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부디 좋은 꿈 꾸기를
사람의 못된 행동은 불편한 경험에서 나온다.
호의를 이용당하면 마음이 비뚤어지고, 배신을 당하면 의심이 커진다.
선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힘든 일을 비교적 덜 겪었기 때문일 테다.
그것이 허웅석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이놈은 좀 이상하다고.’
허웅석은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잠든 태준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서 깨어나길 기다리는 중인데, 또 막상 눈 뜨고 저를 보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싶어 다 식어 빠진 커피만 후루룩 들이켰다.
“음.”
태준은 영 파악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주제에, 그의 인생사를 전부 뒤져도 이만큼 강렬하게 자신의 가치관에 반하는 놈은 처음이었다.
‘그게 싫으냐 하면….’
허웅석은 착잡하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당하고 산 게 많아 바득바득 의심했지만, 태준이 이놈은 참 사람 마음 쓰이게 했다.
착하면 안 되는 사람이 착한 것도 아주아주 큰 문제다.
‘좋지 않다고.’
잔뜩 꼬인 실타래 같은 시선이 태준의 손끝에 맺혔다.
얼핏 보기에 곧고 기다란 손이지만, 자잘한 흉터와 굳은살이 가득 박여 있었다.
‘엉망인 게 손만은 아니었지.’
씻기려고 옷을 벗겼다가 태준의 몸을 보고 얼마나 기함했던가.
그건 마치 예쁜 표지에 속아 열어 봤더니 섬뜩한 내용으로 가득 찬 잔혹 동화 같았다.
허웅석도 나름 여러 풍파를 겪으며 고생했다고 자부해왔는데, 태준의 앞에선 명함 내밀 군번이 아니었다.
“진짜 미쳐불겄다.”
생각은 뱀으로 사람을 조종하던 지채정을 향했다.
그놈이 대하는 것만 봐도, 태준이 그간 그 이상한 곳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분명 지독한 고문을 당한 걸 테다.
‘악마 같은 새끼들. 어린놈이 뭔 죄가 그렇게 있다고 몸을 이짝으로 만드냐.’
대체 태준에게 무슨 짓을 해 놓은 건지, 상급 성수를 부어도 가슴팍의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살벌한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그건 성속성 무기로 언데드 계열 괴물을 잡을 때나 나타나던 증상이었다.
산채로 사람을 말려 죽이려는 악의가 느껴졌다.
마왕님 어쩌고 한 걸 보면 이상한 종교에 심취한 놈들인 듯한데.
그 악마 같은 새끼들이 설마 태준을 산 제물로 삼았나 싶어 오싹하기까지 했다.
‘진짜, 하….’
허웅석은 마시다 만 커피잔을 협탁 위에 올린 채,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상상만으로도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당장 보이는 겉이 이런데, 속은 얼마나 엉망일까.
아들의 무덤에서 태준을 받아 냈을 때, 앞섶이 이놈이 토한 생피로 함빡 젖어 버렸다.
모진 고문 때문에 내장이 진탕돼서 물 한 모금 삼키기도 어려웠다는 뜻이다.
‘염병이네, 진짜.’
허웅석은 스스로의 머리를 깨고 싶었다.
버티는 것조차 괴로웠을 몸으로, 듣지 않아도 될 비난과 오욕을 삼킨 채.
그렇게 저들을 살려 보겠다고 애썼을 태준을 생각하니 고개를 들고 있을 면목이 없었다.
태준이 티를 내지 않았다고 해서 몰랐다는 변명이 먹힐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원래 숨기는 것을 잘하는데, 그걸 기만하게 살피고 눈치채지 못한 어른의 죄였다.
‘어이고, 이 순해 빠진 놈아. 탈출구도 알고 안내자도 찾았으면, 다시 돌아올 게 아니라 염병할 놈들 어디 한번 좆돼 봐라 하고 튀었어야지!’
