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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내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58)화 (58/80)

58. 심연의 주인이 자신의 것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헌터들이 뒤늦게나마 반응했다.

뱀들이 어떻게 날아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우윤혁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뱀을 청염의 기운이 스민 검으로 쳐 냈다.

그때마다 쩌정,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검으로 무수히 많은 뱀들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수가 워낙 많았던 탓에 몇몇 녀석들은 검날을 타고 스르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검에 붙은 뱀을 털어 내고 다시 휘두르고를 반복하느라 우윤혁은 다른 헌터들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다.

“윽!”

문규빈 역시 다급하게 쉴드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후드티 안쪽으로 파고든 뱀에게 어깨를 물리며 주문이 흐트러졌다.

“미친…!”

어떻게든 주문을 이어 보려 했지만,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굳어 버렸다.

이내 독액이 이두근을 타고 손목을 지나, 손끝까지 마비시켰다.

텅그렁.

이내 온몸이 마비되자, 문규빈은 손에서 스태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머지 헌터들도 여기저기 뱀들을 매달기 시작하더니 점차 움직임이 둔해지다가 오래지 않아 대부분 전투 불능 상태가 되고 말았다.

‘뱀이, 아티팩트를 모두 뚫고 들어온다고?’

우윤혁은 한 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심히 당황하고 말았다.

고작해야 뱀인데.

그의 검으로 베어지지도, 떨어져 나가지도 않았다.

청염의 기운으로도 터지지 않았고, 쳐 내면 또 날아오고, 밟으면 어떻게든 다시 기어올랐다.

그렇게 모든 헌터가 쓰러질 때까지, 우윤혁은 버티고 버텼다.

하지만 그 역시 시간문제였다.

결국 뱀의 독니가 S급 헌터의 살갗을 깨물었다.

“큭…!”

즉효성 마비독이 번지며 우윤혁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는 어떻게든 검은 놓치지 않으려고 바닥에 꽂은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인간 주제에 제법 잘 버텨 냈군요. 좋은 연구 소재들이네요.”

휴고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태준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고개가 들린 태준이 입술을 바르르 떨며 휴고를 강하게 노려봤다.

하지만 휴고는 태준의 표정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그의 아랫배를 꾹 눌렀다.

슬라임이 단박에 펄떡이며 튀어 올랐다.

그 감촉에 휴고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뱃가죽을 어루만졌다.

“당장 배를 갈라 확인하고 싶지만 약간 더 무르익어야겠네요. 마왕님께 조금 더 어여쁨을 받아야겠어요.”

“…으, 아.”

태준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입술까지 마비됐는지 발음이 어눌하게 새기 시작했다.

턱에 타액이 흐르자, 휴고 백작이 장갑 끝으로 곱게 닦아내 주었다.

“그보다 동료들은 알고 있나요? 당신이 어떤 처지인지.”

“…….”

“그런 중요한 걸 감추니까, 동료들이 오해하고 화를 내는 게 아니겠어요? 이참에 낱낱이 모든 걸 밝히는 게 어때요.”

휴고의 손이 태준의 목티 밑자락을 잡고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자잘한 흉터가 가득한 복근이 헌터들 앞에 훤히 드러났다.

“이 배 속에 무엇을 품었는지. 악마들에게 어떻게 사랑받았는지. 모든 걸 토하고 함께하자고 말해 보세요.”

“…….”

“저라면 뇌가 푹 무르익게 행복한 쾌락을 선사해줄 수 있답니다.”

“…….”

“싫은가요?”

휴고는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태준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고집쟁이로군요.”

휴고가 손뼉을 치자, 쓰러져 있던 헌터들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통제를 잃은 제 신체의 움직임에 헌터들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검은 뱀이 독니를 박은 채 그들의 몸에 휘감겨 있었다.

“그러면 제가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밖에요. 자, 여러분의 욕망들을 거리낌 없이 표현해 보세요.”

한울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태준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허웅석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흐느적대는 태준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고, 질 수 없다는 듯 그 아래 문규빈이 태준의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배에 얼굴을 묻었다.

우윤혁 역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태준의 양 뺨을 잡았다.

“왜들 머뭇거리고 있죠? 마왕님의 애완동물은 튼튼해서 쉬이 죽지 않는답니다.”

휴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윤혁 상체가 굽혀졌다.

그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행동을 거부하려 했지만, 이내 끼기긱 고개마저 꺾이더니 태준의 이마 위로 입술을 맞췄다.

“……!”

“…….”

태준과 우윤혁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이 스쳐 갔다.

“호오…?”

그 모습에 휴고는 흥미롭다는 듯,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문규빈 역시, 태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배에 어리광을 피우듯 얼굴을 문질러 댔다.

복근과 옆구리에 촉촉 키스를 남기고 달큰한 향을 한껏 들이켜는 표정이 몽롱하게 무너져 내렸다.

한울은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게 고작 여러분의 욕망이라고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휴고가 다시 박수를 치자 허웅석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높게 치켜들었다.

“그래요! 그렇게요!”

퉁!

휴고의 재촉이 끝나기 무섭게 허웅석이 태준의 머리통에 꿀밤을 날렸다.

“!?”

“!?”

“!!”

때린 사람이나, 맞은 사람이나, 곁에서 구경하던 사람까지.

모두 갑작스러운 꿀밤에 놀란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놀란 건 휴고였다.

허웅석이라면 최소한 단검이라도 꺼내 태준을 찌를 줄 알았던 탓이다.

혹시 단검을 마비 증상 때문에 떨어뜨렸나 했지만 그의 검은 엉덩이춤에 제대로 잘 매여 있었다.

