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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105/161)

폭주 에스퍼 95화

“옆이 비었어!”

쿠당탕! 고함에 반응하기도 전에 주현은 옆구리를 걷어차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곧장 일어나 반격 자세를 잡았지만, 왼쪽에서 달려드는 상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금 쓰러지고 말았다.

“고개를 좀 더 많이 꺾으라고 했잖아.”

거친 숨을 내쉬며 세화가 말했다. 임무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주현을 끌고 훈련장에 왔으니 지칠 만도 했다. 그러나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에도 그녀의 눈빛은 호랑이처럼 매섭고 단호했다.

주현은 ‘교육’이 끝났을 때 자그마치 3주가 지났다는 걸 알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기껏해야 며칠 분량의 기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주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살과 근육이 빠지고 조각조각 끊어지는 사고에 행동도 느릿했다. 그러나 살은 찌우면 되고, 근육은 다시 만들면 된다. 원활히 흐르지 못하던 생각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문제는 돌아오지 않는 왼쪽 안구에 있었다.

절반이 어두워진 세상은 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난 에스퍼라 해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주현은 서랍이나 물건에 자주 부딪혔고, 걸려 넘어질 뻔한 적도 많았다. 특히 왼손과 왼발의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 거리감 조절도 어려워 헛손질을 하거나 물건을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그런 주현에게 필요한 건 훈련이었다. 좁은 시야에 익숙해지고, 원활히 움직일 수 있기 위한 훈련. 그리고 누가 말하기도 전에 세화와 승철이 자원했다. 봄과 채경보다 맨손 전투에 능숙한 두 사람이 딱 맞는 상대이긴 했다.

쉴 틈 없이 바쁘면서 시간이 나면 무조건 주현을 데리고 훈련장에 가는 이유에 죄책감이 들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승철은 주현을 볼 때마다 슬픈 표정을 지었고, 세화는 반대로 일말의 동정조차 없이 무자비하게 주현을 굴렸다.

그러나 주현은 화가 나거나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3주 만에 돌아온 그에게 세화가 짓씹듯이 한 말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네가 그 눈 때문에 죽게 하지는 않을 거야.’

“임무에서 적을 만나면 무조건 왼쪽이 노려질 건데, 그때도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생각이야?”

비틀거리며 일어난 주현이 자세를 다잡았다. 세화는 망설임 없이 달려왔고, 몇 번의 공방 끝에 이번에도 주현이 먼저 나가떨어졌다.

한순간에 좁아진 세상은 불편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적응해야 한다. 앞으로 주현은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니까. 못 하겠다고 주저앉으면 그대로 죽을 뿐이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반사 속도나 공격에 대한 대응 등은 상당히 나아졌지만, 그래도 임무에 나가기엔 아직 좀 부족했다. 주현 스스로도 느꼈고, 그의 동료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태석은 보름이면 요양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은 시간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간단한 임무다. 아무리 멍청하고 약해 빠진 너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겠지.”

태석의 목소리에는 조롱과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반발심이나 분노는 솟아오르지 않았다. 주현은 그저 두려움을 씹어 삼키며 바닥을 응시했다.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겁에 질릴 바엔 맞아 죽기를 택할 신주현은 사라지고 비루한 개 같은 폭주 에스퍼만 남은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네.”

떨리는 손을 주먹 쥐며 대답한 주현은 태석이 내뱉은 축객령에 기뻐하는 자신을 싫어하며 방에서 나왔다. 아직도 카펫에 짙게 남은 혈흔은 못 본 척했다.

* * *

비어 버린 왼쪽 눈을 얇은 끈으로 이어진 흰색 안대로 가린 주현이 고개를 숙인 채 방송국 복도를 걸었다. 검은 옷을 입고 말없이 지나가는 그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가슴팍에서 흔들리는 명찰을 힐끔 보곤 곧장 시선을 돌렸다.

모자를 눌러쓴 주현은 머릿속 지도를 뒤지며 신중하게 나아갔다. 오늘 그의 임무는 태석이 말한 것처럼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렵다고 할 수도 없었다.

배우 ‘함다솔’의 대기실에 도청기 설치하기. 사람이 많은 방송국이라는 특성상 잠입이 어렵지, 그 외에는 힘든 일이 없었다. 폭주 에스퍼로서 그런 곳에 가는 것 자체가 꺼려졌으나 주현은 거절할 수 없었다.

