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128화 (128/154)
  • #128

    ‘아직은 원망할 때가 아니라고 했지. 그건 멀었다고.’

    <아직 날 원망할 때가 아니에요. 그건 멀었어요.>

    ‘나중이라며. 다 지나고 나중이라며…… 지금이 그 나중 아닙니까?’

    <다 지나고, 나중에…….>

    ‘수많던 크리처 떼, 다 죽였습니다.’

    ‘…….’

    ‘크리처 웨이브 막아 냈습니다. 이걸 기다렸던 게 아닙니까?’

    ‘…….’

    ‘그래서 꿈에 크리처 군단을 불러오고, 소총 사격이나 고글이나 실전에 익숙해지게 훈련시킨 것 아니냐고…….’

    1회차 서의우가 무슨 생각인지, 그가 대체 무슨 방법으로 권재진의 무의식을 파고들어 꿈에 나타나는 건지, 그리고 그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더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아야만 할 때였다.

    ‘말해. 뭡니까?’

    권재진이 수척한 얼굴을 들었다. 피곤한 눈두덩이는 해쓱하지만, 속에 박힌 검은 눈동자는 또렷하고 영명했다.

    흔들림 없는 시선 또한 여전했다.

    고개를 서서히 뒤돌려 그 눈으로 서의우를 직시했지만, 24살의 서의우는 응답이 없었다.

    더는 앳되지 않은 그의 미려한 얼굴이 무정했다. 잿빛 눈동자는 뜻을 알 수 없도록 어두컴컴했다.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죽은 사신의 눈 같았다. 냉랭하고 오싹했다.

    ‘……아니, 아직’

    서의우가 권재진을 놓았다. 허리를 단단히 구속하던 팔뚝이 풀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끝나기는커녕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뭐……?’

    ‘잠자코 기다려요. 내가 나중이라고 말했잖아요.’

    서의우가 입술을 올려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은 밀랍으로 빚은 것처럼 완벽했고,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했다. 꼭 생명체가 아닌 무기물 같았다.

    웃고 있는데도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뭘……. 무엇을 기다리라는 겁니까.’

    ‘그때가 되면 바로 알게 될 거예요. 참혹할 테니.’

    ‘…….’

    ‘아…… 그렇지, 크리처 웨이브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저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나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전투에서 α크리처가 보였던가요?’

    잠깐, 설마……?

    불현듯, 불길한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크리처 웨이브. 일정 주기로 광포화한 마물이 날뛰는 현상입니다.>

    <흔히 아는 β크리처뿐 아니라 게이트 내부에만 서식하는 오리지널 α크리처까지 밖으로 쏟아져 나와 인간을 습격하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분명, β크리처밖에…….

    어쩐지, 너무 이르다 싶었더니.

    오늘 벌어졌던 전투는 진정한 크리처 웨이브 아니었다.

    포문을 여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요. 좀 더 기다려야 해요.’

    ‘…….’

    ‘와, 흥미롭네요. 항상 기다리라는 말을 듣는 건 나였는데, 내 쪽에서 재진 씨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하니까……. 새롭다. 그쵸?’

    그의 기다란 눈이 곱게 휘어졌다. 짙은 눈동자 속에 번뜩임이 보였다.

    깊은 안쪽에 웅크린 위화감이 보였다. 교묘히 감추고 있지만, 아득한 눈동자 깊은 곳에서 처절한 절규나 비명 따위가 들리는 듯했다.

    ‘재진 씨가 날 기다리는 건 처음이지 않나요. 우리도 처음 하는 게 있네요.’

    ‘…….’

    ‘안달 내도 좋아요. 내가 늘 그랬던 것처럼…….’

    번들거리며 희게 빛나는 눈빛은 권재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매몰된 집착의 응집체였다.

    ‘하하.’

    ***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

    곧바로 깨어나려 했지만, 마음처럼 눈이 떠지지 않았다. 피로하기도 했고, 늘어져 누워 있는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

    <끝나기는커녕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잠자코 기다려요. 내가 나중이라고 말했잖아요.>

    ‘이제 와서 단순히 개꿈을 꾸는 것뿐이라고 치부하고 넘겨 버릴 수도 없고…….’

    그래, 백번 양보해서 초반에는 정말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몇 번쯤인가 1회차 서의우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그때는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꿈이 작위적으로 변해 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1회차 서의우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권재진의 정신을 파고드는 1회차 서의우가 점차 강해지는 기분이다.

    마치 회귀한 권재진에게 주어진 새로운 시간선에 기생하여 성장하는 것처럼…….

    ‘대체 뭘 기다리라는 거고, 뭘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크리처 웨이브? 아니라면 다른……?

    ‘뭐가 됐든, 대체 왜 명확한 속내를 밝히지 않는 것일까.’

    당장 권재진이 알아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숨겨야 하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서의우 저 새끼 속을, 어떻게 알겠냐고…….’

    권재진이 2회차 서의우와 제대로 된 삶을 살고자 고군분투하고, 또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에 살며시 잊고 있었지만, 본디 서의우는 당해 낼 수 없는 치밀한 개새끼였다.

