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12)화 (12/49)
  • “하아, 하아…….”

    뜀박질을 한 듯 호흡이 가빴다. 숨을 똑바로 내쉬려 정신을 다잡아도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별하를 끌고 가던 이들이 별안간 걸음을 멈춘 곳은 장작불 앞이었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길 너머에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본 원주민들 중 나이가 가장 지긋하면서도 가장 건장한 노인이었다.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는 그는 생식기만 가린 다른 원주민들과는 다르게 전신을 가릴 수 있는 커다란 견직물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두르고 있었다.

    깊게 주름이 팬 얼굴에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채도가 높은 붉은색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흰자위는 역시나 누르스름했고 동공에는 백태 현상이 엿보였다. 그럼에도 별하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살아 있었다. 말귀가 전혀 통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눈이었다.

    노인은 별하를 옭아맨 이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팔을 움켜잡은 위력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다리가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은 별하는 겁에 질린 듯, 분노한 듯한 눈으로 노인을 직시했다.

    “풀어줘.”

    노인이 눈을 깜빡였다. 그의 목소리를 자세히 들으려는 듯 허리를 살짝 숙여 물끄러미 정시해 왔다. 별하는 지금 당장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고 해도 들어먹힐 리 없는 영어를 필사로 뱉어냈다.

    “날 풀어줘. 난 이곳 사람이 아니야. 부득이하게 사고를 당해 여기 있는 거지, 너희들과 아무 관계도 없잖아. 돌아갈 때까지 숲으로 한 발짝도 들어오지 않을게. 어느 누구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제발. 돌아가게 해줘. 부탁이야.”

    “…….”

    개 짖는 소리를 듣는 듯, 오전 내내 울리던 난타질 소리를 감상하는 듯 노인은 반응이 없었다. 별하는 부들부들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돌아가게 해달라고!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줘!”

    그 때 노인의 뒤쪽 교목 아래 그늘이 일시에 일그러졌다. 밀림의 그늘을 뚫고 나온 검은 형체들이 장작불의 경계에 서서 존재를 드러냈다. 바로 어젯밤 별하를 덮친 불청객들이었다.

    어제의 셋을 포함해 지금은 서너 배의 숫자가 그늘처럼 늘어서 있었다. 다른 알파들보다도 신장이 월등하고 체격도 커 풍기는 위압감이 남달랐다.

    그들은 노인의 수호기사처럼 뒤를 지키고 서서는 차례로 뭔가를 주절거렸다. 억양과 문장부호가 없는 언어는 동물들이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알아들을 수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었다.

    노인은 별하에게 박힌 눈을 떼고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검은 형체들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발로 땅을 굴리기도 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면 검은 형체들은 점점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고 들어갔다. 그들뿐 아니라 누구도 노인의 말을 걸고넘어진다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완전히 복종했다.

    노인은 이곳 부족의 우두머리 알파였다.

    별하는 얕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겁에 질린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한참 거친 육성을 내뱉던 족장은 다시 별하에게로 이목을 집중했다.

    “젠장…….”

    별하는 작게 읊조리며 눈길을 살짝 낮췄다. 지금 그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게 없었다.

    족장이 지팡이를 들어 땅을 쿵쿵쿵 내리쳤다. 너른 광장이 삽시에 침묵했다. 무언가를 부르듯 족장이 목소리를 짧게 높였다.

    “두! 두!”

    두두와 투투의 중간 발음으로 숨을 토해 내듯 연속해서 부르짖었다.

    “두! 두!”

    주변의 알파들이 하나둘 따라 외쳤다. 두두! 두두! 두두! 묵직하게 뻗어나가는 외침들이 땅을 울리며 숲을 흔들었다. 교목의 높다란 가지에 앉아 쉬던 새 떼가 놀라서 달아났다.

    별하는 이곳 알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에 죽은 듯이 숨을 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목 뒤에서 커다란 인영 하나가 이곳으로 걸어왔다. 그림자만 보아도 알파임을 알 수 있는 인영은 검은 형체들과 족장보다도 크고 훤칠했다.

