분?”
서서히 불길이 일고 있었다. 다시금 흥분하기 시작한 규화에 영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서서히 가닥이 잡혔다. 영인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온건한 말을 골라 뱉었다.
“그런 불쾌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아버지가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규화는 마치 뒤통수를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시선에 초점을 잃었다. 입에서 굴린 단어에 위화감이 일었다. 낯선 언어를 반복해 되뇌듯, 멍하니 영인의 말, 그 파편을 중얼거린 규화가 허탈한 듯 숨을 미끄러뜨리며 웃었다.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진 소리가 났다. 훅 끼친 호흡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영인은 주먹을 나직이 쥐었다. 보이지 않게 한쪽 어금니를 악물었다.
“…좋아, 너에게는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아니었어.”
“괜찮습니다. 전….”
“네가 방금 ‘아버지’라고 감싼 그 사람이, 나한테는 널 어떻게 말했는지는 알아?”
규화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치 제가 모욕을 당한 듯 핏발 선 눈동자에는 분노 그 이상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널 믿지 말래. 그럴 가치가 없대.”
“……!”
“이야기해 보니, 아예 말 통하지 않을 녀석은 아니니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돈을 줘서 돌려보내래. 병원비 등으로 회유하래. 어쩌면 보안상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너한테 감시를 붙이겠대. 그러니….”
순간 규화는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정도 이상의 분노가 낯선 듯 자꾸만 입술을 달싹거렸다. 막상 담담한 표정을 짓는 본인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감정의 요동이 규화를 버겁게 했다.
“…그러니 너에게 너무 의지하지 말래. 나더러 어리석대. 나약하다고. 그 사람은 너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내 라이벌의 공연을 후원하고 악수했던 사람이 날 걱정한답시고 하는 말이야. 이래도 그게 당연한 걱정으로 들려?”
“알겠어요. 됐어요…. 흥분하지 말아요.”
“너를 모욕하잖아! 그런데도…. 너는 괜찮아? 너랑 나를 이간질하려는 거라고. 이 사람은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이대로라면 또 너에게 뭔가 트집을 잡아서 멋대로 헤어지게 둘 거라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게 아버지야? 피만 이어지면 그럴 권한이 있다고 생각해?”
“내게 지금 이 자리가 과분한 건 사실이니까요.”
핏기를 잃은 입술이 내뱉은 대답에 규화의 입술도 하얗게 질렸다. 이로 짓이긴 탓이었다.
“그래요. 나는, 난 없어 봐서 잘 몰라요. 하지만….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날 그렇게 칭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때론 없는 게 있는 것보다 낫다는 말…. 알아?”
낯선 정적이 일었다. 규화의 가슴이 들썩이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규화는 우는 듯 웃는 듯 그 모든 감정이 뒤범벅된 얼굴로 묻고 있었다.
“넌 없어 봐서 나한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라면…. 나도 차라리,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는 거겠지.”
“…….”
“말한 적 없으니 알아 달라고 하진 않을게. 하지만… 나한테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존재야. 네가 그렇게 말한, 아버지란 사람은. 그런데 너는….”
‘아버지’ 고작 그 세 글자를 내뱉기 위해, 규화는 심장이라도 뚫린 것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나보다…. 어떻게 내 앞에서 그 사람을….”
뒤이은 말들은 애석하게도, 영인에게 닿지 않았다.
툭, 하고. 어설픈 현이 퉁겨 나가듯. 영인은 무언가가 제 속에서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깊숙이 묻어 두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살아나 영인의 발목을 붙들었다. 규화의 말을 마지막으로 온 세상을 덮어 버린 이명에 그는 고개를 훅 젖혔다.
높은 천장이 보였다. ‘그 집’의 천장도 이처럼 높았다. 지붕보다 높은 천장까지 피아노의 소리를 담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게 이름을 되찾고, ‘아버지’를 갖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 이 새장처럼 천장이 높은 집에 갇혀 있던, 어리석은 신정훈.
삶에 만약은 없었다. 시작하는 첫 지팡이가 영인을 후려쳤고, 그때 고막이 찢겼다. 피하거나 잘못 맞았더라면. 부질없는 과거였다. 의미 없다 여기면서도 영인은, 규화를 다시 만난 후 계속해서 되묻고 있었다.
‘신정훈’의 이름이었다면 어쩌면, 조금이라도 ‘문규화’와 어울릴 만한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이만, 하죠.”
영인이 비틀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테너는 <겨울 나그네>의 23번. 환상의 태양Die Nebensonnen을 노래하고 있었다. 때마침 창밖으론 점점이 싸라기눈이 세상을 희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디 가.”
규화는 맥이 풀린 표정으로 일어서는 영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가방도 외투도 무엇도 챙기지 않은 채 영인은 위태롭게 현관으로 향했다. 어딘가 이상했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규화 또한 그를 뒤따랐다. 무턱대고 나서려는 그를 붙든 손끝은 차가웠다. 닿은 피부에 흠칫 떠는 영인은 여전히 규화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한테 등 보이지 마.”
“…….”
“가지 말라고!”
결국, 참다못한 규화가 영인의 어깨를 돌려세운 순간, 버티던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영인, 아?”
축이 기울어졌다.
제멋대로 기우는 몸에 영인은 순간 통제할 수 없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얼굴 반쪽이, 아니 몸 전체의 반쪽이 의식의 제어를 벗어났다.
들리지 않았다. 한쪽 눈은 감긴 채, 유일하게 버티고 있는 오른쪽 눈의 시야마저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구역질이 밀려들었다. 현관문 앞에서 주저앉았던 영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화장실로 향했다. 도중에 무릎이 꺾이어 무언가와 세게 부딪혔지만, 그 통증을 미처 느낄 새가 없었다.
무언가를 잔뜩 쏟아낸 뒤에도 이명은 더욱 겹쳐 들었다. 불협화음의 끝. 그 사이를 오가는 규화의 목소리가 조금씩 넘어왔지만, 대답할 새도 없이 영인의 의식은 밑도 끝도 없는 수면 아래로 잠겨 들었다. 두 쪽 귀 모두가 먹어 버린 체험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듣지 못했다.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영인을 붙잡으려는 애절한 울부짖음을, 그 호소를.
영인아, 영인아 제발.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내가 잘못했어. 응? 제발…….
***
영인은 꿈을 꿨다.
꿈속의 영인은 신정훈으로 돌아간 듯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양쪽 귀 모두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울리는 음악 소리는 그의 좌우 귀를 가리지 않고 섬세하게 물들였다.
단순히 청각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보이는 세계 자체가 다르다. 균형 잡히고 좌우가 뒤바뀌어도 아무 문제 없는 일상. 눈을 감았다가 뜬 영인은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익숙한 멜로디가 귓가를 맴돌았다. 슈베르트 즉흥곡 2번. 작품 번호 90-2. E Flat Minor.
잊힌 적 없던 순간이 그의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열한 살. 콩쿠르 대기실. 긴장한 듯 앉아 있는 소년 소녀들. 가장 마지막 순번, 17번. 그리고 앞선 16번의 연주가 영인을 덮쳤다. 바로, 그의 세상이 뒤집혔던 순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일깨운, 이 두 귀 가득한 소리는 다른 누구의 연주일 수 없으니까. 무대 아래, 다음 순번을 위한 대기석에 앉은 영인은 연주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눈을 감았다. 모처럼 들리는 이 스테레오 사운드를 한 마디라도 잃고 싶지 않았다. 숨을 죽였다.
구슬이 흘러가듯 아름다운 선율을 뒤로한 채 어느덧 곡은 단조 스케일로 접어들고 있었다. 마르카토Marcato, 변주부의 강렬한 리듬감은 여덟 살에도, 또 15년 뒤 스물세 살에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있었다. 영인의 마음은 쫓아갈 수 없다는 그 열패감 대신, 묘한 성취감으로 가득해졌다. 영인은 고개를 들어 무대 너머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단 한 순간도 저문 적 없던 뒷모습이 보였다. 피아노 앞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작은 체구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던 꼬맹이. 그 아름다운… 소년.
혹여 수백 번 같은 순간이 반복된다 할지라도 결과는 정해져 있는 듯했다.
고작해야 여덟 살의 연주였지만 제가 평생을 그리워하게 될 멜로디. 두 귀로 들을 수 있었던, 제 평생을 통틀어 가장 전율을 불러일으킨 순간. 단순히 연주의 능숙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편협했던 제 세계를 깨 주었던 작은 아이. 그에 대한 경외심이 가장 순수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규화야.
영인은 그 이름을 크게 부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대신 그는 제 허벅지 위로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규화의 음악을 들음으로써 온전히 충족되는 그 감흥을 서둘러 갈무리했다. 제목답지 않게 철저히 계산되고 정해진 세레나데가 영인의 온몸을 휘감았다. 눈앞을 물들이는 정경은 더욱 섬세해져 있었다. 경쾌한 왈츠. 드넓고 푸른 초원 위를 적시는 빗방울. 때로는 구름으로 물드는 하늘, 이내 다시 하늘을 맑히는 태양까지.
영인이 연주하게 될 그 모든 이야기는 규화를 향해 있었다.
…너한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어. 그러니 제발, 가지 말고 들어줘. 단 한 번, 다시는 없을 유일한 연주니까. 어쩌면 나도 몰랐던, …너에게 바치는 세레나데였던 나의 노래를.
그리고 마지막 순간, 영인의 손바닥에서 피어오른 박수 소리와 함께 꿈은 끝났다.
***
눈을 떴을 때까지도, 영인은 여전히 꿈속인 줄로만 알았다.
이명은 그쳤다. 하지만 여전히 한쪽만이 열린 세상. 흐릿했던 시야가 차차 한 점으로 모이는 데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안개가 걷혔다. 시선 끝에 걸린 규화는 여전히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여덟 살 규화보다 몰라보게 자란 키와 어깨. 은혜와 헷갈릴 정도로 작았던 체구는 어엿이 성인 남성이 되었다. 여전히 예쁘장한 외모지만, 전신을 보면 날렵하고 훤칠하단 느낌이 강하다. 적어도 여자아이로는 절대 오해할 수 없을 터였다.
다만 그 미려한 이목구비만은 변함없었다. 특히 그 눈은. 어두운 병실 속, 규화의 눈은 스탠드의 불빛에 노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깜박임마저 잊고서 영인을 내려다보는 두 눈망울은 비감으로 가득했다.
“…왜, 아무것도 말 안 했어?”
빠져 버린 목적어는 수없이 많은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짐작해야 할지 몰라 영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피아노 소리는 들리긴 했어?”
“…….”
“그래. 넌 늘 나한텐 말 안 하니까. 너나 나나, 마찬가지지.”
아아, 귀 이야기인가. 가닥을 잡은 영인이 눈을 깜박였다. 알아들었다고 해서 할 말은 없었다. 딱히 규화도 영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듯, 쭉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프면 아프다는 말을 해 줘야지. 왜 말을 안 해? …날 나쁜 인간 만들 생각이었어? 내 주치의를 괜히 소개해 준 줄 알아? 넌….”
위태롭게 읊조리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북받친 감정을 털어내려는 듯 규화는 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이럴 거면, …내 아버지란 작자랑 내가 다른 게 뭐가 있어.”
영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잠겨 버린 목소리에 막상 어느 말도 쉽게 내뱉지 못했다. 혀가 딱딱히 굳은 것처럼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규화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네가 이런 상탠 줄 알았다면, 계약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
“그래서, 말 안 했어요.”
규화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두 눈은 침통한 빛 그대로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앞머리를 거칠게 흐트러뜨렸다. 고개를 숙인 그를 따라 결 좋은 머리가 차르르 떨어져 그 모든 시야를 가렸다. 베일을 쓰듯 앞머리로 제 두 눈을 가린 규화는 다음 말을 끝으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네가 정말, …너무 밉다.”
그 뒤로 한동안은 말이 없었다. 영인은 뒤늦게 제 팔에 꽂힌 링거를 살폈다. 병원이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려 봐도 다른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1인실이었다. 너른 실내와 푹신한 침구. 협탁 위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온 수증기들이 영인과 규화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서툰 말로 함부로 위로할 수는 없었다. 영인은 마음만 같아서는 팔을 뻗어 고개 숙인 규화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꽂혀있는 링거가 그를 가로막았다. 답답했다. 입 안을 헛도는 혀에 스멀스멀 이명이 기어올랐다.
“네가 물었었지. 왜 콩쿠르에 나가려 하냐고. …기억해?”
질문하는 말과 달리 규화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긴 공백을 끝으로 울린 규화의 목소리는, 그 이명보다 더욱 작고 여렸다.
“딱 한 번, 인정할 수 없는 우승을 했어.”
“…….”
“내 인생에 다신 없는 충격이었어. 난 당연히 …그 애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나도 듣는 귀는 있었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모든 관객이 환호했어. 그 애의 연주에는, 영혼이 있었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규화는 건조하다 못해 버석거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애는 입상조차 하지 못했지….”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영인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이를 알 리 없는 규화는, 여전히 제 무릎 위에 놓인 왼손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은 낯설고도 익숙했다. 15년간 늘 심장 저변에 묵혀 왔던 해묵은 열패감이 조각조각 파편이 나 버린 마음 위로 스며들었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내뱉는 말들은, 여태껏 건반 위에서도 놀리지 못했던 진심이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애써 다잡는다. 비죽 물기가 솟는다. 깨진 틈새로 돋아난 열등감, 자괴감.…그 날것의 모습이었다.
“이미 난 그때 알았어. 경연이라는 거, 콩쿠르라는 거. 아무 의미 없다는 거. 상은 감동을 증명하지 못하고, 자격도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 부끄러웠어. 싫었어. 이런 거, 받기 싫었어.”
“…….”
“그 이후로도 몇 번을 우승했어. 다행히도 그 아이 같은 사람은 만나지 못했어. 내가 제일 뛰어났어. 하지만, …하지만 전혀 개운하지 않았어. 내가 들었던 그날의 함성을 이기는 반응은 없었어. 성적이 아니야. 나에게는 그런 감흥이 없었던 거야. 영감도, 그 무엇도…. 지금까지 난, 그날 이후로 어떤 자격도 받지 못했고.”
“…….”
“내가 이기지 못한 건, 바나흐 따위가 아냐. 그건….”
새하얗게 질린 왼손 위로 후두둑 비가 내린다. 뿌옇게 어린 수증기 틈새로 고개를 든 규화의 하얀 얼굴에는 비가 얼룩져 있었다. 영인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엔, 차가운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싫었어.”
고스란히 적의를 드러내는 규화 앞에서 영인은 무언가가 제 가슴 밑에서 들끓는 것을 느꼈다. 평소의 나른히 자모음을 떨구던 때와 다르다. 한 글자, 한 글자. 자신을 향한 감정을 실어 나르는 규화의 목소리가 이명보다 더 자욱이 깔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엇일까. 어째서일까. 이 감정은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뺨을 적시는 규화의 눈물을 바라볼수록, 영인의 심장이 요동쳤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명을 뚫고 영인의 마음을 뒤흔드는 멜로디는 E Flat Minor, 아니 그 음률보다 더욱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빗방울이 폭우가 되어 내린다. 또다시 영인의 세상이 뒤집히려 들고 있었다.
“난 네가 싫었어. 싫어야 했어. 너만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평생 이런 감정을 맛보지 않았어도 될 텐데. 너 때문에 다 망쳤어. 넌, 넌… 아름다웠다고? 내가? 웃기지 마. 난 아니었어.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어. 왜…. 왜 그게 너였어.”
“…….”
“이게 뭐야? 왜…. 왜 그러고 있어? 난 평생 널 이길 수조차 없게 됐잖아.”
평생 신정훈을 찾아 헤맸던 마지막 시도. 그 공연이 끝난 무대 위에서 영인은, 아니 그 ‘신정훈’은 아무것도 모른 채 권 교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말했다, 여덟 살의 문규화는 ‘아름다웠다’고.
그 간결한 감탄은 어떤 평론보다 더 규화를 분노케 했다. 우승이라는 멍에에 갇혀 수년을 헤매며 발악하던 저와 달리 모든 것을 초탈했다는 듯 여유로운 영인의 모습에, 규화는 다시 한 번 같은 공간을 도망쳐 나왔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흘러 턱께를 적셨다. 하지만 이번엔, 자신을 달래줄 엄마는 없었다. 멋도 모르고 미국으로 가겠다는 자신을 데리고 갈 아버지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제 손에 쥐게 된 것이라곤, 이토록 우스운 열등감뿐.
억울했다. 모든 게 억울했다. 이대로 영인을 자유롭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권 교수에게 청했었다. 그 어설픈 보안 요원을 제 조율사로 쓰겠노라고….
“난, 나는…. 내 실력대로 정정당당히 널 이기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바뀌어 버렸을까. 분명 미워해야 할, 증오해야 할 대상이었던 ‘신정훈’이 ‘장영인’이 되어 버린 순간 너무나 다른 멜로디가 되어 버렸다. 갑작스레 전조된 선율처럼, 지극히 자신을 아끼는 눈빛과 몸짓에 규화는 다시 한 번 초라해졌다.
저를 향한 사랑을 토해내는 순간에마저. 서로의 몸을 부딪치는 그 쾌감의 절정에서마저 단 한 번도 자신을 원망한 적 없다는 듯한 순하고 곧은 눈빛. 규화는 늘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주한 패배였다.
나는 어쩌면 너처럼 날 사랑하지도 못하고, 또 널 사랑할 수도 없을 거야.
문규화는 늘 장영인 앞에서라면 미숙할 뿐이었다. 그는 신정훈도, 또 장영인도 이길 수 없다. 태초부터 천칭은 기울어져 있었다. 아등바등 노력할수록, 역으로 영인을 궁지에 몰리게 할 뿐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어째서….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기도 중 하나님에게도 내뱉지 못했던 감정의 밑바닥을 들춘 끝은 허탈했다. 그리고 한편 개운하기도 했다. 모든 것은 끝났다. 눈물로 흐려졌던 시야가 차차 개었다. 어느덧 허리를 세우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영인의 눈빛이 두려웠다.
넌 나를 경멸할까, 우스워할까. 스스로 패배자임을 인정한 규화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중얼거렸다.
“난 결국 영원히 널 이길 수 없어. 그래서 네가 원망스럽고, 난….”
“미안해요.”
하지만 긴 침묵을 깬 영인의 목소리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규화의 입술이 멈추었다. 절로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크게 뜨인 금빛 눈동자 속에는 영인이 한가득 들어왔다.
“미안해요. …근데, 정말 미안한 게. 나 너무 기쁘다.”
링거 줄이 부딪치며 무언가가 쓰러진 듯 큰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규화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강한 완력에 이끌려 몸이 무너졌고, 이윽고 영인의 품에 끌어 당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겨든 영인의 품. 자신을 감싼 강렬한 온기에 규화의 몸은 경직되었다.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말들은 귀를 의심할 정도로 심히 믿기 어려운 말들이라 규화는 숨을 들이켰다.
…기쁘다고? 네가? 어째서….
