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1부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친해 보이면 좋겠는데, 서로 스킨십 좀 해볼까? 그렇지, 그런 식으로! 아, 좋다. 표정, 표정… 더 상큼하게! 나는 과일이다! 나는 레몬이고, 나는 오렌지다!”
곧 데뷔를 앞둔 아이돌 그룹의 프로필 촬영 현장.
커다란 흰색 스크린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소년들이 포즈를 취하고, 카메라를 손에 든 포토그래퍼는 그들 주변을 맴돌며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른다.
스타일리스트 팀과 소속사의 임직원들, 포토그래퍼의 스태프들까지. 스크린 주변에 둘러서서 촬영을 지켜보는 사람들만 대략 열 명이 넘어 넓지 않은 스튜디오가 북적거렸다.
그중 단 두 명, 소속사의 대표인 임상진과 팀장급 매니저인 용재만이 멀찍이 떨어진 벽 쪽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쟤들 포즈나 표정 연습 안 시켰냐? 평소엔 자기들끼리 허구한 날 사진만 찍어대는 게 일이면서 멍석 깔아주니까 왜 저 모양이야?”
임 대표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스튜디오에서 이런 정식 촬영은 처음이잖아요. 긴장하는 게 당연하죠. 그래도 ‘티탄(TiTan)’ 데뷔 초하고 비교하면 쟤들은 프로 수준인데요?”
“뭐, 그거야 그렇다만…”
매니저의 말에 임 대표의 표정이 약간 풀어지긴 했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묻어났다.
긴 무명 시절 끝에 이제야 조금 잘 풀리는가 싶었던 ‘티탄’이 허무하게 해체된 후, ENA 엔터테인먼트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게 된 보이 그룹이었다. 그만큼 임 대표는 요즘 예민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상연이하고 준우 좀 보세요. 둘이 사이 안 좋은데도 카메라 앞에선들러붙잖아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래요, 쟤들. 누가 보면 사귀는 사이인 줄 알겠네.”
“이 바닥에 발 들일 놈들은 저 정도 근성은 있어야지. 패 죽이고 싶은 놈 앞에 두고도 천사처럼 웃을 자신 없는 놈들은 어차피 얼마 버티지도 못해.”
단호하게 얘기한 임 대표는 단단히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자재 박스 위에 올려두었던 커피를 집어 들었다. 커다란 덩치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이는 컵을 들고, 빨대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촬영 현장 쪽에 눈을 고정한 채 후련하다는 듯 말했다.
“저 정도 프로 의식이면 적어도 ‘티탄’ 애들 같은 꼴은 안 나겠네. 그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잠시 촬영이 중단되었다. 포토그래퍼가 카메라를 바꾸는 동안, 스타일리스트 팀은 멤버들의 매무새를 정비하느라 분주했다.
자재 박스 위에 다시 커피를 내려놓은 임 대표는 다시 팔짱을 꼈다. 그리고 무거운 비밀 얘기라도 하려는 듯이 매니저에게로 몸을 더 기울였다.
“용재야, 혜안이 말이다…”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지 뜸을 들이던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게… 참… 언제까지 저렇게 둬야 할지 모르겠다.”
“언제까지라니요.”
“그 자식, 가족도 없고… 4개월째 저렇게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데, 막말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깨어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그래도 숨이 붙어있는데… 어떡하겠습니까.”
“그렇지… 그것도 그렇지.”
자포자기의 한숨을 내쉰 임 대표는 멋쩍은 입맛을 다시다, 다시 컵을 쥐고 빨대를 입에 물었다.
처음 본 사람은 움찔 겁을 먹을 만큼 험상궂은 얼굴과 거구의 덩치가 주는 인상과 달리 그는 모진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불명으로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소속 연예인의 뒷바라지를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성인군자도 아니었다.
“혜안이 그놈 앞으로 된 돈이 얼마나 남았지?”
“이제 얼마 안 되긴 해요. 통장 잔고도 거의 빠지고… 목돈이라고 해봤자 오피스텔 보증금 정도겠네요.”
“그 집을 빼자. 매달 꼬박꼬박 몇백씩 나가는 월세라도 병원비로 돌려야지. 이젠 어쩔 도리가 없어.”
“그래도… 혹시 형 깨어나시면 난리 부리실 텐데.”
