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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14화 (1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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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와 악마는 부르지 않아도 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탓에 하늘은 검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하얀 입김을 뱉으면서 신전 앞마당을 비질하던 알렌은 아직 어린 신문 배달부가 다가오자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신부가 아니라 부제(Deacon)이지만, 유리시아 교의 신도가 아닌 이상 무슨 차이인지도 잘 모르겠지.

솔직히 알렌도 블람 교의 장군과 수왕의 차이를 잘 모르니 말이다.

“그래. 고생이 많네.”

알렌은 그가 건네준 조간을 건성으로 읽어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크고 굵은 활자로 표기된 머리기사였다.

-11일 자정경 부두에서 밀레이와 카람이 대대적인 항쟁을 벌여 35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유리시아 신을 믿는 밀레이와 블람 신을 따르는 카람은 종교 및 일자리 부족 문제로 인하여 오랜 세월 갈등을 겪어 와…….

‘밀레이 놈들. 함부로 유리시아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게다가 부두라면 여기에서 30분 거리잖아?’

참 흉흉한 세상이라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알렌은 신문 배달부가 조간을 건넨 뒤에도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신전 입구를 힐끔거리고 있자,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데미안 신부님이라면 기도 중이실 거야.”

알렌이 나지막이 한마디 하자, 신문 배달부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더듬더듬 대꾸했다.

“네? 아, 그, 그러신가요?”

“그래. 새벽 일찍부터 신전 밖에 나와 계신 경우가 오히려 드물어.”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소년은 고개를 떨군 채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리더니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요새 데미안 신부님이 새벽 일찍 신전 밖으로 나가시지 않는다 싶더니 이 소년이 원인이었나 보다.

‘데미안 신부님도 참 죄가 많은 분이시라니까.’

진한 눈썹에 쌍꺼풀이 없는 시원스러운 눈매를 한 데미안은 단아하고 반듯한 인상이면서도 묘하게 도착적인 충동을 자극하는 남자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가 이 나라에서 그리 드문 것도 아니건만 정숙한 색감으로만 이뤄진 그의 겉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색정적으로 보였다.

가느다란 허리와 달리 사제복을 터질 듯하게 꽉 채운 가슴도 아마 그에 한몫하겠지.

‘사춘기 소년과 소녀에게 너무 유해하고 일반 남자와 여자에겐 지나치게 자극적인 분이시니.’

데미안은 신도들과 사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너무 쉽게 현혹되었기에 데미안 신부는 예배 시간이 아니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모습을 드러내는 그를 보기 위해 이 외진 신전을 열심히 들락거리는 이들은 여전히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그는 마치 인간을 유혹하는 마성의 악마와도 같았다.

‘아니, 신부님께 이런 표현을 하면 안 되겠지.’

알렌은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라고 미남이 되고 싶어서 미남인 것도 아닐 텐데.

“자네가 오늘 청소 담당인가 보군.”

신문 배달부가 자리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미안이 신전 밖으로 나왔다.

금욕적인 검은 사제복을 입고도 그 누구보다도 음심을 자극하는 죄 많은 남자가.

그는 부드러운 저음으로 알렌에게 말을 건네고는 곧바로 등을 돌려 선 채 우편함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알렌의 대답을 기대하고 말을 건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약간은 매정하게 느껴지는 태도였지만, 그게 알렌의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는 데 도움이 되진 않았다.

“아, 아, 네.”

알렌은 저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 같은 수상쩍은 반응을 하고 말았다.

조금 전에 신문 배달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신부님에게선 좋은 향기가 났었지…….’

알렌은 딱 한 번 그의 너른 품에 안겨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사고로 인한 것이었지만.

사다리에서 떨어질 뻔한 알렌을 두 팔로 잡아 준 데미안은 얼떨결에 품 안으로 들어오게 된 그를 보고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이내 알렌의 등을 커다란 손으로 쓱 밀어 주었다.

「조심해야지.」

잠깐 엿보게 된 그 인간적인 감정이 담긴 얼굴이, 살짝 흔들린 눈동자가 알렌의 가슴마저 흔들어 놓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엄청난 미남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성에게서 성욕을 느낀 것도, 같은 남자의 팔에 꽉 안기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 좋지 않아. 이런 생각은 빨리 떨쳐 버려야 하는데.’

신부나 신모가 결혼해서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데미안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알렌이 슬쩍 떠보듯이 결혼에 관한 생각을 물었을 때도 그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알렌을 바라보다가 그냥 자리를 떠나 버렸을 뿐이었다.