규화는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영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
“난, 당신이 못 들었을 줄 알았거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영인은 표정 변화가 적은 편이었다. 미소를 곧잘 짓곤 했지만, 그 선한 눈매와 입꼬리 경사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완만했다.
지금은 달랐다. 완전히 눈을 접었고, 크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가는 완벽한 환희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우뚝한 콧날을 가로지르는 눈물의 궤적에 규화는 넋을 놓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영인은 울고 있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숨겨서 미안해요. 솔직히….”
영인의 말들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이명에 더불어 눈물로 꽉 찬 비강은 자신의 목소리만을 담기에도 벅찼다. 바르작거리는 규화의 몸을 그러안은 채, 영인은 제 모든 감흥을 쏟아내었다. 영인의 진심 어린 환희 앞에서 그는 넋을 놓았다. 그리고 귀를 의심했다.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기억도 못 할 줄 알았어.”
“난….”
“미안해. 정말 미안해요….”
고작해야 대기실에서 나란히 앉은 게 전부였던 인연이었다. 낮은 의자 때문에 책을 빌려줬던 게 전부. 대화라 할 것도 없이 먼저 말을 건넸던 게 고작.
그 모든 게 하찮았음에도 규화는 기억해 주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유일한 공연을, 그 무대를. 양부에게 힐난 받았던 그 엉망인 무대를, 규화는 귀하게 여겨 주었다. 유일한 청중이 되어 주었다.
터무니없는 감격에 찬 영인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제 품에 안긴 규화를 확인하듯 더욱 강하게 그러안았다.
“그게 내, 마지막 무대였어요. 하지만 나도 우승 따위 안 해도 괜찮았어. 말했잖아요. 다 필요 없었어. 그냥, 문규화가 들었으면 돼. 그게 다였어….”
악보도 잊어버린 채, 손가락이 움직이고 절로 페달을 밟게 했던 그 모든 감흥. 한 치 앞의 미래도 모른 채 기꺼이 마지막 불꽃을 기꺼이 타오르게 했던 모든 근원. 그게 너였다고.
“당신의 연주를 듣고 꼭 전하고 싶은 말이었어. 경연도 무엇도 다 잊어버렸어. 내 머릿속에 이런 게 다 피어났다고. 모든 박자가, 음률이 다 당신으로부터 비롯된 거라고…. 전하고 싶었어.”
설사 규화에게 닿지 못했더라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만 안타까웠다. 처음이자 마지막 감흥이 그렇게 공중으로 휘발되고야 말았다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규화가 말해 주었다. 제대로 닿았다. 닿았다고 했다. …자신을 미워할 정도로.
“정말 미안해요. 이런 모습이 되어 있어서 …미안해요.”
“……!”
“하지만 난, 괜찮아. 다, 보상받은 기분이야.”
이유 없이 단순히 고아인 것만으로, 가난하고 보잘것없다는 이유만으로 받던 적의와 달랐다. 규화의 적의는 자신이 먼저 쏜 화살의 반응일 뿐이었다. 처절히 쏟아놓은 원망의 말들은 도리어 영인에게는 단비가 되었다. 이런 미움과 원망이라면 기꺼이 수긍할 수 있었다.
“…아무 의미 없던 게 아니었어. 그걸로, 됐어….”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가 될 바에야, 차라리 미워했었다면. 그걸로 됐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말해 줘서….”
갑작스레 영인이 끌어당긴 탓에 규화는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난 채였다. 어설프게 허리를 들고서 규화는 그대로 영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움푹 들어간 그의 쇄골에 관자놀이를 누르며, 규화는 귀가 아닌 진동으로 그 모두를 감당했다.
날것의 말, 날것의 감정들. 하지만 가장 진실한 영인의 파편들이었다. 제 귀를 맴맴 도는 목소리들은 규화가 악착같이 쥐고 있던 지난 십수 년의 고통을 보잘것없이 만들었다.
…나의 미움이, 오히려 너에겐 기쁨이 되다니.
또 다른 감흥이고, 연주였다. 저만이 품고 있었다 여긴 멜로디가, 영인에 의해 다시금 변주되고 있었다. 규화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음형이 되어 전신에 울려 퍼졌다.
어느덧, 규화를 쥐고 있던 영인의 팔이 스르르 풀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안겨 있던 규화가 몸을 일으켰다. 마주 본 얼굴은 눈물이란 없이, 평소처럼 고요한 눈빛뿐이었다. 뺨 위에 얼룩져 있던 눈물마저 메말라버린 영인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고, 시선을 피할 길 없는 규화만을 온전히 담고 있었다.
“…피가 나잖아.”
그에 뒷걸음질 친 규화는 시선을 떨구며 볼멘소리를 했다. 링거 바늘이 빠진 자리에서 새어 나온 피로 침대는 엉망이었다. 막상 본인은 무엇이 즐거운지 피를 철철 흘려 가면서도 싱글벙글이었다. 다만 그 앞에서 규화의 마음은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여덟 살 때와 다를 바라고는 없이, 늘 솔직하지 못했다.
“뭘 그렇게 웃어.”
“…그냥요.”
“안 아파?”
“응, 안 아파요.”
대답 대신 입가에 걸린 커다란 호선에 규화는 눈 안에 애써 품고 있었던 마지막 물기를 모두 털어내었다. 옅어지는 열패감 위로, 영인의 싱그러운 목소리가 또렷하게 물들었다.
“하나도, 아픈 줄 모르겠어.”
시야가 맑게 개었다. 규화는 뒤늦게 제 귀와 눈을 가리고 있던 두근거림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귀와 눈이 멀었던 것은, 문규화 자신이었다.
***
호출을 받은 간호사는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빠진 링거를 다른 쪽 팔에 옮겨 꽂는 동안 규화는 말없이 주변을 정리했다. 여태껏 정리정돈은 자신의 몫이었기에, 영인은 살갗을 파고드는 바늘의 이물감보다 눈앞의 생경한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밤은 깊다 못해 이제 곧 아침이었다. 실내등을 끄고 바깥의 여명에 기댄 두 사람은 1인실에 비치된 접객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규화는 영인에게 침대에 누워 있으라 했지만 영인이 고개를 저었다. 링거대를 끌고 가 소파에 나란히 앉은 그들의 무릎 위로 볕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어느덧,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 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기뻐했던 것 같아.”
전기 포트로 미지근하게 데운 물을 머금어 마른 입술을 축인 뒤, 규화는 입을 열었다. 영인의 오른편에 앉아 나직하게 말을 잇는 그의 얼굴이 서서히 빛을 더해 갔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깃든 빛은 마치 후광처럼 그를 빛내 주었다. 그래서인지, 규화가 토해 내는 그 모든 말들이 영인에게는 시편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처음엔 행복했을 거야.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다 소용없어졌겠지. 화려한 생활이 그리워졌을지도 몰라. 엄마는 무척 아름다운 사람이었거든. 나 하나로 희생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
“새 인생을 시작하려면 내 존재는 거추장스러웠겠지. 어차피 양육비는 받고 있던 데다가 아버지한테 간다고 하니까. 잘됐다 싶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하자면 그래.”
사랑이 지나가고 남은 자리는 하나같이 더럽고 지저분했다. 그 결실로서 남은 아이마저 마찬가지가 될 때도 있는 것이다. 문규진은 아이를 원했고 윤선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한국이 싫다는 아이를 데려간 건 문규진이었고, 아이는 그 손을 잡았다. 결국 그 뒤로 모자는 다신 만날 수 없었다.
영인은 생각했다. 혹시, 제 부모도 그랬을지 모른다. 다만 그 시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찾아온 것이다. 사람마다 행복의 크기와 불행의 비율, 그리고 그것을 견디는 인내심의 크기는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니까. 속삭이듯 말하는 규화의 목소리를 제 한쪽 귀로 담으며, 영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규화의 파편만이나마 공감할 수 있다는, 그 이기적인 행복에 나른히 잠겼다.
“내가 부모에게 받은 이득이 사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이게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어.”
“…….”
“하지만 아까는, 내 말이 지나쳤어. 정말 미안해.”
“사과하지 말아요. 지나쳤던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긴말을 맺은 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규화의 눈은 평소의 빛을 되찾았다. 긴 밤이 지나고 모습을 드러낸 태양처럼 고요한 금빛이었다.
그 찬란한 빛에 눈을 가늘게 뜬 영인이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르는 새 당신을 많이 부러워했나 봐.”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규화는 요구도 강요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스스로 마음을 드러냈듯 영인 또한 제 속내를 내보일 차례였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처음이었다. 제가 품었던 마음을 송두리째 누군가에게 드러내기는.
“…아버지가 갖고 싶었거든요. 아버지의 이름을 닮은 이름도, 아버지의… 얼굴도.”
아무것도 모르니까. 담담한 목소리에 규화는 욱신거리는 코끝을 찡긋거렸다. 이제는 울다 지쳐 메말라 버린 줄로만 알았던 눈가에 다시금 습기가 어렸다. 어딘가 제대로 고장 난 듯했다. 한 번 새어 나오기 시작한 감정은 깨진 파편 위로 자꾸만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는, 음….”
“…….”
호흡을 가다듬었다. 파르르 내뱉은 한숨에 물기가 어렸다. 주저하며 내뱉은 말에 둘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어둠이 물러가고 어슴푸레 돋아오는 시야 속에서 또렷해진 규화의 얼굴은 인자했고 너그러웠으며, 흔들림 없이 또렷했다.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어. 그냥….”
“…….”
“천천히 말해 줘도 돼. 말해 주기만 한다면.”
규화의 목소리는 지극히 작고 여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명을 뚫고 온전히 닿을 정도로 명료했다. 마치 규화의 음악 같았다. 그래서 영인은 허리를 곧게 세웠다. 최대한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러니까, 충분히. …오래 내 곁에 있어 줘.”
묘한 어리광을 부리는 규화의 하얀 뺨은 일출과 더불어 붉게 빛났다. 몹시 사랑스러운 빛이었다. 순간 영인은 제가 눈이 먼 게 아니라 귀가 먹어 다행이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이기적이고 도리에 맞지 않는 생각이었으나, 일순 품었던 후회를 무르고 그는 기꺼이 웃었다.
늘, 문규화 앞에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게 순리가 되어 줬으니.
“…….”
대답 대신 영인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규화의 왼손을 쥐었다.
규화의 굳은 손목이 제 손을 쥐는 온기에 차츰 풀렸다. 그의 고개가 영인을 향해 돌아갔다. 제 이마 언저리를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영인은 제가 쥔 왼손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규화가 제게 했던 질문을 고스란히 돌려주기 위해서.
…피아노를 관두면, 너를 다신 보지 않을 거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내 두 눈이 멀쩡한 이상 어디 있든지 간에 널 찾게 될 거야. 그리고 다시 널, 사랑하게 되겠지. 듣지 못해도 너의 음악을 듣고, 심지어 보지 못해도 지금의 너를 그리워하겠지.
그러하겠다는 선언이나 맹세가 아니었다. 이미 그러한 바였다.
어느덧 같아진 체온 속, 가느다란 손가락 끝, 그 손톱 위에 스치듯 입술을 비비며 영인은 제 고백을 흘렸다. 일상적인 아침 인사와 다를 바 없이.
“…그럴게요.”
그 인사 덕일까. 그런 영인을 바라보는 규화의 눈에는 여태껏 치밀어 보지 못한 낯선 감흥이 밀려들었다. 새로운 아침이었다. 온전한 원형을 띈 태양빛을 등지고 선 규화의 눈에서, 시린 금빛이 샘솟았다.
***
거실의 너른 창으로 노을이 너울지고 있었다. 스툴 앞에 앉은 규화는 하얀 건반을 물들이기 시작하는 노을빛을 바라보았다. 그 빛이 이내 규화의 하얀 손등에까지 닿았을 때, 규화는 제 왼손으로 발라드의 시작을 알리는 C의 옥타브를 눌렀다. 가장 기본이 되는 울림에 규화는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렸다.
‘엄마는 언제 올 건데?’
울먹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는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금방 갈게. 그러니까 아빠 말 잘 듣고 착하게 있어.’
그게, 규화가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당부였다.
콩쿠르가 있었던 그해 가을이었다. 규화는 미국행을 택했고 엄마와 이별했다. 나이에 비해 체구는 작았어도 어른스러웠던 아이는 열네 시간의 비행을 의젓하게 참아냈다. 엄마를 기다리기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무척이나 보고 싶을 때도 아이는 의연하게 참았고, 주변에서는 입을 모아 아이를 칭찬했다. 착하고, 어른스럽다고.
착하게 지내면, 엄마는 분명히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미국에서의 낯선 계절을 지냈다. 아빠는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제 아버지가 맞았다. 규화와 같은 밝은색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아빠는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그 대신 여러 사람이 규화 곁에 머물며 그를 돌봤다. 보모와 가정 교사들, 레슨 선생님. 들리는 낯선 단어들과 여러 빛깔의 사람들 속에 아이는 자연스레 말수가 적어졌다. 아버지와 단둘이 맞이하는 저녁은 거의 드문 일이었다. 말수가 없는 부자의 식탁은 적막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규화에게는 그마저도 달가웠다.
그러다 규화가 처음으로 미국 내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한 날 부자는 드문 외식을 했다. 호화로운 스테이크는 입에 조금 질겼으나 무척이나 신이 나 있었던 규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기분에 힘입어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언제 오느냐고.
그 말 하나에 아빠의 얼굴에 희미하게 어려 있던 미소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엄마는 잊어라.’
‘…….’
‘엄마는 너를 버린 거야.’
아이는 부정도 동의도 못 한 채 그저 입을 다물었다. 우승의 기쁨도 무엇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규화는 차갑게 식은 스테이크를 한참이고 우물거렸다.
그를 기점으로 규화가 지니고 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은 마치 계절을 따라 빛을 바꾸는 나무처럼 자연스럽게 퇴색되었다. 유명인의 아들이라는 점은 여러모로 편리하기도 했다. 스스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알아서 주변에서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왠지 그들 앞에선 약해지기 싫어 규화는 ‘엄마’를 목소리로 내뱉지 않았다.
엄마의 얼굴이 보고 싶으면 다른 자료를 뒤지면 됐다. 여덟 살 마지막, 그때 본 엄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지만 자취는 찾을 수 있었다. 화려한 옷과 화장으로 치장한 엄마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눈동자를 빼면 그녀와 꼭 닮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규화는 생각했었다.
엄마는 오신다고 했어. 그러니까 올 거야.
그렇게 한 해가 지났다. 다시 가을이 왔고, 또다시 가을이었다. 몇 번의 가을을 지나고 겨울을 버티며, 규화는 엄마가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버릇처럼 엄마의 이름을 검색한 어느 한국 사이트에서, ‘윤선화가 재혼한다’는 기사를 봤기 때문이었다.
헤드라인만 보고 아이는 인터넷 창을 껐다. 아빠에게 이 사실을 아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답이 돌아올까 봐 두려워 마음속에 묻기로 했다. 엄마 이름을 검색하는 규화의 버릇은 그날 이후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오히려 두려워서 인터넷을 멀리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5월 초입. 국제 콩쿠르를 위해 이동한 베를린의 호텔에서 규화는 무척이나 심심한 생일을 보내고 있었다.
외롭다 못해, 충동적이었다. 규화는 호텔의 컴퓨터를 켜 잊고 있던 버릇을 되살렸다. 몇 년 만이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엄마의 이름을 검색한 아이는 그 이름 석 자 앞에 붙은 한자가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 아래, 엄마의 생일에서 작년 어느 날짜까지가 닫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날짜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반년도 전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 한국어는 규화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문장이었다. 결국 그 말뜻을 깨달은 규화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벌게진 눈으로 그로부터 웹상에 올라간 모든 에피소드를 찾았다. 이미 그들 속에서 규화는 이름은 없지만 유명인이었다.
윤선화의 인터뷰를 모두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결혼의 실패. 미국에 있는 남편과의 소송. 자신의 아이가 보고 싶다는 애타는 절규. 변모된 모성은 아이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 재기를 꾀했지만 뒤이어 그녀는 몰락했다. 실의에 빠진 그녀에게 따라붙은 기사 속 단어는 약물 중독, 그리고….
규화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늘 바쁜 아버지는 전화를 거의 받지 못했으나, 연이은 부재중 통화에 다소 불쾌한 목소리로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사정한 끝에 그가 답했다. 무척이나 차분한 목소리로.
- 알고 있었다.
‘…왜.’
- 굳이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야.
‘…그래도 내 엄마였어요.’
- 말했지 않니. 널 버린 여자야. 굳이 네가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
‘…….’
- 잊거라.
냉정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규화는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과연 어떤 정신으로 무대에 섰는지 규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연주하는 내내 이를 악물다 못해 피가 났던 입 안에서 느껴진 그 찝찔한 미각만큼은 남아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슬퍼서 울거나, 하늘로 돌아간 엄마를 기리는 감성적인 연주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연주는 더욱 정교해졌다. 그때 처음, 견고한 벽이 세워졌다.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잃은 규화는 독립을 선언했다. 파리 음악원 입학을 핑계로 분가한 것도 이 일이 계기였다. 프랑스에 기거하면서부터 규화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청소년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두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어머니의 이름을 묻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절대 울지 않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이 또한 죗값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정조차 하지 못했던 질문이 자꾸만 고개를 들이밀었다. 만약, 내가 계속 한국에 머물렀다면. 미국에 가 버리겠다 떼쓰지 않았다면, 엄마는….
“…….”
삶을 지나온 모든 풍파를 이유로 따져 드는 것은 비겁했다. 부친도, 모친도, 그리고 영인도. 그들도 그들의 역사 위주로 굴러갈 뿐이다. 스칠 때마다 궤도가 바뀌는 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라면 자연스럽게 겪어야 할 일들이었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지금 보이는 세상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규화는 영인을 붙들어야 했다. 이대로는 놓칠 수는 없었다. 재회하는 데만 해도 15년이 걸렸으니까. 다음이 언제가 될지,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규화는 모른 척 권 교수에게 제안했고, 그 연구실 안에서 영인을 다시 만났다.
왜 장영인이 되어 버린 건지. 신정훈은 뭐였는지. …귀와 손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묻고 싶은 것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러 참았다. 쉬이 제 속내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영인 앞에서 규화는 완전무장을 한 스스로를 부끄러이 여기는 한편, 실컷 제 연주를 퍼부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가장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규화는 그런 제 곁에 영인만은 청중으로 둘 예정이었다. 영인이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이 응당 영인에게 돌려줄 보복이라고 생각했다.
그 감정에 다른 이름이 붙는 것은, 부차적인 차원의 일이었다.
…1 주제를 넘어 장조로 도약한 규화의 손이 매끈하게 건반 위를 오르내렸다. 화려한 아르페지오를 이끄는 와중에도 규화의 두 눈은 굳게 감겨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프레스토로 진입한 순간. 온전히 모습을 감춘 태양 대신, 규화의 두 눈이 어둑해진 건반을 내리비췄다. 미스 터치 하나 없는 그 열렬한 연주가 홀로 남은 집안을 가득 일구었다. 마치, 높은 천장을 넘어 누군가에게 닿길 바라기라도 하는 듯이.