    그의 피부는 좀 더 짙은 색을 띠고 있었고 굽실하게 등을 덮은 머리칼은 새카맸다. 여타 알파들과 비슷한 행색을 하고 있었는데, 명치까지 내려오는 특이한 목걸이와 양쪽 허리에 찬 무기 같은 것들이 단연 눈에 띄었다.

    선이 짙은 얼굴을 비롯해 전신에 붉은색과 흰색, 검은색 염료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어떤 용맹함을 상징하는 그들만의 표식 같았다.

    저를 부르는 족장에게로 다가간 그는 상대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돌연 이쪽을 힐긋 돌아보았다.

    “……!”

    순간 장작불 너머로 눈이 마주친 별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제발 저를 못 봤기를, 제 존재를 모르기를 기도했지만 이곳에 오메가는 별하뿐이었다.

    속으로 온갖 욕설을 뱉으며 도망갈 경로를 찾아 바삐 곁눈질을 하는데, 불길을 돌아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029.

    광장에는 많은 알파들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 지독한 냄새를 풍겨댔고 개중에는 호감을 느낄 만한 냄새도 분명 존재했다. 그럼에도 단순한 호감을 능가하는 하나의 페로몬이 별하의 신경 센서를 자극했다.

    남자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체취는 더 강해졌다. 불길을 뒤로하고 제 앞에 우뚝 멈춰선 이와 마주하는 순간 별하는 깨달았다. 그는 파비안과 같은 하이 알파였다.

    목울대가 멋대로 움직였다. 파비안의 아찔한 페로몬과는 또 달랐지만 강렬하기는 마찬가지라서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체취에 절로 호흡이 가빠졌다. 고개를 돌리고 억지로 숨을 참으며 점막으로 스며드는 체취를 거부했다.

    남자는 그런 별하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자신들과 다른 외형, 다른 피부, 다른 복장의 이방인 오메가를 한참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별하의 앞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눈이 다시 마주쳤다.

    두 눈을 부릅뜬 별하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를 악물고서 바로 정면에서 다가온 남자와 얼굴을 맞댔다. 눈가와 입가를 뒤덮은 위협적인 문양이나 한쪽 콧방울을 뚫어 달아놓은 피어싱과 비슷한 무언가, 탄탄한 골격, 페로몬까지 공격적인 성향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는데 눈매만은 남달랐다.

    그의 눈매는 얼핏 족장과 닮아 있었지만 그와는 다르게 흰자위가 깨끗했다. 희미한 누른 기도 없이 하�R다.

    별하는 저를 따라 움직이는 검은 동공과 바짝 밀착했다. 당혹감에 두 눈을 정처 없이 굴리며 빠르게 깜빡였다. 그럼에도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떨어지지 않고 별하의 두 눈을 수 초간 들여다보았다.

    “…….”

    “하아…… 하아…….”

    그는 곧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단발의 사자후를 토해 냈다.

    “우!”

    광장 여기저기서 똑같은 사자후가 번졌다. 우! 우! 우! 치뜬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족장이 지팡이로 땅을 쿵쿵 찧으며 외쳤다.

    “우! 우!”

    남자는 할 일을 마친 듯 미련 없이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족장과 검은 형태들도 교목의 깊은 그늘로 몸을 숨기고 들어갔다. 광장의 알파들은 흥미진진한 경기 관람을 마치고 야구장을 나서는 야구팬들처럼,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관람 후 근처 카페로 모여든 영화광들처럼 웅성거렸다.

    별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어안이 벙벙했다. 좋지 않은 예감은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부터 줄곧 느끼고 있었으나 그를 뛰어넘는 불안과 비운을 감지한 때는 다시 양팔을 붙들리면서부터였다.

    돼지우리로 끌려가리란 예상과는 다르게 그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별하를 끌고 갔다.

    어수선한 광장과 움막들을 지나,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심림으로 들어섰다. 태양이 머리 위 녹음을 뚫지 못할 정도로 빽빽해 어스름하면서도 서늘했다.

