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11)화 (11/49)
  • 026.

    점차 발열하는 육체에는 오로지 고통뿐이었지만 턱 근육만이 도드라질 뿐 파비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모은 무릎 위에서 위태롭게 자던 이는 결국 허물어졌다. 모래밭에 폭 파묻혀 들어가 단내를 풍기며 쌔근거렸다. 누가 깨우지 않는 이상, 한동안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를 멀찍이서 바라보던 파비안이 나무 밑으로 들어갔다. 가지에 걸어둔 레인 코트를 풀어내려 동면한 작은 짐승 같은 별하에게 그것을 덮어주었다. 제게 악수를 청하던 손과 향긋한 체향을 풍기던 어깨, 목 아래까지 올려 덮었다.

    그는 손을 뻗어 별하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솜털이 느껴지는 피부는 따뜻하면서도 보송보송했다. 좁은 뼈대가 드러난 윗볼이 약간은 마른 듯했다. 마지못해 인사를 건네며 희미하게 떨던 입술에 손끝을 대자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벌어졌다.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단내에 휩쓸리기 전에 파비안은 호흡을 멈췄다.

    천천히 그늘 밖으로 물러나 숨결이 닿지 않는 햇빛 아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고 바지 앞은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불어낸 파비안은 이윽고 완전히 뒤돌아섰다.

    나뭇가지에 걸린 넝쿨 사이로 석양에 물든 바다가 내다보이는 그곳은 커다란 암석들과 관목으로 둘러싸인 음지였다.

    이끼가 달라붙은 바위에 기대앉은 파비안은 움켜잡은 페니스를 거칠게 훑어 올리며 사정을 재우쳤다. 활짝 열린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이 진땀으로 번들번들했다. 이미 정액 범벅인 열기둥은 한창 노팅 상태였고, 낮부터 이어진 마찰에 성이 날 대로 나 울툭불툭했다.

    그는 일부러 계속해서 정액을 배출시켰다. 러트를 서둘러 끝내려면 들끓는 혈기가 회복되기 전에 계속해서 소진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처음 찾았을 무렵에는 해변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주먹으로 바위를 가격하다 피부가 찢기기도 하며 자기 자신과 끝없이 맞부딪혔다.

    지금도 과격한 충동에 휩싸여 있었지만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서 오직 제 손끝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그럼에도 단내를 흩뿌리며 제게 매달려 신음하던 이가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Shit…….”

    잠든 별하의 옷을 찢어발겨 어떤 과육보다도 달콤한 나신을 원 없이 맛보고 싶었다. 미칠 것 같은 이 갈증이 가실 때까지 핥고 빨며, 진땀으로 눅눅한 뒷덜미를 물어뜯기를 갈망했다. 다리를 잡아 벌려 애액을 흘리는 구멍에 페니스를 틀어박아 허리가 빠질 때까지 쳐올리고 싶은 극렬한 욕구를 느꼈다. 흐느끼는 숨결까지 집어삼켜 제 아래서 몸부림치게 하고 싶었다.

    “하아…….”

    불이 붙듯 감겨드는 그 감각을 익히 아는 육체가 별하를 떠올릴 때면 사납게 움찔거렸다. 파비안은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로 큰 손에 꽉 들어찬 페니스를 빠르게 찌걱찌걱 훑어 올렸다. 제 정액에 흠뻑 젖은 안쪽을 찌를 때마다 강하게 조여들던 내벽의 감촉을 상기하며 급히 손을 움직였다.

    ‘파비, 안…….’

    헐떡이는 별하의 숨결이 귓전을 스치는 순간 귀두를 감싼 손바닥에 정액이 가득 들어찼다.

    “흐음.”

    파비안은 뜨거운 열기가 응집된 주먹을 그러쥐고 뒷머리를 바위에 붙였다. 달아오른 입술 밖으로 거친 숨결이 쏟아졌다. 급격하게 오르내리던 가슴팍이 점차 완만하게 가라앉으며 이내 느른한 한숨을 뱉어냈다. 그런 중에도 페니스는 여전히 발기해 있었고, 뱃속을 휘도는 열기 또한 그대로였다.