***
병원 생활은 영인의 청력 보호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평상시 그의 생활은 음악을 비롯한 소음과 늘 함께였다. 반면, 가끔 가습기가 물이 부족하다며 내뱉는 기계음이 시끄러울 정도로 병동 생활은 고적했다.
사실 분에 넘쳤다. 너르디너른 1인실 VIP 병동은 제 자취방보다 넓었다. 청소하는 직원들을 볼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던 영인은, 하루는 용기를 내어 간호사에게 물었다.
“병실을 옮길 수는 없을까요?”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세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병실을 옮기고 싶다는 영인의 말에 간호사들은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무언가 잘못이 있다면 제발 용서해 달라는 눈치였다. 영인은 고개를 저으며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악명 높은 병원식도 입맛에 적당히 맞았다. 저염 식단은 엄밀히 말해 맛있다 하기는 어려웠지만, 영인은 애초에 입맛이 무던한 편이었다. 그렇게 의식주가 갖춰진 병원 생활은 약간의 심적 부담만 제외한다면 완벽했다.
다만 유일하게 거슬리는 게 있다면 서툴기 짝이 없는 간병인이었다.
마치 영인이 정해진 시간 규화에게 들렀던 것처럼, 이제는 규화가 매일같이 병원에 들렀다. 영인은 연습이나 하라며 일침을 놓았지만 그다지 효험은 없었다. 오전에 꼬박꼬박 연습을 마치고 온다는 말과 그 뒤에 덧붙이는 항변 때문이었다.
“내가 내 돈으로 병원비 내서 들르겠다는데 왜.”
“그래서 1인실을 쓴 겁니까?”
“귀가 안 좋은 환자한테는 조용한 게 우선이지. 2인실만 돼도 엄청 시끄러워.”
고요가 중요하다며 강조하는 규화의 목소리가 영인의 일상 가운데 유일한 소음이 되어 주었다. 물론 영인은 그 소음이 무척이나 즐거웠고, 또 사랑스러웠다.
문규화는 그다지 훌륭한 간병인은 아니었다. 애초에 영인은 규화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지 않았다. 한다면 고작해야 음료수를 가져다주거나 말동무가 되어 주는 것. 그마저도 여태껏 누군가를 돌본 적이 없는 티가 났다. 도련님은 도련님이었다. 마치 병원 놀이 소꿉장난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규화는 묘하게 신이 나 보였다.
게다가 올 때마다 양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왔다. 보통 늦은 점심 식사였다. 어디서 사 왔는지 꼬박꼬박 찌개와 밥을 짊어지고 와서 여태와 마찬가지로 함께 밥을 먹었다. 아마도 입원 첫날 나눠 먹었던 병원 밥맛에 대단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주는 그 마음이 고마운 한편 이유 모를 웃음도 났다. 그 와중에 서툰 건 영락없어서, 오늘도 찌개를 옮기다 테이블에 국물을 한바탕 엎질렀다. 황급히 티슈로 닦아내고 나니 찌개 국물은 딱 먹기 좋게 식어 있었다.
“병원 밥 나오는데, 뭐 하러 무거운데 손목 아프게 들고 와요.”
“여기 밥 맛없잖아.”
“병원 밥은 원래 다 그래요. 집에서 편하게 먹지.”
“…저번에 사 온 육개장이 좀 더 나았던 거 같아. 그치?”
이명의 근본적인 원인 및 치료 방법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기본 처방은 상식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생활에 더불어 충분한 수면, 덧붙여 저염식 위주 식단을 권장한다. 물론 규화가 사 오는 찌개의 나트륨 수치는 그 기준을 몇 배수 초월했다.
다행히도 하루 한 끼 정도의 일탈은 주치의도 눈감아 주었다. 대신 국물은 일절 금지. 영인은 건더기만 열심히 골라 먹었다. 규화는 그 대신 국물에 밥까지 쓱싹 비벼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작은 머리통을 바라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 영인은 빙긋이 웃었다. 아무래도 좋기는 했다. 혼자 먹는 밥보다 둘이 먹는 밥이 맛있는 건 당연했으니까. 게다가 늘 입맛이 없다고 투정인 규화는 영인과 함께 먹을 때면 그 말이 무색하도록 먹성을 보였다. 체중을 불려야 할 규화를 위해서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함께 한 점심이 달콤할수록 혼자 먹는 아침과 저녁은 맛이 없었다. 규화에게는 비밀이었다. 그저 허기를 달랠 뿐이었던 밥에 호불호를 느끼다니. 사소하지만 무딘 감각으로 일상을 견디던 영인으로서는 큰 변화의 징조였다.
“맛있지?”
“네.”
“거봐.”
…하지만 그게 다 뭐라고.
뿌듯해하는 규화의 얼굴을 보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밥알 한 톨까지 싹싹 비우는 모습을 보자면 영인은 제가 다 배부른 기분이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나면 두 사람은 한가로이 잡담했다. 규화가 사 들고 온 과일 주스를 빨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눴다.
다 큰 성인 남자 둘이 부둥켜안고 한바탕 울어 버린 그날 새벽 이후, 규화는 눈에 띄게 말수가 많아졌다. 처음 레슨을 시작하고 고작해야 인사가 전부였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규화는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규화는 영인이 묻기도 전에 제가 살아온 추억 곳곳을 말해 주었다. 8살, 처음 디뎠던 미국 땅에서의 생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신변잡기 하나하나가 영인에게는 그저 귀하고 소중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둘씩 그 이야기들을 모으다 보면, 보다 섬세하게 규화를 담아내고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아직도 발라드 1번 만드는 중이에요?”
“응.”
“오랜만에 듣고 싶다. 저번 아트 센터 때가 마지막이었는데.”
오늘의 주제는 쇼팽 레퍼토리였다.
각 라운드에서 연주할 레퍼토리는 이미 오래 전에 정해졌다. 전부 기존에 연주해 본 곡들이었다. 하지만 곡을 연주할 줄 아는 것과 곡을 소화하여 자신의 곡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단순히 악보를 외우고 건반을 치는 일은 누구나 가능하다. 그에 반해 연주할 곡의 테마를 잡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관통하는 ‘서사’를 만들어 내는 데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전문 연주자가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고난이었다. 그 진지한 푸념을 규화는 마치 참새가 재잘대는 듯한 말투로 조잘대며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는 너무 갑자기였고…. 지금은 그것보단 많이 만들었어. 부분부분 연습 중이지만…. 오늘도 2 코다 부분 치다 왔어. 알지?”
규화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마치 스툴에 앉은 듯 허리를 펴고선 영인의 침대 위에 제 양손을 현란하게 놀렸다. 발라드 1번의 하이라이트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 Presto con fuoco. 말 그대로 정열적으로 빠르게. 클라이맥스로 치솟는 그 화려한 연주를, 규화의 손가락이 마치 건반 위를 노닐듯 매트리스 위에서 열심히 재현해 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궤적을 보기만 해도 영인은 공간을 가득 메우던 그 울림을 그려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감상과 달리 규화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규화가 앞머리를 후, 불고는 양손의 새끼와 엄지를 넓게 벌리고서 시트를 연달아 두들겼다.
“도약할 때 소리가 손끝에 잘 안 붙는 느낌이라. …이어지는 옥타브에서 원하는 만큼 소리가 안 나와. 체력 문제인가 싶기도 한데. 그냥 마음에 안 들어.”
“손목은 괜찮아요?”
“…오늘만도 너 그거 벌써 세 번째 물어.”
“그럼 일곱 번은 더 물어봐야겠다.”
자연스럽게 걱정이 잇따를 수밖에 없었다.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영인의 눈동자는 사뭇 진지했다.
불행과 다행함이 반비례하듯, 영인이 입원한 동안 규화의 손목은 꽤 차도를 보였다. 조심스럽게 연습 시간을 늘려가고 있다는 말에 안도하면서도, 영인은 익숙하게 규화의 왼쪽 손목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돌아가서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나 알아서 잘해.”
“알아서 잘해서 건초염까지 나고. 밥도 안 먹고.”
지금의 영인으로서는 이 손목 마사지가 제 간병인에게 돌려줄 수 있는 최대한의 비용이었다. 재차 조심하라며 당부하는 그의 말투와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지나치게 걱정스러워, 규화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눈엔 아직 나 여덟 살이지?”
“이렇게 징그럽게 큰 여덟 살도 있어요?”
“징그럽다니, 무슨. 나 엘레강élégant하다고 난린데. 기사 봤다며?”
“…아기 때가 더 귀여웠어요.”
“맞아. 누가 그래서 자기더러 형 말고 오빠라고 부르긴 하더라. 예쁘긴 예뻤나 봐.”
“…….”
애초부터 영인은 말싸움엔 젬병이었다. 힐끗 째려보는 영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것을 확인한 규화가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활짝 웃었다.
“패배자의 뒤끝이 버무려진 도발이라고 생각해.”
“…진짜.”
“알았어. 농담이야, 알았어! 아!”
***
그 평온한 생활도 열흘이 지나니 지루해졌다. 영인은 슬슬 좀이 쑤셔 왔다. 천성에 이런 여유로운 생활은 거리가 멀뿐더러, 육체적으로는 좋다 해도 심적으로는 그리 편치 않은 이유가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제게는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몸이 편안해지면 편해질수록 공들여 일깨운 감각은 무뎌질 터였다. 서툴게 감기 시작했던 동선이 그나마 들어줄 법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무리한 데 규화와의 트러블이 겹쳐 입원하고 말았다. 이제는 딱지가 떨어지고 아문 지 오래인 손끝을 매만지며 영인은 초조함을 달랬다.
오전 회진을 도는 의사에게 넌지시 물어보아도 추후 보호자 분과 상의하겠다는 말뿐이었다. 우스웠다. 이미 성인인 환자에게 무슨 보호자와의 상의가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문규화가 제 보호자로 지칭된다는 사실이 묘하게 간질거려 영인은 길게 따지고 들지는 못했다.
결국 영인은 그날 규화에게 퇴원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생각보다 규화는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다만 조건은 있었다.
“이런 것까진 필요 없어요.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큰 병 맞지. 그럼 아냐?”
“…….”
환자복을 입어도 드러나는 영인의 너른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퇴원을 앞두고 영인은 대대적인 검사를 받기로 했다. 청력 검사야 기존에 주환에게서 종종 받아왔기에 낯설지 않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MRI를 통한 정밀 검사는 실로 몇 년 만이었다. 게다가 전신은 처음이었다.
영인 스스로도 자부하기 어려운 몸 상태가 어떻게 나올지 결과도 두려울뿐더러 그에 미칠 규화의 반응도 무서웠다. 마치 죄다 찍은 시험의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이라도 된 듯 영인은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규화는 의연히 그를 달랬다.
“사내 복지라고 생각해. 원래 입사하면 건강 검진 같은 거 하잖아. 내가 너무 늦은 거지.”
어떤 건강 검진이 MRI까지 찍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규화는 막무가내였다.
“조건 미달이면 저 잘리나요?”
“…말했잖아. 잘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미소로 자신의 답변을 일축한 규화에게 영인이 이길 방도는 없었다. 누가 패배자라는 건지. 애초에 영인은 단 한 번도 규화를 이긴 적이 없었다. 검사실에 들어가는 영인의 등 뒤로 규화는 불공정 계약의 단초를 작게 읊었다. 물론 영인에겐 들리지 않게.
“…대신 계약 기간이 늘어날지도 모르겠지만.”
***
검사결과는 어찌 보면 좋았지만 달리 보면 좋지 못했다. 머리부터 허리 위까지, 상체 곳곳까지 MRI를 찍어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우려했던 청신경 종양 등의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미 오래전에 손상된 청신경의 상태는 여전했으며, 다른 한쪽 귀도 청력이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오른손 문제는 검진 결과 이상 소견이 없었다.
결국 영인에게 할 수 있는 처치는 따로 없었다. 게다가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여기까지 나빠진 청력은 복구 불가능하다는 답변에 규화는 무척 실망했다. 정작 장본인인 영인은 숙지하고 있던 사실을 재차 확인 사살당해 편치 않은 기분을 뒤로하고 오히려 규화를 다독였다.
일반인이라면 조금 불편하고 말 정도지만 영인은 음악을 하고, 또 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꾸준한 약물치료를 전제로 주치의를 포함한 셋이 논의한 끝에 퇴원이 결정되었다.
영인의 퇴원을 앞두고 규화는 몹시 안절부절못했다.
지난 보름간, 규화는 솔직한 심정으로 영인의 요양 생활을 몹시 즐기고 있었다. 영인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던 평소와 달리, 정해진 시간에 마음 놓고 가면 영인이 늘 같은 자리에서 반겨 준다는 사실이 새삼 기분 좋았다. 함께 지내면 더욱 즐겁고 편하겠지. 아픈 영인을 돌봐준다는 핑계는 무엇보다 그럴싸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규화는 요사이 예전의 연습량을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하루에 세 시간 정도 이어질 그의 연주는 소음에 취약할 영인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칠 터였다. 영인의 상태를 아는 이상 무턱대고 함께 살자고 권유할 수는 없었다. 유독 울림이 훌륭하다고 좋아했던 높은 천장과 목재로 된 집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이윽고 영인의 퇴원일, 규화는 늘 가져오던 먹거리가 아닌 백화점 쇼핑백을 여럿 들고 나타났다. 쇼핑백을 열어 본 영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종이봉투 속에는 갈아입을 옷가지들이 들어 있었다. 단순히 위아래 옷만이 아니었다. 코트부터 해서 상, 하의는 물론, 양말에 심지어 속옷까지. 가격표는 없었지만 하나같이 고급이었다.
패션과는 거리가 먼 영인도 단번에 눈치챌 정도였다. 목을 감싸는 천의 촉감이 남달랐다. 코트는 규화가 늘 입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차르르 윤기가 떨어졌다. 과연 얼마나 할까, 물어보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
“와, 잘 어울려! 진작 이렇게 입었어야 하는데.”
“흠….”
“어때, 마음에 들어?”
“네, 당연히….”
영인은 번듯한 새 옷이 영 어색했지만, 그에게 선물한 장본인은 대만족한 모양이었다. 규화가 마치 인형 놀이를 하듯 제 취향의 옷을 영인에게 입혀 보고 나니 새삼 남다른 그의 체격과 외모가 드러났다.
규화 앞에서 영인의 차림새는 극과 극뿐이었다. 타고나기를 어깨와 광배근이 발달한 영인은 기성복 정장을 사면 자신에겐 늘 어정쩡한 치수의 상의만 입어야 했다. 하체도 마찬가지였다. 허벅지 두께나 다리 길이에 맞추면 허리가 남아돌아 매무새가 어색해졌다. 차라리 평소에 입고 다니는 편한 캐주얼 차림이 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규화의 눈썰미로 고른 세미 정장은 영인의 몸 선을 따라 옷맵시를 완벽히 받쳐 주었다. 게다가 요 며칠 병원에서 요양한 덕분인지 그간 날렵해졌던 턱선에도 살이 붙어 보기 딱 좋았다. 다만 아직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맘에 걸리는지 규화는 이모저모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왁스까지 칠할 기세였다. 그 허리를 잡아 말리며 영인은 재차 물었다.
“정말 갈 거예요? 한참 먼데.”
“응. 가야지.”
“날도 추운데. 버스도 갈아타야 해요. 괜찮겠어요?”
“알겠으니까 그럼 어서 가자. 오늘 하루 일정 바쁜 거 알잖아.”
빼먹은 마지막. 저와 같은 브랜드의 장갑을 영인에게 건네며 규화는 환하게 웃었다.
용케도 매니저와 타협했는지 규화는 하루 동안의 휴가를 얻었다. 흔치 않은 기회라 오늘 하루는 바쁠 예정이었다.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하는 영인 곁에서 규화가 물었다.
“미리 연락 안 하고 가 봐도 괜찮아?”
“그런 거 필요 없는 분이에요.”
규화가 퇴원과 더불어 임시 휴가를 허락하며 영인에게 내건 나머지 조건 중 하나는 김포 공방에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거절할까 싶었던 우려와 달리 영인은 선뜻 수긍했다.
병동 생활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인데, 규화는 여태껏 피아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영인은 그런 규화에게 한 번쯤 그 작업 현장을 보여 주고 싶어졌다. 연주가로서 자신이 만지는 그 악기의 뼈대를 보는 경험은 남다를 테니까.
물론 생각만 했을 뿐이지 정말 데려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야무지게 안전벨트를 하고 창밖을 바라보는 규화의 옆얼굴을 보며 영인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렜다.
두 사람은 터미널 근처에서 적당히 내렸다. 택시 기사가 더 안쪽까지 들어가면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굳힌 영인과 달리 규화는 알았다 답하며 흔쾌히 수긍했다.
한적한 버스 터미널, 두 사람은 먼지 가득한 벤치에 잠시 걸터앉았다. 영인은 서둘러 차 시간을 확인했지만, 안타깝게도 버스는 고작 5분 전에 터미널을 떠난 모양이었다. 유독 길었던 배차 시간을 떠올리자 영인은 난감해졌다.
결국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로 했다. 고작 동행인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 오고 가던 길이 새삼스러워졌다. 유독 고즈넉했던 들판이 낯설었다. 막아서는 건물 하나 없는 덕에 두 사람은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서며 걸어야 했다. 새로 산 코트는 따스했지만, 귓가에 윙윙 스치는 바람 소리는 매서웠다.
“괜찮아요?”
“응.”
“그냥 기다릴 걸 그랬나.”
“괜찮다니까.”
영인은 동행인을 힐끔거리며 붉게 변한 코끝을 살폈다. 아무리 따사로워졌다고 한들 겨울바람은 차갑다. 차 없이 이토록 오래 걸은 일이 얼마 만일까 싶어 영인이 자꾸만 눈치를 살폈다.
규화는 그가 저를 보는 눈이 꼭 걸음마 하는 아이를 보는 눈빛 같아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어이가 없었다. 지금 환자가 누군데.
“나 스물넷이거든. 여덟 살 아니고.”
“언제 그렇게 시간이 지났어요.”
“그러는 너는.”
“이제 스물일곱이네요.”
“…뭐, 형이라고 불러달라는 거야 뭐야.”
가벼운 농담처럼 건넨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본 영인의 뺨이 바람 탓인지 살짝 붉어 보였다. 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눈동자에 규화는 놀랐다.
뭐야, 말 놓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형이라고 부르기야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반년 가까이 하대하며 지낸 탓에 이제 와 새삼 형이라 부르기는 묘하게 낯간지러웠다. 뺨을 긁적이던 규화는 이내 이어갈 말을 찾지 못한 채 묵묵히 따라 걸었다.
시골길은 고적했고, 덕분에 두 사람 사이를 맴도는 침묵도 어색하지 않았다. 높은 건물 하나 없이 탁 트인 도로 덕분에 머리를 누르는 하늘은 유난히 드높았다. 먼바다로 날아가는 새를 향해 규화가 고개를 들자, 결 좋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며 흩날렸다. 그 모습을 감상하듯 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영인이 긴 침묵을 깨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트럭 서 있는 곳 근처예요.”