당장이라도 혜안이 일어나 쫓아올 것처럼, 용재는 두툼하고 넓은어깨를 움츠리며 임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병원비를 계속 내야 그 자식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든 말든 할 거아냐. 윤혜안 그놈 돈이 떨어질 때까지만 기다릴 거다. 마음이야 안 좋겠지만… 내가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언제 깨어날지 알 수도 없는 놈 병원비를 내면서 빚으로 달아놓을 수도 없잖냐. 오피스텔, 오늘이나 내일 바로 내놔.”
“네…”
가족이 없는 윤혜안이 무연고자로 확정될 경우, 병원의 윤리 위원회가 환자의 치료를 계속해 나갈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쉽게 말해,윤혜안의 목숨이 병원 측의 결정에 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임 대표는 일단 자신을 보호자로 등록하고, 그간 윤혜안의 통장에서 병원비를 지불해 왔었다. 하지만 본인의 돈을 병원비로 내면서까지 뒷바라지할 마음은 없었다. 임 대표에게 그것은 밑 빠진 독에물 붓기처럼 느껴졌다. 막말로 윤혜안이 다시 살아나 일을 해서 갚지않으면 회수할 수도 없게 되는 돈이었다.
오피스텔의 시세를 알아보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던 용재가 생각났다는 듯 임 대표를 돌아보았다.
“제가 좀 알아봤는데요… 의식 불명 상태에서 깨어나는 사람들이그래도 생각만큼 그렇게 적진 않은가 봐요.”
“그 성질머리 때문에 제일 고생했던 게 너인데. 넌 그래도 그놈이깨어났으면 좋겠냐?”
“힘들기야 했지만… 그래도 사람 목숨이니까요. 일단 사람은 살고봐야죠.”
“네가 그렇게 무르니까 혜안이 그놈이 너한텐 더 지랄이었지.”
“그래도 혹시 형이 깨어나면 다시 담당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나도 너 빼주고 싶었어, 인마. 근데 어떡하냐. 그 자식을 견딜 수있는 매니저가 회사에 너밖에 없는데. 다른 애들은 걔 밑에서 한 달도못 버티고 그만둬 버리니 방법이 있어야지.”
잠깐의 재정비가 끝나고 촬영이 막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포토그래퍼는 발랄했던 분위기를 바꾸어 록 계열의 강렬한 곡을 배경음악으로 골랐다. 이전보다 더 긴장이 풀렸는지, 멤버들의 포즈도 한결자연스러워지면서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한층 떠들썩해졌다.
“대표님.”
임 대표는 커피를 마시며 순조롭게 진행되는 촬영을 감시하듯 바라보았고, 용재는 그 옆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와… 이게 무슨… 대표님.”
용재가 다급하게 툭툭 치면서 부르는데도 임 대표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빨대 끝을 질겅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 왜․ 말을 해.”
“이서경이 태국에서 죽었대요.”
“뭐?”
그제야 임 대표의 시선이 용재에게로 향했다. 그는 용재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낚아챘다.
“뭔 소리야 그게.”
“몇 시간 전에 총 맞고 죽었다는데요?”
임 대표가 직접 확인한 속보는 용재의 말 그대로였다.
성폭력범죄의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성매매, 업무상 횡령 등의 무수한 혐의로 기소되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재벌 3세이자 녹스 호텔의 전무인 이서경이 피살되었다는 내용이었다.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그는 항소심 준비에 들어가기 전, 뇌물수수와 관련하여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수사에 협조하도록 명령받은상태였다.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로, 외신들도 앞다투어 떠들썩하게 보도했었다.
그런 이서경이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검찰청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총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이서경이면 한서 그룹 창업주 손자잖아요. 이런 대단한 사람도 죽긴 죽네요.”
용재는 충격을 받았는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임 대표는금세 흥미를 잃었다. 입맛을 다시며 핸드폰을 용재에게 건네주고는 커피를 찾아 다시 빨대를 물었다.
“가는 데 순서 있어? 돈 있고 권력 있다고 불사조는 아니지. 지들이불사조인 줄 알고 사는 놈들이 있긴 하지만.”
자재 박스에 비스듬히 기댄 임 대표는 아무래도 좋다는 투로 덧붙였다.
“지보다 더 나쁜 놈들이나 지만큼 나쁜 놈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