    거스름을 남기며 저무는 석양이 그의 우뚝한 옆얼굴을 비췄다. 음영에 잠긴 오드아이는 이 순간에도 본능과 싸우고 있었다. 의식이 소멸하기 전까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처럼 느껴졌다. 다행이라면 몇 시간 동안 이어지던 노팅이 점차 풀려가고 있었다.

    파비안은 희뿌연 정액이 뚝뚝 떨어지는 주먹을 풀어 재차 페니스를 쥐었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성기를 돋우는데, 반복되는 자극에 감각이 무뎌진 듯 사정감이 찾아들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습관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떠올리기만 해도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뜨겁게 스며드는 특유의 단내, 높은 체온, 불순물 없이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할 때면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아뜩한 감각을 느꼈다.

    파비안은 손아귀에 힘을 실어 귀두를 압박했다. 순식간에 흥분한 페니스가 우뚝 치솟았다. 무릎을 꿇어앉은 그는 턱을 물고 페니스를 강하게 훑어 올렸다. 찌걱찌걱찌걱―

    제 아래서 다리를 활짝 벌리고 성난 페니스를 받아들이는 이를 내려다보며 서슴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벌어진 엉덩이를 밀어 올려 안쪽을 찔러 들자 별하의 젖은 얼굴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파비안은 거침이 없었다. 억누르고 있던 열기를 터트리듯 그의 안으로 정신없이 파고들었다. 별하는 입술을 달싹이며 헐떡였다.

    ‘파비, 안…….’

    파비안은 그를 덮쳐 새빨간 입술을 한 입에 집어삼켰다. 달뜬 숨결이 제 안으로 흘러드는 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내벽 안에서 사정했다. 이끼 낀 바닥에 정액을 흩뿌린 그는 거칠게 쏟아지는 숨을 억눌러 삼켰다.

    “흐, 음.”

    흐트러진 호흡은 한참이 지나서야 잦아들었다. 파비안은 연기처럼 날아가 버린 이의 빈 자리를 망연자실 내려다보았다.

    석양의 잔재마저 사라진 숲은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액이 더 나오지 않을 때까지 셀 수 없이 쥐어짜낸 후에도 페니스는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 그를 원했고 뱃속은 뜨거웠다.

    막바지에 다다른 러트는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맹렬했지만 이제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씻으러 근처 해변으로 향하던 파비안이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아 귀를 세웠지만 밀림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 위화감이 들 정도로. 청감을 끌어 올려 한참을 서 있었지만 신경줄을 잡아끄는 기척은 더 이상 없었다.

    그는 풀어헤친 셔츠와 바지 버클을 잠그지 않고 해변으로 내려갔다. 밤하늘에는 둥그런 달이 떠올라 있는데도 전날보다 바다가 어두웠다.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내다보며 물속으로 걸어들어 가자마자 이내 사라졌다. 그를 삼킨 밤바다는 잔잔히 밀려 나갔다가 다시 느긋하게 밀려 들어왔다.

    한참이 지나 먼 수면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파비안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호흡을 다잡았다. 눈을 들어 어둠에 휩싸인 밀림과 위쪽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뜨문뜨문 떠오른 밤하늘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연기 같은 건 피어오르지 않았다.

    낮잠을 그렇게 잤으니 지금쯤 일어나 배를 채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양볼을 불리며 과즙이 흐르는 과일을 맛있게 베어 먹는 이를 떠올렸다.

    덜 익은 과일을 잘못 골라 강한 신맛에 일그러지던 얼굴이 생각나 파비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발정기에 잠시 떨어져 있기로 한 약속을 이행한 것뿐인데도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던 이가 못내 눈에 밟혔다.

    “…….”

    느릿하게 발을 움직이며 한참 물 위에 떠 있던 그는 다시 물속으로 입수했다. 아직 발정이 끝나지 않았지만 물속에서라면 서로의 페로몬을 인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잠영과 자유형을 번갈아가며 근해를 빙 둘러 헤엄쳤다. 눈에 익은 지형지물이 자리한 장소까지 금방 도착한 파비안은 투명한 장막을 뚫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아…….”

    나직이 숨을 뱉으며 고개를 살짝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한결 맑아진 시야로 모닥불부터 찾았다.

    “……?”

