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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129/161)

폭주 에스퍼 116화

주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어떠한 말도 뱉을 수 없었다. 그보다 먼저 미끄럽고 뜨거운 살덩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가까워서 초점조차 잡히지 않는 거리에 차인호의 기다란 속눈썹이 있었다. 그걸 잠시 보던 주현도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손마디마저 예쁜 손이 주현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누군가가 머리채를 움켜쥐고 잡아당긴 적은 있어도 이토록 부드럽게 어루만진 적은 처음이었다. 뒤통수를 감싼 손 때문에 벗어날 수 없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애초에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읏, 음…….”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숨결이 귀를 울렸다. 조금씩 상처가 아물고 있는 손이 가이드의 어깨를 잡았다가 이내 두 팔로 목을 끌어안았다. 자연스레 차인호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파도치는 가이딩과 차인호와의 키스. 둘 중 어느 게 더 좋냐고 묻는다면 주현은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주현은 그동안 여러 가이드를 만나며 맞으면서 힘 조절을 익혔다. 차인호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근육을 이완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자꾸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때때로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젖은 소리가 울렸다. 틈을 메우며 달려드는 입술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머릿속을 나뒹구는 이런저런 생각들은 차인호의 혀끝에서 산산이 조각나 어딘가로 흘러가 버렸다.

이 순간만큼은 폭주 에스퍼도 시한부도 아니게 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저 필사적으로 키스에 응하려는 서툰 남자가 된 주현이 무의식적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차인호는 그 손을 떨쳐 내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상당히 정확하게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주현은 5분이 지났는지 30분이 지났는지 구분하지 못했다.

“하아, 하…….”

차인호에게서 멀어지며 숨을 고르던 주현이 뜨끈한 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산소 부족 때문인지, 짙은 접촉 때문인지. 아마 둘 다일 테지만.

“저도 하고 싶어서 했어요.”

“…….”

“가이딩하려고 한 게 아니라, 주현 씨랑 키스하고 싶어서 했다는 말이에요.”

슬쩍 고개를 들자 차인호가 달아오른 얼굴로 웃고 있었다. 눈꼬리에 매달린 온기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풋풋한 마음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럼에도 흐르는 방향만은 같다고.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주현은 평생토록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겠지.

“저랑 왜 키스하고 싶은데요?”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든가. 여전히 기억 속 공백에 다가가지 못했다든가. 그런 와중에도 겨우 이런 게 궁금한 이유는,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희망이 따르기 때문이리라.

차인호는 대답 대신 설핏 웃었다. 어쩐지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그런 얼굴로 에스퍼의 머리를 매만지며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는데, 아까 주현이 했던 것과 무척 흡사했다.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니까 눈치 보지 마세요.”

어느새 손등에 남았던 화상이 약간의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걸 쓰다듬으며, 주현은 입술에 남은 차인호의 흔적을 느끼기 위해 애썼다.

협회에 속으며 11년 동안 죽지 못해 살았던 게 전부 차인호를 만나기 위한 일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기엔 스러진 생명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다만, 차인호는 이 방을 그동안 괴롭기만 했던 C동의 가이딩 룸이 아니라 훨씬 멋지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바꾸어 준다. 그가 처음 이곳에 와서 실수로 호출기를 누른 순간부터, 어쩔 줄 몰라 하며 끌려가던 폭주 에스퍼에게 손을 뻗은 그 순간부터 그랬다.

“……당신 같은 가이드는 처음입니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만약 주현이 폭주하지 않았다면, 협회가 조금만 더 자비로웠다면, 다른 가이드를 만나 이 모든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까?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주현은 언제 바닥으로 떨어졌는지 모르는 담배를 발끝으로 문질렀다.

죽음을 확정받고 나서야 순순히 인정하는 스스로가 참 약해 빠졌다는 걸 새삼 느꼈다. 곧 있으면 좋든 싫든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는 걸 알고 나서야 용기가 솟았다. 이런 자신이 스스로도 싫은데 누가 좋아해 줄까.

차인호의 가슴에 못을 박아 주겠다던 다짐은 어느새 봄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계약이 끝나고 차인호가 매칭을 끊을 때쯤이면 주현은 이미 없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빈자리를 매만지며 처량하게 외로워할 날은 오지 않을 터다.

‘내가 죽으면 차인호는 어떻게 되려나. 가이딩이 부족해서 죽었다는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주현이 죽으면 기간이 남아 있다 해도 당연히 계약은 사라진다. 그러면 차인호는 다른 에스퍼의 매칭 가이드가 된다. 주현보다 강하고 누구에게든 자랑할 수 있는 에스퍼와 함께 서서,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뚝. 엄지손톱 끝이 부러졌다. 주제넘은 질투에 가슴이 답답했다. 죽고 나면 그 꼴은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이 구원이었다.