본래라면 사형당해 죽었어야 할 주현이 살아 있는 이유는 협회 덕분이다. 그러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거기다 협회의 목적은 공공의 이익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협회가 내주는 임무를 수행하면 주현도 조금이나마 사회에 공헌하는 게 된다.

마치 누군가 대본이라도 읽어 준 듯 술술 지나가는 생각이 남의 것인 양 거북했다. 그러나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주현은 따지는 걸 포기하고 함다솔의 대기실 앞에 섰다. 정확히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는데, 슬쩍 집중하자 안에서 작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직원이 준 스케줄 표가 정확하다면 30분은 지나야 그녀가 대기실을 나갈 터였다.

‘30분…….’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건물에서 앞으로 한참을 더 있어야 한다. 무심코 옷자락 안의 초커를 쓰다듬던 주현은 갑작스럽게 잡힌 팔에 놀란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예전이었다면 누군가 근처에 다가온 순간 알아차렸을 텐데. 그동안 갈고닦은 감각마저 흐린 정신에 잡아먹힌 걸지도 모른다.

그를 끌고 어딘가로 향하는 상대의 움직임에는 빈틈이 가득했다. 손을 뿌리치거나 반대로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간간이 지나가는 민간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힌 팔뚝을 타고 서서히 퍼지는 가이딩은 마치 따뜻한 물에 팔을 집어넣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주현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그럴 것이다.

비상계단에 주현을 밀어 넣은 남자는 어쩐지 화가 난 표정이었다. 어딘가 다급해 보이기도 했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그야 임무하러…….”

“당신이 방송국에서 무슨 임무가 있는데요?”

주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협회에서 내리는 임무를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기본 규칙이었다.

‘그런데 차인호는 일반인이 아니라 가이드잖아. 가이드면 괜찮은 거 아닌가?’

둔한 머리로 흘러가는 생각은 제법 그럴듯했다. 차인호는 에스퍼의 임무에 동행하는 일반적인 매칭 가이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쩌면 일 얘기를 할 때만큼은 차인호가 곁에 있어 줄지도 모른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합리화였을 수도 있다.

주현은 손을 맞잡은 채 이리저리 살피는 차인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마치 상처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혹은 무언가 묻은 게 없는지 검사하는 것처럼.

문득 차인호가 폭주 에스퍼의 주된 임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주현은 그가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만약 주현이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살인자라는 걸 알았다면, 그는 손을 잡기는커녕 곁에 다가오려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아니. 그가 하는 건 단순한 살인이 아니다. 협회와 더 나아가 국민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위험 분자를 처리하는 옳은, 옳은 일…….

“주현 씨?”

안개가 걷히듯 확 갠 시야 가득 차인호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차올랐다. 주현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아름다운 얼굴을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뿐인 눈을 내리깔았다.

폭주 에스퍼가 방송국에 있는 게 어지간히 걱정되는 듯했다. 사실 누구라도 걱정할 사안이었다. 볼 안쪽을 깨문 주현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반란군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청기 설치만 하면 끝나는 간단한 임무이니,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겁니다.”

금방 떠날 거라는 어필에도 차인호의 표정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심란해 보였는데, 주현은 정체 모를 초조함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어요?”

이것만은 정말로 안 된다고 본능이 경고했다. 함부로 떠들었다는 걸 들키면 눈 하나 잃는 것보다 더한 벌을 받을 거라고, 살고 싶다면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고.

그러나 차인호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매칭 가이드에게 사랑을 품어 버린 평범한 에스퍼로서, 주현은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함, 다솔.”

작게 흘러나온 속삭임이 차인호에게 닿았다. 그제야 주현은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렸다. 함다솔은 차인호와 얼마 전 헤어진 연인이었다. 그녀에게 질투했던 기억이 한 꺼풀 뒤집어쓴 것처럼 흐리게 지나갔다.

차인호는 곤란한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어쩌면 아직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피실피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은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랬다.

“신경 쓰입니까?”

“…….”

“그분이 진짜 반란군만 아니면 괜찮을 겁니다.”

반란군에 속해 있다고 확정된 게 아닌, 반란군과 관련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 단계이기에 몇 번의 시험을 잘 통과한다면 협회는 다솔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터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제외하면 비상계단은 조용하고, 어둑하고, 서늘했다. 임무 중 긴장을 푸는 건 핀 뽑힌 수류탄을 들고 있는 것과 같은 행위지만, 그럼에도 힘이 빠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부드러운 온기가 볼을 감쌌다. 차인호는 여전히 어색하게 웃고 있는 주현을 올곧게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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