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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130화 (130/154)
  • #130

    그의 주위로 이능이 얼기설기 피어올랐다.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고, 빗방울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앞서 대규모 전투에서 크리처들을 향해 막대한 이능을 쏟았기에, 새어 나오는 힘이 평소보다 불균형으로 뒤틀려 있었다. 사특하고 흉악한 이능이 위협적이었고, 그런 동시에 절박하고 애틋해 보였다.

    권재진이 막막한 헛숨을 들이켰다.

    “……가두고 싶다고?”

    폭발하는 화산처럼 쏟아져 나온 딜레마가 뚜렷했다. 서의우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것 같았다.

    <난 우리 둘이 좋아요. 완전히 우리 둘만인 게 좋다고요…….>

    <우린 처음부터 둘뿐이었잖아요. 언제나 단둘이었어. 그럼 재진 씨가 나만 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가 이상한 거야……?>

    “우리 둘만, 세상에 둘뿐인 것처럼 지내고 싶다는 겁니까……?”

    “네, 네, 그래요. 그거예요……. 제발.”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재진이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혓바닥이 간질거렸다. 무슨 말을 내뱉으려다 멈추고, 또 내뱉으려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망설였다.

    고뇌한 끝에, 재진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이 이 꼴인데 어떻게 둘뿐인 것처럼 지내지……?”

    “……뭐라고요?”

    “크리처 웨이브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적어도 α크리처가 게이트 속에서 기어 나올 때까지는 전투가 이어질 겁니다.”

    “…….”

    “전선에 나선 각성자들은 무참히 죽을 테고,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에스퍼는 폭주하고, 가이드는 구멍 찢겨가며 점막 가이딩 해야 합니다. 지금 순간에도…….”

    “…….”

    “이따위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뻔히 아는데, 우리 둘이 아무리 좋아 죽는다고 해도 서로만 쳐다보고 있을 순 없잖습니까……? 사실, 그래…… 눈알이니 발톱이니 뭐니 서의우 씨가 바라는 대로 내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권재진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차마 서의우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시선을 틀자마자 서의우가 재진의 턱을 잡아 붙들고 다시 자신을 보게끔 끌어당겼다.

    “솔직히? 말해요. 솔직히 뭔데요.”

    얼굴을 거머쥔 손아귀 힘이 강했다. 권재진을 손안에 넣어 버리고 싶은 욕망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 머리통을 단단히 붙들고선 놓아 주질 않았다.

    권재진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내어 대꾸했다.

    “……저는 역시,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다.”

    서의우보다 변혁을 우선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서의우와 함께하고 싶다는 뜻이다.

    “바뀌고, 달라진 세상에서 우리 둘이 지내면…… 그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여기, 이 끔찍한 곳 말고.”

    “그래서요……? 계속 말해요. 아직 할 말이 남았잖아요.”

    사방에서 섬찟한 진동이 느껴졌다.

    서의우가 뿜어내는 이능이 금세라도 터질 것처럼 난폭하고 위험했다.

    “……가이딩을.”

    “네.”

    “가이딩을, 하아, 그래…… 진짜 본심을 내뱉자면,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아직 있습니다.”

    콰지직!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파열음이 일어나며 지하 벙커의 두꺼운 강철 벽과 강철 바닥이 파손되었다. 짐승 발톱에 찢긴 것처럼 깊은 균열이 사방에 일어났다.

    서의우가 거친 날숨을 뱉으며 어깨를 떨었다. 그의 눈썹은 분노와 충격으로 흉포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하얗던 낯빛도 어둑하게 죽어 있었다.

    “재진, 재진 씨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요?”

    권재진이 끼어들 새도 없이 서의우가 속사포로 외쳐 댔다.

    “내가 가둬 놓고 싶다고 말해서 그래요? 재진 씨에게 심한 짓을 하고 싶다고 해서 싫었나요? 또…… 또 상처 낼까 봐, 아플까 봐 무서웠어요? 내가 잘못한 건가요?”

    “아니, 잠깐만…….”

    “분명 안 된다고 말했잖아요! 에스퍼는, 가이딩, 그 씨발 새끼들 안 된다고! 손끝도 스칠 생각 말라고!”

    서의우가 권재진의 목을 조를 듯이 팔을 뻗었다. 커다란 손으로 목덜미를 그러쥐다가, 차마 힘을 주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시퍼렇게 뒤집혀 있었고, 일그러진 입술은 절규하는 듯했다.

    난폭한 아우성이 소리 없이 귀청을 울렸다.

    권재진은 날것의 감정 그대로 덤벼드는 서의우를 붙들었다가, 밀어 냈다가, 결국은 있는 그대로 받아 주면서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헐떡이는 호흡에 뒤섞여, 미어지는 목소리가 억눌려 나왔다.

