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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153화 (153/154)
  • #153

    권재진이 무릎에 놓인 주먹을 그러쥐었다. 서의우와 그의 앞에 향긋한 찻잔이 아직 식지 않고 뜨거웠다.

    “자네들은 젊고 나는 늙었지. 가끔은 눈이 침침할 때도 있고 귀가 먹먹할 때도 있다네. 꺼져 가는 불꽃 신세지.”

    최 대장이 뜨거운 차를 후루룩 마셨다. ‘입이 쓰구먼.’ 하고 중얼거린 뒤 입가를 쓱 닦았다.

    꺼져가는 불꽃 신세라고 했지만 그는 아직 꺼질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죽염이라고 했던가. 쥐어짜면 쓸모가 있다. 다른 장성은 몰라도 적어도 최 대장만큼은 그런 존재였다.

    “그럼 넋두리는 다 했으니 본론으로 들어갈까. 내가 자네들과 새로운 협상을 할까 한다만. 나와 한배를 타겠나?”

    최율 대장이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푸른 홀로그램이 아닌 민낯으로 보니 한세월 더 해 먹을 것처럼 정정해 보이는 늙은이였다.

    서의우와 권재진이 힐긋 서로를 쳐다보았고,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최 대장에게 답했다.

    “저희 조건은 까다롭습니다.”

    “젊은 친구가 그새 정치를 배워 왔군. 그래, 퍽이나 그렇겠지.”

    “특수 거주지구와 일반 거주지구의 왕래. 가능하십니까?”

    “지금도 일반 거주지구로 특임부대를 파견하고 있으니 왕래가 없다곤 할 수 없네만.”

    “임무 외의 사적 방문을 말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휴가라거나.”

    “오호라. 자네 가족들을 만나러 휴가라도 떠날 생각인가 보지? 뭐, 공적에 따라 포상 휴가를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는 추진해 볼 수 있을 것 같네만 지금은 시기상조지.”

    “조만간 돌연변이 출신 각성자들도 등용할 것 아닙니까. 그들이 특수 거주지구의 일원이 되면 어차피 섞이게 됩니다.”

    “소수가 유입되는 것과는 다르지 않나. 각성자들은 아직 바깥세상을 알기엔 좀……. 그보다 교육이 먼저지. 조급해 말게.”

    권재진과 서의우가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의우가 입술 끝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스윽 저었다. 권재진이 한숨을 내쉬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저희는 공식 절차와 허가 없이도 좌표 이동으로 언제든 다녀올 수 있습니다. 센터 측 협조는 필수사항도 아닙니다.”

    “하여간 자네들 협박 실력은. 쯧. 부탁이니 내 머리는 헤집지 말아 주게.”

    “아무쪼록 서둘러 주십시오. 지금도 서의우 대위가 제6 거주지구에 가고 싶다고 성화입니다.”

    “거 알겠네, 알겠어. 방안을 짜내 볼 테니 늙은이 너무 괴롭히지 말게나.”

    최 대장이 혀를 끌끌 찼다.

    서의우와 권재진은 이미 손꼽히는 유명 인사가 되어 버려서 일반 거주지구에 가더라도 곧바로 눈에 띌 것이다. 얼굴을 죄다 가리지 않는 한 바로 제보가 들어올 것이다.

    “재진 씨, 그만 가요. 할 말은 끝났잖아요.”

    “아니, 차는? 입도 안 대고 가는가? 겨우내 숨어 있다가 봄에 튼, 작고 여린 잎으로만 만든 작설일세. 참새 혀를 닮았다 해서 작설(雀舌)이지.”

    “아, 예…… 됐습니다. 거기 뭐가 섞였을지 모르잖습니까.”

    최 대장이 ‘이 친구가?’ 하는 눈으로 서의우와 권재진을 보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일어나 좌표 이동했다.

    “그럼 또.”

    넓은 개인실이 확 밝아지고 충만한 이능이 퍼졌다.

    1회차 서의우와 2회차 서의우의 이능이 한 몸에 담기고, 더불어 완전한 가이딩까지 받은 서의우는 예전의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에스퍼가 되어 있었다.

    사특함이라곤 당연히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고, 오랜 고질병이었던 서의우의 뿌리 깊은 불균형 세 가지도 완치된 상황이었다.

    첫 번째는 불면이고, 두 번째는 불식, 세 번째는 불안.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안심하지 못한다.

    자신의 폭주를 극도로 경계하도록 설계된 불안을 태생부터 등에 짊어지고 살아왔던 서의우지만, 더는 염려할 이유 없게 되었다.

    그의 이능은 정순했고 앞으로는 늘 그럴 것이었다.

    ***

    “아니 난 공식적으론 장기 휴가 중인데 이게 뭐예요. 요 며칠은 센터만 줄기차게 드나드는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모든 일은 후처리가 가장 중요한 법입니다. 마무리가 엉성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니까.”

    “재진 씨…… 그건 타고난 거예요?”

    “예?”

    권재진이 서의우를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욕실에 들어가 손을 씻던 참이었다.

    “성격.”

    서의우가 느른하게 뒤따라 들어와 권재진의 뒤에서 섰다. 재진의 허리를 감싸듯 팔을 뻗어 같은 세면대에 손을 씻었다.

    “어릴 때도 그랬나. 어린이 권재진 궁금해요.”

    손등을 타고 거품이 몽글몽글 일었다. 서의우는 자신의 손뿐 아니라 재진의 손까지 꼼꼼히 씻겨 주고는 수도를 잠갔다. 권재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너 그렇게 자꾸 보채지 말라니까…….”

