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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5/161)

폭주 에스퍼 31화

주현이 늦는 걸 단순히 임무에 차질이 생긴 걸로 알고 있다면 오늘은 살아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아쉽지 않은 주현은 아랫입술을 혀로 문지르곤 태연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썼다.

“임무가 있어서 이만 갈게요. ……통화 즐거웠습니다.”

-잠깐, 정말로 그냥 생각나서 전화한 거예요?

“그럼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닌데…….

문득 둘러본 바깥은 아까보다 조금 더 어둡고 인파가 상당히 줄어 있었다. 주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하, 이런 거에 휘둘리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데다 중얼거리는 차인호의 목소리는 너무 희미해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임무 조심히 하시고 내일 봅시다. 가이딩하러 갈 테니 능력 마음껏 사용하세요. 저도 주현 씨와 통화해서 즐거웠어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들고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주현은 직원에게 약간 문제가 생겼으나 임무는 마쳤다고 연락했다.

돌아가는 길, 능력을 사용해서 날 듯이 하늘을 건넌 주현의 볼은 노을이 담겨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내일. 내일이면 차인호가 주현에게 가이딩을 해 주러 온다. 아프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그저 따뜻한 가이딩 말이다.

이제는 흔들리는 탑을 즐겁게 구경하는 지경이 된 주현은 그런 스스로를 눈치채곤 순순히 망했다고 생각했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미쳐서 집착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말도 안 된다고 비웃었던 과거가 아련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만큼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당분간은 계속 달콤한 가이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사는 건 고통스럽지만, 조금은 더 숨 쉬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 *

주현은 제법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려 대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여름이 다가오는 시기지만, 아직 장마가 시작되기에는 이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칠 것이다.

“비 오는 날엔 임무 안 줬으면 좋겠어. 우린 우산도 없잖아.”

소파에 옆으로 누워 축 늘어진 채경이 말했다. 실내에서도, 심지어는 밤에도 쓰고 있는 선글라스 때문에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구분되지 않았다.

“괴물들한테 말해 봐. 비 올 땐 게이트 넘어오지 말아 달라고.”

나흘 전 날짜가 찍힌 신문을 넘긴 세화가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말했다.

“이럴 때는 주현이 능력이 부러워. 너는 우산도 필요 없지?”

마음에 들었던 페이지를 다시 읽던 주현이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능력을 사용하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다.

“굳이 비 피하려고 능력 쓰지는 않아. 아깝잖아.”

주현은 발현 후 단 한 번도 가이딩이 풍족했던 적이 없었기에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웬만해선 능력을 아꼈다. 그런 사소한 곳에 능력을 쓴 적은 없다는 말이다.

“이젠 상관없지 않아?”

채경이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가이딩 약물 금단증상으로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보고 있자니 그가 덧붙였다.

“가이드가 있는데 아낄 필요 없지.”

“…….”

“예전에 알던 놈은 숟가락도 자기 손으로 안 들었어. 이참에 마음껏 써 봐.”

일주일에 두 번 가이딩을 받는 건 사실 일반적인 에스퍼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횟수지만, 폭주 에스퍼에겐 다시 없을 기회였다.

염동력은 여러 능력 중 일상생활에서 손꼽히게 유용했다. 스위치를 누른다든가 물건을 가져오는 등, 다양한 일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멀리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발현하자마자 위험한 사람이라 낙인찍히고 안전에 대해 세뇌될 정도로 교육받은 주현에겐 다른 이야기였다.

채경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 책에 집중하는 척 고개 숙인 주현이 대답했다.

“임무 나가서 실컷 쓰는데, 뭐.”

“너를 위해서 써. 네 힘이잖아.”

다행스럽게도 주현은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기가 통한 듯 움찔거린 채경이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방금 비 오는 날은 임무 가기 싫다고 말했는데.”

투덜거린 그가 다녀온다며 휴게실을 나섰다.

신문에 집중한 세화를 잠시 살핀 주현이 슬쩍 주머니에 손을 넣어 네모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범규가 자주 가지고 다니던 주황색 전화 카드가 조금 어두운 형광등에 반사되었다.

전화 카드를 산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가끔, 어쩌다 날씨가 궁금해질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어디 고객센터에 전화라도…….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하게 굴 수 없는 주현이 황급히 카드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A동에 가서 한 협회 임원의 책상에 서류를 두고 오는 임무를 마친 후, 주현은 최강훈이라는 에스퍼에게 신분이 강하게 인식되었다는 걸 솔직하게 말했다. 그 결과 태석에게 벌을 받기는 했으나 그래도 현신주라는 에스퍼는 임무 중 사망했다는 걸로 잘 처리되었다.

