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30화
사람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시신이 부패하기 전에 발견해야 처리가 쉬우므로 너무 외진 곳은 안 된다.
‘아예 처리할 필요가 없도록 강이나 바다에서? 바다가 어디에 있지? 그러고 보니 범규, 범규도 바닷가에서 죽었지.’
주현이 죽였다. 그가 모자란 탓에 범규가 죽었고, 총알은 너무 작은데 그토록 강하고…….
머리가 아팠다. 벌써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폐가 부풀었다 줄어드는 모든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그럴수록 점점 더 앞으로 할 일이 옳게 느껴졌다. 삶은 이렇게 아프면 안 되는 거니까.
살아 있다는 건 좀 더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고 누가 말했더라.
한참을 달리던 주현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골목길에 있었다. 어딘지도 모르고, 사실 관심도 없다. 멋대로 A동을 빠져나왔다는 걸 들키면 머리가 날아가겠지만, 그게 바로 주현이 원하는 바다.
오직 땀과 먼지만 묻어 있을 뿐인 손바닥을 물끄러미 보던 주현이 더러운 담벼락에 무너지듯 기댔다. 그러곤 코까지 덮는 옷이 답답해서 지퍼를 내렸다. 폭탄이 달린 투박한 목줄이 드러났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뿌리박힌 나무처럼 서서 숨만 쉬던 주현은 천천히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폭주했을 때 그를 제압했던 에스퍼를 봤고, 그 때문에 거의 정신이 나가서 허둥지둥 도망쳤다.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결국 이런 더러운 뒷골목에 도착했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다. 주현은 자신의 정신 상태가 썩 건강하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 정도로 나약할 줄은 몰랐지만.
그러나 패닉에서 벗어난 지금도 방금까지 세웠던 자살 계획이 상당히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우리, 자살만은 하지 말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떨어지는 유성과 같이 빛나던 눈이 아직도 선명했다. 주현은 차가운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제발…….”
‘폭주 에스퍼를 제압했습니다.’
“그만 좀 해!”
아직도 사방에 널려 있던 진득한 핏물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냥 피도 아니고 소중한 사람들의 피였다. 주현은 부딪히듯 눈을 감았다.
‘11년이 그렇게나 짧나? 어제 일처럼 생생할 정도로?’
어쩌면 계속 곱씹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처음은 언제나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첫 살인도 같은 이유로……. 아니, 그날이 처음이 아니다.
‘물론 아니지.’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내기 위해 주현이 벽에 뒤통수를 쿵 박았다. 날카로운 통증은 순간이지만 머릿속을 텅 비게 했다.
쿵. 쿵. 몇 번 더 같은 짓을 반복한 주현은 오직 심장 소리에만 집중하며 살아 있기 위해 애썼다.
동시에 주현은 이곳이 더럽고 지저분한, 대낮임에도 어두워서 아무도 오지 않는 골목길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자존심이 강해서 이런 약해 빠진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실 주현은 잘 버티고 있었다. 나름대로 그리 슬퍼하지 않으며 삶을 살아가려 노력했는데, 가끔 잘 안 될 때가 있다. 오래전 죽은 누군가가 떠오르거나, 그가 저지른 죄악이 유독 아프게 느껴지거나, 혹은 그냥 문득 죽음이 탐날 때.
한참을 헐떡이던 주현은 젖은 얼굴을 소매로 마구 문질렀다. 그 과정에서 렌즈가 구겨져 눈동자를 벗어났다. 주현은 맨손으로 렌즈를 빼내 바닥에 버렸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괴물에게 옷을 입힌다고 사람 취급해 주는 이는 없다. 괴물은 괴물답게 살아야 하는 법이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주현은 하늘이 옅은 주홍색으로 물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몇 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어려운 임무가 아니기에 주현의 위치를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곧 머리가 터지려나?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의 위협에도 주현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인생이 행복한 사람들이나 삶을 붙잡고 싶어 하니까.
코를 훌쩍이며 버려진 깡통을 응시하던 주현은 골목길 입구에서 누군가의 말소리를 들었다. 고독을 곱씹을 수 있는 행운도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황급히 반대쪽으로 걸어가며, 주현은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동료가 죽었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기껏해야 과거를 떠올렸다고 흐르다니. 조금 더 자신을 미워하게 된 주현이 눈물을 닦으며 성큼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때- 아!”
모퉁이를 돌던 사람과 가볍게 부딪힌 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전화기를 든 채 교복을 입고 있던 학생은 잠시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주현이 반사적으로 학생의 팔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래. 고개를 들고 학생을 붙잡았다. 그게 바로 주현의 실패 요인이다. 서툴게 아이라인을 그린 어린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붉은색…….”
