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좆같은 나의 주인님 뜻대로
“폐하께서 어찌…!”
휴고는 당혹스러워하며 하스칼의 발치에 고개를 조아렸다.
영원한 밤과 지옥의 군주가 직접 나타날 줄은 예상치 못했던 까닭이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고작 인간 노예 따위를 위해 마왕이 친히 걸음 하다니.
어떤 해명이든 뱉어야 했다.
이 모든 건 악마대공의 수작이고, 자신은 그 계획을 아주 약간 거들었을 뿐이라고 밝혀야 했다.
그것이 자존심을 모두 내버리고 비참한 꼴로 빌어먹는 꼴이더라도 사죄가 마왕의 귀에 닿아야 했다.
하지만 하스칼은 휴고의 부름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금빛 눈동자는 그저 태준과 그 근처에 허물어져 있는 헌터들을 차례로 훑을 뿐이었다.
“허억, 헉.”
“크, 헉!”
시선이 닿는 것뿐인데도 나약한 인간 검사는 뇌가 부스러져 모래알이 되는 기분이었다.
불온한 마력이 정순한 마나를 잡아먹고, 미약한 인간 마법사의 심장에 박혀 드는 것 같았다.
온몸이 벌레에 물린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 정신 나갈 것 같은 감각에 헌터들은 머리를 움켜쥐며 헐떡거렸다.
“위험한 산책을 즐겼네.”
하스칼은 점차 마력이 잠잠해지며 머리칼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태준의 뺨을 쓸어 냈다.
“그새 상처가 늘었고.”
뱀에 물려 바닥을 구르느라 언제 생채기가 났는지도 모르게 엉망이었다.
“내 경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거겠지.”
그의 손가락이 상처를 문지르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태준의 눈동자 위로 이지가 반짝 떠올랐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하스칼을 모두 품고서야 어눌해진 입술을 열었다.
“…하스, 카…?”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태준을 보자 하스칼의 동공이 날카롭게 조여들었다.
쿠웅!
동시에 주춤주춤 도망을 시도하던 휴고의 몸이 바닥으로 까라졌다.
“아아아!”
쿵. 쿵.
무형의 힘이 강철보다 단단한 악마의 몸을 으스러뜨리듯 짓눌렀다.
“폐, 폐하! 살려! 살려주…!”
그러더니 그의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아주 천천히 발목을 타고 번져 갔다.
균열에 잠식된 신체가 조금씩 먼지처럼 부스러졌다.
몸이 작은 알갱이로 분해되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휴고는 몸부림쳤다.
“…!”
하지만 거대한 힘에 공간이 일그러지자, 소리를 내는 파장이 뒤틀리며 그의 비명이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
단순히 죽는 게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소멸되고 있었다.
그가 남았던 기록이, 데이터가, 일궈온 모든 것이 분자 단위로 쪼개져 나갔다.
휴고는 자신의 고통을 공감받지 못한 채 고독 속에서 온몸이 다 사라질 때까지 몸부림쳤다.
탐욕에 비해서 너무 허무한 소멸이었다.
“분명, 멋대로 다치면 네가 가장 아끼는 것들을 부숴 버리겠다고 했는데.”
한껏 조용해지자, 힘 있는 하스칼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헌터들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위압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경배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다르다.
새롭게 나타난 저 남자는 조금 전 뱀을 부리던 그 변태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한 번씩 펄떡이는 심장 너머로 불길한 직감이 온몸을 잠식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 버러지 같은 것들을 모두 죽여 없애면 간단하겠지만. 그러면 이 눈이 또다시 깨져 나갈 테지.”
하스칼의 손가락이 태준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눈가 근처를 뭉근하게 문지르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냥 보내주기엔 내 노여움이 가시질 않는데.”
하스칼은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태준의 눈가를 쓸어 올리던 손을 뻗었다.
그러자 태준의 눈앞으로 작고 검붉은 소용돌이가 나타나 파직파직 소리를 내며 몰아쳤다.
그 소용돌이 너머로 하스칼이 손을 집어넣자, 나르카스가 뽑혀 나왔다.
그러나, 강기를 머금으면 우윳빛으로 빛날 만큼 하얗던 검신은 새카맣게 그을려 검붉은 마력을 넘실넘실 내보이고 있었다.
검신 주변으로 불길해 보이는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네가 아끼던 검을 조금 손봤거든.”
하스칼은 모든 빛을 삼켜 버릴 정도로 검게 변한 나르카스를 태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자 나르카스가 우웅 하고 진동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주려고 했는데. 쓰임새가 따로 있었네.”
하스칼이 사납게 웃자 헌터들이 각혈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악마의 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저 존재하고 말하고 웃는 것만으로도 지구 제일의 헌터들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나는 상벌은 확실하게 따지는 왕이기에 잘못을 인정하고 마땅한 벌을 받으면 상을 주도록 하지.”
하스칼이 태준의 팔을 쥐고 쓰러져 있는 헌터들을 향해 검 끝을 겨누게 했다.