하지만 규화가 먼저 발견한 것은 표지가 아닌 소리였다. 안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기계음은 음악이 아니었다. 음악이 태어나기 전, 건반을 다듬는 소리. 그 나무를 다듬는 소리에 뒤이어 은은한 향이 그를 반겼다.
겨울의 건조한 대기 속 매캐한 담배 연기, 하지만 그를 이기고 드러나는 나무의 향.
피아노는 해머를 이루는 양털과 부속, 현을 담당하는 강철 외에는 대부분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가공된 피아노와는 다른 원초적인 향이 서늘한 공기 사이를 뚫고 규화를 이끌었다.
“시간이 이른데 누구람?”
작업하던 공방 주인은 창고가 열리는 소리에 어련무던히 물었으나, 돌아본 곳에 선 영인의 낯선 옷차림에 의아스레 눈을 크게 뜨고는 물었다.
“뭐야 너는. 그따위로 입고 와서 무슨 일을 한다고.”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담배를 또 태우세요. 이 겨울에.”
“너 없는 동안에야 실컷 피우지. 오는 거 알았으면 안 했다. …그나저나 무슨 손님이냐?”
“전에 말씀드렸던 제 클라이언트에요.”
“아, 네 물주?”
“…선생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사뭇 짓궂은 농담에도 규화는 살가운 인사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영인과 대거리를 하면서도 신 씨의 시선은 규화에게로 가 있었다. 대놓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길에도 규화는 태연자약했다. 그렇다고 과하게 본인을 낮추지도 않았다.
어째 오늘은 두 사람 입장이 서로 바뀐 듯했다. 택시 기사에게도 그렇고 지금 신 씨에게도. 규화가 유독 어른들에겐 공손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인은 기분이 묘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에 비해 규화는 차분히 신 씨와 인사를 나눴다.
“날이 춥지요.”
“아뇨, 괜찮습니다. 연락드리지 않고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규화의 예의 바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어깨를 으쓱한 신 씨는 영인더러 말했다.
“날이 추우니 네가 적당히 차라도 내 와라.”
“…녹차 괜찮아요? 유자차도 있고.”
“응, 아무거나 괜찮아.”
영인이 차를 준비하러 사라지자, 창고 안에는 신 씨와 규화만 남았다. 우두커니 선 규화에게 신 씨는 말했다.
“편히 둘러보쇼.”
그의 말에 규화는 창고를 차분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창고 안을 채운 피아노들은 어림잡아 20대. 업라이트와 그랜드, 미니 사이즈를 가리지 않았고 메이커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제가 알고 있던 피아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규화는 쉽사리 손을 내뻗지 못했다.
대부분 수리 중인지 현이 뜯겨 있었고, 향판에 금이 가거나 건반 자체가 깨져 있어 제대로 소리가 날 것 같은 피아노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유독 상태가 안 좋은 것들은 창고의 바깥쪽에, 그나마 복원 중인 것들은 작업대 근처에 놓여 있었다. 신 씨가 한창 작업 중인 피아노는 단종된 야마하 제품으로, 플랜지코드와 브라이들 테이프를 교체하는 중이었다. 공장에서도 단종되어 부품이 나오지 않는 모델이었기에 직접 나무를 갈아 부속을 만들고 있었다.
“추위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사람이야 견디면 되지만…. 여기 것들은 추위는 문제도 아니지. 애초에 다 못쓴다고 버림받은 처지에, 눈비 피하고 순번 기다리는 운명이니.”
“…….”
“피아니스트 양반으로선 보기 드문 것들뿐이지. 소리가 잘 날수록 좋은 주인을 만날 수 있을 텐데, 얘들은 소리를 못 내서 버려진 것들이니. 이 피아노들도 어찌 보면 행운이네.”
“아닙니다.”
“뭐, 소리라도 내면 은혜받겠지만, 대부분이 아직 그럴 수 없는 애들뿐이라.”
영인이 사라지고 나자, 오히려 신 씨의 태도는 급격히 너그러워졌다. 아마도 영인의 반응이 재밌어 일부러 골리려 드는 것일 터였다. 규화로서도 그 심정을 대강 알 것 같았다.
한편 신 씨는 장갑을 만지작거리는 규화의 손을 유심히 살피다 넌지시 물었다.
“왼손이 많이 안 좋나?”
“…그걸 어떻게 아시죠?”
“어떻게 알았을 거 같아.”
역으로 묻는 말에 규화는 말없이 신 씨를 바라보았다. 신 씨는 영인이 사라진 쪽을 흘낏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나는 장사치라 대가가 없이는 아무것도 주지를 못 해.”
규화는 영리하게도 그 말이 가리키는 바를 눈치챘다. 보통은 매스컴 앞에서 짓곤 하는 그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규화는 대답했다.
“장사치라고 다 같지는 않죠. 음악을 파는 장사는 일반 돈놀이와는 수준이 다르잖습니까.”
“꽤 재밌는 말을 할 줄 아는 걸 보니, 생긴 것과는 또 다르네.”
“사실 저도 장사치의 아들이라서요.”
악의가 없는 규화의 말에 신 씨는 작업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규화를 넌지시 살폈다. 목장갑을 뺀 신 씨의 손가락에는 영인과 비슷한 딱지와 흉터가 져 있었다. 규화가 눈을 가늘게 뜬 순간, 신 씨는 상처 난 손가락을 들어 한쪽 구석의 피아노를 가리켰다.
“저 피아노 어때.”
규화의 시선이 뒤를 따랐다. 많이 낡았지만 옆면 도장이 아직 선연한 그 피아노는 스타인웨이였다. 창고에 널린 다른 피아노들과 달리 그 피아노는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외견도 비교적 멀쩡한 편이었다. 다만 주변에 조율 기구와 현들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까지 작업 중이었던 물건으로 보였다.
연주해 봐도 되는 것일까. 신 씨는 머뭇거리는 규화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한 곡만 쳐 봐요. 마음껏. 잠든 피아노들이 다 깨어버릴 만한 연주로.”
물을 데우고 차를 준비하던 영인은 유자청 뚜껑을 열다 말고 귀를 의심했다. 돌연 들려온 화려한 연주 소리는 분명 신 씨의 것은 아니었다. 신의 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신 씨가 할 수 있는 연주는 고작해야 소나티네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압도적인 음량은 공간을 뚫어 버렸다. 이 얄팍한 창고와 그에 붙은 가건물의 여백이란 여백을 빼곡하게 채운 선율에, 영인은 주전자 불을 끄고 부리나케 창고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나도 연주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유일한 관객이었던 신 씨가 넌지시 영인의 팔을 잡아서 말렸다. 찡긋 윙크를 한 신 씨와 영인, 두 사람은 피아니스트의 즉흥 연주를 감상했다.
Chopin Etude, Op, 25-11.
흔히들 <겨울바람>이라는 부제로 칭하는 이 곡은 빠른 아르페지오의 진행과 멜로디의 어우러짐이 겨울에 몰아치는 날카로운 바람을 연상케 하는, 연습곡 중에서도 고난도를 자랑하는 곡이다.
그리고 이 곡의 포인트는 왼손에 있다. 왼손의 멜로디가 분명해야만 오른손의 화려한 진행을 받쳐 줄 수 있다. 스툴이 아닌 작업용 간이 의자에 걸터앉은 규화의 왼손이 거침없이 옥타브를 내려치고 있었다.
영인은 눈을 의심했다. 정말, 규화가 ‘그’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사실 영인에게 중요한 것은 <겨울바람> 자체가 아니었다. 그의 눈은 규화의 왼손에, 보다 정확히 말하면 왼쪽 손목이 아닌, 그 왼손이 내려치는 건반과 피아노에 가 있었다.
반쯤 먹어 버린 귀로는 허겁지겁 저음을 주워듣기에도 바빴다. 4분여 연주를 마친 규화가 어느새 제 등 뒤로 다가온 영인을 향해 웃으며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 피아노 신기해.”
“…어땠어요?”
물어오는 말투가 묘하게 조심스럽고 이상했다. 하지만 규화는 연신 제 왼손을 움직여 확인하듯 건반을 매만졌다. A1부터 차례차례 건반을 눌러, 그 낮은 울림들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 E8부터 몇 개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울림이 달라.”
“…….”
“귀신은 못 속이겠구먼.”
너털웃음을 지은 신 씨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솔직한 장인의 경탄에도, 규화는 아직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금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아닌가요? …이상하다.”
“아니. 이상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거, 여기 봐.”
얼굴을 쓸어내리는 영인의 반응에 갸웃한 규화는 다시 한 번 건반을 두드렸다. F10을 연신 누르며 규화는 고개를 기울여 소리에 집중했다.
“무척, 신기해. 뭐라 그러지. 건반을 누른 반발력에 비해 무척 귀여운 소리가 나. …아.”
거칠게 트릴을 누르자 갑자기 소리가 바뀌었다. 현이 미처 그 움직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늘어나 헐거워진 모양이었다. 금세 내부를 살핀 신 씨가 혀를 차며 돌아가 버리고, 영인은 그저 커다란 손으로 제 눈을 감싼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왜? 무슨 일인데, …응?”
“아니에요.”
“내가 망가뜨린 거야? 미안해. 응?”
제가 무슨 짓을, 또 무슨 말을 해 버렸는지 모르는 규화만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영인을 보챌 뿐이었다.
***
“전화하고 올게요.”
돌아가는 길은 콜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서울로 들어간다고 해도 택시로 이동한다면 막힌다고 해봤자 2시간 남짓. 시간은 충분했지만 영인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서둘렀다.
막상 규화는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가 끓여다 준 유자차에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는데.”
“해 금방 떨어져요. 날도 춥고.”
“나 아직 구경하고 싶은 게 많은데….”
“…….”
규화의 노골적인 의사 표현에도 영인은 휴대폰을 가지고 밖으로 나섰다. 그 뒷모습에 대고 작게 구시렁대는 규화에게 신 씨는 말을 건넸다.
“생긴 거와는 딴판이네. 소문대로야.”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그럼. 내 눈이 얼마나 높은데. 어디 저놈한테 한 번 물어봐요.”
신 씨가 빙긋이 웃었고 규화는 순순히 그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와 별개로 이 공방에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규화는 구석구석의 피아노들을 살폈다. 해머를 건드리고 도색 중인 건반을 만지작거리다 마지막에는 제가 연주했던 그 스타인웨이 곁에 가 섰다. 차마 건반을 두드리지 못하겠는 모양인지, 규화는 조심스레 신 씨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제가 뭔가 크게 망가뜨린 건가요? 그렇다면 수리비라도….”
“여기가 공방인데 뭘 걱정해요. 반파 난 피아노도 우습게 고치는데.”
“그러면 왜….”
염려 말라는 신 씨의 위로에도 규화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분명, 연주 후 저음부의 소리가 변했다. 반복 타건으로 인해 그쪽 현이 장력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진 듯했다.
규화는 타건하는 힘이 강한 데다가 연습량 또한 상당한 편이었기에 단선이 일상다반사였다. 보통 끊어지는 현은 정해져 있다. 주로 고음부였다. 저음부는 현도 두꺼운 데다가 고음만큼 터치가 잦지 않아 끊어지는 경우가 드문 데다, 보통 그 전에 노화로 소리가 변해 교체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세게 쳤던가? 아니었다. 이 피아노는 저음에 그리 힘을 줄 필요가 없었다. 찰나였지만 그 이질적인 촉감은 여전히 손끝에 선명했다. 마치 그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처럼 규화는 왼손 손끝을 모아 만지작거렸다.
<겨울바람>을 선택한 덕분이었다. 근접한 건반을 연속해 누르는 아르페지오와 달리, 왼손의 도약은 손의 궤적이 정확해야만 했다. 뛰어오르는 순간 느낀 터치감에 규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센트를 딛는 저음이 규화의 예상보다 더 기민한 소리를 냈다. 수리 중인 피아노라 보기 어려운 민감도였다.
피아노의 원래 이름은 피아노포르테. 직역하자면 쉽게 말해 ‘부드럽고 강하게’가 된다. 그 이름이 칭하는 대로 좋은 피아노라면 연주자의 의도대로 섬세한 강세 조절이 가능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피아노는 무척이나 좋은 피아노였다. 특히 피아노p를 노렸던 부분에서 의도치 않게 피아니시모pp에 가까운 소리가 날 만큼 섬세한 셈여림 조절이 가능했다.
피아노와 포르테. 굳이 고르자면 전자가 연주자에겐 까다롭다. 얼핏 생각하기엔 강하게 치는 데 더 힘이 들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급기야 손날로 건반을 내려치는 피아니스트도 있을 만큼, 포르테에서 연주자는 제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풀어낼 자유가 주어진다.
하지만 피아니시모에서는 그런 기교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여린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손끝을 비롯한 근육의 긴밀한 통제가 필요했다. 음량의 절제와 힘의 절약은 별개였다. 작게 친다고 힘을 빼 버리면 음 자체가 듬성듬성 비어 버리게 된다.
소리는 꽉 채우되, 아주 여리게. 바로 피아노의 역설이었다.
그리고 그 모순의 실현은 모든 피아니스트의 역량을 판가름하는 기준이었다. 건초염을 앓고 있던 규화에게 특히 저음부의 피아니시모는 커다란 과업이었다.
하지만 이 피아노는 달랐다. 격랑을 노래하는 멜로디 속에서 순간이나마 규화의 손끝을 ‘보다 수월하게’ 도와주었다. 다만 모든 건반의 터치가 그렇지는 않았다. 듬성듬성 빛을 내는 그 동그란 울림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곡이 끝나 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돌아온 영인이 바로 곁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착잡한 눈빛으로.
“걱정 말아요. 오히려 저놈에게 더 큰 도움을 준 셈이니까.”
신 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규화는 자신을 바라보던 영인의 표정을 떠올렸다.
입으로는 추운 곳에서 함부로 손을 놀리지 말라며 아우성이었지만, 단순히 손목을 걱정하는 투가 아니었다. 제가 크게 한 사고를 쳤구나, 하고 규화가 지레 겁을 먹었을 정도로 영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이거 받아요.”
규화의 집중을 환기하듯 신 씨는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건넸다. 몇 년 전 영인에게 건넸던 종잇조각이었다. 이제는 한두 장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색을 덧붙이며 그는 말했다.
“이건….”
“약속대로 대가는 치러야지.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니 갖고 있어요. 내 다른 재주는 없어도 피아노 하나만은 썩 나쁘지 않으니, 언젠가 의뢰 한 건을 빚진 셈으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뭐, 글쎄. 과연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신 씨는 말끝을 흐렸다. 꼭 그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투였다. 한편 규화는 제 안주머니에 명함을 챙긴 뒤, 생각났다는 듯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그럼 저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영인이 밖으로 나선 출입문 쪽을 향해 있었다.
***
택시가 공방까지 들어오는 데만도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작업을 재개한 신 씨는 손님이 가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의 등에 대고 인사를 전한 뒤 두 사람은 택시에 탔다. 안쪽에 저를 앉히고서 창밖을 바라보는 영인을 흘낏거린 규화가 확인하듯 되물었다.
“기분 상했어? 내가 피아노 망쳐서.”
“아뇨, 전혀 아니에요.”
말로는 아니라지만 영인의 표정은 여전했다. 어차피 물어봤자 아니라고 할 것을 알기에, 규화는 캐묻는 말을 멈추고 조금은 풀이 죽었다.
“아무튼, 고마워. 데려가 줘서.”
“…….”
“너는 재미없었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재미있었어.”
“다행이에요.”
마침 택시는 톨게이트를 지나 서울로 진입했다. 서울에 오신 걸 환영한다는 활자를 확인한 규화가 영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무튼…. 너희 집 주소 대.”
“…정말 가려고요?”
“응. 말했잖아.”
규화가 내건 마지막 조건은 바로 영인의 자취방이었다. 근거야 충분했다. 큰 병을 앓는 환자의 거처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한동안 가 보지 못해서 지저분할 겁니다. 침대도, 소파도 어디 제대로 앉을 곳도 없어요.
“괜찮아. 애초에 기대 안 했어.”
“차로 못 올라가요.”
“아까 30분 넘게 멀쩡하게 걷는 거 봤잖아. 요새 안 그래도 운동도 필요했어.”
어떤 핑계로도 난공불락이었다.
“좋은 말 할 때 말 들어. 안 그러면 다시 병원에 입원할래?”
“…기사님, 화원대 후문으로 가 주세요.”
여전히 흘겨보는 눈빛에 패배를 선언한 영인이 목적지를 수정했다. 갑작스러운 목적지 변경에 기사는 부랴부랴 차선을 바꿨고, 그제야 규화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퇴근길 정체가 시작되기 전 시내 도로 상황은 평탄했으나 택시 기사가 유독 브레이크를 길게 잡는 버릇이 있는 듯했다. 외곽도로를 벗어나 시내에 들어서자 규화는 멀미 기운에 내내 눈을 감아야 했다. 흔들리는 차창에 몇 번 머리를 박고 나자, 자연스레 영인이 그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어 주었다.
뺨과 관자놀이에 닿는 그 보드라운 소재에 규화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다잡았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오히려 멀미가 더 심해진 기분이었다. 식은땀을 닦아 내는 그 투박한 손길이 닿는 동안 규화는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그렇게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어느 순간 정말 잠이 들어 버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영인이 다 왔다며 깨우는 소리에 규화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차창 밖의 풍경은 과연 낯이 익었다.
신학기를 앞둔 대학가는 한산했다. 때 이르게 핀 개나리와 매화 몇몇이 점점이 다가올 봄을 알렸다. 차가 늘 다니던 교수동을 지나 후문 앞에 섰다. 미처 차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좁은 골목 골목은 여전히 봄빛은커녕 하나같이 잿빛이었다.
“뭐라도 사 가야지.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
“됐어요. 손 무겁게.”
마침 보이는 편의점을 가리키며 묻는 말에도 영인은 고개를 젓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퉁명스러운 기색으로 보아, 아무래도 규화에게 제 자취방을 보이기가 언짢은 모양이었다. 결국 규화 역시 영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난데없이 미아가 될 순 없었다.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도 규화는 잊지 않고 주변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언제든 또 혼자 찾아올 수 있도록. 음료수야 그때 가지고 가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똑같은 건물들의 모습에 조금은 자신감이 하락했다. 전봇대 밑을 이리저리 나뒹구는 쓰레기봉투에서 악취가 났다. 아직 몸집이 작은 고양이 몇이 그 봉투를 뒤지다 두 사내의 걸음 소리에 놀라 골목 사이로 숨었다. 그 굽은 꼬리 끝을 바라보다 문득, 규화는 영인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입혀 준 영인의 옷은, 분명 이 거리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냥 둘러보는 게 다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
“조금만 있다가 다시 내려와서 저녁 먹자, 응?”
“…….”
달래는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걸었을까. 동네의 가장 꼭대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곳에서 한 번 더 계단을 올랐다. 녹이 슨 철 사다리가 심히 불안정했다. 그를 다 오르고서야 두 사람은 옥탑방 마당에 도착했다.