    별하는 뒤늦게 저를 붙잡은 이들이 알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색무취의 평범한 베타였다. 그들은 익숙한 모양새로 그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대, 대체 어딜 가는 거야?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대답 없는 메아리만 울렸다. 멀지 않은 수풀더미가 자꾸 바스락거려 고개를 홱 돌려보자 뿔 달린 짐승이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슴이었다. 그 옆에서도 기척이 들렸는데 또 다른 여러 마리가 수풀 뒤에 숨어서 이쪽을 경계했다.

    숲에는 사슴뿐 아니라 높다란 나뭇가지를 타고 노는 원숭이들도 보였다. 흡사 바위처럼 생긴 생물체를 지나치기도 하고, 나무 위에 앉아 알록달록한 장식깃을 뽐내는 거대한 극락조와도 마주쳤다.

    베타들은 짐승들을 자주 목격하는지 어떤 반응도 없이 갈 길만 재촉했다.

    도드라진 혈관처럼 지면 위로 자라난 나무뿌리와 줄기에 발이 자꾸 걸렸다. 별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보다 문득 지금까지와는 다른 습한 공기를 피부를 통해 느꼈다. 해변에서보다 강한 누기였다.

    “설마…….”

    햇빛이 엷게 비춰드는 초지를 지나, 미세한 경사 길을 내려가는 그 때, 아니나 다를까 앞쪽에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이었다.

    베타들의 목적지는 이곳이었던지 별하를 억압하던 손을 풀었다. 그러더니 다 같이 물을 가리켰다.

    “……?”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된 별하는 어리둥절하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왜 물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보다 자유의 몸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언제든 숲으로 내달릴 준비를 하고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타 하나가 뒤편을 가리켰다. 나무 뒤에서 이쪽을 지켜보던 검은 형체가 순식간에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또 다른 베타는 작은 동물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 물을 가리켰다. 들어가는 뜻이었다.

    “…….”

    별하는 모든 의욕을 잃은 얼굴로 강을 내려다보았다.

    잔잔히 흐르는 강은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온천수 같은 흰색 물빛에 그 아래쪽은 파스텔 빛깔의 푸른 해수가 지나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강줄기를 따라 번성한 맹그로브가 그림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었는데, 물속에 뿌리를 내린 그 아래서 인어든 산신령이든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는 베타들의 채근에 못 이겨 얕은 물에 발을 담갔다. 온천수처럼 따뜻하진 않았지만 바닷물보다는 좀 더 열감이 있었다. 생각보다 수심이 깊어 머뭇거리는데 베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손짓했다. 더 깊이―

    “죽, 으라는 건가…….”

    허벅지를 지나 배꼽이 잠기고 가슴팍까지 물이 차올랐다. 목울대와 턱에서 무른 수압을 느끼다가 서서히 코끝을 묻었다. 이내 베타들의 손길을 따라 온전히 입수했다.

    뽀로록―

    별하는 물속에 들어와서도 물길을 따라 도망갈까, 도망갈 수 있을까를 번민했다. 곧 숨이 차올라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됐을 때 천천히 수면으로 떠올랐다. 베타들은 만족한 듯 나오라는 손짓을 건넸다.

    흠뻑 젖은 채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광장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시끄러운 난타질 소리와 사람들의 기척이 주변 숲을 울리고 있었다.

    별하는 이곳의 위치를 여전히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런 큰 소음을 어떻게 지금까지 듣지 못한 건지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면 해변으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깊은 밀림이라 그런 건가?

    누가 죽든, 누가 먹히든, 세상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런 곳에서 정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는지, 멀쩡하게 살아나갈 수 있을는지, 그는 크나큰 패배감을 느꼈다.

    별하가 다시 광장으로 들어갔을 때 그에게 눈길을 던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얼굴을 들이밀며 웃어대거나 무람없이 몸을 건드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지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베타들은 광장을 지나 거대한 교목을 우회했다. 굵직한 나무줄기와 넝쿨들이 머리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음지로 들어가 좀 더 걷자 군락을 이룬 연둣빛의 장대한 파초들이 보였다.