    “손을, 잡는 것뿐입니다. 서의우 너랑은 달라…….”

    권재진이 어깨를 옹송그리고 등허리를 조금 떨었다.

    표정이 얼핏 흐트러졌다. 눈썹이 차츰 아래로 처졌고, 눈가에 조금씩 붉은 몽우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서의우 너는……. 넌, 다르다고.”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데요! 에스퍼는 다 똑같아. 하나같이 추잡하고 저열한…….”

    “아니, 그것만이 전부가 아닌 줄 알잖습니까. 우리는 그 이상인데.”

    권재진이 잠시 숨을 골랐다. 대화만 주고받을 뿐인데 숨이 찼다. 서로의 영혼끼리 맞부딪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서의우 씨는 제가 마태오를…… 그 사람에게 가이딩 당하고 왔을 때, 제가 싫어졌습니까?”

    “무슨, 뭐?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럼 아까는? 헷갈린다며. 저를 가둬 놓고 싶고 심한 짓 하고 싶다며. 이젠 저랑 연애하기 질렸습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잖아……. 우린 그러기로 했잖아. 변함없이. 굳건하게.”

    “하지만…….”

    “손 내준다고 달라지는 거 없습니다. 물론, 에스퍼들의 타고난 본능이 거슬리는 점은 백번 이해합니다. 저도 싫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잖습니까. 너랑 나랑은…… 다르잖아.”

    제대로 된 인생을 살기로 했다.

    숱한 시체를 발밑에 깔고 제대로 연애할 수 없듯, 피비린내 나는 세상을 외면하고서는 제대로 살 수 없었다. 서글프게도 권재진은 그런 인간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도망치기를 택했다면 모를까, 이미 권재진은 맞서는 길을 걷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죽어 나가는 각성자들, 무기로 쓰이다 폭주하는 에스퍼들, 도구처럼 착취당하는 가이드들. 이 지저분한 세상을 뒤엎기 위한 가장 유효한 카드는 진작부터 권재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에스퍼의 이능을 증폭하는 가이딩.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세상이 뒤집힌다.>

    <앞으로 돌연변이는 죽지 않을 것이고, 가이딩은 인도적인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고, 원한다면 어느 거주지역이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바뀔 겁니다.>

    <점막 접촉 아닌 피부 접촉. 손을 잠깐 잡는 정도라면 가이딩 해 볼 의향 있습니다.>

    S급 돌연변이 가이드.

    각성자 취급도 받지 못하던 밑바닥 변종이 전례 없는 능력으로 반란하는 것. 그보다 더 완벽한 혁명이 존재할까?

    “……그럼 나는 어떡해요.”

    서의우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에 붙들린 권재진의 목줄기가 조금씩 조였다.

    “난 재진 씨 손 닿는 새끼들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하는데…….”

    “읏…….”

    “재진 씨를 가둬 놓고 싶어서 지금도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의우야…….”

    “나……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무너졌어요. 재진 씨가 좋아하는데 자꾸만 모순된 충동만 들어요. 내가, 내가 괴물이 되어 버린 것 같다고요……!”

    “아…….”

    “혹시 내가 각성자라서, 일반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요……? 난 태어날 때부터 재진 씨랑은 연애할 수 없는 부류였던 걸지도 몰라요……. 나, 난…… 실격이에요. 애인 자격도 없어.”

    온갖 모순이 그를 뒤덮고 있었다. 권재진에게 애원하며 입 맞추고 싶은 동시에, 목을 조르고 싶은 포악한 충동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서의우가 권재진의 목을 쥔 채 잡아끌었다. 마른 입술이 포개어졌고, 벌어진 잇새로 성마르게 혀가 난폭하게 파고들었다. 혀끝끼리 맞닿자마자 절절한 열기가 느껴졌다.

    달려드는 그의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끓어오르는 격정에 내맡긴 채, 권재진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애인 실격은커녕, 서의우는 이제야 연애의 진면모에 다가서고 있었다.

    일반 거주지구에서 자라난 성인이라면 당연한 상식으로 알고 있을 연인 간의 질투나 독점욕 따위가 서의우에겐 낯선 미지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치정은 연인과의 관계에 필수로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고비였다.

    “그럼 서의우 너는, 윽, 연애가 마냥 좋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어……?”

    권재진이 두 눈을 내리깔고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그러게, 흐으, 악질적인 게 있다고 말했을 텐데…….”

    <상대를 존중하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게…… 그게 연애입니다.>

    <……사랑이요? 사랑니 할 때 그?>

    <예, 그런 게 있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악질적인 게.>

    “사랑하면…… 다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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