    권재진의 유년기 기억을 모조리 지우고도, 정신계 이능의 존재를 감쪽같이 숨겼을 정도로 용의주도한 미친놈이다. 그게 바로 1회차 서의우였다.

    1회차 서의우와 지낼 때, 한 번이라도 권재진의 생각대로 흘러갔던 적이 있긴 했던가?

    지금 기억하기론 없었다.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었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었고,

    미워하려 해도 미워할 수 없었다.

    하물며 모든 일이 끝난 지금조차, 1회차 서의우를 과거의 연인으로 정리하고 매듭지은 지금조차도, 권재진은 그를 잊지 못한 상태였다.

    본래는 2회차 서의우와 새 인생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1회차 서의우를 망각의 저편으로 떠나보내려 했다. 비통한 애증으로 점철되었던 과거는 서서히 잊고 새로이 인생의 2막을 시작해 보려 했다.

    그러나 1회차 서의우는 그조차 권재진의 뜻대로 흘러가게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게끔…….’

    이 개새끼…….

    서의우 개새끼…….

    전해지지 않을 무의미한 욕을 해 봐도 가라앉은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속 시원하게 욕설을 지껄일 수도 없었다. 1회차 서의우가 그 등에 권재진의 죽음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지가 잘린 시신을 앞에 두고, 서의우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떤 말을 내뱉었을지…….

    어떤 표정이었을지…….

    그리고, 어떤…….

    어떤 심정이었을지…….

    지금 당장 서의우의 목적이 뭔지, 꿈에 나타난 방법은 뭔지, 기다리라는 이유는 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문제투성이지만, 저런 것들은 뻔히 답을 알 수 있었다. 권재진이 감히 짐작해 보기도 두려울 정도로.

    생각해 보면 가슴 언저리가 뜨끈해졌다. 울컥한 불덩이가 목구멍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머릿속이 울렁거리고 눈이 시큰거릴 정도로 아렸다.

    ‘……후, 됐다. 그만 일어나야지.’

    지친 숨을 삼킨 재진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눈앞에 서의우가 바로 보였다. 앳된 얼굴의 스무 살 서의우다.

    그의 희고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피부도 메말랐다.

    그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의식을 되찾는 권재진을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질척하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가 권재진이 눈 뜨는 모습을 한 순간 한 순간 집요히 살피는 중이었다.

    권재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투명한 동공에 무지갯빛 이채가 번뜩였다.

    “……으.”

    곧장 의우야, 하고 부르려 했는데 목이 말랐다.

    모래를 삼킨 것처럼 입 안 전체가 퍼석했다. 인상을 찡그리는 권재진을 보고서 서의우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갈비뼈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세게 껴안고 짓눌렀다.

    “큭!”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걱정, 걱정했잖아요.”

    두 사람의 몸이 뒤얽혔다. 빗물에 젖은 전투복이 버스럭거렸고, 떨어진 총기나 고글 따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서의우가 미친 개새끼처럼 권재진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고 당겨서 깨어난 모습을 거듭 확인했다. 눈을 뜨고 있는지 한 번 보고, 입술에 키스하고 또 눈을 마주치고 키스하고 그랬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 많이도 놀랐나 보다.

    좌표 이동 마치고 나니 권재진이 의식을 잃고 있어서 걱정했겠지.

    “살살 해……. 정신 사납습니다…….”

    권재진이 서의우의 어깨를 힘없이 밀었다. 근육통이 심했다. 손 감각이 둔하게 느껴졌다.

    “재진 씨는, 재진 씬 대체 왜 이렇게 약해요? 틈만 나면 픽픽 쓰러지고.”

    “아니, 언제 틈만 나면 그랬다고…….”

    “그럼 안 그랬어요? 픽픽 그랬잖아. 이 픽픽이.”

    픽픽이는 또 뭔…….

    당혹한 권재진이 눈썹을 찌푸렸다. 곧은 눈썹이 삐죽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냥, 좌표 이동이 좀 어지러웠나 봅니다.”

    권재진은 전장에 나가 크리처와 싸웠고, 한계까지 심력을 소모했고, 에스퍼가 폭주하는 충격적인 참사까지 목격했다.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상태로 좌표 이동까지 했으니 잠깐 의식을 잃은 것뿐이다. 실제로 금방 깨어난 것 같고.

    타당한 이유를 들어 항변했지만, 서의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좀 어지러워? 그래서 이런 얼굴이에요?”

    “얼굴이 왜…….”

    “곧 숨넘어가게 생겼는데……. 동공 확장됐고, 입술은 떨리고 있어요. 심장도 엄청 빠르게 뛰네요.”

    “자세히도 보네…….”

    “그럼 내가 재진 씨를 자세히 보지 달리 뭘 보겠어요?”

    서의우가 아까보다는 조금 줄어든 기세로 엉겨 붙었다. 관자놀이에 입술을 비비고 목선을 따라서 쭉 입 맞춰 내려갔다.

    무거운 체중에 눌린 채, 맹렬하게 달라붙는 서의우를 감당하고 있으려니 조금씩 안심되었다. 당황스러웠던 정신도 평정을 되찾고, 경직되어 굳어 있던 몸뚱이도 차츰 나른해졌다.

    서의우가 곁에 있고, 두 사람 다 무사하다.

    당장은 이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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