“네 손으로 인간을 한 명 찔러. 그러면 남은 인간들은 지구로 돌려보내 줄 테니.”
“!!”
태준은 흠칫 놀라 몸을 웅크렸지만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하스칼의 가슴팍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랄…, 마…!”
“잘 생각해야 할 거야. 선택하지 않으면, 여기 있는 날벌레는 모두 죽어.”
태준의 손에 핏줄이 설 만큼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토록 한 몸처럼 아끼던 애검을 떨쳐 내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하스칼은 당장 검을 떨쳐 내고 싶어서 바르르 떠는 태준의 손아귀를 쥐었다.
가벼운 힘이었는데도, 손에 접착제가 발린 것처럼 태준은 나르카스를 내버릴 수가 없었다.
“왜 이래….”
몸속 마력이 혈관을 타고 돌자 어느덧 휴고의 뱀이 밀어 넣었던 독액이 모두 증발했다.
그 까닭에 태준은 조금 더 매끄러워진 혀로 하스칼에게 애원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경고를 무시하고 다쳐서 그래? 아니면 하찮은 인간들이 지옥을 더럽힌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 딱 이번 한 번만 눈감아줘.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할 테니까!”
“직접 고르는 것이 어려우면, 내가 선택을 도와줄까?”
하스칼의 시선이 우윤혁에게 닿았다.
“저놈은 어때. 아까부터 눈이 마음에 안 들어.”
“제발…!”
“아니면, 저 마법사도 괜찮겠네. 역한 마력 냄새가 불쾌할 정도야.”
“잘못,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 보려던 태준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머리를 마구 도리질 쳤다.
그러고는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하스칼의 팔에 매달렸다.
“다시는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하자는 대로도 다 할 테니까…! 내가 이름! 이름도 알려줬잖아!”
하스칼이 꼼짝하질 않자, 태준은 버둥대며 그의 다리며 허벅지 따위를 마구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스칼은 그런 태준을 진정시키려는 듯, 배를 두 번 두드려주며 말을 이었다.
“가장 애를 먹이던 저 늙은 놈은 어때. 더 빨리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 복에 겨운 놈이니.”
“하스칼…….”
“시간 끌려는 수작도 소용없어. 빨리 고르지 않으면 네가 찌르지 않아도 짓눌려 터져 버릴 테니.”
평온한 어투에 꼼짝없이 버티는 몸.
태준은 제가 아무리 잘못을 빌고 애원해도, 하스칼이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지키려던 사람들을. 내 손으로 찌르라고.’
아무리 하스칼이 이성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는 악마였다.
악마들의 선봉장에 서서 지구를 멸망시키는, 인류의 최대 적.
태준은 갑자기 찬물 세례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그제야 오닉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왕님이 너무 오냐오냐해준다던, 호의를 베풀면 권리인 줄 안다던 듣던 당시에는 억울하기만 했던 바로 그 말.
이것이 호의란 말인가.
누군가의 목숨을 선택할 수 있는 칼자루를 태준의 손에 쥐게 하고 직접 베어 내 운명을 끊게 하는 것이, 정말로.
“하.”
갑자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역시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태준의 상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볼 수 없는 괴이한 선택지였다.
이것이 악마다.
이런 자를 어쩌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이나마 생각했던 스스로가 어리석었다.
쩌정.
태준은 제 가슴이 산산이 조각나 사방으로 비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 한 명이면 된다고.”
방금까지 감정이 넘쳐흘렀던 목소리가 건조하게 메말랐다.
태준은 하스칼의 가슴팍에 등을 기댄 채 헌터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 또한 버석버석 건조해진 눈빛이었다.
한참 말없이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태준은, 고개를 들어 올려 하스칼의 뺨에 손을 얹었다.
무언가를 속삭이려는지 거슬거슬한 입술이 움찔거렸다.
“…?”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하스칼의 금빛 눈동자 너머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태준이 모처럼 귀여운 짓을 하고 있었다.
하스칼은 무얼 하려나 싶어 순순히 고개를 숙여주었다.
그런 마왕의 입술 위로 태준의 입술이 닿았다.
아니, 닿는 직후 물어뜯겼다.
태준은 하스칼의 입술을 문 채, 타락해 버린 나르카스를 높게 치켜들었다가 손잡이를 휘리릭 돌려 잡고 그대로 내리찍었다.
푹!
아주 가볍고 경쾌한 일검.
그 내지름에 살가죽이 거칠게 튿어졌다.
날카로운 검날이 태준의 가슴팍을 꿰뚫고, 등 뒤로 튀어나와 하스칼의 몸체에 닿았다.
‘역시나.’
고작 이런 검으론 악마들의 왕의 몸엔 작은 구멍조차 내지 못했지만 인간들의 용사는 만족했다.
“좆같은 나의 주인님 뜻대로.”
입술이 떨어져 나가며 건조한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리고.
“서- 태준!”
허물어지는 태준을 받아 낸 하스칼의 노호가 지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울림이 끔찍하게 비참하고, 저열하게 짜릿했다.
마침내 태준은.
자신을 이루는 무언가가 파열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