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두둑― 좀 전의 묘한 기척이 다시 들려왔다. 전보다 훨씬 크게.
대답을 기다리던 파비안이 어깨를 틀어 이쪽을 돌아보았다. 별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찰나, 몸을 기대고 있던 지반에 쩍 균열이 일더니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쿠구궁― 의식할 새도 없이 균형을 잃은 그는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 무너진 절벽 안으로 기우뚱했다.
“또 빌어, 으윽!”
파비안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튀어나온 바위를 잡았다가 놓치고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별하의 손을 단박에 움켜잡았다.
“잡았어! 별하, 잡았어!”
“파, 파비안……!”
맞잡은 손이 강한 악력으로 흡착했다. 간발의 차이로 추락을 면한 별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거칠게 호흡했다. 간신히 디디고 선 발밑의 새카만 어둠에서 고개를 들어 저를 붙잡은 파비안을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저, 절벽 귀신이라도 붙었나? 이게 무, 무슨 일이야…….”
“바로 당길 테니 손 꽉 잡아, 별…….”
순간 파비안의 흰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파비……?”
불안을 예감한 둘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얽혀드는 순간 파비안이 딛고 선 지반까지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쿠구궁―
“Shit!”
누군가의 거친 욕설이 새카만 암흑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069.
강한 중력에 끌려가다 말고 몸이 어딘가에 퍽 부딪혔다.
“읏!”
딱딱한 지면에 등과 둔부를 부딪친 별하는 신음하면서도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 캄캄한 공간은 여기저기서 새어 드는 빛으로 어슴푸레했다. 그는 제 발 아래서 은은하게 빛나는 흰색 셔츠와 금발의 잔영을 발견하고 잠긴 목에 힘을 실어 넣었다.
“파비안……? 파비안 괜, 찮아?”
어둑한 공기를 타고 익숙한 저음이 날아왔다.
“흐음……. 괜찮아. 별하는 다친 데 없어?”
그는 별하처럼 중심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는지 금방 몸을 일으켜 이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통증이 가시지 않는 신체를 좀처럼 똑바로 세우지 못하는 별하에게 곧장 손을 내밀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어둠 속에서 더욱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별하는 그 손을 서둘러 맞잡았다.
“분명 이건 누군가의 계략이 틀림없어. 아니면 어떻게 나한테만 이런 일이 자꾸 읏, 일어날 수 있는 거지?”
파비안의 완력에 이끌려 손쉽게 몸을 일으키고는 욱신욱신한 등과 엉덩이를 문질렀다. 파비안은 약간의 타박상 외에 무사한 별하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어둑한 공간을 빙 둘러보았다.
“석회동굴이군.”
겨우 정신을 차린 별하는 저들이 굴러떨어져 들어온 곳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암석이라고만 생각했던 절벽의 외벽에 사람 하나는 쉬이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그 주변의 지반까지 허물어져 내려 바깥과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 곳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곳이 무너질 때의 충격으로 인해선지 비슷한 형태의 구멍들이 서너 군데는 더 생겨나 있었다.
입을 벌린 공간으로 비쳐 드는 빛무리에 자욱하게 흩날리던 흙먼지가 차츰차츰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별하는 탄식이 섞인 한숨을 짧게 불어냈다.
“그냥 좀 기댔을 뿐인데…….”
파비안은 다른 구멍이 난 방향으로 조용히 움직이며 말했다.
“그 정도에 무너질 정도라면 누군가 기대지 않았더라도 아마 머지않아서 무너졌을 거야.”
“그런 것 같네.”
별하는 파비안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원래부터 평균 몸무게였던 그는 현재 그보다 훨씬 더 살이 빠진 상태였다. 청바지 허리가 멋대로 뱅뱅 돌아가기도 하고, 바지 밑단이 살짝 끌려 두어 번 접어야만 했다. 늘어난 티셔츠 목구멍으로 쇄골의 형태를 이제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고 훨씬 가늘어진 턱선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안쪽의 팬티가 자꾸만 흘러내렸다.