    “그래도요. 난 마음이 급한 걸 어떡해.”

    “우선 서의우 씨부터 적응하고. 그다음에. 예?”

    “나 적응 다 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뭘.”

    서의우가 재진의 귓가에 부드러운 입술을 파묻었다. 귓바퀴에 다정하게 키스하곤 내친김에 허리까지 끌어안았다. 젖은 손의 물기가 재진이 걸친 옷을 가볍게 적셨다.

    “서의우…….”

    “진짜예요. 나 정말 괜찮은데. 그냥 4년간의 기억하고 이능이 생긴 것뿐이잖아요.”

    서의우가 권재진을 꽉 끌어안고 달라붙었다. 속살거리는 목소리 탓에 귀가 근질거렸다. 나른하게 젖은 목소리가 관능적이었다.

    “난 본래도 재진 씨가 지난 4년 동안 뭘 했는지 알고 싶어 안달 냈었고, 재진 씨 기억까지 읽어 내려고 집착했었으니까요. 오히려 속 시원히 우리 과거사를 다 알게 되어 좋아요.”

    서의우가 슬그머니 재진의 셔츠 안쪽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비누 냄새가 풍기는 촉촉한 손바닥이 허리께를 쓸었다.

    “보다시피 내 기억은 괜찮다고요. 그러니 재진 씨 기억 돌려주고 싶다니까요.”

    재진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더 안정되면 합시다.”

    “왜요.”

    “서의우 씨한테 모르던 기억이 생긴 와중에 저까지 유년기 기억이 돌아와 버리면 두 사람 다 정신이 뒤죽박죽일 것 아닙니까. 한 명씩 텀을 두고 적응해야 맞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제야 재진 씨에게 빼앗은 걸 돌려줄 수 있게 되었는데. 또 기다려야 한다니…….”

    기억뿐 아니라 이능력까지 합쳐지고, 거기에 안정된 가이딩을 제공받은 서의우는 당장이라도 권재진의 뿌리 뽑힌 기억을 돌려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정신계 이능이 복잡하고, 그중에서도 기억을 복원하는 건 치명적으로 위험하다지만 지금의 서의우라면 해낼 수 있었다.

    “글쎄 안 된다니까.”

    권재진이 계속 졸라 대는 서의우를 뜯어말렸다.

    아니, 언제는 가족이고 기억이고, 권재진의 인생 몽땅 다 넘기라더니만. 전부 갖고 싶다고 난동 부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돌려주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조심스러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재진 씨가 그렇다면 알았어요.”

    서의우가 재진의 셔츠 속에 찔러 놓은 손을 슬슬 움직였다. 손가락 끝으로 복근 사이를 간질이다가 가슴을 잡아 쥐었다.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지내겠네요.”

    “읏.”

    “어떡할래요. 침대로 갈래요?”

    거울 속의 서의우가 짙게 미소 지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귓가에서 부딪히던 입술이 눈가로 다가왔다.

    권재진이 눈꺼풀을 들었다. 서의우가 눈가에 입술을 찍으며 혀를 내었다. 시큰하고 뻑뻑한 감촉이 들더니 눈알이 쓸렸다. 쪽쪽거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었다. 오금이 저릿하다.

    “재진 씨…….”

    왜 이걸로 세우는 건데.

    둔부에 묵직한 게 닿았다. 서의우가 밀착하자 두꺼운 기둥이 엉덩잇살에 비벼 눌렸다. 권재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면서 서의우의 입술을 찾았다.

    “마음대로 해.”

    고개를 들어 가볍게 키스하자 서의우가 갈급히 달라붙었다.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물다가 혀를 내밀어 얽었다. 입천장의 오돌토돌한 부분을 집요히 핥아 대니 재진이 목을 조금 움찔거렸다.

    “으…….”

    “하하, 아…… 좋다.”

    “…….”

    재진이 습관적으로 말을 삼켰다. 대꾸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드는 깨달음에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여 말했다.

    “……나……도.”

    표현하는 게 왜 이리 낯선지.

    “입천장…… 그거 좋…….”

    재진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표현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어렵다. 그런데 서의우는 고작 입천장이란 단어만으로도 좆을 무섭도록 바짝 세웠다. 이미 반쯤 발기해 있던 중심이 완전히 힘을 받아 재진의 엉덩이를 찔렀다.

    권재진의 눈동자가 어설프게 방황했다. 까만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자 서의우가 황홀하게 입술을 휘었다. 강렬한 눈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서의우는 각별함으로 형상을 빚고 애정으로 색을 덧칠해 탄생한 존재 같았다. 손을 들어 태양볕을 가릴 수 없듯이 서의우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생물이었다.

    “입천장, 이거?”

    서의우가 권재진을 세면대에 밀어 놓고 다시 입을 맞췄다. 혀끝으로 입 안 점막을 진득하게 훑어 주니 목울대가 깔딱거렸다. 재진이 끅, 하고 숨을 삼키며 고개를 뒤로 뺐다. 서의우는 권재진이 도망칠 수 없도록 뒤통수를 붙잡고 머리를 바짝 당겼다.

    “흐, 으……!”

    혀를 느릿하게 굴리며 반복해 자극해 주니 정신이 없었다. 서의우가 입술을 떼어 주고는 풀린 눈으로 권재진을 지그시 보았다.

    “또?”

    서의우가 물었고, 재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서의우는 픽 웃으며 입술을 겹쳤다.

    “이번엔 내가 하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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