    익숙한 모양의 야자수들과 바위들의 위치를 차례로 확인했다. 백사장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찬찬히 돌아봤지만 모닥불이 보이지 않았다. 모래 바닥에 널브러진 레인 코트를 발견한 그는 급히 헤엄쳐 뭍을 밟았다.

    좀 전까지 누군가 곤히 잠들어 있던 나무 밑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고 별하는 없었다. 모닥불은 모래에 뒤덮여 희미한 열감도 없이 싸늘하게 꺼져 있었다.

    파비안은 두 눈을 단단히 뜨고 주변을 살폈다. 어지럽게 헝클어진 모래밭의 형태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밀림 주변에서 그 시작점을 찾아내 모닥불 주변을 지나 과일더미가 자리한 야자수까지 한 번에 이어 내렸다.

    이곳에 별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둘 이상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켜는 파비안의 눈에서 새파란 불똥이 튀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들이닥친 생물체들의 목적은 확고하게 단 하나였다.

    오메가인 별하―

    그는 아주 희미하게 남은 낯선 냄새를 따라 발길을 내디뎠다. 모닥불을 넘어 밀림으로 들어서자 그 냄새는 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본래 알파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그다지 인지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간혹 냄새의 농담이 남다르다거나, 사춘기를 겪을 때까지 전혀 접해보지 못한 희귀종이라거나, 개인의 취향에 따라 감지하는 부분이 조금씩 달랐다.

    파비안이 감지한 냄새는 확실히 알파들의 것이었고, 독특하게 쏘는 듯한 질감이 각각의 냄새에서 동일하게 느껴졌다. 이전 사회에서는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그것은 밀림 안쪽으로 꾸물꾸물 이어지고 있었다.

    “…….”

    달빛도 닿지 못한 밀림의 저 먼 곳까지 들여다보는 오드아이가 전에 없이 분노로 번득였다.

    027.

    의식을 차린 때는 한참 전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벌떡 일어났다가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몰라, 여전히 의식을 잃은 척 누워만 있었다.

    “…….”

    등으로 느껴지는 땅바닥이 차가웠다. 어딘가에 들어와 있는 듯 어떤 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안팎을 드나드는 인기척이 들릴 때면 미세하게 새어 드는 불빛을 감지할 수 있었다.

    별하는 느릿하게 목울대를 움직여 마른침을 삼켰다. 정신을 잃기 전, 대체 무슨 일을 당했던 건지 흐릿한 머릿속을 찬찬히 되짚었다.

    거처에 두 명의 알파가, 아니, 세 명의 알파가 들이닥쳤었다.

    굽은 듯한 자세, 맨발에 특화한 걸음걸이, 설명할 수 없이 기묘한 눈빛과 매우 독특한 체취로 봤을 때 그들은 조난자 같은 게 아니었다. 몇 주가 지나도록 여전히 길을 찾아 헤매는 이방인인 자신과 파비안과는 사뭇 달랐다. 이 밀림에서, 이 무인도에서 몇 대에 걸쳐 진화해 온 원주민 같았다.

    두려움을 느낀 별하의 숨결이 살짝 흐트러졌다. 완전한 무인도라고 단언했었는데, 언제 이쪽을 찾아낸 건지 오한이 들었다. 파비안이 자리를 비운 시점에 맞춰 타이밍 좋게 들이닥친 데에서, 어제오늘 자신들을 발견한 게 아니라는 걸 짐작했다. 소름이 끼쳤다.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만약 첫날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면 이토록이나 강렬한 냄새를 맡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혼자 보내던 시간이 많아서 들이닥칠 기회도 충분했다.

    어쩌면 태풍이 지난 후부터인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불을 피우기 시작했기에 밀림에 정통한 자들이라 바로 알아챈 것일지도.

    “…….”

    일이 어떻게 됐든, 이들이 저를 이곳으로 끌고 온 이유가 결단코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정신을 차리고부터 코에서 진동하는 알파들의 격한 페로몬 냄새에 구역질이 날 정도였으니까.

    별하는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이 상황에 더 집중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조난당한 것도 서러운데, 오메가란 이유로 이런 곳에 강제로 끌려온 처지가 정말 기구하다 못해 끔찍했다.