규화를 처음 반긴 건 촌스러운 초록색으로 방수 코팅이 된 너른 마당 풍경이었다. 말라 죽은 지 오래인 어떤 모종이 널려 있었고 그 안쪽에 우뚝 선 건물 하나가 보였다. 집이라고 하기엔 방 하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바로 영인의 자취방이었다. 규화는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훔쳐내고는, 영인이 먼저 들어가 안을 적당히 정리하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 형!! 왔어!?”
낯선 남자애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규화가 안쪽을 바라보니 먼저 철문이 열리고 민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영인도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민성이 네가 와서 지냈어?”
“응.”
“그래, 잘했네.”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민성은 곧잘 화원대의 도서관 열람실에서 책을 빌려 보고는 했다. 때마침 영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 그 옥탑방을 차지하고서 공부했던 모양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하는 민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그 표정이 심상치 않다. 두꺼운 안경을 낀 민성의 표정이 자못 얼어붙었다. 그 반응에 영인은 고개를 돌려 규화 쪽을 살폈다.
호텔 로비에서 은혜를 마주쳤을 때는 당황하느라 미처 목격하지 못했던 규화의 적대적인 눈빛에 영인은 살짝 놀라 변명하듯 덧붙였다.
“아, 소개할게요, 이쪽은…. 이민성.”
“안녕, 하세요….”
신 씨를 소개했을 때 예의 바르던 모습은 어디 가고, 규화는 고개만 대강 까닥였다. 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에 영인은 놀라는 한편 그 또한 귀엽다고 생각했다. 다만, 민성의 심정은 달랐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무언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영인은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민성아, 은혜는?”
“어, 걔야 그 집에 있지. 형 돌아온 줄 알면 바로 이리로 오지 않을까….”
“우선 오늘은 안 되고, 다음에 보자고 말해.”
“어, 응. 알겠, 어….”
희망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제각기 타고난 성격은 달라도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눈치가 빠르다는 점이었다. 자신을 보호해 주어야 할 부모 없이 자랐기 때문에 눈치 싸움은 기본이었다. 작게는 밥상부터 이러한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눈치 빠른 민성은 더는 묻지 않고 제 백팩에 주섬주섬 책들을 챙긴 뒤, 입을 겨를도 없이 패딩을 손에 들었다.
“형, 그럼 나는 이만 가 볼, 게….”
“…그래. 내가 연락할게.”
얼마나 급하면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못했을까. 민성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려다 제 운동화 끈을 밟고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향해 앞으로 자빠졌다.
흡사 슬랩스틱 코미디나 다름없는 장면에도 규화의 입술은 올라갈 줄을 몰랐다. 민성의 짐을 추슬러 배웅하고 돌아온 영인이 들어가자 재촉하는 말에도 규화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입술을 간질이는 웃음에 몇 번 헛기침을 한 영인이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나 원래 이런 얼굴이야.”
“아니, 이런 얼굴 아닌데. 원래는 훨씬 더 예쁜 얼굴이잖아요.”
“…….”
영인을 놀리려 내뱉었던 단어가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에 미미하게 붉은빛이 돌았다. 씨익 웃은 영인이 그의 등을 안아 추슬렀다.
“추워요. 어서 들어와요.”
방금까지 있던 민성 덕분에 방에는 훈기가 돌고 있었다. 정돈된 방 안을 둘러보며 영인은 내심 안도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놀라울 만큼 빨리 망가진다. 더군다나 겨울철 옥탑방은 외부와의 온도 차 때문에 곰팡이가 슬기 일쑤였다. 하지만 민성과 은혜가 돌본 덕분인지 방은 생각보다 준수한 상태였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방에 들어온 규화는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모른 척 찬장을 살피며 영인은 목소리를 돋웠다.
“뭐라도 먹어야죠. 배고프죠? 어쩌지, 집에 아무것도 없는데.”
아직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각이었지만 아침부터 바삐 다닌 탓에 벌써 허기가 졌다. 하지만 규화는 밥 생각이 없는지 대답은 뒷전이고 방 이곳저곳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어때, 라면이라도 괜찮아요? 아니면 배달 음식이라도 시킬까요?”
“…평소에 그런 거만 먹어?”
“아뇨. 뭐. 딱히 그런 건 않은데…. 집도 오래 비웠잖아요.”
궁색한 변명에 규화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상관없어. 너 평소 먹던 대로 줘.”
“알겠어요. 구경하고 있어요.”
먹던 대로라, 가장 까다로운 부탁이었다. 영인은 다급히 부엌을 살폈다. 그나마 민성이 기거한 덕분에 식재료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찬장 가득한 라면과 즉석 밥에, 냉장고에는 푹 익은 김치와 채소 조금. 그렇다고 라면만 끓여 덜렁 대접할 수는 없었다. 냉동실을 살핀 영인은 급기야 프라이팬을 꺼내 들었다. 실로 몇 달 만에 하는 요리였다.
그렇게 영인이 바쁘게 저녁상을 차리는 사이 규화는 방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애초에 집이라 하기보다 방에 가까운 실내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방에 작은 화장실이 딸린 구조였다. 가산이라고 해 봤자 별것 없었다. 옷장과 책상, 그리고 규화가 앉은 침대 겸용 접이식 소파가 전부였다. 옷장을 열어보니 짐을 보관한 상자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프탈렌 냄새로 가득한 여름 침구와 옷가지를 둘러본 규화는 영인이 벗어 둔 코트를 안에 걸었다.
그 곁에 가지런히 걸린 옷가지들은 하나같이 눈에 익은 것들뿐이었다. 셔츠부터 남방, 그리고 낡은 코트와 패딩까지. 옷깃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지난 영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을, 계약서를 쓰던 날. 삼겹살을 먹고 거리를 떠돌았을 때 입었던 셔츠….
그리고 겨울, 노크 소리에 달려와 호텔 문을 열어 마주했었던 영인의 아련한 미소까지.
그에 비해 코트는 과하게 반짝이는 탓인지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규화는 서둘러 옷장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리자 마침 책상이 보였다.
2단짜리 책장에 꽂힌 책은 조율 관련 서적이 대부분이었다. 얼마나 복습했는지 책장마다 너덜너덜했다. 습기를 먹은 페이지 군데군데는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노트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진동수를 계산하고 암기한 수식이 낡은 페이지에 빼곡하게 남아 있었다.
아마 피아노를 계속했다면, 틀림없이 장영인은 성공했을 것이다. 몸도 불편하지 않았다면, 이미 진작에 저보다 높은 곳에 있었을 터였다. 그게 피아노든 아니든 간에.
막연한 예측이 아닌 확신이었다. 규화는 새삼 잊고 있었던 열패감에 목 언저리가 뜨끈해졌다. 손을 아낀답시고 연필을 쥐는 것도 피하기만 했던 제가 부끄러웠다. 모든 노력이 좋은 결과를 보증해 주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제가 과하게 누리는 현재는 늘 치열한 영인의 삶 앞에서 부정한 갈취로만 느껴져 부끄러웠다.
아냐, 이러지 말자. 문득 다시 책을 꽂아 넣으려던 규화는 책장과 벽 사이 삐죽 튀어나온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책 하나가 밀려 책장 뒤로 넘어간 듯했다. 손을 내밀려는 와중에 영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슬슬 상 좀 펴 줄래요? 책상 옆에 있어요.”
“응, 알았어.”
“경첩 펼 때 손 조심해요.”
뒤늦게 후각이 되살아났다. 좁은 방을 가득 채운 음식 냄새를 맡자 규화는 잊고 있던 허기를 깨달았다. 동그란 소반에 냄비를 올리자 자리가 거의 절반 찼다. 녹인 마가린에 익은 김치를 송송 썰어 볶은 김치볶음밥에서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났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혹시나 규화에게 매울까 싶어 달걀을 잔뜩 푼 라면 국물은 다행히도 부드러웠다. 나트륨이 과다한 식단에 못마땅해하던 규화의 얼굴은 한입 맛을 보고는 금세 풀어졌다.
“맛있어.”
“다행이다.”
입 안이 훈훈해지자 금세 입맛이 돌았다. 길게 늘어진 소매를 걷어 올린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작은 소반을 사이에 두고 덩치 큰 성인 남자 둘이 마주 앉은 가운데, 냄비에서 모락모락 뿜어져 나오는 김이 두 사람의 숙인 이마 사이를 가득 메웠다.
뒤늦은 허기가 몰려온 규화는 묵묵히 그릇을 비웠다. 김치볶음밥은 붉은 색깔치고 달짝지근한 맛이라 쉽게 수저가 갔다. 마가린 때문에 느글거릴 때 얼큰한 라면 국물을 마시면 딱 적절하게 궁합이 맞았다. 잘게 자른 단무지를 아삭아삭 씹으면 마치 초밥에 초생강을 곁들여 먹은 듯 입이 개운했다.
끝도 없이 들어갔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앞다투어 그릇을 비웠다. 눈치껏 영인은 즉석 밥 하나를 더 데워 왔다. 남은 라면 국물에 반씩 나눈 밥을 비벼 먹고 나서야 두 사람은 수저를 놓았다.
손님 대접이라 하기엔 지극히 값싼 저녁상이었지만 규화는 예상보다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다만 라면은 아무리 달걀을 풀었어도 맵고 짰던 모양이었다. 찌개는 잘 먹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국 규화는 제가 마셨던 국물의 배만큼 물을 마셨다. 그가 땀으로 푹 젖은 뺨과 이마를 닦고선, 가늘게 눈을 뜨고 물었다.
“늘 이렇게만 먹는 건 아니지?”
“그럼요. 거의 학교 식당에서 먹는걸요. 가격도 싸고 다양하니까.”
“사 먹는 것도 많이 짤 텐데….”
이것저것 퍼부을 잔소리는 한가득 있었지만, 막상 본인이 가장 맛있게 먹고 나니 지적을 할 면이 서지 않았다. 결국 잘 먹었다는 인사뿐이었다.
갑작스러운 포만감에 규화는 눈을 비볐다. 설거지라도 하겠다는 그에게 대신 물을 건네주며 영인은 말했다.
“쉬엄쉬엄하면 돼요. 좀 쉬다가 배 좀 꺼지면 같이 내려가요. 경사가 높아서 위험하니까 데려다줄게요.”
“왜? 나 여기서 자고 갈 건데.”
“…안 돼요.”
“말했잖아. 처음부터 자고 갈 거라고. 그 남자애도 재워 줬잖아. 나도 잘래.”
고집을 부릴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그 고집의 근거가 예상 밖의 인물이라 영인은 흠칫 놀랐다.
“왜 아까 그 남자애는 되고, 나는 안 돼? 걔는 허락도 없이 집에 머물러도 될 …그런 정도의 사이야? 나는 그보다 못하고?”
라면이 맵긴 매웠던 모양인지 불만을 표하느라 툭 튀어나온 규화의 입술이 유독 붉었다. 영인은 애써 시선을 흩뜨리고선 말했다.
“민성이는 저번에 소개했던, 은혜랑 마찬가지로 보육원 동생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늘 같이 지냈으니까. 사실 그런 개념이 없이 자랐어요. 같은 방에서 지냈고, 독립한 뒤에도 또 놀러 오기도 자주 놀러 왔고요. 피는 안 통했지만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니까요.”
“…….”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누굴 비교해서 이 사람은 되고, 누구는 안 되고…. 그런 의미에서 안 된다는 말이 아니었어요.”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 잔뜩 심통이 난 미간은 오히려 풀릴 줄을 몰랐다. 결 좋은 앞머리 사이로 드문드문 비치는 그 주름을 보며, 영인은 정확히 자신이 뭘 사과해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도 미안하다며 그를 달랬다.
짐작은 갔다. 여태껏 음악을 통해 서로를 알아갈 때는 미처 알 길 없었던 일상적인 삶의 차이. 서로 살아온 세계의 궤적이 달랐기에, 당연히 규화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작 몇 달 머무르기 위해 통 크게 피아노까지 사들여 집을 꾸미는 그에겐, 나와 남의 구분 없이 집을 공유해야 했던 영인의 삶이 어찌 보일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보다시피 집이 좁으니까, 자기 불편할 테니까 그런 거예요. 뭘 그렇게 신경을 써요. 그냥 아는 동생이에요. 게다가 남자잖아요.”
달래는 말에 잘 듣고 있던 규화가 마지막 말에 도끼눈을 떴다.
“…그러니까.”
“응?”
“남자잖아.”
“남자인 게 뭐, …아.”
그리고 영인은 뒤늦게 규화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영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정황을 다시 파악했다.
…세상에. 남자여서 신경이 쓰였다니. 제가 들은 게 정말 맞는 말인가. 단순히 친분이 아니라 정말 ‘남자’로서의 감정이라면. 그 귀여운 질투가 지극히 사랑스러워 웃음이 삐죽 났다. 영인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영인은 어설프게 고개를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막을 길 없이 기침처럼 토해낸 웃음에 규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웃음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웃지 마.”
“아, 미안해요. 진짜, 놀리려는 게 아니고.”
그래도 당신이 너무 귀엽잖아. 억지로 웃음을 참다 못해 기침까지 토하는 영인에게, 규화는 제가 받아들고만 있던 물을 거꾸로 건네주었다. 물을 단숨에 마셔버리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영인은 눈가에 눈물을 달고서 물었다.
“그런데 잠깐만. 정말 내 취향이 그래 보여요?”
“…모르는 거지.”
“대체 모르긴 뭘 몰라요, 응?”
규화의 오해는 민성이에게도 실례였지만 여러모로 자신에게도 실례였다. 나의 진심이 그렇게 흔하다고 여기다니. 그 절절한 고백과 포옹은 다 지난 말이 되어버렸나 싶어 한편으로 허탈했다.
민성도 은혜도 소중한 건 맞지만 문규화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일상의 구질구질함 따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인데.
비교할 걸 해야지. 조금은 엄하게 말해야겠다 싶은 마음에 영인은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그 입술 끝은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저번엔 은혜한테, 이번엔 민성이. 내 주변 사람에게는 다 도끼눈을 뜰 작정이에요?”
“그땐….”
“그땐?”
“그땐, 네가 남자 좋아하는 걸 몰랐으니까.”
“그럼 여자랑은 같이 있어도 상관없어요?”
“…….”
심경이 복잡한지 규화는 답지 않게 쉬이 되받아치지 못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말싸움은 늘 규화의 승리로 끝나곤 했으니까. 내도록 열세를 보이는 규화의 모습이 새로웠다. 그래서일까, 얼굴이 새빨개진 규화와 달리 영인은 아직 여유로웠다.
“그리고 질투라면 내 쪽에서 해야죠.”
그래서 조금은 더 놀릴 생각이었다. 이런 질투라니 사실, 영인으로선 너무나 반갑고 기꺼웠다. 여덟 살 이후로 나를 미워해 왔다는 그 해묵은 감정마저 반가운 한편에, 질투와 집착이 뭐 그리 나쁘랴.
심지어 규화가 제게 울컥 화를 내도 좋을 것 같았다. 좀 더 다양한 빛깔을 제게 보여 주었으면 했다. 서툴고 나약할수록 좋았다. 그만큼 영인이 좀 더 어른스럽게 그를 달랠 기회가 있을 테니까. 단순히 피아노가 아닌 다른 모든 일상에마저, 규화가 여전히 어리게 굴었으면 했다. 서툴렀으면 했다.
어쩌면 정말. 농담이 아니고 영인의 눈엔 여전히 규화가 여덟 살로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눈앞의 규화는 더는 여자애 같지도 않은 데다가 굳이 손을 잡아 주지 않아도 될 만큼 어엿하게 자라났다. 오히려 손을 떠는 쪽은 영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현실에서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규화 때문이었다. 여태껏 잘 참고 체념해 왔다 생각해 온 자신의 삶이, 문규화를 만나고서는 모두 새삼스러워졌다. 생각하게 만들었다. 왜 나는 너와 이렇게 다른 세계를 살까. 어떻게 하면 같은 세계를 살 수 있을까….
“자꾸 이렇게 귀엽게 굴면, 나 오해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생각이 깊어지고, 그 현실을 받아들일수록 규화와는 가까워질 수 없다. 꿈을 꾸고, 욕심을 부려야만 겨우 닿을 수 있었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다를 허우적거리듯 절박한 마음으로, 영인은 지금 눈앞의 규화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이 누추한 옥탑방에서 작은 수다를 떠는 순간조차 그에게는 보석보다 귀했다. 이 또한, 앞으로 수십 년간 영인을 살게 만들 원동력이 될 테니까. 여태껏 그래 왔듯이.
“…찮아.”
“네?”
“괜찮다고.”
“…….”
절박한 그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규화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서툰 ‘신정훈’의 말에 삐쳐 고개를 홱 돌려버렸던 과거와는 달랐다. 영인의 두 눈을 피하지 않은 그는, 한 글자 한 글자를 힘주어 말했다.
“…오해해도 괜찮다고.”
혹여 두 귀가 모두 먹게 될지라도 들을 수밖에 없을 그 말들을.
***
언제 푸르렀냐는 듯, 하늘은 쉽게도 노랗게 물들었다. 설거지를 마친 뒤 싱크대의 물기를 닦던 영인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규화의 검은 머리는 어느덧 기울어진 노을에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는 눈이 어두워 보일 정도로, 지는 해에 빛나는 규화가 눈부셨다.
그래서 영인은 조금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지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 영인이 혼자 다녀오겠다는 규화를 굳이 따라나섰다. 목적지는 가장 가까운 편의점. 녹이 슨 철제 계단이 발 넷에 쉴 새 없이 삐걱거렸다.
순식간에 세상은 어둑해졌다. 군데군데 미처 녹지 않은 언 바닥이 보일 때마다 영인은 규화가 넘어져 다칠까 걱정이었다. 그는 뒤로 손을 뻗었다. 남자 둘이 나란히 서지 못할 만큼 길은 좁았다. 규화는 말없이 손목을 내주곤, 영인의 등을 보며 걸었다.
가로등 불은 여전히 죽어 있었다. 그 여전함이 새삼 고마울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배어든 땀에 영인은 규화의 손목을 고쳐 쥐었다. 가볍게 쥔 손아귀 속 맥박이 요동쳤다. 누구의 손목인지, 아니면 손끝이었는지. 둘 다였는지. 출처를 깨닫기도 전에 어느덧 두 사람은 편의점에 도착했다.
규화가 이것저것 고르는 동안 영인은 주변 가게를 둘러보았으나, 옷가지를 살 만한 곳은 없었다. 돌아오는 길, 오르막길을 오르는 내내 비닐봉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함께 했다. 쥔 손목에 진득한 땀이 배었는데도, 누구도 손목을 빼지도 손을 놓지도 않았다.
옥탑방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계절이 무섭게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땀을 닦아 내면서도 영인은 보일러를 최대치로 돌렸다. 외관은 낡았지만 그나마 화장실만은 쓸 만했다. 옥탑방을 소개하면서 리모델링한 화장실을 내세웠던 중개사가 새삼 고마워졌다.