‘정말로?’

휴고는 이 상황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헌터들의 오해와 감정은 점점 무르익으며 마지막 클라이맥스까지 제대로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

만약 문규빈이 울며불며 상황을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휴고는 원하던 엔딩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실패했을 때는 상심이 컸는데 오히려 재미난 결말을 본인이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해야 꿀밤이었다.

‘농담이지?’

휴고는 다시금 눈을 깜빡이며 허웅석을 바라봤지만, 그는 주저하는 손으로 제가 때린 태준의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었다.

“흐….”

허웅석은 처음엔 자신의 행동을 어이없어하다가도 나중에는 반쯤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태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흡사 커다란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과연 저 행동이, 가장 불만이 많고 화가 났던 사람의 모습이 맞는 걸까.

휴고는 제가 너무 오래도록 인간계에 나가지 않아서 그들의 폭력성이 크게 달라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휴고는 자신의 계획이 완벽했다고 생각했다.

휴고는 헌터들이 지옥에 오자마자 지채정의 몸을 탈취했다.

그러고는 분위기가 좋아지려고 하면 직접 나서서 불안한 기류가 흐르도록 태준을 자꾸 물어뜯었다.

때마침 그들은 불온한 마기가 감도는 결계 안으로 향했고, 거울 결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약한 인간들의 이성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침착함과 인내심이 차츰 무너지며 작은 일에도 짜증과 분노가 화르르 불타올랐다.

불씨가 꺼지려고 하면 태준이 휴고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중요한 정보를 숨기며 스스로 의심받았다.

그렇게 모든 톱니가 알맞게 맞물렸다.

마침내 허웅석이 분노를 표출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알던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대상자를 향해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욕망을 자극시켜 줬더니, 고작 한다는 게 끌어안고 이마에 뽀뽀하고 머리통에 꿀밤을 먹이는 거라니.’

“아하하하! 참 무서운 욕망이네요.”

결국 휴고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인간들은 어쩜 이렇게 개체마다 반응들이 다른지.’

휴고는 꿈틀거리며 튀어나온 불만족을 애써 웃음으로 내리누른 채, 싸늘한 미소를 비틀어 올렸다.

미지의 것을 보고 나니 새로운 연구 욕구가 샘솟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좋아요.”

휴고가 다시 손뼉을 치자, 우윤혁이 허웅석의 허리춤에 매어 놓은 단검을 꺼내 쥐었다.

“결말을 다시 바꾸도록 하죠.”

그러더니 우윤혁은, 그것을 태준의 배에 얼굴을 뭉개고 있던 문규빈의 손에 쥐여주었다.

누군가는 무기를 제공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옮겨주었으며.

누군가는 그것을 쥐고.

누군가는 방관한다.

이로써 모두가 공범이 되었다.

“죽고 싶다고 했으니 그 강렬한 소망을 이뤄주도록 해요.”

휴고가 문규빈의 손을 쥐고 태준의 목 한가운데를 향해 검 끝을 겨누게 했다.

“으, 아!”

문규빈은 어떻게든 그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떨어 댔지만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는 그의 팔은 무언가에 묶인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 가진 강렬한 감정이라는 건, 단순한 욕정이나 원한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요.”

자신들이 태준을 죽이려고 공격하는 상황이라니.

마치 거울 속 환상을 직접 체험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했다.

“예를 들면-”

“흐으, 아…. 아, 안”

문규빈의 눈가로 채 닦아 내지 못한 눈물이 고여 흘렀다.

애써 물어뜯은 입술이 터져 나가며 미간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그 표정을 황홀하게 쳐다보던 휴고가 입술을 열었다.

“살의.”

단순한 단어가 잔혹한 입술에 맺히고.

그 순간 문규빈의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푹!

날카로운 검에 살갗이 꿰이는 소리가 났다.

그 끔찍한 소리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우윤혁의 눈에는 핏발이 서서 흉흉했고, 문규빈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진 채 오열하고 있었다.

“……기회를 주었는데도. 어떻게 이럴 수가!”

그 모습을 보던 휴고의 목소리에 서서히 분노가 스며들었다.

“흐으, 흐….”

다행이다.

다행이야!

문규빈의 검이 태준의 목을 찌르기 직전, 잠시 경직했고 그 순간 우윤혁이 손을 움직여 손등을 내주었다.

이때만큼은 둘의 마음이 맞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자꾸 저를 이렇게 실망하게 할 건가요?”

헌터들이 안심하는 기색을 보이자, 도리어 휴고는 거세게 화를 내며 발을 쾅쾅 굴렀다.

그러더니 우윤혁의 손등을 꿴 단검을 거칠게 뽑아냈다.

그대로 크게 들어 올려 태준을 찌르려는 차.

쿠릉쿠릉.

거대한 공동이 울리며, 무시무시한 마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마력은 태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느덧 표정 없이 깨끗하게 비어 있는 태준의 눈동자 너머로, 금빛 기류가 사납게 휘몰아쳤다.

“이, 기운은…!”

그 굉장한 압박감에 휴고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태준의 곁을 둘러싸고 있던 헌터들에게 독니를 박아 넣었던 뱀들이 투둑투둑 떨어져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거대한 돌풍이 몰아치며 흉포한 기류에 얼음벽들이 쩌적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짓눌릴 것 같은 그 거대한 힘 가운데에 힘없이 주저앉은 태준의 가슴 위로 유려한 손이 감겨들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의 것에 손을 댔구나, 휴고.”

심연의 주인이 자신의 것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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