    폭행이나 강간을 당한 건 아니었지만 가까운 미래에, 어쩌면 지금 당장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메가라는 존재는 그랬다. 문명사회에서는 법과 양심으로 그들의 인권을 수호하는 듯한 시늉이라도 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세상에서는 오메가에게 그런 권리라는 것이 존재치 않았다.

    오메가 강간과 강제 임신은 알파들의 본성이었다. 그들이 고등교육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내면세계, 그 기저를 이루는 원초적인 욕망 그 자체였다.

    별하는 축 늘어뜨린 팔다리를 조금씩 까딱였다. 잠시 의식만 잃었을 뿐, 사지는 아직 온전히 붙어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 동태를 살피다 한참이 지나도록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실눈을 떴다.

    주위가 무척 어두워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른거리는 불빛만 흐릿했다. 움직이는 형체는 보이지 않았고, 좀 전까지 간간이 들리던 인기척도 끊어져 조용했다.

    별하는 눈을 완전히 뜨고 자신이 누운 곳을 빠르게 휘둘러보았다.

    어슴푸레한 빛이 비쳐드는 공간은 사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3평이 될까 말까 한 크기였다. 곧고 두툼한 나무줄기를 격자로 엮어 가벽처럼 세운 구조로, 격자 구멍은 팔 한쪽이 겨우 빠져나가는 크기였다.

    안에서도 밖이 내다보이고 밖에서도 안이 들여다보이는 형태의 공간의 어느 쪽에서도 출구, 그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봐도 감방이었다.

    별하는 침을 꼴깍 넘기며 천장 구멍마다 어지럽게 휘감긴 넝쿨들을 아연히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머리가 쫓아가질 못했다.

    어쩌면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의 응달에서 난데없이 기척이 일었다. 바스락바스락―

    “―?!”

    별하는 벌떡 일어나 앉은 채로 물러났다. 단단한 벽에 등이 쿵, 부딪혔다.

    푸르르―

    시커먼 돼지 한 마리가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잠들었다.

    놀란 가슴이 한참 동안 방망이질 쳤다. 바짝 굳은 채로 어둠 속의 방 주인을 경계하던 별하는 곧 맥없는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

    긴장한 어깨를 내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가벽 너머에 서 있는 인영과 눈길이 맞닥뜨렸다.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듣지 못했던 터라 또 한 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별하는 호흡하는 법도 잊고, 저를 내려다보는 인영을 끔뻑끔뻑 올려다보았다.

    해변에서 마주쳤던 검은 형체들이 아니었다. 체격도, 나이 대도 전혀 달랐다. 약간 누른 피부에 새까만 단발머리의 인영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얼굴은 앳된 듯하면서도 뼈대가 제법 굵은 것으로 보아 청소년기의 사내아이 같았다.

    까만 눈동자의 눈 밑 살과 입 주변에 검붉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언뜻 혈흔처럼 보여 섬뜩했다. 상반신은 탈의한 상태였고 하반신은 견직물과 비슷한 모양새의 것으로 생식기만 겨우 가리고 있었다. 일련의 행색은 그야말로 매체를 통해서만 보아왔던 원주민의 그것이었다.

    누르스름한 공막의 까만 눈동자가 별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와 다른 인종을 처음 보는 것인지, 오메가를 처음 보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별하는 떨리는 숨을 찬찬히 불어냈다. 앞의 소년은 분명 알파였지만 지금은 이곳을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안, 녕……?”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소년이 눈을 깜빡거렸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도 억양과 높낮이로 상대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별하는 소년이 서 있는 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제 움직임을 뒤쫓는 까만 눈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문 어디에 있는지 알아? 문 말이야, 문. 이렇게 열리는 문 알지?”

    손으로 벽을 미는 시늉을 해 보이자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속해 벽을 밀어내는 별하의 행동을 이해했는지, 어쨌는지, 불길이 일렁이는 제 뒤편을 살핀 후 뜻밖에도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소년은 격자 안으로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더니 손톱이 새카만 검지로 별하의 턱을 콕 눌렀다.

    “……?”