별하는 청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슬쩍 끌어 올리고는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언제 손에서 빠져나간 창을 찾기 위해 주변 바닥을 더듬었다. 빛살이 들고 있었지만 저무는 빛은 바닥에까지 닿지 못했다.
“파비안. 라이터 켤 수 있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밀도 높은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번뜩 생겨났다. 별하와 파비안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라이터의 불빛에 드러난 공간을 바라다보았다.
소리가 묵직하게 울리는 공간은 파비안의 짐작대로 종유굴이었다. 요새 같은 절벽의 형태를 따라 길게 이어진 굴은 그다지 넓지 않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석회석과 그 부산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천장의 종유석과 바닥의 석순이 결국 만나 한 몸을 이룬 기둥도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파비안은 라이터를 좀 더 내려 어둑한 지면을 슥 비췄다. 발을 딛고 선 바닥은 암석덩어리 그 자체였다. 이끼처럼 붙어 있던 자그마한 벌레가 갑작스러운 불빛에 놀라 바위 틈새로 급히 몸을 숨겨 들어갔다.
“일단 불을 피워 와야겠어.”
동굴의 탄생 비화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별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나뒹구는 창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날과 대가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매만져 확인하며 빛이 드는 구멍을 돌아보았다.
“꽤 높은데 올라갈 수 있을까?”
“더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설마 또 무너질까.”
“라이터 끌게, 별하. 이제부터 더 필요해질 것 같으니까.”
“응. 이제 꺼도 돼.”
파비안은 높이가 가장 낮은 구멍을 비교한 후에 한곳으로 향했다. 엄청난 장신인 파비안이 최대한 팔을 뻗었으나 구멍에는 전혀 닿지 않았다. 부서져 나온 바위를 밟고 올라서도 감격적인 변화는 없었다. 별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내 어깨 밟아.”
엷은 음영이 진 파비안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별하의 어깨를……?”
별하는 고개를 크게 한 번 까딱이며 선뜻 제 어깨를 내밀었다. 블루칩의 전용 의자는 뻑적지근하게 결려서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파비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눈앞에 들이민 어깨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반듯한 모양의 어깨는 옷감 너머로도 도드라진 뼈대가 느껴질 정도였다. 왜소하다는 느낌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마음 편히 발판으로 삼을 만큼 튼튼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호기롭게 어깨를 내밀고 선 이의 꽉 다문 입술을 가만히 응시하며 물었다.
“거의 200파운드인데 감당할 수 있겠어?”
별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파비안을 올려다보았다.
“뭐, 200파운드? 거의 100킬로라는 건데 진짜야?”
“반올림한다면 넘을지도.”
“그렇게는 안 보여.”
“지금은 지방이 좀 더 빠졌겠지만 선천적으로 뼈대가 두껍고 굵어.”
“어, 안 되겠다. 까딱하면 아작 나. 그럼 어깨 말고 여기 밟을래?”
별하가 창을 내려놓고 대번 바위로 올라갔다. 양팔꿈치와 양무릎을 바닥에 붙이며 말했다.
“허리.”
“…….”
“내가 여긴 좀 되거든.”
파비안은 턱을 치켜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려 애쓰는 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빤히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그가 움직이지 않자 별하는 허리를 둥글게 말아 보였다. 마치 이렇게나 튼튼하다는 듯이.
“……별하. 굳이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올라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하려던 파비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더할 수 없이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난관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게 되어 못내 기쁜 심경이 함빡 깃들어 있었다.
“어서, 파비안.”
파비안은 눈길을 내리며 작게 웃었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 팔을 감싸 쥐고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그것도 좋지만 반대로 하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아. 별하는 몸놀림이 민첩하니까.”
별하는 의아한 얼굴로 파비안을 쳐다보았다.
“으음?”
“난 여길 좀 더 살펴보고 있을게.”
깍지 낀 손 안쪽을 내보이는 그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한쪽 입가를 끌어올렸다.
“필요한 건?”
“장작. 나머진 별하의 뜻대로.”
“오케이.”
별하는 파비안의 어깨를 잡고 그의 손바닥을 밟았다. 다리에 힘을 주기도 전에 강한 위력이 몸을 위로 떠밀었다. 별다른 수고 없이 구멍에 손이 닿은 별하는 가뿐하게 지상으로 뛰어올랐다. 아래서 곧장 던져주는 창을 챙겨 들고는 말했다.