규화가 먼저 씻는 동안 영인은 부리나케 잠자리를 꾸렸다. 여태껏 잘만 써왔던 매트리스가 처음으로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자다 허리 망가질까 걱정된다며 은혜가 사다 주었던 토퍼를 처음으로 꺼냈다. 너무 새것 냄새가 나나. 섬유 탈취제라도 뿌려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욕실 문이 열렸다.
온수에 흠뻑 몸을 적신 탓인지 규화는 다소 상기된 얼굴이었다. 훅 끼친 샴푸 냄새를 비롯해 빌려 입은 옷가지마저 전부 익숙한 것들인데도 영인은 잠시 생경함에 할 말을 잃었다.
“입을 만한데? 생각보단 안 커.”
“허리 많이 크지 않아요?”
“뭐, 고무줄이라서 괜찮을 거 같은데.”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 덕분에 상의가 그다지 큰 느낌은 없었다. 문제는 하의였다. 이 또한 패션에 관심 없는 영인에게 이런 디자인도 좀 입어보라며 민성이 선물했던 트레이닝복이었다.
입어보니 허벅지에 달라붙는 게 부담스러워 보관만 했던 옷인데, 마침 적당한 쓰임이 생겼다. 하지만 그마저도 규화에겐 컸다. 괜찮다면서도 연신 허리를 추어올리는 모양새로 보아하니, 조금만 바지를 잡아당겼다가는 쑥 내려갈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추우면 말해요.”
“더워. 괜히 난방 많이 하면 건조해지니까 적당히 돌려.”
“안 그래도 수건 적셔서 머리맡에 놓으려고요.”
수건으로 감싼 머리카락을 조물거리며 규화가 픽 웃었다. 채 털지 못한 물기가 떨어져 오뚝한 코 위에 물방울이 졌다. 영인의 엄지가 다가가, 그게 떨어지기도 전에 부드럽게 닦아 내었다.
“너무 그러지 말라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맘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알겠으니까 너도 어서 씻기나 해.”
더는 치울 것도 없어 보이는 방을 부산스레 살피는 모습에 규화는 그 너른 등을 화장실로 떠밀었다. 영인은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들고 온 수건을 선반 위에 올려 두고서 물을 틀었다.
샤워기에서 흐르는 물은 방금까지 규화가 쓴 덕분에 기다리지 않아도 따스했다. 그 편리함에 문득 뭉클해졌다. 고작해야 몇 평짜리인 화장실 안을 가득 채운 익숙한 샴푸의 향취에 영인은 손바닥에 짜 둔 샴푸를 한참이고 손으로 쥐었다 펴기만 했다.
TV 하나 없는 방에서 노닥거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드라이어기도 없이 머리가 바싹 마를 때까지, 두 사람은 시답잖은 농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규화가 주전부리와 음료수를 펼쳐 두었지만, 막상 누구도 크게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나누어 마신 이온 음료만 빠르게 바닥을 보였다.
잠들기는 이른 시각이었다. 하지만 앞둔 밤이 짧아지는 것은 싫었기에, 미적거리던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불을 껐다. 눕고 나서야 영인은 내내 옆쪽으로 이불을 밀어주었다. 고작 몸 절반을 가린 이불이 딱 적절했다. 오늘 밤은 계절이 무색하게 더웠다.
모텔 침대보다 더 좁은 간이 매트리스 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들숨 날숨마저 청각보다 진동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숨이 달아오르는 것은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뻐근한 아랫배를 들여다 보듯, 한참의 정적이 두 사람의 불규칙한 숨을 희롱하고 난 뒤에야 규화가 먼저 운을 떼었다.
“자…?”
“아뇨.”
물어오는 목소리에는 잠결이라곤 없이 또렷하고 명확했다. 답하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잠이 안 와요?”
“…응.”
웃음 섞인 대답이 공중에 나풀거렸다. 그 아련한 음성에 문득, 영인에게는 낯선 충동이 일었다.
“음….”
“왜 그래?”
손을 내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그가 있음에도 영인은 규화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졌다. 하지만 부를 말을 찾지 못하고 영인은 머뭇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함께 지낸 반년 내내, 가끔 당신이라는 존칭으로 부른 적은 있지만 이름을 부르지는 못했다. 규화 씨? 문규화? 아니면…. 규화야. 어느 것이든 의미는 다르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어색했다.
“애초에 존대하고 싶다고 했던 건 너잖아.”
“…….”
“난 상관없으니까 편한 대로 해. 어떻게 부르든 내가 아닌 건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논리정연한 반박에 영인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 담담한 목소리에 불쑥 용기가 일었다가 얼마 못 가 사그라들었다.
머릿속으로는 수도 없이 불렀던 이름이었다. 재회하기 전에도. 혼잣말로도 자연스럽게 불러왔던 이름인데. 부르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또 답해 줄 규화가 있다는 게 이제 와 낯선 모양이었다.
이름의 자음과 모음이 하나하나가 생경했다. 기역이 어떻게 내는 발음이었지. 더듬더듬 외국어를 하듯 한참을 입안을 굴리고, 입술을 모았다 떼었다. 어둑해져 다행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깜박이는 눈에 그 모든 잔여물을 들키기 전에, 영인은 던져 두듯 이름을 뱉었다.
“…규화야.”
“응.”
망설인 게 우스울 만큼 대답은 담담했다. 막상 불러 놓고도 할 말은 없었다. 한 글자 대답만으로도 알 수 없는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목울대를 간지럽히는 충만함에 버거워 영인은 몸을 틀어 외로 누웠다. 큰 덩치로 새우잠을 자듯 몸을 틀어버린 영인의 뒷모습에 규화는 웃음을 참았다.
“뭐야, 사람 불러 놓고 왜 말이 없어, 응?”
“…….”
“영인아.”
“…….”
“신정훈 말고, 장영인.”
부르는 목소리는 저와 달리 당당하기만 했다. 힘을 주어 부르는 석 자가 부름 이름이 제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장영인이 내 이름이구나. 그렇지 않다면, 규화가 지금 왼손으로 제 어깨를 붙들었을 리 없으니까.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러운 게 됐다. 익숙해진 모든 것이 규화를 거치면 위험하게 낯설었다. 영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건드리지 말아요.”
마치 건반 위를 유영할 때처럼 떨리는 오른손으로, 영인은 필사적으로 규화의 왼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뿌리치려는 그의 오른손을, 다시 규화의 왼손이 살포시 마주 쥐었다.
“영인아, 부끄러워?”
누구도 먼저 손을 놓지 않았다. 영인은 깍지를 잡아 끼더니, 이어 익숙하게 그 왼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종일 피아노를 멀리한 손은 둔해졌을지언정 별다른 통증은 없었다. 하지만 공들여 어루만지는 손끝이 범상치 않게 뜨거워 규화는 들리는 경고에도 그저 나른히 웃었다.
“괜찮아. 넌 날 아프게 안 할 거라며?”
규화가 차분한 만큼 영인은 점차 위태로웠다. 고삐가 풀려 버린 충동은 뒤를 모르고 이어졌다. 심각성도 모른 채 그저 순진한 목소리에 불쑥 불길이 일었다. 볼썽사납게 달아오른 아래는 사실 별문제가 아니었다. 하루 내내 가슴을 데운 충동이, 이내 끓는점에 다다른 듯했다.
“…난, 분명 경고했어요.”
목이 멘 목소리의 의미를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규화의 손바닥에 뜨끈한 온기가 찾아들었다. 그 낯선 촉감에 규화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굳은살이 박여 투박한 손길이 아닌, 지독히 여린 살점이 닿고 있었다. 마사지를 해주던 손길과 다름없이 손바닥 정 중앙에 연신 입을 맞추는 입술에 자연스레 신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지나친 난방 때문일까. 오로지 닿는 것은 손바닥일 뿐인데, 마치 국부를 애무 당하듯 전신이 달아올랐다. 제 아래를 머금고 핥아 주던 그 열기가 절로 되살아났다. 규화는 가빠오는 숨을 감추려 자신도 모르게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약지와 중지 사이로 느껴지는 영인의 거친 숨결이 마치 다리 사이를 파고든 것처럼 아찔했다. 이내 긴 손가락을 하나씩 깨물고 핥던 그 입 속엔 연달아 두 개, 그리고 세 개의 손가락이 끝을 들이밀었다.
기민한 손끝에 닿는 입 속 살들이 터무니없이 여리고 부드러웠다. 뜨거웠다. 아니, 뜨거운 줄 모르게 되었다.
“영인아, 영인아…. 제발, 아….”
입을 가리었던 손이 자연스레 제 다리에 다가갔다. 지나치게 헐렁한 바지 탓에 쉽사리 손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달아오른 제 것을 쥐기 전에 영인의 손길이 그를 막아섰다. 손목을 쥔 손은 제 손이 차갑게 느껴질 만큼 뜨거웠다.
손만이 아니었다. 영인의 전신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손에 이어 손목으로 내려온 입맞춤에 규화는 고개를 저으며 흐느꼈다. 몸을 일으킨 영인은 자연스레 규화의 위에 몸을 버티고 섰다. 크다 못해 반쯤 내려간 바지 속에는 속옷이라곤 없었다. 이를 확인한 영인이 처음으로 웃었다.
“괜찮아요.”
“그만….”
“네가 말했잖아.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웃음기 섞인 낮은 목소리에 규화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머리맡에 걸려 있던 수건을 끌어낸 영인은 왼손에 가득 질척이는 제 타액을 수건으로 닦아 내었다. 보송해진 손은 이내 다른 힘 없이도 영인의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뜨끈한 열기가 어린 눈시울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손을 뻗지 않아도, 팔꿈치 안쪽을 굽혀도, 이내. 더는 눈을 깜박이지 않고서는 지켜볼 수 없을 만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규화야.”
마지막 경고였다는 듯, 영인은 손바닥과 손목의 경계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뗀 뒤 이내 규화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규화의 몸 위로 무게감이 내려앉았다. 숨을 막을 듯 그를 짓누른 건 단순히 영인의 몸만이 아니었다. 수천 번 수만 번, 그가 과분한 욕심이라 치부하고 외면해 왔던 장영인의 모든 세계를, 문규화는 여린 손목으로 그러안았다. 마주 안았다.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순간이 그랬다.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은 언젠가 뒤늦게 경종을 울린다. 사실 마음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는지 모른다. 논리와 근거는 그럴 때 주효했다. 이미 마음은 답을 알고 있음에도 주어진 길이 선뜻 내키지 않을 때, 퇴로를 만들어 준다.
그 퇴로의 길이와 퇴로를 벗어나 정답에 이르는 속도는 저마다 다르다. 규화와 영인 또한 그랬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한 번 마주치지 못했을 인연이었다는 것을, 밭은 숨을 내뱉으며 규화는 다시 한번 뇌리에 되새겼다.
놓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뼈저리게 후회할, 멍청한 짓이라 할지라도.
***
입술을 머금고, 호흡을 담았고, 이내 신음했다.
쏟아져 흘러나오는 영인의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오감을 넘어 사고까지 뒤틀리고 있었다. 흑과 백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했다. 참된 것이 그릇된 것이 되고, 또 하찮게만 여겼던 모든 순간이 존귀해져 버리는 격변.
다행히 처음은 아니었다. 기시감에 덜컥 겁은 먹었다. 이번에도 또, 영인은 손쉽게 규화의 세상을 뒤집어 버릴 터였다. 단 한 번의 연주, 그리고 단 한 번의 관계로.
여태껏 문규화가 비웃어 왔던 모든 감정에 직면할 수 있게. 영인은 퇴로를 막고 서 있었다. 도망칠 길은, 진작 막혔다.
영인의 손이 거침없이 규화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골반 근처에 아슬하게 걸려 있던 바지는 주인의 손길을 따라 저항 없이 흘러내렸다. 안에는 속옷 없이 오직 살덩이뿐이었다. 이어 빌려주었던 상의를 걷어 올리는 엄지가 첨단을 스치자 신음이 터졌다.
사람의 몸에는 각자의 삶이 스민다. 고단한 삶의 풍파에 깎여나간 것처럼, 영인의 몸은 국부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거칠었다. 그래서 규화는 내내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흔한 애무 하나마저도 영인의 손길은 무게감이 달랐다. 흔한 촉감에도 머릿속이 징징 울렸다.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파고로 쏟아져 내리는 감각 앞에서 규화는 팔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를 그러안았다. 영인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를 내버려 두었다. 순순히 허리를 들고 두 팔을 들어주었다. 이번만큼은, 그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규화야.”
타액에 흠뻑 젖고 나서야 영인의 입술이 매끄러워졌다. 열기에 메마른 규화의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그리고 인중과 코를 깨문 영인은 뒤이어 턱 끝과 목젖에 머물다 이내 흰 목덜미 사이에 내려앉았다. 덕분에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소리가 아닌 진동으로 먼저 닿았다.
“규화야….”
미안하다는 말도. 신음도, 흐느낌도 그 모든 것도. 마치 갓난아이가 처음 배운 말처럼, 영인은 모든 감정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그 자음과 모음 사이엔 알알이 감정이 도사려 있어, 규화는 그 무게에 짓눌려 무턱대고 대답할 수 없었다. 신음이 고작이었다.
덩달아 그를 부르기엔, 영인이라는 그 동글한 이름이 입 안과 목젖에 부딪혀 미처 글자가 되기도 전에 기화되어 사그라졌다. 버티기 어려웠다. 허벅지 사이를 찌르는 영인의 성기가 거침없이 부푸는 게 느껴져서. 어느덧 흠뻑 젖은 다리 사이는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아서인지, 서로의 물기로 질척해져서인지 알 수 없었기에. 규화는 깊게 흐느낄 뿐이었다.
“흐윽….”
처음이 아니었기에 규화는 잔뜩 긴장된 듯 주먹을 그러쥐었다. 알고 있기에 흥분은 더했다. 영인이 어떻게 제 것을 물고 핥을지, 빨아 줄지. 어떤 느낌이 올지. 어떤 절정에 다다르게 될지.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한숨에 영인은 낮게 웃으며 규화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낮게 포복했다. 이미 그의 손엔, 규화가 편의점에서 산 콘돔이 들려 있었다.
“윽….”
말은 필요치 않았다. 가쁜 숨소리와 신음, 낮은 한숨까지. 기둥에 닿는 숨결에 절로 허벅지가 경련했다. 개수를 늘려가는 손가락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영인은 게걸스럽게 규화의 것을 핥고 빨았다. 각오한 바가 우습게, 몰아치는 감흥은 더했다. 절정은 부끄러울 만큼 빨랐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이번에도 제 정액을 삼켜 낸 영인에, 규화는 마지막으로 제가 영인의 손가락을 셋이나 품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콘돔 낀 손가락이 제 안을 헤집다 빠져나가고, 그 자리가 채 다물어지기도 전에 은박지를 새로이 벗기는 소리가 들려 규화는 푹 젖은 속눈썹을 깜박였다. 솟아오른 영인의 성기가 눈에 들어와 희어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입으로도 넣을 엄두가 나지 않던 크기를 그보다 좁은 입구로 품으려 하다니,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기꺼이 규화는 두 다리를 벌렸다.
“아….”
하지만 막상 입구를 맴도는 성기의 뜨거운 촉감에 허벅지 사이가 긴장했다. 덜컥 겁을 먹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위아래로 들썩이는 가슴을 내려다보던 영인이 입을 열었다. 유독 커다란 손은 규화의 겨드랑이 아래부터 허벅지를 진득이 쓰다듬고 있었다. 영인의 모든 부위가 규화에겐 델 듯이 뜨거웠다.
“내가 아프게 하면….”
쉬어버린 영인의 목소리에서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났다.
“다시 날, 미워할 거예요?”
형식만 질문이었다. 이미 선단은 조금씩 규화의 안으로 제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비좁은 입구는 종전과는 다른 부피감에 둔통이 일었다. 규화는 신음을 애써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나는 널 늘 미워해 왔고….”
“…….”
“그리고 계속, 널 미워할 거야.”
순간을 영원으로 믿는 감정에 속아 몸과 마음을 바치는 행위를, 여태껏 규화는 멍청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꺼이 규화는 멍청해지기를 선택했다. 영원을 바라서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서였다.
내가 그러했듯이, 너에게도 이 순간이 앞으로도 이후로도 없길 바라며. 규화는 힘껏 그와 눈을 마주하고선 말했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굴지 마. 상관없으니까.”
서툰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영인의 형형한 눈빛에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단이 파고들었다. 고통은 예상대로였고, 한편으로 그의 좁은 세계를 뛰어넘었다.
“……!”
아프다. 어딘가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아프다. 너무 아팠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말랑하던 배가 단숨에 경직되었다. 들어간 건 고작해야 선단 정도가 전부였지만, 더는 품을 수 없을 것처럼 한계까지 벌어졌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아프지 않을 수 없는 행위였다. 무엇 하나 받아들여 본 적 없는 부위였다. 각오는 했지만 감당해야 할 고통의 종류가 달랐다. 어딘가가 제대로 고장 나 버릴 것 같아 덜컥 두려웠다. 규화는 간신히 영인의 어깨를 잡았다.
뿌리 밑까지 온전히 들어찬 성기에 아랫배가 요동쳤다. 순간 헛구역질이 일었다. 규화는 고개를 들어 영인에게 매달렸다. 규화의 둥근 손톱은 강건한 영인의 어깻죽지를 파고들지 못하고 하얀 자국만 남겼다.
“…윽.”
도를 넘은 압박감에 영인마저도 고통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아랫도리는 걱정스레 묻는 얼굴과 달리 굴고 있었다. 한군데를 끊을 듯 조이는 압력 가운데 오히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아파, 너무 아파….
요령 없이 치받는 성기가 불로 하체를 지지듯 몸을 갈가리 찢었다. 오히려 영인다웠다. 선단까지 빠져나갔다가 단번에 뿌리 끝까지 파고드는 행위에 규화가 목을 젖혔고, 허리를 퉁겼다. 몽둥이로 아래를 얻어맞는 것처럼 아팠다. 단순히 밀부만의 고통이 아니었다. 하체 전체를 짓이기듯 뚫고 들어오는 영인에 규화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널브러졌다. 달래듯 커다란 손아귀가 엉덩이를 가득 쥐었다. 가슴을 핥는 애무마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영인의 사정은 다른 듯했다. 움직임은 점차 거세어질 뿐,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규화는 젖은 뺨을 영인의 왼쪽 목덜미에 비비며 신음했다. 고개를 젖힌 그의 눈에 영인의 왼쪽 귀가 보였다. 올려붙이는 터에 규화의 콧날이 영인의 젖은 귓불에 가 닿았다. 앞니로 작게 짓씹자 옆구리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어, 규화는 그의 왼쪽 귀에 대고 겨우 그 이름을 속삭였다.
“영, 인아….”
불린 이름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듯, 영인은 계속해 몰아쳤다. 허리와 엉덩이를 쥔 손의 악력이 가실 줄을 모르고 거세어졌다.
“아파….”
“헉, 헉…. 윽….”
“아, 파….”
“하아….”