    별하는 소년이 전하는 뜻을 이해해 보려 갖은 머리를 썼지만 짐작도 하지 못했다. 소년의 얼굴이 무표정해서 이게 어떤 의미를 내포한 행동인 건지 더 아리송했다. 턱을 다시 콕 찍어 누른 소년은 대뜸 별하의 티셔츠 옷깃을 쭉 잡아당겼다. 벌어진 안쪽을 빼꼼히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윽.”

    별하는 소리 나게 손을 짝 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소년이 양 입가를 끌어올려 이를 보이며 웃었다. 불길이 이는 근방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발소리도 내지 않고 재빠르게 달아나 버렸다.

    “비, 빌어먹을 새끼…….”

    적잖이 충격을 받은 그는 사색이 된 채 그늘로 숨어들어 갔다. 괴한들이 덮쳐들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망조였지만 직접 겪은 후의 감상은 또 달랐다.

    더군다나 앞으로 다가올 불운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운다운 불운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을 알기에, 별하는 더 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되짚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과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1퍼센트의 가능성들에 대해 필사적으로 궁리하고 고찰했다.

    어쩌면 지금쯤 그곳으로 돌아와 있을지도 모를 파비안을 떠올리며, 별하는 도무지 입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쓴맛을 간신히 목으로 삼켰다.

    시름에 하염없이 잠겨 있는 중에 날이 밝아 왔다. 머리 위를 뒤덮은 거대한 교목의 가지들 때문에 하늘이 바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이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만으로도 사위가 충분히 밝았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눈을 뜬 돼지는 꿀꿀거리며 코로 바닥을 들춰댔다.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던 바깥에서 인영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주위를 에워쌌다. 수십이나 되는 숫자였다.

    말 그대로 동물원의 동물이 된 별하는 잔뜩 웅크린 채 벽 너머를 주시했다. 밤에 본 소년과 비슷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은 그런 그를 들여다보며 저들끼리 알 수 없는 언어로 속닥거렸다. 때로는 웃기도 하며 생김새가 다른 이방인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젠장…….”

    당장 겪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별하의 낯빛은 점점 더 하얗게 실색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무기둥을 발로 차 부숴버리고 숲으로 내달리고 싶었다. 그런 의욕은 굴뚝이었지만 간밤처럼 먹을 뒤집어쓴 놈들이 또 쫓아와 해코지를 할까 봐 선뜻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때 밤새도록 장작불이 켜져 있던 안쪽에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일었다. 그러자 복작복작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몹시 구수한 음식냄새가 이곳까지 날아왔다. 장작불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데 어울려 웃고 떠들다가 흥에 뻗쳐 악기를 두드리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별하는 밤새 퀭하게 들어간 눈으로 밖을 살폈다.

    자신이 머무르는 돼지우리는 장작불이 켜진 광장에서 가장 먼 곳에 있었다. 광장 주변의 나무기둥 사이사이로 거적을 사용해 지은 듯한 움막이 여러 채 보였다. 눈에 보이는 이들의 대부분은 남자들이었고, 한둘 섞인 여자들 역시 아랫도리만 가리고 있었다.

    별하는 문득 알아챈 하나의 사실에 와들와들 떨었다.

    이곳에 있는 남녀는 거의가 알파였다. 언뜻 베타도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알파 소굴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이도, 어른도, 몇 없는 늙은이도 다 알파, 알파, 알파였다.

    028.

    이 정도로 번식하려면 분명 많은 오메가가 있어야 정상인데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더 별하를 질색하게 했다.

    그는 행복한 식사 시간을 갖는 이들을 건너다보며 이곳 오메가들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했다. 혹 가축우리처럼 외따로 격리시켜 놓은 건 아닐까? 그들에게만 밥을 주지 않고 노동을 강요한다든지? 설마 잡아먹었다거나……?

    공포영화를 방불케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식사를 마친 알파들이 나머지 음식을 들고 제 움막으로 속속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한 음식 같았다.

    그 누군가가 오메가임을 짐작한 별하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아무리 미개한 사회라 해도 오메가를 잡아먹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하아…….”

    이곳의 오메가들보다 훨씬 더 암담한 제 처지를 다시금 자각한 그는 머리칼을 헝클였다. 그러다 번득 생각했다. 그들이 다른 곳에 집중해 있는 지금이 도망칠 기회가 아닐까?