“금방 갔다 올게.”
“조심해. 별하.”
“너도.”
숲을 향해 돌아서는 그 때 새파란 물체가 황급히 날아와 어깨에 앉았다. 블루칩이었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부리를 그의 뺨에 마구 비벼댔다. 별하는 그런 블루칩을 쓰다듬으며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움직였다.
장작용 나뭇가지들은 이전의 밀림에서보다 구하기가 쉬웠다. 발로 밟아 적당한 크기로 부러뜨린 것들을 다시 한데 묶어 어깨에 걸쳐 매는 작업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된 반면, 갈증을 없앨 만한 것들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샘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흔하게 보이던 과일나무도 없었다. 물을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다고 생각하자 별하는 괜히 더 목이 마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아……. 어떡하지.”
그는 무거운 장작을 들쳐 맨 채로 점점 음영이 진해지는 숲을 빙 둘러보았다. 습하고 벌레도 많지만 그만큼 과일이 지천에 널린 밀림이 새삼 그리웠다.
소나무와 비슷한 모양의 침엽수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는데 블루칩이 대뜸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바로 앞의 침엽수로 날아가 가까운 가지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부리로 가시처럼 생긴 잎을 쪼아댔다. 별하가 어떤 관심도 없이 고개를 돌리자 크게 날갯짓을 하며 이목을 끌었다. 별하는 눈을 들어 다시 블루칩을 올려다보았다.
“또 뭐야?”
블루칩은 가시 잎을 콕콕 쪼거나 입에 물고 흔들어대기만 했다.
별하는 불현듯 깊숙한 곳에 묻힌 작은 기억 한 톨을 발견했다.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크던 배낭여행의 초기 계획 단계 시절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온갖 지침서들을 독파하고 관련 미팅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에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상식 하나가 불쑥 떠오른 것이었다.
그는 아래로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뾰족뾰족한 가시 잎을 몇 개 뜯어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그것을 이로 물자마자 엄청나게 강한 쓴맛이 혀끝을 찔렀다.
“으으. 쯧.”
그는 혀를 차면서도 끝까지 씹었다. 침과 섞여 금방 흐물흐물해진 그것을 뱉어내고 이번에는 좀 더 뜯어내 입에 넣었다. 쓴맛은 변함이 없었지만 전과 다르게 혀끝이 푹 젖어 들었다. 예상보다도 많은 수분이었다.
별하는 책에서 배운 대로 가시 잎을 반복해 입으로 가져갔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갈증이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는 서둘러 잎을 따다가 아예 가지를 부러뜨렸다. 마침 제 어깨로 돌아온 블루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잘했어, 블루칩. 나중에 좋은 먹이 찾아줄게.”
블루칩은 저를 향한 애정 표현에 기분이 잠시 좋아진 듯했으나 여전히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 모습이었다.
별하는 동굴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가 걱정돼 부지런히 짐을 챙겼다. 장작 묶음과 침엽수의 나뭇가지에 덩굴을 연결해 번쩍 들고는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불그스름한 석양이 비치는 동굴은 좀 전보다 더 새카매진 듯했다. 별하는 고요하기 그지없는 동굴을 들여다보며 그를 불렀다.
“파비안. 꽤 좋은 걸 발견했어.”
당연히 생각했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기척도 없었다. 대번 불안해진 별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파비안?”
그 때 동굴 저 안쪽에서 작은 불이 켜졌다. 라이터 불빛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보고한 파비안은 금방 불을 껐다. 별하는 숲에서 가져온 것들을 동굴 안으로 던져넣었다. 저도 뛰어내리려는 찰나 어깨에 앉아 있던 블루칩이 기겁을 하고 날아가 버렸다.
“괜찮아, 블루칩. 아무것도 없어.”
멀찍한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는 별하의 다정한 목소리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초조하게 두 발만 굴리는 폼이 마음은 굴뚝이나 몸이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겁먹은 소동물을 억지로 부르지 않았다.