정말, 들리지 않는구나. 관자놀이로 흐른 눈물이 이어 귓바퀴를 축축하게 적셨다. 젖은 귀 너머로 들리는 영인의 거친 숨소리는 쾌감에 어려 있었다. 허리를 느슨히 돌리어 아래를 벌리는 행위에 규화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게 너에게는 지금 좋은 걸까. 좋을까.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영인은 여태껏 규화가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늘 규화가 먼저였고 배려하기 바빴던 평소의 영인과는 다른 모습이 낯설고도 그만큼 반가웠다.
성급했고, 서툴렀다. 제멋대로였다.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마치 그가 화를 내 주기를 바랐던 것처럼. 진실된 영인 앞에 규화의 마음만은 한결 가벼워졌다.
차갑게 식은 손가락으로 규화는 영인의 뺨을 제게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비릿한 향취가 남은 입술을 제 입 안으로 가져갔다.
서툰 키스가 깊어질수록 영인의 두 손에 의해 다리가 더욱 훤히 갈렸다. 천장을 향해 드러난 하체를 부끄러워하기도 전에, 제 고환 아래 닿는 영인의 음모에 규화는 도리질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깊어, 윽. 아파, 아….”
가장 안쪽 깊숙이 상처를 낼 생각이었던가. 영인은 수직으로 내리꽂으며 제 몸을 가장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활짝 벌어진 규화의 새하얀 다리가 반동에 퍼덕거리는 게 성가신 듯, 그의 발목을 그러쥔 채 허리를 몰아쳤다.
퍽퍽 소리가 났다. 죄책감에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일까. 영인은 눈을 감은 채 말단의 쾌감에만 허우적거렸다. 커다란 손아귀가 허벅지에 자국을 냈다. 어설프게 감긴 규화의 다리와 발뒤꿈치가 그의 엉덩이를 힘없이 두드렸다.
두 사람은 타고난 템포가 달랐다. 영인이 무심결에 한 모든 것은 규화의 예상을 하나같이 엇나갔다. 빨라질 것 같을 때는 느릿해 애를 태우고, 조금 쉬엄쉬엄하겠거니 싶었던 때는 세차게 몸을 놀렸다. 그만큼 진이 빠진 몸은 쉽게도 늘어졌다.
언제 사정을 하고, 또다시 부풀어 깃드는지 몰랐다. 불 하나 켜지 않아 어두운 방 안에서, 영인은 마지막 콘돔을 동낼 때까지 규화를 놓아주지 않았다. 다만 규화는 그만하라는 말 하나 없이 힘없이 영인을 그러안을 뿐이었다.
영인의 허벅지 위에 앉아 그의 머리칼을 쥔 규화는, 스스로 허리를 세울 틈도 없이 놓아주지 않는 커다란 손길에 신음하며 저도 모를 절정에 젖었다. 아래가 비는 허전함에 허리를 떨며, 영인을 내지르며, 듣지도 못하는 그가 저를 놓을 수 없게 긴 손가락을 허우적거렸다.
“으응…!”
통제되지 못한 소리가 마구잡이로 튀어나간다. 자각도 없이 규화의 성기에선 액이 질질 새어나갔다. 영인이 한 번 허리를 올려칠 때마다 입술 사이에서 짓이겨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건반을 마구 주먹으로 내려친 것처럼 정제되지 못한 불협화음이 깃들었다. 고통 사이로 몰래 고개를 들이미는 진득한 쾌감은, 그 존재 자체로 온몸을 괴롭혀 왔다. 끔찍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참을 길도 없이 흐느끼는 신음에 더불어 결국엔 영인의 절정 끄트머리에 두 사람은 매달렸다. 체액이 콘돔을 채우다 못해 규화의 입구를 잔뜩 적시고, 허벅지 사이까지 흘러내렸다. 규화는 힘없이 바르작대며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모든 게 쓸려 내려갔다.
규화는 손을 뻗었다. 흐려지는 시야 가운데 영인이 울고 있었다. 건반을 두드리듯 더듬더듬 그 뺨을 그러쥐며 규화가 여리게 속삭였다. 울지 마…. 비명을 지르다 못해 쉬어 빠진 목소리는, 귀가 먹은 그에게는 닿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났다는 탈력감 끝에 깃든 어이없는 행복이,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하체 너머로 넘실대며 밀려들었다.
너무 커다란 것을 품었던 탓일까. 이물감에 해방된 몸은 안도감보다 먼저 어리석게도 두려움에 직면했다. 비록 고통스러웠다 해도, 하나였던 그 순간에 비해 지극히 평온한 지금이 허전하고 외롭기만 했다.
그래서 규화의 왼손이 영인의 입술에 닿았다. 영인의 떨리는 오른손이 규화의 다리 사이를 어루만졌다. 차가운 손끝이 입 안으로 먹혔다. 건반 대신 닿은 혀끝 돌기에 규화는 웃었다. 눈을 감았다. 마치 어미의 젖가슴을 빨듯, 규화의 긴 손가락을 빨아들이는 영인의 온기가 겨우 그를 잠재웠다. 영인의 입 속은 무척이나 따스했다. 벌써 겨울이 끝이 나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영인은 부산스럽게 화장실을 오가는 중이었다.
따스한 물에 적셔온 수건으로 규화의 알몸을 닦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들고 허벅지 사이를 닦는 촉감에 규화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지레 놀라선 규화의 표정을 살피는 영인은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았다.
그 얼굴에 대고 무어라 장난이라도 한마디 던지고 싶었지만 쉬어 빠진 목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어느덧 규화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눈을 떴을 때까지만 해도, 영인은 그의 곁에 있었다. 사실 곁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두 사람은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붙어 있었다. 앞머리에 닿는 영인의 규칙적인 숨결이 연신 규화의 앞머리를 헤집었다. 그 묘한 간지러움에 낑낑거려봤으나 소용없었다.
이내 규화는 체념하고 영인의 품에 좀 더 파고들었다. 정성스레 닦아 준 덕인지 몸에 닿는 싸구려 시트의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영인의 뜨거운 체온 덕도 있을 테다. 오른쪽 귀를 베개 쪽으로 대고 잠든 영인은 작은 소음 따위에 깨어나 줄 리 없음을 알면서도, 규화는 혹여나 그를 깨울까 숨을 죽였다.
여전히 다리 사이에 영인을 품고 있는 것처럼 묘한 감각이 일었다. 안을 헤집던 날것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흘낏 아래를 살피니 반쯤 발기한 영인의 성기는 기세가 여전해 등골이 서늘하기까지 했다. 둔통이 이는 허벅지 안쪽 사정을 살피고 싶어도, 돌처럼 단단한 영인의 다리가 제 허벅지를 누르고 있었다.
규화는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몸에서 힘을 뺐다. 대신 더듬더듬 손을 내려 그 또한 영인의 옆구리를 쥐었다. 간지러운지 허리와 머리를 감싸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러다 숨이 막히겠어. 까칠한 턱에 이마를 기대며, 규화는 잠이 들었다.
이윽고 세 번째 눈을 떴을 때, 규화는 혼자였다.
좁은 방은 고개를 고작 한 번 까딱이기만 해도 시야에 전부 들어오는 넓이였다. 보일러가 덥게 돌아가는 방인데도 그는 서늘함을 느꼈다. 분명 두 번째 눈을 떴을 때까지만 해도 알몸 차림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셔츠에 바지까지 입혀져 있었다.
분명 어젯밤은 현실이었다. 부르트고 뾰족해진 유두가 셔츠에 스치는 감각, 힘겹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부터 허리까지 타고 오르는 찌릿한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모든 건 현실이라고. 꿈이 아니라고.
화장실 바닥에는 물기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규화는 거울에 비친 제 몸을 살폈다. 유독 부푼 유두와 살갗 위 얼룩진 흔적 몇 군데를 제외하곤 멀끔했다. 다리 안쪽에서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피가 아닌 연고가 체온에 녹아 흘러내리는 걸 보니 영인이 어떻게든 처치를 해 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어디 간 거야….”
TV도 시계도 없는 집. 휴대폰도 꺼져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봄이 가까워졌다고 해도 여전히 겨울은 겨울. 아침은 그 이름과 달리 여전히 밤에 가까웠다. 허리를 붙들고서 비스듬히 누운 규화의 시야는 어둠에 차츰 익숙해졌다.
여명이 동쪽 창을 넘어 차츰 머리맡을 채우기 시작할 때까지도, 영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해진 규화는 자리에 눕지도 못하고 좁은 방을 연신 서성거렸다.
옷장에 곱게 걸어 두었던 새 코트를 입고 나간 걸까. 규화는 그 곁에 걸린 낡은 패딩 점퍼를 꺼내 입었다. 옷에 가득 밴 영인의 냄새에 코를 묻고서, 그는 옥상 쪽으로 나갔다. 슬리퍼를 신은 발가락 사이로 새어드는 바람이 찼다.
사다리를 오르는 통통 소리가 날 때까지 몇십 분이 지났을까. 손에 비닐봉지를 잔뜩 들고 계단 끝에 올라서다 놀란 영인은, 자기 집 문 앞에 쪼그리고 앉은 패딩 뭉치에게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너야말로 어디 갔었어.”
다듬어지지 못해 샐쭉한 말투 곳곳엔 서운함이 드러났다. 그 뾰족한 원망을 어루만지듯 규화의 빨개진 코끝을 튕긴 영인이 미안해하며 말했다.
“좀 더 잘 줄 알았지. …미안해요, 놀랐구나.”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허리도 아플 텐데, 왜 이러고 앉아 있어요. …어서 들어가서 아침 먹어요. 허기질 텐데.”
아무렇지 않다는 핑계를 대기도 전에 영인이 그의 허리를 패딩째로 능숙하게 그러안아 들어, 규화는 얌전히 안긴 채로 허공에 걸음을 옮겼다.
제가 선물했던, 그 반지르르한 코트에 이마를 뭉개고 나서야 그는 영인이 쥔 봉지에서 올라오는 음식 냄새를 맡았다. 어제처럼 아무거나 먹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근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급히 포장해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이른 저녁을 먹은 뒤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불안함 탓이었을까, 여태 감지하지 못했던 허기가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배에서 우렁차게 꼬르륵 소리가 울린 것은 당연한 인과 관계였다.
“어서 식기 전에 먹어요. 먹고 나면 데려다줄게요.”
젓가락을 야무지게 털어선 제게 건네는 손에 비쭉대면서도, 규화는 이제 딱히 댈 핑계가 없어 머뭇거렸다. 다리가 아파 못 내려가겠다고 할까. 그러다 업어 준다고 하면 어쩌지. 솔직히 한번 업혀 보고는 싶었는데….
“아직, 뭐. 시간 너무 이르지 않나. 천천히….”
“몸이 괜찮다면 말인데. 같이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응?”
다른 생각을 촘촘히 이어가기에 열중하던 규화는 엉뚱한 말을 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가 되묻자 영인이 싱긋 웃었다. 해를 등지고서도 선명한 얼굴은, 조금은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짝 돌아서, 데려다주려고요.”
***
영인의 손재주는 비단 손목 안마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꼼짝도 못 할 것 같았던 다리와 허리를 그가 몇 번 주무르고 나니 골반 통증도 한결 나아졌다. 걷는 데도 무리가 없어, 업히겠냐는 영인의 말에 규화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날이 흐린 탓일까. 여전히 시야는 어둑했고, 그래서 택시를 잡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언덕을 다 내려오도록 오가는 차가 없어 큰길로 나가서야 겨우 택시를 잡았다.
한산한 도로를 가르던 택시는 다시금 좁은 도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도로를 지나며 차체 바닥이 통통 튈 때마다 규화는 눈물이 찔끔 나왔다. 뒤늦게 알아챈 영인이 팔을 뻗어 규화의 엉덩이 아래 제 손을 가져다 댔지만, 오히려 다른 이유로 자극을 주어 뾰족한 눈초리를 받았다.
골목은 더욱 좁아져, 더 들어갔다간 택시가 빠져나올 구석이 없을 듯했다. 두 사람은 가던 길 중간에서 내려 두 발로 다시 언덕을 올랐다.
영인이 연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업히겠냐고 재차 물어봤지만 이제 와 그럴 수 없었다. 대학가보다 더 고요한 골목, 대체 목적지가 어디인지 궁금할 뿐. 산꼭대기 같은 골목에 이르러서야, 규화는 십자가가 내걸린 지붕을 발견했다.
“여긴….”
“집에 와 보고 싶어했잖아요.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다 떨어진 낡은 간판엔 ‘희망원’이라는 한자가 새겨 있었다. 애석하게도 규화는 한자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그 광경을 둘러보기만 해도 이곳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쪽에는 마당과 더불어 조그마한 집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성당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며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규화를 뒤따르던 영인이 그가 연신 허리를 두들기는 모습을 보고는 제 오른손으로 등허리를 받쳐 주었다. 몸을 반쯤 기대며 오르자 어느덧 아침이 밝게 개었다. 아직 아무도 깨지 않았는지 고즈넉하기만 한 주변을 본 규화가 우려 섞인 얼굴로 물었다.
“마음대로 들어가도 괜찮아?”
“그럼요. 오늘은 새벽 미사가 없는 날이라서, 아직 여유가 있어요.”
고작해야 서른 명 정도가 미사를 드릴 수 있을까 싶게 소담한 성전이었다. 그나마 지붕 경사를 따라 창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알록달록한 빛을 내며 텅 빈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십자가에 걸린 예수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규화의 시선이 이내 안쪽 피아노에 가 닿았다.
“내 첫 피아노예요. 인사해요.”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였다. 공방에서 본 몇몇 반파된 피아노보다야 나았지만, 어느 면에서는 그들보다 회생하기 어려운 상태일지도 모른다. 30년도 더 된 피아노라. 아무리 액션 및 부속을 갈았어도 그 소리의 기본인 프레임과 향판은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분명, 세월을 간직한 소리를 내 줄 것이다. 게다가 영인이 처음 만졌던 피아노라니.
규화는 절제할 수 없는 호기심에 연신 피아노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경연할 때라면 소리의 질적인 면을 따지겠지만, 보통은 다르다. 어떤 피아노든 피아니스트에겐 미지의 영역이자 탐구의 대상이었다. 피아노가 품고 있는 역사는 그 소리에서 나온다.
…아마 영인의 파편도 조금이나마 품고 있겠지.
피아노를 매만지는 규화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인이, 이내 나직이 물었다.
“…쳐 볼래요?
“그래도 괜찮아?
어제의 실수를 떠올린 탓인지 규화는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영인은 대답 대신 구식 뚜껑의 잠금을 풀어 능숙하게 건반을 내보였다. 이를 드러낸 피아노는 겉에서만 볼 때와 비교해 확실히 세월에 풍화된 티가 났다. 하지만 정갈하게 정비된 구석구석엔 오랜 세월 영인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그럼요. 하지만 아침이니까 <겨울바람>보다는 좀 더 산뜻한 곡이 어떻겠어요?”
“…안 쳐. 어제는 그분이 좀 센 걸 쳐 보라고 해서 그런거고. 안 망가뜨릴 테니까.”
“괜찮아요. 그런 건 피아니스트가 걱정할 일이 아니잖아요.”
스툴을 뒤로 빼낸 영인이 품에 안듯이 허리를 감싸곤 그 위에 규화를 앉혔다. 갑작스런 포옹에 규화는 찌르르 경추를 타고 올라가는 통증을 미처 느끼지도 못했다. 추위에 굳었을 두 손을 꾸욱 쥐었다 놓아준 영인의 커다란 손바닥은, 어제 규화의 몸 깊숙이까지 열렬히 와 부딪히던 그 열기를 여전히 품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망가뜨려도 충분히 고칠 수 있어.”
그리고 그에 반해 지극히 차분하기만 한 목소리는, 굳이 피아노를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지붕이 높은 성전. 그 위를 나풀거리며 울려대는 영인의 너그럽고도 단단한 저음에 등을 기대며, 규화는 살짝 눈을 감았다.
“문규화가 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치면 돼.”
이내 멜로디가 떠올랐다. 등 뒤로 전해지는 심장 고동을 메트로놈 삼아, 손등에 미진하게 남은 온기에 기대어 그의 손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자유롭게.
흔쾌한 허락과 별개로, 규화는 저 나름대로 준비가 필요했다.
게다가 지금 몸 상태로 <겨울바람>은 애초에 턱도 없었다. 허리가 전신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는 이상, 건반에 무게를 완전히 전달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여린 곡들도 쉽지는 않다.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이 낯선 피아노의 터치감과 소리를 확인해야 했다.
규화는 숨을 가다듬고 제 오른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한 번 가볍게 스쳤다. ‘…안녕, 처음 만나.’ 하며 인사를 건네듯, 공방에서의 스타인웨이보다 더 조심스러운 터치였다.
생각보다 건반의 반발력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연이어 C Major를, 그리고 D#을 눌렀다. 가볍게 흘린 아르페지오에 성전 특유의 울림이 어우러졌다. 풍파가 스민 그 낡은 건반을 규화의 부드러운 손끝이 진득이 감쌌다. 다행스럽게도, 이 피아노는 낡은 몸으로도 나쁘지 않은 ‘피아니시모’를 들려주었다.
어슴푸레한 시야 속, 도드라진 십자가에 시선을 맞춘 규화는 자연스럽게 두 손목을 들어 올렸다. 손등에는 아직 영인의 온기가 머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악상이 떠올랐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림나장조의 선율이 ‘여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Bach,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Sheep May safely graze>
바흐는 평생을 종교 음악에 헌신했지만, 그런 그도 가끔은 세속적인 목적으로 곡을 썼다. 하지만 곡을 만든 이의 성향과 세계관은 목적을 떠나 자연스레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바흐가 작곡한 다른 종교 음악과 마찬가지였다. 곡 전체에 밴 조화로운 화성의 진행과 그로 인한 감동은, 오히려 종교의 틀을 떠나서 듣는 이에게 평온을 선사하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문규화 특유의 절제된 루바토와 섬세한 셈여림. 그 정확하고 간결한 타건은 이토록 고요한 울림 속에서 더욱 그 빛을 발했다. 섬세한 페달의 물결을 타고서, 멜로디는 마치 성가대의 노랫소리처럼 이 좁은 성전을 충실하게 물들였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 듣는 이에게 평안을 안겼다. 마치 축복처럼.
그 때문일까. 연주가 시작되었을 때 규화의 등 뒤를 받쳐 주던 영인은, 5분이 채 안 되는 연주가 끝났을 즈음에는 어느덧 물러나 맨 앞 의자에 걸터앉아서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있었다. 규화는 그 사실을 연주가 끝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때?”
마치 두 발 자전거 타기를 도와주던 아버지가 어느새 손을 놓아주었는지도 모르고 내달린 아이처럼, 규화는 황망하게 눈을 깜박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연주에 몰입한 자신이 스스로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영인의 시선이 유독 진지하고 무거워 더욱 계면쩍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화려한 낭만파 연주만을 보여 주었는 데다, 바흐를 선보이기엔 아직 스스로 미숙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랑 바흐, 안 어울려?”
“아뇨. 무척….”
영인은 문득 목이 메는 느낌에 한 번 말을 더듬어야만 했다.