    파초들 사이에 움막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광장의 자그마한 움막들보다 두세 배로 컸다. 외따로 떨어진 움막이 베타들의 최종 목적지인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별하는 더할 수 없이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저 움막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지만 제힘으로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 하나 방법이 있다면, 지금 당장 혀를 깨물고 자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넓적한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문을 열자 그늘에 잠긴 안쪽에서 서늘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향수를 들이 엎은 듯 응집된 진한 페로몬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으음…….”

    베타들은 주춤하는 별하를 안으로 이끌었다.

    움막의 내부 구조는 꽤나 특이했다. 문으로 들어서면 우측과 좌측으로 통로가 나 있었고 여러 명이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한 공간이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통로는 여기저기서 비쳐드는 외부의 빛으로 움직이는 데에 지장이 없는 반면, 중앙의 응접실로 보이는 곳은 창문이 없고 불도 지피지 않아 동굴처럼 캄캄했다.

    베타 하나가 별하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먼저 좌측 통로로 향했다. 별하는 문 앞에서 대기 중인 나머지 베타를 뒤로하고 앞선 이를 비척비척 뒤따랐다.

    직사각형의 작은 창문이 달린 좌측 공간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진흙을 꼼꼼히 발라 세운 안벽에는 장식품인지, 먹는 것들인지 모를 것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동물들의 가죽이라든가, 모피, 뼈, 발톱 같은 조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 혹 인간의 것처럼 보여 별하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베타는 그의 젖은 옷가지를 가리키며 의성어 같은 말소리를 냈다. 분명 알지 못하는 언어인데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챈 별하는 고개를 저었다.

    “시, 싫어. 절대 안 벗어. 안 벗어.”

    그러자 베타는 그의 옷을 찢어낼 듯이 강압적으로 잡아당겼다. 저항하는 별하를 가뿐히 억압해 남방을 벗기고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그만해! 하지, 그만하라고! 손대지 마, 이런 미친!”

    본래 오메가나 베타나 신체 여건은 비슷한 수준이나, 자연에서 생활하는 베타의 악력과 완력이 별하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베타는 별하의 젖은 청바지를 벗겨낼 때 애를 먹긴 했지만, 금방 파비안의 팬티까지 벗겨내 별하의 뽀얀 알몸이 드러났다.

    “하아, 제기랄…….”

    별하는 욕설을 내뱉으며 씨근덕거렸다.

    베타는 들은 둥 마는 둥 작은 견직물을 건넸다. 저들이 입고 다니는 하의였다. 단박에 거부하며 젖은 옷가지를 다시 주워 입으려는 별하를 베타가 저지했다. 그는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는 별하를 바닥에 밀치듯 드러눕혀 억누른 다음 능숙하게 하의를 끌어 올려 입혔다.

    “아앗.”

    그 상태로 흰색의 염료를 사용해 별하의 얼굴에 그림을 그렸다. 눈가와 눈 밑을 희게 칠하고 입술 아래도 길게 그었다. 치장을 끝낸 베타는 아연히 누운 별하를 일으켜 우측 통로로 이끌었다.

    030.

    우측의 공간은 다른 공간들보다 널찍하고 밝았다. 나무를 평평하게 엮어 만든 침상이 덩그러니 놓인 것으로 봐서 침실 같았는데, 그곳에 별하를 집어넣은 베타들은 할 일을 완전히 마친 듯 서둘러 나가버렸다.

    “…….”

    낯선 공간에 홀로 남겨진 별하는 제 생식기를 감싼 가칠가칠한 하의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듯 말 듯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강에는 어째서 들어간 건지, 이런 옷은 왜 입히는지, 또 여길 데려온 이유는 뭔지,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별하는 정수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진땀을 닦아내다 손등에 어렴풋이 묻어나는 흰색 염료를 발견했다.

    “이런 뭣, 같은.”

    손과 팔로 그것을 미친 듯이 문질러 닦았다. 대체 무엇으로 만든 건지 잘 지워지지도 않는 염료를 쉼 없이 문지르며 서둘러 침실 문턱을 넘었다. 조용해진 이참에 도망칠 생각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려 옆방으로 향하던 별하는 좁은 통로에서 별안간 우뚝 멈춰 섰다. 통로 한가운데에 시커먼 인영이 서 있었다.