“그럼 거기서 잠시 쉬고 있어. 밤에는 좀 더 높은 곳에서 자도록 하고.”
블루칩은 양날개를 축 늘어뜨리고서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별하는 그에게 짧은 눈길을 보낸 뒤 지체하지 않고 동굴로 뛰어내렸다. 짐들을 살짝 비껴서 착지한 그는 파비안이 서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뭔가 찾은 거야?”
파비안은 기척 없이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불쑥 대답했다.
“이 부근에서 미세한 바람이 느껴져.”
070.
“바람? 거기 길 나 있어?”
담담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니. 막혔어.”
별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짐을 풀었다.
“그거 이쪽 때문 아닌가? 내가 움직여서.”
장작과 가는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들고 미미하게 빛이 드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크고 너른 장작을 바닥에 깔고 단단한 나뭇가지의 끝을 장작 가장자리의 홈에 가져다 댔다. 합장한 양 손바닥을 모으고, 그것을 끼워 그대로 손 안에서 굴렸다. 양손을 빠르게 비비며 맞닿은 면을 마찰시켰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미동 없이 한참 서 있던 파비안은 곧 발길을 돌려 근처로 걸어 나왔다.
“별하가 돌아오기 전부터 느껴졌었어.”
별하는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인 채로 그를 돌아보았다.
“공기가 흐른다는 건 밀폐의 반대말이잖아? 벽이 얇은 건가? 미세한 틈이 나 있다거나.”
“불을 붙인 뒤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지.”
파비안은 담담히 말하며 별하가 하는 것을 가까운 옆에서 들여다보았다. 별하는 그에 더 열심히 손바닥을 비볐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마찰되던 단면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났다. 앉은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집중해서 작업하는 중에 벌건 불씨가 번득였다. 별하는 뒤늦게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지푸라기라도 좀 주워올 걸. 마른 지푸라기 있으면 금방 불붙을 텐데.”
파비안은 조용히 일어나 별하가 가져온 살림을 살폈다. 외피를 벗겨내기 쉬운 장작 몇 개를 선별하는데 옆쪽에서 가시 잎이 달린 큰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그는 가시 잎 나뭇가지가 장작용이 아니란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밀림 한복판에서 당장 물을 구하기 어려울 때 저도 나뭇잎을 질겅거린 적이 있던 터였다.
“이것도 오메가 연맹에서 배운 건가?”
파비안은 어렴풋이 웃으며 별하에게로 다가갔다. 불씨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던 이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어떤 거?”
“나뭇잎.”
거두절미한 대답에도 이내 물음의 뜻을 파악하고서 반색했다.
“아니. 배낭여행 시작하기 전에 잠깐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배운 거야. 그런 걸 배웠었는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생각났어.”
파비안은 장작의 마른 외피를 얇고 가늘게 여러 겹으로 벗겨냈다. 그것을 지푸라기처럼 뭉쳐서 옆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
“타이밍이 좋았군.”
별하는 그것을 불씨가 번득이는 곳에 가져다 대고 입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희뿌연 연기가 삽시에 주변을 에워쌌다. 이따금 튀던 불씨가 나무 외피로 만든 지푸라기에 옮겨붙는 순간 어스름한 음영 속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별하는 간신히 지핀 불꽃을 지푸라기로 덮었다. 그것을 먹고 금방 크게 자라난 불길 속으로 장작들을 하나둘 밀어 넣었다.
“역시 사람은 고난에 봉착했을 때 숨겨진 힘이 나오나 봐. 초인적인 힘.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나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거나 하는 거 있잖아.”
일련의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던 파비안이 느지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드레날린의 힘이지.”
“맞아. 아드레날린.”
“별하는 그만 쉬도록 해. 아까 거기 잠시 살펴보고 올게.”
그는 불이 붙은 장작 하나를 손에 들고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별하는 저도 큰 횃불을 들고 그가 향하는 곳과 그 주변을 밝혔다.
불빛에 훤히 드러난 동굴은 라이터 불빛으로 얼핏 봤을 때보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종유석이 달리지 않은 천장은 십수 미터의 높이였고 깊이도 천장과 비슷한 수치로 그 이상은 넘지 않을 듯했다.