“좋았어요. …평온했어요.”
하지만, 분명 나쁘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은 컨디션에 낯선 피아노, 그리고 지나치게 높은 천장과 추운 날씨. 어느 하나 흡족할 데라곤 유일하게 들어주는 청중 하나뿐인 이 작은 연주회가 자신에게는 만족스러웠는지, 규화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나도, 이 피아노 좋았어.”
“그랬어요?”
“응. 생각보다 소리가 잘…간직되어 있던데. 이걸로 연습했던 거야?”
피아노에 대해 묻자 영인은 앉았던 몸을 일으켜 규화 등 뒤로 다가왔다. 싸늘하고 건조한 대기를 막아서듯 등을 받치는 체온에 규화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허리께가 찌릿했다.
“돈도 없고 후원자들도 없는 성당에서, 그래도 피아노를 내다 팔 수는 없으니까요. 미사는 드려야 하니까. 놀 것 없는 가난한 애들에게는 피아노가 가장 재밌는 장난감이었어요. …그저 좋았어요. 그 음정이 얼마나 엉망인 줄도 모르고. 원래 그런 소리인 줄로만 알았죠. 학교 입학해서 음악 시간에 제대로 된 피아노 소리를 듣고 나니까…. 살 것 같더라고요. 소리가 좋아서.”
피치가 떨어진 화음은 절대음감을 지닌 이들에게 미묘한 불쾌감을 선사한다. 그 불쾌감을 당연하게 여기며 익숙해져 온 영인에게 교정된 소리는 실로 완벽에 가깝게 들렸다. 아름다웠다.
“그때부터 피아노가 궁금했어요. 하지만 내가 가진 건 이게 다니까. 건반도 잘 안 눌리는 피아노를 가지고, 어떻게든 더 예쁜 소리를 내고 싶어서 애썼어요. 사실 진작 내버리자고 했는데. …그럴 수 없더라고요. 워낙 뭘 잘 못 버리는 성격이기도 하고.”
왜 이 피아노로는 그 소리를 낼 수 없을까. 어린 영인이 밤새 고민했던 흔적은 여전히 이 피아노 속에 담겨 있었다. 시간이 지나, 건반만 두드리던 아이는 이 피아노를 뜯어내고 고치는 사람이 되었다. 삶의 성공과 실패는 단순히 한 맥락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게 피아니스트가 아닌, 조율사의 역할이라는 걸 아주 나중에야 알았죠.”
마치 성적표를 변명하듯 제 자취를 읊는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규화는 그 붉은 뺨과 귀를 살피며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 평소답지 않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영인의 모습이 낯설고도 아름다웠다.
“궁금하다.”
“뭐가요?”
“그럼 여기서 네가, 이렇게도 연습했을 것 아냐.”
…아니라고 부정하는 영인의 말이 입술 근처로 오르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들은 시작되고 말았다.
무던한 충동에 휩싸인 규화는 짧은 심호흡 이후, 쉽게도 제 오른손 약지를 시 플랫 위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매끄러운 아르페지오. 영인은 귀를 의심했다. 연주하는 규화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슈베르트 즉흥곡. 작품 번호 90-2, 내림마장조.
건초염으로 재기가 불투명해진 순간, 문규화가 막연히 떠올린 곡과 그 장면, 그리고 사람. 신정훈. 그리고 화원 아트홀. 하지만 제 계획한 바와는 다르게 마지막 앙코르에서마저 규화는 끝끝내 이 곡을 칠 수 없었다. 두려웠다. 완벽에 닿을 수 없고, 신정훈에 닿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를 이 곡으로부터 늘 달아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무렇지도 않은 보통 날, 더 좁고 보잘것없는 성전과 피아노 앞에서 규화는 거침없이 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여덟 살, 그때 이후로 처음 누군가의 앞에서 연주하는, 문규화의 슈베르트 즉흥곡이었다.
영인 또한 열한 살 때 이후로 처음 듣는 그 연주.
그는 곧게 편 규화의 허리에 팔을 감고서 스툴 뒤쪽에 느슨히 기대며 제 오른쪽 귀를 기울였다. 최선을 다해, 좀 더 잘 듣기 위해서.
영인의 움직임과 손길에도 규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오만한 자세 그대로 턱을 치켜들고, 상체의 흔들림을 절제하며 삐걱거리는 페달을 야무지게 밟았다. 이제는 걸터앉을 책이나 보조 의자 없이도 긴 팔과 다리를 유려하게 오가며, 규화는 자유로이 자신의 선율을 노래해 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그 무너진 벽 뒤로 내어 보였던 무대가, 대기실에서 먼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던 문규화의 연주가, 그 두 손이 영인의 눈 아래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고작해야 여덟 살배기의 실력과는 비견할 수 없는 연주였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자신이 미처 다다를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빛나는, 그래서 움켜쥐지 못했던 빛.
지극한 기시감이었다. 영인은 규화의 허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피아노가 안온히 노래하는 평온한 왈츠 선율과 달리 절박하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울렸다. 비단 영인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의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프레스토를 내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피날레.
연주를 마친 규화를 반긴 것은 흔한 박수 소리 하나 없는 정적이었다. 손안에 흥건한 땀을 훔치며 입을 연 규화의 변명은 미처 그 끝을 맺지도 못했다.
“아, 너무 오랜만이라….”
고개를 돌린 그의 단정한 턱에 영인의 왼손이 닿았다. 나머지 오른손으로 강하게 규화를 제 쪽으로 돌려 안은 영인이, 이내 볕을 따라 그대로 규화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지난밤과는 다른, 지나치게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에 규화는 한동안 눈을 감지 못했다. 깜박이는 시야를 가득 채운 영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른히 잠긴 눈에 촘촘히 박힌 속눈썹을 헤아리다, 규화는 제 아랫입술을 물고 핥아 주던 혀가 부드럽게 치열을 두드리는 힘에 살포시 턱을 열었다.
“음….”
휘감겼다. 까칠한 딱지가 앉은 영인의 엄지가 턱을 조금 더 비틀었다. 안쪽으로 침범한 보드라운 살덩이가 잠시 온기를 잊은 규화의 몸을 데우기 시작했다. 어깨를 놓아준 영인의 손은 이내 허리에 닿았다. 쓰다듬듯 등에서 허리로 내려앉은 그 커다란 손이 규화의 몸을 좀 더 제 쪽으로 돌려 안았다. 뒤로 기우는 몸을 강하게 떠받치는 손에, 그는 자연스럽게 영인의 목덜미를 감싸 안을 수밖에 없었다. 두 입술 사이로 나른하게 한숨이 깃들었다. 혀는 보다 깊게 서로를 탐했다.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그리고 또다시 입맞춤이 이어졌다. 푹 젖어 부르튼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입술이 서로의 입술을 베어 물고, 다시 빨아들이다 물기 밴 마찰음을 냈다. 그때까지도 영인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마치 꿈이라면 깨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절실함이 어린 두 뺨을 쓸어내리며 규화는 영인의 품에 깊게 파고들었다. 고작해야 입을 맞춘 게 전부인데 영혼이라도 먹힌 것처럼, 규화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잠시 잊었다. 매달리는 그를 끌어안고 등을 도닥인 영인이 뒤이어 힘겹게 말을 이을 때까지.
“나는 그때부터 줄곧…. 이걸 바라왔던 것 같아.”
“…….”
“이제야, 알았어.”
규화를 향한 말들이 아니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그 조소 어린 목소리에 고개를 든 규화가 칭얼거리듯 그의 입술 위로 제 촉촉한 입술을 마구 비볐다. 말을 멈추게 하는 데에는 제법 효과적인 어리광이었다.
“이렇게 신성한 곳에서 괜찮아?”
“…왜요?”
다시 벌어진 입술 사이. 입술보다 이제는 코를 맞대고서. 규화의 나풀거리는 웃음이 새하얀 입김을 받아 빛났다.
“벌이라도 받으면 어쩌려나 싶어서.”
“…왜, 겁나요?”
이제 영인은 두 눈을 뜨고 규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능글거리는 웃음 하나 없이 뻔뻔하게 구는 그 낯이 싫지 않았다. 어느 시궁창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을 그 또렷하고 곧은 시선에 더해. 이제 자신을 가짐으로 인해 그가 얻은 그 여유로움이 단연코, 싫지 않았다.
성취감이 피어오른 규화는 비비던 콧날에 이어 이마를 마주 대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쥐었다가 펴고는, 감지 않으려는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아니. 나는 신경 안 써.
“…….”
“네가 주는 벌만 아니라면, 나는 다 괜찮아.”
빛이 사위를 선명하게 비춘다. 깃드는 총천연색 아래, 오로지 피아노만이 흑과 백일 뿐이었다. 두 사람 앞에 담담히 선 낡은 악기는, 이 앙코르 무대의 유일한 청중이자, 가수였다.
십수 년 사이에 몹시 부르트다 못해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린 손은 건반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어김없이 잘게 떨리는 손에, 규화의 섬세한 손끝이 그를 달래듯 어루만졌다. 그 위로에 잠시 심호흡을 한 영인은, 이내 제 오른손 약지를 시 플랫 위에 놓았다.
“그때의 나는…. 그저 예쁜 도입부를 바란 게 아니었어요. 내 앞 꼬맹이의 연주가 너무 강렬해서. 좀 기가 죽었거든요.”
‘그 꼬맹이’였던 이는, 어느덧 몰라볼 만큼 아름답게 자라서는 영인의 말에 피식 웃고 있었다.
“운명 교향곡처럼, 운명이 내 문을 노크한 기분이었어. …그래서 첫 음을 길게 끌고 싶었어요. 앞 연주의 여운 위에서 시작한다 생각했어요. 딛는 건반마다 그 아래 레드 카펫이 깔린 느낌이었어. 나는 그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나면, 너른 무도회장에 다다르는 거야.”
그리고 시작되었다. 하지만 매끄럽게 이어지던 스케일은 오래 못 가 도중에 끊겼다. 영인은 제 오른손의 떨림을 감추려 작게 주먹을 쥐었다. 그를 잠자코 바라보던 규화는 오른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영인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왼손은 영인의 몫이었다. 까다로운 오른손에 비해 왼손은 쉬운 편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템포를 아우르며 매끄러운 스케일에 강세를 심는 역할이 바로 왼손의 몫이었다. 영인은 성실히 그 직무를 수행했다.
악보 하나 없이 두 사람은 호흡을 맞춰 나갔다.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는 성인 남자 둘을 감당하기 벅차 보였지만, 두 사람의 조심스러운 터치에 위태롭게 노래를 이어나갔다.
“박자 때문일까. 아마도 난… 함께 왈츠라도 추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손을 내밀었는데 거절당했죠.”
“…뒤끝 길다.”
“그럼요. 앞으로도 평생, 그 뒤끝 안 끝날 텐데.”
뾰족한 말투로 답하자 영인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가벼이 귓가를 스쳤다. 그 와중에도 영인의 왼손과 규화의 오른손은 바쁘게 주제부를 구현해 나갔다. 당김음처럼 엇갈리는 박자를 따라 둘은 고개를 까닥였다. 마치 두 손은, 뒤늦게나마 춤을 추는 듯했다. 가끔은 발을 밟듯 박자를 틀리기도 했다. 작게 오가는 웃음이 서로의 미스 터치를 치하했다.
이윽고 조가 바뀌었다. 왼손이 도약과 함께 바빠지기 시작하자 영인은 자연스레 제 손을 뒤로 물렸다. 허리에 감기는 손길을 느낀 규화가 왼손을 들어 완전히 그를 대신했다. 영인은 규화의 허벅지를 건반 삼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사랑스럽고 에로틱한 지휘에 규화는 입술을 깨물며 음악에 집중하려 애썼다.
“아니, 거기서 좀 더 강하게. 그래야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맞아요. …어떻게 기억하고 있네요?”
“응….”
규화는 일부러 뒷말을 삼켰다. …나도 평생, 못 잊을 것 같거든.
영인의 지휘를 따르는 데는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르카토에 이르기까지, 규화는 제 허벅지를 두드리는 템포와 강세에 따라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귓가에는 속삭이는 영인의 목소리만이 가득했다. 마치 그의 두 손이 된 것처럼 규화는 제 손과 팔을 놀렸다. 의자가 두 사람의 체중을 감내하느라 내내 삐걱거렸지만, 그 와중에 페달링마저 매끄러웠다.
“숨을 죽였어요. 난…. 서서히 현실로 돌아올 타이밍을 찾고 있었죠. 이 무대를 내려가면 날 기다릴 결과를 생각하면, 차라리 이 순간이 멈췄으면 했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제일 작은 소리를 냈고….”
“…….”
“한편으로는 이미 당신이 나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불안했어요. 그래서 진폭이 좀 더 커졌죠. 그래서 좀 더 과감하게 루바토를. 큰 보폭으로 이르다, 이후 두 번은 작게. 딴, 따단.”
영인은 16년 전의 연주를 마치 어제 일처럼 읊었다. ‘즉흥곡’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래서 주제부로 돌아왔을 때는, 매끄럽게 흐르는 물방울이 아니라 흩날리는 드레스 자락이 보였어요. 턴을 하면 느릿하게 이어 도는 화려한 레이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에 미끄러지듯이….”
건반이 온전히 자신의 차지가 되어 버리고 나자, 규화는 조금씩 영인의 지휘와 엇갈리기 시작했다. 곡의 난도 문제가 아니었다. 악보에 적힌 그대로의 악상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규화로서는 무의식적으로 영인의 지시에 어긋나려 했다. 조금은 다그치듯, 허벅지를 강하게 두드리는 영인의 손길에 그는 어느덧 주도권을 잃었다.
손과 귀가 따로 놀았다. 새삼 패배감이 깃들었다. 스스로 쳐내는 낯선 울림에 어느덧 허리의 통증마저 잊었다. 그리고 피날레에 이르러 작게 깃드는 피아니시모. 볼륨이 점점 강해져 허벅지를 붙든 큰 손아귀에, 규화는 이윽고 마지막 음을 누른 채 한참을 허덕여야 했다.
“…조금 이상하죠.”
울림이 잦아들었다. 어색한 듯 웃으며 정적을 깬 영인에, 규화는 잠시 혼란스러웠던 정신을 추스르고 대답했다.
“…아니, 잘했어.”
이어, 고개를 돌려 영인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 감상을 들려주었다.
“잘, 들었어.”
“…….”
“덕분에, 마음이 잡혔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드디어 규화의 목표가 선명해졌다.
확실했다. 문규화는 장영인이 될 수 없다. 문규화가 아무리, 손목이 부러질 정도로 연습한다고 한들, 장영인이 될 수는 없었다. 태초부터 둘은 다른 연주자였고, 그러기에 이끌렸다.
규화의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곡을 장면으로 이끌어가는 재능은 그에게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벅찼다. 영인의 지시를 따라 규화는 그 손가락을 놀리는 게 고작이었다. 다른 차원의 재능이었다.
규화는 넌지시 제 바닥을 더듬었다. 규화에게 악보는 악보일 뿐이었다. 그것을 뛰어넘어 표현하고픈 무언가는 애초부터 갖고 있질 않았다. 영인이 타고난 재능에 닿을 수 없다. 원천이 없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놓는다 해도, 가지는 빈약해지기 마련이다.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길 수 없다.
재삼 패배를 시인한 그의 눈동자에는 딱히 절망감은 없었다. 이미 여덟 살, 그 순간에 깨달은 바를 인정하기까지 십여 년이 걸렸을 뿐이다. 오히려 마음은 개운해졌다. 슈베르트 즉흥곡의 악령에서 벗어난 것일까. 눈앞의 영인은 여전히 조심스러웠고, 두 눈에는 저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그 모습이 얄밉거나 밉기는커녕, 이제는 지독스레… 사랑스럽기만 하다.
…들려주고 싶어졌다. 더는 늦기 전에.
네 귀가, 더 나빠지기 전에.
패배감은 어쩌면 등가교환일지도 모른다. 바닥을 비운 뒤, 새로 시작하는 마음가짐까지 더한다면. 문규화는 제가 나아갈 바를 찾았다. 따라잡지 못한다는 열패감을 이긴 소유욕이, 목적을 잃은 규화의 마음에 조용히 깃들기 시작했다.
아직, 나의 최선은 지금이 아니리라 믿어.
어느덧 온전히 하늘 위에 떠오른 해가 성전을 밝혔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비추는 햇빛에 공간은 오색으로 물들었지만, 문규화의 금안을 이기는 빛은 없었다. 왼손을 어루만지는 그 거친 손등에 이번엔 거꾸로 입술을 비비며, 규화는 이 특별한 교습에 대한 사례를 넉넉히 치렀다.
미증유. 그에게는 이전에도, 또 앞으로도 없을 단 한 번뿐인 레슨이었다.
***
어둠이라곤 자취를 감춘 세상 아래,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간 이별을 고했다. 기한은 길지 않았다. 봄이 무르익고 꽃이 필 즈음까지. 그동안 영인은 통원 치료를 받기로 했다. 영인의 상태를 봐서 합류할 생각이었기에,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기일은 정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긴 이별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아쉬움을 내뱉진 않았다. 실로, 지난밤은 마치 없던 일인 것처럼, 두 사람은 이별 앞에서 담백했다. 다만,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규화가 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심인성으로 오른손을 쓰지 못했던 한 피아니스트의 일화였다.
“모두가 힘들 거라고 했대. 어느 의사도 마찬가지였어. 현대 의학으로는 소용없다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무려 25년간 재활을 한 끝에….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고, 음반까지 냈어.”
“…….”
“그러니까 이 정도는 기적이 아니야.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우리라고 해서 못 할 리 없잖아.”
장영인이 아닌, 네가 아닌. 난데없는 ‘우리’. 그 사랑스러운 1인칭에 영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쥔 규화의 오른손 손바닥을 엄지로 느슨히 쓸고 매만졌다.
“세상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해도 나는 기대하고, 또 바라고 있을 거야. 난 섣불리 단념하지 않아.”
“…….”
“너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내가.”
규화의 마지막 말은, 딱히 영인의 대답을 원치 않는 듯 보였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주 쥔 손은 풀지 않았다. 간단히 나눈 말보다 쥐고 있던 손의 온기가 더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엄지로 간질이는 부드러운 손바닥이 어쩌면 닳을 때까지, 영인은 끝없이 그 손을 주물렀다. 규화는 차라리 시간이 멈추었으면 싶었다.
이윽고 골목이 올라가지 못할 좁은 길 앞에 택시가 섰다. 영인은 규화의 오른손을 그답지 않게 한 번 세게 쥐었다 놓은 뒤 택시에서 내렸다.
규화는 잠시 기사에게 기다려 달라 청했다. 그리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는 영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고, 그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출발하자고 말을 전했다. 그 잠깐 사이에 잠긴 목은, 짧은 문장을 내뱉는 데도 가시가 박힌 듯 따가워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닫히는 차창 사이로 냉큼 깃든 바람에는 어느덧 봄의 자취가 묻어 있었다. 누군가의 의지와 다르게 계절은 흐르고 있었다. 점점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