    얼른 밀림 쪽의 안벽을 더듬었다. 어설픈 악기소리와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나무벽 한가운데를 발로 힘껏 걷어찼다.

    퍽―

    예상보다 소음은 크지 않았지만 쉽게 부서질 줄 알았던 나무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견고했다.

    별하는 약간의 패닉 증상을 겪으며 제 주변을 맴도는 돼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입이 마르는 갈증에 입술을 자근거리는데, 누군가 이쪽으로 누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려 뒤쪽으로 멀찍이 물러났다.

    손에 뭔가를 들고 나타난 이는 젊은 여자였다. 맨가슴을 훤히 드러내고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일절 없는 그녀 또한 알파였다.

    빨간 염료로 눈가와 입가를 칠한 그녀는 격자 구멍을 통해 별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이를 내보이며 웃다가 가져온 것을 그대로 안으로 쏟아부었다.

    질퍽한 것들이 땅바닥에 쏟아지자 돼지가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꿀꿀꿀꿀― 여자는 제 할 일을 끝내고 미련 없이 돌아서서 가버렸다.

    “…….”

    별하는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과일 찌꺼기와 여러 가지 것들이 뒤섞인 음식물 쓰레기를 돼지는 천혜의 진미처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커다란 건더기도 그대로 삼켜버리며 정신없이 바닥을 핥아댔다.

    그 모양새를 아연히 지켜보던 별하는 근처 바닥에 떨어진 작은 고깃덩이 몇 개를 발견했다. 넋이 반쯤 나간 채로 그것을 멀거니 응시하는데 어쩐지 푹 삶아낸 쥐처럼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별하가 다가가자 돼지는 혹 빼앗길까 싶었는지 그것을 허겁지겁 먹어버렸다.

    비위가 상한 그는 고개를 홱 돌렸다. 바닥 청소를 하듯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돼지와 부딪치지 않으려 자리를 옮기다가 물컹한 뭔가를 꾹 밟았다. 발을 떼고 그것을 내려다보던 별하는 돌연 경악하며 밖으로 내던졌다.

    “으악!”

    던진 뒤에도 견딜 수 없다는 듯 손을 옷에 빡빡 문질러 닦았다. 발바닥도 급히 벽에 문지르며 감촉을 지우려 애를 썼다. 별하는 기어이 헛구역질을 했다.

    쥐라고 생각했던 고깃덩이는 사실 쥐가 아니었다. 가느다랗게 휘어진 뼈에 살덩이가 간당간당 붙은 그것은 손가락이었다. 사람의 손가락.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하고도 구역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풍겨 오는 냄새의 정체를 깨달은 지금, 구수한 음식냄새는 감쪽같이 증발하고 송장 썩은 내가 코를 뒤덮었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별하는 팔로 입을 눌러 막아 울걱울걱 올라오는 구역질을 견뎠다.

    “으읍…….”

    원주민들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도, 끝나지 않는 난타질소리도, 광장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음들이 소름 끼쳤다. 마치 인간의 피와 살을 취한 악마들이 성공적인 사냥을 자축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곳에 터를 이룬 원주민이자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었다.

    이방인 오메가에 대한 원주민들의 호기심도 슬슬 사그라질 무렵이었다. 돼지우리 구석에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있던 별하는 불시에 들이닥친 이들에게 잡혀 밖으로 끌려나갔다.

    “윽! 그, 안 돼! 하지, 그만!”

    저녁 만찬 재료가 되고 싶지 않아 온 힘으로 저항했지만 양쪽에서 팔을 붙들리자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펄떡이면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발끝이 바닥에 질질 끌리다시피 하며 곧장 광장으로 향했다.

    장작불이 이전보다 훨씬 크게 타오르는 광장은 거대한 나무 그늘 탓에 어두운 감이 있었다. 광장 주변에는 이미 많은 원주민 알파들이 모여 있었는데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들은 삼삼오오 둘러서서 속닥거리다 이방인 오메가가 옆을 지나가자 말을 맞춘 듯 침묵했다.

    별하는 두려움에 휩싸인 제 상태를 내비치지 않으려, 할 수 있는 대로 험악한 얼굴을 만들었지만 오한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전신이 와들와들 떨리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예상되는 일만큼 무시무시한 상황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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