    얼굴에 그려진 문양과 짙은 피부, 긴 머리칼, 건장한 윤곽이 낯설지 않았다. 좀 전 광장에서 마주했던 하이 알파였다.

    “…….”

    별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알파의 뒤쪽에 난 문이 아니면 도망갈 길이 없음을 알지만 그에게 가까이 가는 건 훨씬 위험했다. 다시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 별하는 문에서 가장 떨어진 안벽으로 피신했다.

    느직하게 뒤따라 들어온 알파가 별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들과 똑같은 차림새를 말없이 훑어 내리더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오지 마!”

    별하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새되게 소리쳤다. 알파는 걸음을 멈추고 그런 별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역시 알파였다. 알파가 섹스를 원한다면 오메가는 당연히 그에 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안하무인의 족속이었다. 미개한 원주민인 것을 차치하더라도 다짜고짜 관계를 맺으려는 알파에게 별하는 격한 혐오감을 느꼈다.

    별하는 처음 보는 알파와, 지성은커녕 감정도 없는 듯한 식인종과는 절대로 맺어지고 싶지 않았다. 식인종의 아이를 낳아 똑같은 식인종으로 만드느니 이대로 저녁 만찬이 되는 편이 옳았다.

    이방인 오메가가 저를 거부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알파의 분위기는 영 좋지 않았다. 떡 벌어진 가슴팍을 크게 오르내리며 숨을 훅훅 불어냈다.

    알파의 하의는 이미 발기한 페니스로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아직 발정이 오지 않은 상태였지만 페로몬은 발정기 때 못지않게 짙었다. 수일 내로 러트가 올 낌새였다.

    별하는 하이 알파에게 본능적으로 끌리는 오메가의 탐욕을 철저히 외면했다. 육체는 열기를 원할지 몰라도 마음은 반비례로 차가워졌다. 그럼에도 육체의 예민하고 날 선 감각들이 그를 채근했다.

    어둑한 공간을 장악한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해 미열이 올랐다. 입 안은 바짝바짝 마르고 호흡은 가빠졌다.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가슴팍으로 미끄러졌다. 알파를 의식하면 할수록 별하에게서 풍기는 체향도 노골적인 단내를 가미했다.

    참다못한 알파가 성큼 다가왔다.

    “읏.”

    황급히 고개를 돌려 피하는 별하의 목덜미 가까이에 코를 대고 알파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하얀 피부의 오메가가 신기한지 별하의 움츠린 어깨와 급격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 불그스름한 젖꼭지, 옴폭한 명치, 복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별하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진득한 눈길로 피부 곳곳을 훑어 내렸다.

    별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겁을 먹고 경직된 피부 위로 오한이 일었다.

    “그, 그만해.”

    “…….”

    “날 여기서 내보내 줘…….”

    사정하듯 빌었다. 그의 부탁을 알파는 어떤 식으로 해석한 것인지 꽉 다문 허벅지 사이로 불쑥 손을 밀어 넣었다. 그에 별하는 경기를 일으키듯 알파의 손길을 세차게 뿌리치며 거부했다. 손길이 떨어진 후에도 견딜 수 없다는 듯 치를 떨며 구석으로 멀찍이 물러났다.

    “…….”

    그를 묵묵히 지켜보던 알파가 벽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움막이 무너질 듯 우르르 진동했다. 그는 제게서 떨어져 나간 별하를 당장에 잡아먹을 듯 씨근거리다가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괴성을 질렀다.

    “우어억―!”

    그리곤 홱 뒤돌아 무서운 기세로 움막을 나가버렸다.

    별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난 괴물 같은 알파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도망쳐야 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맥없이 풀린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하아…… 하아…….”

    별하는 절망했다. 자신은 이곳에서 죽으리라 확신했다. 남들보다 몇 배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으로 체력을 기르고, 국방의 의무도 이행했으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오메가는 알파를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오메가는 알파의 장난감이자 성욕 해소 도구였다. 먹이일 뿐이었다.