오랜 세월 동안 야금야금 퇴적되어 온 유기화합물질들로 만들어진 내부는 불그림자와 뒤섞여 상당히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황옥빛과 에메랄드빛이 층층이 섞여 만들어진 암석들이 온갖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수 갈래로 흘러내린 퇴적물이 마치 버드나무와 같은 형태를 띤 것도 있었다.
별하는 학창시절에 소풍으로 갔었던 국내의 커다란 동굴을 떠올리며 파비안에게로 다가갔다.
“어때? 뭔가 있어?”
파비안은 별하에게 잠시 움직이지 말라며 눈으로 사인을 보내왔다. 그리곤 손에 든 장작불을 울퉁불퉁한 안벽에 살며시 가져다 댔다.
“…….”
“…….”
수직으로 잔잔하게 타오르던 불길이 일순 일렁였다. 누군가의 기척이나 숨소리라고는 착각하기 힘들 정도로 크고 선명하게. 안벽에 드리운 별하와 파비안의 그림자가 파문처럼 한참 어지러이 일그러졌다. 천천히 가라앉는가 싶더니 다시금 흐트러지기를 반복했다.
파비안은 더 의심할 것 없다는 듯 단언했다.
“또 다른 공간이 있어.”
별하는 크게 뜬 눈을 깜빡였다.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그것’의 서식지일까?”
“글쎄. 이런 형태의 또 다른 공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수로일 수도 있어. 별하의 짐작대로 사냥감의 둥지일지도 몰라.”
“…….”
별하는 안벽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쫑긋 세웠다. 얇은 벽인지 두꺼운 벽인지, 미세한 틈이 있는지 없는지, 육안으로는 확인이 거의 불가능한 곳에 한참 동안 귀를 기울였다. 횃불의 재가 떨어질 때까지 집중했지만 암반수가 흐르는 소리나 그 비슷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밖에 없었다.
파비안은 이만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불이 켜진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벌써 해가 졌군. 오늘은 꽤 많이 걸어서 피곤할 테니 이제 슬슬 쉬도록 해, 별하.”
“이대로 놔두고? 뭔가 찝찝한데.”
별하는 중얼거리며 빛이 들지 않는 주변의 사각지대에 일일이 불을 비춰 확인했다. 혹시라도 벽 너머로 통하는 구멍 같은 게 있을까 살폈으나 어디를 어떻게 봐도 완벽한 밀실이었다. 그렇게만 보였다. 파비안은 장작불이 더 잘 탈 수 있도록 숯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곳은 내일 일찍 확인하면 돼. 잠시 한눈판다고 해서 도망가는 녀석이 아니니까.”
별하 역시 그와 같은 견해였다. 마음 같아서는 돌망치나 도끼로 벽을 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제 조바심만 내세울 수도 없었다. 이곳의 식생에 대해 전무한 상태에서 일을 저질렀다가는 수습하기 불가능한 일이 생길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별하는 어쩐지 점점 더 조급해지는 마음을 간신히 접고 파비안이 자리한 곳으로 돌아섰다.
구멍 밖의 숲은 어느새 해가 저물어 캄캄해져 있었다. 하도 겁을 내는 바람에 데리고 오지 못한 블루칩이 걱정된 별하는 가만히 밖을 내다보았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수목과 벌레밖에 없는 이곳에서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는지, 잠시만이라도 앵무새가 되어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단순히 제 영역이 아니라서 그리한다기에는 과민한 반응이었다. 더군다나 머리도 비상한 녀석이.
별하는 제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가만히 응시했다.
“…….”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동굴에서 마주하는 불길은 몹시 따뜻했다. 이제야 소화가 된 속이 편안했다. 갈증은 더 없었고 엄지발톱을 감싼 나뭇잎 붕대 역시 거친 움직임에도 아직까지 튼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온종일 전신을 짓누르던 긴장감이 가시자 이번에는 피로감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별하는 으슬으슬한 어깨를 슬쩍 웅크리며 불 가까이에 좀 더 다가갔다. 옆자리에서 자신이 가져온 가시 잎을 질겅이는 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해적이 보물이라도 숨겨뒀으면 어쩌지?”