“다른 에스퍼와 매칭하게 되었을 때는, 마음대로 손대게 두지 마십시오. 아무리 매칭 관계라고 해도 어느 정도 안전거리는 두어야 합니다.”

“……사람이 참 롤러코스터 같네요. 귀엽게 굴 거면 끝까지 좀 그렇게 하지.”

“저는 그쪽을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쓸데없는 걱정이라고요.”

차인호는 눈썹을 구기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왜 기분이 상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현은 진심으로 충고해 주었을 뿐인데. 희미하게 남은 담배 냄새가 어쩐지 평소보다 씁쓰레했다.

그러고 보면 차인호와 주현은 모든 부분이 퍼즐처럼 딱 맞는 건 아니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그가 가끔 짜증 나기 그지없는 사람이 되곤 한다는 걸 잠시 잊었다.

눈가를 움찔거린 주현이 테이블 다리를 걷어찼다. 크게 흔들린 테이블에 차인호도 덩달아 비틀거렸다. 손바닥에 턱을 부딪쳤는지 문지르는 손길에 원망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또 웃음이 나왔다. 샤워기를 틀어 놓고 엉엉 울었던 게 거짓말이라는 양 겨우 이런 일로 미소가 지어지는 게 신기했다. 눈이 하나가 된 후로 조금만 눈꺼풀을 내려도 온 세상이 검게 물드는데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아…….”

“갑자기 뭡니까. 많이 아파요?”

“밖에서는 그렇게 웃지 마세요. ……못생겼으니까.”

주현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고뇌하는 사람처럼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차인호에게서 다시금 커다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매일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볼 차인호에게는 세상 사람 모두가 못난이로 보일 터다.

괜히 뺨을 매만진 주현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딸깍. 어느 괴물이 무척 마음에 들어 했던 불꽃이 타올랐다. 약간의 고민 끝에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은 주현이 흰 막대를 손끝으로 굴렸다.

“아무튼, 무슨 일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도 돼요. 별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그냥 털어놓는 걸로도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니까요.”

“매칭 가이드는 그런 일도 합니까?”

“더한 것도 많이들 합니다.”

차인호의 손가락이 가죽 안대에 닿았다. 손가락에서 손바닥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광대뼈를 어루만졌고, 따뜻한 손바닥이 입술 언저리를 스쳤다.

주현은 차인호의 생각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무슨 감정으로, 어떤 의도로 행동하는지 일말의 추측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사적인 감정으로 매칭했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말을 바꿔 그저 공적인 일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는 행동조차 애매했다. 주현을 미워하는지, 걱정하는지, 호감이 있는지. 여러 물감이 뒤섞여서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가진 거라곤 자존심밖에 없는 주현은 차인호에게 동정까지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미는 손길에 빌어먹을 동정심이 담겨 있다면 주현은 아무리 원하던 온기라 해도 곧바로 물어뜯을 자신이 있었다.

“더한 게 뭔데요?”

눈이 하나로 준 후로 주현은 사람과 마주할 때면 바라볼 곳을 확실히 정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미간 근처를 봤던 것 같은데. 이번에 그가 본 건 차인호의 오른쪽 눈이었다.

촘촘한 속눈썹이 가볍게 팔랑였다. 부드러운 윤곽을 보고 나서야 미소라는 걸 깨달았다. 장난기도, 당황도, 분노도 없는 미소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주현은 통 알 수 없었다.

“다음에 알려 줄게요.”

무척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떨리는 말끝은 기대감 같기도 했고, 슬픔 같기도 했다. 주현은 평소라면 차갑게 뿌리쳤을 손을 가만히 두었다. 오히려 조금 기대기까지 했다. 잠시 움찔거린 손이 부드럽게 귓바퀴를 매만지는 게 느껴졌다.

그가 말하는 ‘다음’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이번에도 거짓말일지 모르고, 주현을 놀리는 말일지도 모르고. 그러나 이성이 외치는 소리를 전부 합쳐도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보다는 작게 들렸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동안 주현은 차인호에게 예언에 대해 말할까 수도 없이 고민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데다 종일 얼굴 보며 살아야 하는 동료들에게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차인호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있으니까 말해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만약 정말로 차인호가 11년 전 죽은 홍연우라면, 그렇다면 내 죽음에 기뻐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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