    그는 괴로운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약한 모습을 내보이지만 어떤 의욕도 가지지 못했다. 더 이상 희망을 꿈꿀 수 없는 내일에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그냥 죽어버릴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꾸역꾸역 살아가는데도 기다리는 게 고통뿐이라면, 그냥 포기하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수 있었다. 편하고 또 안락할 테니까.

    별하는 조금 전 몸을 담갔던 강과 정수리에 닿았던 교목의 나무넝쿨을 떠올렸다. 독사라도 숨어 있을 듯한 파초 군락을 떠올렸다가 파초로 만든 태풍 대피소와 그 아래 쌓아두고 먹었던 과일을 연달아 상기했다.

    다디단 과육과 입술 밖으로 흘러내리던 과즙이 마치 실재처럼 입 안에서 느껴졌다. 혀 밑으로 침이 고여 들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것들을 부지런히 옮겨 나르던 남자에게까지 기억이 닿는 순간, 별하의 굳은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

    본능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곳의 알파와는 판이한 저쪽의 알파는 지금쯤 러트를 잘 보냈을까?

    저를 향한 투명한 오드아이와 새빨간 입술,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그의 두 뺨을 떠올리자 혀끝으로 부드럽게 감겨드는 감촉이 느껴졌다. 헤어지기 전 스치듯 맞닿았던 키스가 새삼 안타까웠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단꿈처럼 아쉬웠다.

    별하는 그저 생각했다.

    그를 그렇게 보내지 말 걸.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이 가는 대로 그와 섹스할 걸.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발정기를 함께 보낼 걸…….

    이별한 후에 후회해 본들, 결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었다.

    작은 창으로 비쳐들던 석양까지 사라지자 완전한 어둠이 찾아들었다. 누군가가 움막으로 들어와 응접실에 불을 붙이는 기척이 들렸다. 나무가벽의 격자 구멍으로 스멀스멀 번져 나온 불빛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이를 비췄다.

    별하는 낯선 기척이 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였다. 다시 문이 열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움막 안팎의 정적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꼬르륵―

    허기가 졌다. 갈증이 나고 다리는 저렸다. 무엇보다 무척 졸렸다. 그렇다고 무방비하게 잠들기에는 갑자기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별하는 일렁이는 불그림자를 응시하며 꾸벅꾸벅 졸았다.

    벽에 기댄 뒷머리가 힘없이 자꾸 미끄러졌다. 한쪽으로 무게가 치우쳐 목덜미가 아파 오자 고개를 반대로 기울였다. 하품을 연달아 하며 그렁그렁해진 눈꺼풀을 문지르던 별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제 앞에 와 서 있는 시커먼 인영을 발견하고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문을 박차고 나갔던 알파가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움막을 부술 듯한 분노는 한 차례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커다란 그릇 같은 것을 양손으로 들고 있었는데 몹시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그 냄새의 정체를 익히 아는 별하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알파가 그것을 내밀기도 전에 고개를 크게 저어 거부했다.

    “필요 없어. 안 먹어.”

    “…….”

    “그딴 거 먹느니 굶어 죽는 게 나아.”

    알파는 제 손에 든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별하의 뜻을 이해했는지, 어쨌는지 손에 든 그대로 휙 뒤돌아 움막을 나갔다. 역겨움의 실체는 없어졌지만 냄새는 좀처럼 날아가지 않아 별하는 입을 틀어막고 구역감을 견뎠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너무 불편해 자리를 옮길까 생각했다. 잠은 어디서 자야 할지, 알파가 또 덮쳐 오면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나갔던 이가 다시 움막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별하는 몸을 웅크린 채 혹시라도 알파가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다시 돌아온 알파는 같은 그릇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전의 역한 음식냄새와는 다르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알파는 그것을 별하의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별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전혀 관심 없는 척 다른 곳을 한참 응시하다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둥그런 그릇 안에는 돼지가 환장하며 먹던 음식물 쓰레기 대신, 알록달록한 과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꼬르륵―

    “…….”

    “…….”

    알파는 앞에 우뚝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연 이건 먹을 수 있는지, 설마 또 못 먹는 건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별하는 당장 먹고 싶었지만 괜히 받아먹었다가 관계를 합의한 걸로 착각할까 봐 손을 뻗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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