태준은 충분히 혼자 도망칠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도 굳이 거울 결계로 돌아와서는, 모두를 내보내고 태준만 빠져나오질 못했다.
유일하게 뭔갈 알고 있는 듯 보이는 우윤혁이 입을 닫아 버려서 태준의 생사조차 알지 못했었는데.
이 꼬라지를 보니 전에도 무슨 일이 있었겠구나 싶었다.
‘설마…?’
순간 버렸다는 말에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게 굴던 문규빈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픈 태준을 미끼 삼았거나, 저들 혼자 살겠다고 내버려 둔 채 도망 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식은땀이 밴 손바닥 거죽이 쩝쩝 들러붙었다.
이제는 우윤혁과 문규빈이 하수구에 들어간 목적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쩐지. 이놈 혼자 미공개 던전을 돌아다니는 것도 이상했다고.’
던전에서 혼자 생존할 만큼 대단한 헌터라기엔 허웅석의 레이더망에 걸린 게 없었다.
그렇다고 그저 그런 저등급 헌터였다면 던전에서 살아남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면 다른 곳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설마 던전에 가둬 두고 착취했다거나…?’
몹시 소름 끼치는 가정이지만, 제법 그럴싸했다.
‘실은 저놈아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샘플을 수거하러 온 거였다면? 빼앗기면 안 되는 뭔가를 이놈이 갖고 있었다면?’
갑자기 고등급 헌터들이 미공개 던전을 자처해서 진입한 이유가 퍼즐 조각처럼 맞아 들었다.
「태준 헌터는 의미 없는 정보로 장난칠 사람이 아니고, 결코 해되는 방향으로 안내하지도 않을 겁니다.」
우윤혁이 했던 말이다.
놈은 이상할 정도로 태준의 정보를 신뢰했다.
그건 태준이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확신한 거다.
태준이 착해서? 솔직해서? 친해서?
‘아니야.’
우윤혁의 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납득 할 수 없는 어떤 경험이 느껴졌다.
더욱이 태준은 분명 귀환 놈들을 꺼리는 기색인데도, 두 놈은 이상하게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상냥하게 굴었다.
그러면 태준은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은근슬쩍 녀석들에게 유하게 굴고는 했다.
태준의 착해빠진 성품을 이용하는 솜씨가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 것이,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세뇌당한 게 아니라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스킬에 당한 걸 수도 있어.’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거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와, 이런 개자식들을 봤나!’
최근 잦아진 재난으로 인근 병원이 휩쓸려 가 버려서, 서울까지 올라가려면 반파된 고속도로를 뚫고 몇 시간을 달려야 했기 때문에 우윤혁에게 연락하려고 했다.
협회 부회장이 된 놈이 입김을 넣어 주면, 태준도 빠르게 검사와 치료를 받고, 자신도 보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구 미친놈아. 넌 대구빡이 그렇게 안 돌아가냐!’
애초에 우윤혁이 협회 부회장 자리에 오른 것도 하수구 던전을 다녀온 뒤였는데, 왜 의심해 보질 못했을까.
‘이놈을 팔아서 한 몫 챙긴 놈한테 등 떠밀면 죽으라는 것밖에 더 돼!?’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뻔했다고 생각하니 뒷골이 뻣뻣해졌다.
‘이건 아니야. 새로운 신분이 필요해.’
허웅석은 태준이 던전에서 빠져나온 것을 감출 작정이었다.
그리고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작정이었다.
그것만이 저를 구한 태준을 지킬 방법이었다.
‘아저씨가 뭐든 해 줄 테니까….’
그러니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부디 좋은 꿈 꾸기를.
허웅석은 태준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머리칼을 걷어 내며, 평안한 숙면을 기원했다.
딩동-
그때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가 울리며 산통을 깼다.
퉁퉁퉁.
벨을 누르고 몇 초나 기다렸다고 그러는지, 곧장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상황이 너무 절묘해서 허웅석은 바짝 굳었다.