멍한 속삭임을 듣자마자 주현은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갈수록 사람이 많아졌다. 주현은 몰랐지만, 학생들 하교 시간과 직장인의 퇴근 시간이 맞물려 어딜 가도 인파가 넘치는 시간이었다.
이런 곳에서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잠겨 덜덜 떨면서도 다리를 멈추지 못하던 주현은 순간 익숙한 얼굴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평소 보여 주는 것과는 다른 날 선 눈매, 꾹 다문 입술. 저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은 흔치 않다.
주현은 차인호 앞으로 다가갔다. 정확히는 차인호가 앉아서 무심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화보. 거대한 전광판.
차인호의 가이딩은 무척 부드럽고 따뜻하다. 주현은 그를 만나고 나서야 가이딩에도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 두통도, 출혈도, 멍도 차인호가 한 번 어루만지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곧장 편안해진다.
불쑥 다가오다가도 성큼 물러나는 그 가이드는 주현에게 라이터도 주었고, 옷도 사 주었다.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흰색 후드티.
어느 순간 주현은 숨이 더 이상 거칠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가끔 에스퍼라며 힐끗 보기는 해도 그의 눈동자까지 들여다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어느 정도 진정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가슴이 불안하게 뛰던 주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망칠 곳을 찾았다.
결국 그가 선택한 곳은 낡은 공중전화 부스였다. 투명하긴 해도 들어서 문을 닫으니 조금이나마 불안함이 가라앉았다.
입술을 깨물며 시간을 보내던 주현은 문득 이 안에 있으려면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전화 부스 안에 있으면서 수화기도 들지 않고 있는 사람은 수상해 보일 게 틀림없으므로.
다행히 임무 전 지급된 물건 중에는 약간의 현금도 포함되어 있다.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해 받은 돈이지만 동전 몇 개 썼다고 문책받지는 않을 터다.
주현은 차가운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전화할 사람 따윈 한 명도 없다. 자기 좀 잡아가라고 C동에 전화하는 거면 몰라도, 사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인 번호라며 쪽지를 쥐여 주었던 차인호를 제외하고는.
일렬로 이어지는 열한 개의 숫자는 여전히 머릿속에 박혀 있다.
망설임 끝에 주현은 조금 느린 속도로 버튼을 눌렀다. 안 받았으면 하는 마음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길어지는 신호음에 주현이 묘한 안도를 느끼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여보세요?
전화 너머로 듣는 차인호의 목소리는 조금 낮고 덜 부드러웠다. 주현은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누구시죠?
“저, 저예요. ……신주현.”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쩐지 우당탕하는 큰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차인호가 말했다.
-주현 씨 무슨 일이에요?
“그냥, 생각나서?”
차마 임무 중 멋대로 뛰어나와 돌아다니다가 당신이 모델로 선 전광판을 보고 나서 진정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성의 없는 변명에도 차인호는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목소리에는 웃음기마저 스며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 봤다고 그의 미소가 눈앞에 그려지기까지 했다.
-제 생각이 났어요? 그거 영광이네요.
장난스러운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마주 보고 하는 대화였다면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쓰고 말았겠지만, 전화는 오직 말로만 대화를 이을 수 있었다.
“영광일 것도 많네요. 그나저나 이거 진짜 번호였군요.”
-그럼 그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주현 씨 저를 어떻게 생각한 거예요?
“연예인이면서 아무한테나 번호 막 줘도 되는 겁니까?”
습관적으로 날 선 목소리로 말한 주현은 내심 아차 싶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며 번호 바꿀 거라고 한다면 주현의 손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차인호가 번호를 바꾼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 범규 때처럼 급히 가이드가 필요한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까.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변명을 늘어놓던 주현의 생각은 부드러운 차인호의 목소리로 가볍게 끊겼다.
-당신이 아무나는 아니잖아요.
공중전화 특유의 낮은 음질에도 차인호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입술을 달싹였으나 마땅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 뭔데요? 아무나가 아니면 전 뭔데요? 그렇게 물으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아마 매칭 에스퍼라고 말하겠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단기간만 계약한 건데도 이렇게 다정하게 군다면, 정말로 마음이 통한 에스퍼에겐 무엇을 해 주는 거냐고. 알고 싶지 않은 질문을 꾹 삼켜낸 순간이었다. 주현의 목, 정확히는 초커에서 삐 소리와 함께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무가 늦어지는 이유가 있나?
평소엔 먼저 말 거는 일이 거의 없는데, 연락한 걸 보면 기다리다가 지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