생뚱맞은 물음에 유리구슬 같은 파비안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해적이 벽 너머에 보물을 숨겨 넣는 상상을 해보는 것인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곧 작은 코웃음을 소리를 내며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불길이 비쳐 불그스름해진 금발이 보드랍게 흘러내렸다.
“지니의 요술 램프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지.”
담담한 저음으로 읊는 단어가 어쩐지 우스워 별하의 입매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엄청 예쁜 각국의 미녀들이 만찬 드레스를 입고 반겨준다면?”
파비안은 제 턱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하는 여성이 좋았던 건가?”
가만히 직시해 오는 조각 같은 얼굴에 웃음기는 전혀 없었다. 별하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만나본 적은 없어. 그녀들은 어떨까, 생각하는 정도로만.”
그는 딱히 여자에 대해 생각이 없었다. 여성형 알파든, 여성형 오메가든, 여성형 베타든 간에 오메가 남성은 정소의 기능이 퇴화해 그들을 임신시키기가 매우 어려웠다.
기적에 가까운 극히 낮은 확률이 존재하긴 하나, 오메가 남성들은 본능적으로 알파 남성에게 강하게 이끌렸다. 일평생 알파를 외면해 왔던 별하조차도 그랬다. 본능적인 이끌림이 또 다른 형태로 표현되었을 뿐.
파비안은 별하의 말을 곱씹듯 조용했다. 별하는 왠지 모르게 뺨이 간질간질해 손끝으로 문지르며 덧붙여 말했다.
“인연이 된다면 만나볼까도 했는데 이젠 관심 없어. 전혀.”
“……어째서?”
별하는 입술을 잘근거리면서도 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파비안, 네가 있으니까.”
파비안은 눈도 깜짝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금빛 속눈썹 아래서 반짝이는 오드아이는 더없이 아름다웠으나, 찰나로 스치는 생각이나 감정은 읽어낼 수 없었다. 나도 좋다거나, 아니, 싫다거나 하는 뉘앙스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별하의 까만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별하는 먼저 눈길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덮치거나 덮쳐질 것 같은 분위기가 어색해 이전의 실없는 대화를 덤덤히 이어나갔다.
“그, 아니면 그것도 좋겠다. 닭다리살로 튀긴 치킨 햄버거가 저곳에 가득 들어있는 거야. 토마토는 빼고. 아니다, 토마토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아.”
파비안은 느직이 고개를 돌리며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맥주가 좋겠어. 홉이 매우 강한 흑맥주.”
별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에 지지 않으려 곧장 뇌까렸다.
“100달러짜리 지폐가 한가득 채워져 있는 거야. 벽을 부수자마자 우르르 쏟아져서 파묻힐 정도로.”
파비안은 전혀 구미에 당기지 않는 듯한 낯빛이었다.
“별하는 그런 게 갖고 싶어?”
071.
너에게도 그런 욕심이 있느냐며 진실을 탐구하는 듯한 물음이었다. 그에 별하는 대번에 눈썹을 찌푸렸다.
“어이, 파비안. 내 취향 자꾸 걸고넘어지지 마. 넌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난 배낭여행 자금 모으려고 군대에서 컵라면 한 번 안 사 먹었어. 휴가 나와서도 아르바이트했다고.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허무맹랑한 상상을 해보겠어? 안 그래?”
파비안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저를 응시하는 이에게 사과의 의미를 지닌 눈길을 건넸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군. 나의 무지로 인한 불찰이다. 사과하지.”
별하는 작게 웃으며 제 발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돌려 다시 불길을 응시하며 잠잠히 말했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
“…….”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에게도 너만의 인생이 있었겠지.”
파비안의 음영 진 얼굴에 흐린 미소가 찾아 들었다. 별하는 세운 무릎 위에 팔을 기대며 느른한 한숨을 불어냈다.
“그럼 다시 이어가 볼까? 으음……. 벽을 쾅 때려 부수고 밖으로 나갔는데, 자세히 보니 집 뒤편 동산이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