“어이-! 허 씨! 없어? 없으면 말 좀 해 봐.”
이 무슨 출석 체크 중에 없는 사람만 손 들라는 것처럼 말이 안 되는 소린지.
행여 태준이 깰세라, 허웅석은 허둥지둥 거실로 달려 나갔다.
빗장쇠를 걸어둔 채 현관문을 열자 전 길드원 이 씨가 문틈 새로 고개를 빼꼼 드러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어째 신수가 누렇다?”
“쉿!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그렇게 떠들어?”
“몇 시긴 몇 시야. 정오지.”
허웅석의 눈이 재빠르게 거실에 걸린 시계를 향했다.
완벽히 정오를 가리키는 시침을 보자 괜히 할 말이 없어져 허웅석은 되려 뻔뻔하게 이 씨를 타박했다.
“크흠, 큼. 애들 밥 먹고 낮잠 잘 시간이잖아. 자다 깨면 아파트가 떠나가라 운다고. 알아?”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 아, 그보다 문 열어봐. 들어가게.”
이 씨가 문짝 새로 신발코를 밀어 넣자, 허웅석은 그 발을 문밖으로 도로 밀어 냈다.
“그냥 거기서 말해.”
“아니, 바쁜 사람 부려 먹고 커피도 한잔 안 주게? 이 사람 이거, 못 본 새 수전노가 다 됐어?”
“커피는 무슨 커피. 방금 다 마셔서 없어.”
“그럼 술 줘.”
“대낮부터 무슨 술이야? 나중에 전화해.”
‘받을 일은 없겠지만.’
“아, 술 줘! 집에 궤짝으로 숨겨 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못 들었어? 나중이라고, 나중!”
“아니, 우리가 언제 술 마실 때 시간 따져가며 마셨남?”
“이젠 따지게 됐으니까, 문 앞에 부탁했던 거나 두고 가.”
“흐으음…?”
이 씨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팔을 휘휘 내젓는 허웅석을 살폈다.
어쩐지 평소답지 않게 급히 구는 것이, 꼭 집에 꿀단지를 모셔 놓은 모양새가 아닌가.
“뭐야. 집에 애인이라도 숨겨 놨어? 설마 새장가 드나?”
“애인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하긴. 슬슬 좋은 사람 만날 때도 됐지. 그간 고생 많았잖아. 날은 잡았고? 아니면 속도위반? 그래서 애 우는 거 걱정하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꽹과리까지 치는 모습에 허웅석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가라.”
“정색하는 거 보니 맞나 보네?”
“가라고.”
“아니면 문이나 퍼뜩 열어 봐. 오늘 기필코 수돗물이라도 한잔 얻어 마시고 갈라니까.”
허웅석과 이 씨는 상대가 보증 서 달라고 오면 정신 차리라고 뒤통수를 후릴 수 있을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하지만 친한 것과 집에 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이 씨의 조동아리가 민들레 씨보다 더 가벼웠기 때문이다.
‘저놈 하는 말에 휩쓸리면 다 털린다.’
이 씨의 눈이 짓궂게 반짝이는 걸 본 허웅석은 여기서 이야기가 더 길어지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몰라. 문 닫는다.”
그 까닭에 이 씨가 무어라 하기도 전, 문을 잽싸게 닫았다.
그러자 눈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이 씨가 현관문을 다시 쿵쿵 두드렸다.
“허웅석이. 나는 오늘 일을 두고두고 기억할 거야. 두고 보라고. 엄청나게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아, 악당 대사 치지 말고 썩 꺼지라니까!?”
“흐흐. 두고 봐.”
문 앞에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터벅터벅 발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문을 슬쩍 열어 살피자 시끄러운 인기척이 사라졌고, 쇼핑백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허웅석은 동전을 삼키는 저금통 인형처럼 재빠르게 쇼핑백을 수거해서는 문을 퉁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