다음 날 가이딩을 위해 C동에 온 차인호는 여기저기 멍투성이인 주현에 조금 기분 나빠 보였으나 그럭저럭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가이딩이 끝났다.

그렇게 잘 끝난 일인데 주현이 휴게실 밖 복도를, 정확히는 공중전화 앞을 서성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일하게 사용하던 범규가 죽은 후로 공중전화는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저번 임무 중 밖에서 사용했던 전화기보다 조금 더 낡고, 조금 더 투박한 회색 전화기를 힐끔거리던 주현이 느린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 잊은 게 있는 것처럼 돌아 걸어와 휴게실에 들어섰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자니 신문을 보던 세화가 짜증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왜 그래. 뭐 필요한 거 있냐?”

“아니.”

“그런데 왜 뭐 마려운 개처럼 서성여?”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싶어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주현도 자신이 왜 이렇게 긴장하고 망설이는지 모른다. 차인호에게 전화 거는 게 그토록 힘들다면 그냥 안 하면 될 텐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도하려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래도 카드를 샀으니까.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매점 주인, 희록이 환불해 줄 리는 없고 가진 걸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속으로 갖은 핑계를 대며 가늘어진 세화의 눈을 무시한 주현이 휴게실에서 나왔다.

종내 수화기를 잡는 손은 느리면서도 어색했으나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보다는 훨씬 나았다. 거리에서 얇고 투명한 벽에 스스로를 가두고 동아줄을 잡듯 차인호에게 전화했을 때는 훨씬 쉽게 버튼을 눌렀던 것 같은데, 참 이상했다.

여하튼 그때 차인호는 주현의 전화에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주현의 전화가 좋을 이유는 없으니 늘 그랬듯 예의상 다정하게 대화를 이어 준 것이겠지만, 그래도 주현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다음 임무에 대해 미리 말하려고 부른 거래. 다행히 오늘은 뒹굴뒹굴하면서 쉬어도- 악!”

쾅! 헤실헤실 웃으며 나타난 채경에 주현은 빛의 속도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놀란 채경이 크게 움찔했다.

“뭐, 뭐야? 주현아 왜 그래?”

“……벌레가 있길래.”

“진짜? 잡았어?”

“놓쳤어.”

“기다려 봐. 내가 저번에 좋은 거 샀거든.”

어디론가 달려가는 채경을 채 붙잡지 못한 주현이 한숨을 삼켰다. 슬쩍 수화기를 들자 다행히 부서지거나 금이 간 곳은 없었다.

돌아온 채경의 손에는 벌레 잡는 스프레이가 들려 있었다. 매점에서 본 적 없는 물건인 걸 미루어 또 희록을 구워삶아 얻은 게 틀림없었다.

치이익, 스프레이에서 시큼한 액체가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검은색 수화기가 액체에 젖어 번들거리는 걸 잠시 보던 주현은 뿌듯하게 이마 닦는 시늉을 하는 채경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후로도 차인호에게 전화하려던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그렇게 부끄러울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어쩐지 손가락이 근질거려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날에는 그 앞에서 서성이는 걸 승철에게 들킨 적이 있는데, 주현의 표정과 손에 들린 수화기를 번갈아 보던 그는 짜증 날 정도로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는 휴게실로 쏙 들어갔다.

휴게실 문을 닫기 전에 걱정 말라는 듯 손짓하는 모양새가 속내를 파악하기라도 한 것 같아서, 주현은 다시 한번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매칭 가이드에게 전화하려는 의욕은 떨어져만 갔다.

혼자 있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 보통 비관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터라 임무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땐 차인호에게 전화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멍청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전화 카드는 서랍 구석에 처박혔고, 전화기는 찾아 주는 사람 없이 방치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3일 후, 주현은 다시 한번 카드를 들고 회색 공중전화기 앞에 서게 된다.

* * *

[“배우 차인호 씨가 오늘 오후 1시경에 영화 촬영 중 촬영 장비에 깔리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휴게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심지어 세화마저도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봤는데, 주현은 아무것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아나운서가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고막을 스치지 않고 그대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현재 병원에 이송되어 치료받고 있으며, 사고는 관리 부실이 원인인 것으로…….”]

“주현아, 신주현!”

날카로운 목소리에 주현이 숨을 들이켰다. 앞을 보자 걱정스러운 낯의 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뭐가? 그렇게 묻고 싶었다. 나는 아픈 곳도 없고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데,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그러나 벌린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휴게실에 있는 봄과 세화, 승철 모두가 묘한 표정으로 그를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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