개인사를 그와 공유할 생각이 없다는 명백한 거절의 답변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알렌은 신전을 향해 걸어오는 젊은 남자를 발견하고 부지불식간에 인상을 찌푸렸다.

새벽부터 불청객이라니.

‘젠장. 저 새끼가 또 왔잖아?’

평범한 노동자처럼 흰 티셔츠에 검은 청바지를 입고도 부잣집 도련님 특유의 곱게 자란 태를 풀풀 풍기는 그는 이름조차 미카엘 홀리브링어(Holybringer)였다.

아마 그는 독실한 가문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겠지.

정중하고 부드러운 말씨를 사용하는 그에게선 양질의 교육을 받은 티가 났으니 말이다.

그는 데미안의 주위를 맴도는 여러 남자 중 하나로 알렌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어서 오게, 미카엘. 일찍도 왔군.”

“선생님의 일을 돕는 동안엔 여기에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데미안이 한 손을 내밀어 보이자, 미카엘이 두 손으로 들고 왔던 커다란 짐가방을 자연스레 그에게 떠넘겼다.

“전에 제가 쓰던 방을 또 빌릴 수 있을까요?”

알렌은 성하(聖下)조차 조심스럽게 대하는 데미안을 호텔 벨보이 취급하는 그에게 화가 났지만, 데미안은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물론 가능하네. 그런데 이 안에 든 건 뭔가? 꽤나 묵직하군.”

미카엘은 맑게 웃더니 데미안의 어깨를 유의미한 손길로 쓸었다.

정말이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개수작 같은 남자였다.

“고작 묵직이라니. 그거 750kg가 넘어요, 선생님.”

7백?

알렌은 무의식중에 미카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물장사를 하면 한탕 거하게 벌 듯한 화사한 얼굴을 한 그는 곱상한 얼굴과 달리 데미안 못지않게 훤칠한 키에 잔 근육이 진 탄탄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지만…….

보통 그 정도 무게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들 수 있나?

‘설마 저 사람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데미안은 사실 인간이 아니라 대천사이다.

그는 수백 년이 지나도 외모가 변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20, 30년에 한 번씩 다른 지부로 이동한다고 들었다.

그런 연유로 신전 관계자들은 그가 인간이 아니란 걸 알음알음으로 알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뒤늦게 알렌에게로 시선을 던진 미카엘이 짐짓 애매한 미소를 지은 채 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성함이 태아(Embryo)…… 뭐였던 것 같은데.”

“알렌 담브로시오입니다. 앰브리오가 아니라 담브로시오.”

“아하. 담…… 무슨 태아라고요?”

“담브로시오라네.”

데미안이 점잖게 말을 정정해 주자, 미카엘은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화려한 얼굴 위에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이름을 못 외우는 편이라서요.”

저 망할 개새끼가.

알렌을 엿 먹이기 위해 우습지도 않은 짓거리를 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데미안은 그의 말을 진실로 믿는 듯했다.

“알렌만 괜찮다면 이름으로 부르는 건 어떤가.”

“아아, 아니에요. 전 괜찮지만…….”

얇은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을 일그러뜨린 채 살짝 불편한 미소를 짓는 미카엘은 꼭 데미안더러 제 편을 들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저 질투에 미친 부제 새끼가 싫어할 것 같아요, 하고.

‘저 꼴보기 싫은 새끼.’

절로 이가 으득 악물렸다.

여태까지 데미안을 노리고 신전을 들락거리는 여자들은 정말 수도 없이 많았다.

남자라고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숫자가 적은 만큼 남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데미안의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다정한 신부님일지언정 무른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사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단호하게 관계를 끊어 냈다.

「이제 여기에 오지 말게. 자네의 신은 이곳에 없는 것 같으니 말이야.」

그것도 그가 동경해 마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은 채 말이다.

그러니 데미안이 유독 미카엘에게만 자신의 곁을 내주는 이유는 그가 동성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 객(Guest)이라는 말에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는 거겠지.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것까진 알렌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고.

저 새끼의 정체가 무엇이고, 데미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인지 따위는.

“알렌.”

근심스러운 얼굴로 미카엘과 알렌을 번갈아 바라보던 데미안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했다.

“자네가 양보해 주게.”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홀리브링어 씨.”

알렌이 마지못해 답했지만, 미카엘은 짧게 웃고는 바로 데미안을 향해 돌아서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널 부를 일은 없다는 투였다.

‘아, 저 개새…… 진정하자. 엮이면 내가 지는 거야.’

억지로 분노를 삭인 알렌은 도로 신전 앞을 빗자루로 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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