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96화
“주현 씨는 반란군이 싫어요?”
“네.”
“왜요?”
왜냐고? 답은 하나밖에 없다.
“임무가 생기니까.”
살인 따윈 질색이다. 새빨간 피가 터져 나오는 것도, 날카로운 울음소리도, 살과 뼈를 가르는 감각도, 파리들이 시체 주위를 맴돌며 상처로 파고드는 것도.
주현은 누군가를 죽이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어떤 이도 살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멈출 수가 없다.
머리 한구석에서 그를 혼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무는 옳은 일이고 훨씬 많은 사람을 구하는 일인데 거부감을 가지는 주현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
움찔거리던 입꼬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내려가 바보 같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주현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안 그래도 좁은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 모든 신경이 쏠렸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울지 않고 살았는데, 최근에는 아이가 된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울고 있다. 머릿속을 헤집는 이상한 사고들이 감정을 멋대로 주무르는 듯했다.
뺨을 쓰다듬던 손이 천천히 오른쪽 눈 위를 덮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 시각을 잃어버린 순간 다른 감각이 한껏 예민해지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따뜻한 무언가가 주현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고는 천천히 들어 올렸다.
주현은 손끝에 닿는 피부에 흠칫 떨었다. 그곳은 차인호의 얼굴이 있을 위치였다. 손가락을 스치는 건 울퉁불퉁한 굴곡이었다. 주현에게도 그런 것이 많이 있다. 손에도, 팔에도, 배에도, 다리에도. 찢어진 피부는 나은 후에도 흔적이 남는다.
‘차인호의 얼굴은 분명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는데.’
그러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현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그의 가이딩인지 아니면 따뜻한 온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흉하죠? 트러블이 심하게 났거든요.”
거짓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아무 상관 없었으니까. 주현은 대신 조금 더 힘을 줘 차인호의 흉터를 매만졌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주현 씨.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아주 온화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주현은 표지판을 따르듯 차인호의 음성에 집중했다.
“같이 도망칠래요? 다 두고, 차인호와 신주현만 들고 그냥 둘이서 떠날까요?”
차인호와 함께. 전부 내려놓고 그와 단둘이…….
죽을 만큼 행복한 제안이었다. 눈가를 감싼 손바닥이 가늘게 떨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평소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그의 호흡소리, 차인호의 속눈썹이 팔랑이는 소리. 덜컹거리는 뇌가 마구 돌아가는 소리, 속절없이 뛰어 대는 심장에 피가 빠르게 도는 소리.
무엇을 두고, 누구에게서, 어디로 도망친다는 말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떠오르는 생각은 긍정밖에 없다. 당장에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하지만 주현은 옳은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다시 한번 입매가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아니요.”
차인호는 한순간의 동정 때문에 폭주 에스퍼 따위와 손잡고 도망치기에는 너무 귀한 사람이다. 처음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아져 버린 탓에, 감히 그를 자신이 있는 지옥으로 끌고 내려갈 수 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작은 못을 박아 넣기 직전에 망치를 내던진 주현은 자신이 후회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알았습니다. 이상한 질문 해서 죄송해요.”
손을 내린 차인호는 평소와 같이 예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주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임무는 성공했고, 듣기로는 함다솔에게서 어떠한 의심스러운 정황도 포착되지 않았다고 한다. 태석은 혀를 찼으나 주현은 왠지 모르게 안도하고 말았다.
여전히 반밖에 없는 세상은 적응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살아남았으며 자살은 용납되지 않는다. 멈추길 고대하는 삶을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의도적으로 사고를 멈춘 주현이 비좁은 세상마저 닫았다. 빗소리는 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