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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127화 (127/154)
  • #127

    정신이 살짝 흐려졌다. 아찔하더니, 긴장이 풀려 몸에서 힘이 빠졌다. 서의우가 권재진을 세게 움키고 부축했다.

    그런데 그때, 외경계벽 위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비켜, 물러서십시오! 박 중위가 불안정합니다!”

    외경계벽에도 숱한 시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살아남은 각성자들이 힐링 팩터로 치료하고 있었다.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그 위치에서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폭주 위험도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건 찰나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별안간 특임부대원 한 명에게서 무형의 이능이 솟구쳤다.

    쭈뼛 소름이 돋으며 저도 모르게 해당 특임부대원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박 중위라 불린 그는 겉보기에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눈에 띄는 외상이 보이지도 않았고, 팔다리도 바른 위치에 잘 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권재진은 그가 찢어졌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물을 담은 봉지가 찢어져 액체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그의 이능이 핵을 조금씩 찢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출하는 힘이 어둡고 끈적했다.

    불길하고, 사특하고, 흉흉했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서의우의 심연에 갈무리된 이능. 가이딩을 받지 못해 불균형이 심해진 상태의 불안정한 이능. 바로 그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과도하게 이능력을 남발했고, 하필 가이딩 대체 약물까지 제때 사용하지 못했던 건지, 저 불운한 에스퍼는 불균형에 잡아먹힌 제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폭주.

    저건 폭주 상태였다.

    “끄흐, 끅! 크하아악!”

    박 중위가 고통스러워하며 마귀처럼 울부짖었다. 그의 가슴에 박힌 핵이 쩌적 갈라지면서 폭주가 시작되었다.

    그가 한평생 다뤄 왔을 수족이자, 자랑스러운 우군이었을 이능력이 지금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주인을 침식하고 먹어 들어갔다.

    폭주한 에스퍼의 말로가 어떤지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건 더 이상 에스퍼가 아니었다.

    마물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지를 잃고, 능력이 제어되지 않으며, 한계까지 이능력을 사방팔방 뿜어내다가 종국에는 찢어진 핵이 완전히 폭발하며 터진다. 핵폭탄처럼. 주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면서.

    그리고 당연하게도, 폭주한 에스퍼를 살릴 방법은 없었다.

    피해가 커지기 전에 사살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힐링 팩터로 부상을 치료하던 특임부대원들이 다급히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박 중위의 폭주가 먼저였다. 생명력을 끌어 쓰는 끔찍한 이능 덩어리가 줄기줄기 터져 나왔다. 그에 휩쓸린 특임부대원들이 시신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대부분 밀려 쓰러졌지만, 버티고 있는 자가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마태오 소령, 아니 강등당했다던 마태오 대위가 보호막을 펼치고서 폭주한 박 중위에게로 다가갔다.

    박 중위의 얼굴을 따라 검은 기운이 얼룩지고 있었다. 제어하지 못한 이능이 그를 까맣게 뒤덮고 집어삼켰다.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모습이었다.

    쓰러졌던 특임부대원들이 정신을 차리고 후방에서 총을 쏘며 엄호했고, 마태오 대위는 보호막을 전개한 채로 폭주한 에스퍼의 핵 가까이 접근했다.

    다행히도 폭주 직후다.

    지금 이 에스퍼의 핵을 깨부숴 버리면 피해를 멈출 수 있었다.

    마태오가 허벅지에 찬 권총을 집었다.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박 중위의 심장에 겨누었다.

    발포음이 연달아 들렸다.

    이성을 잃은 박 중위가 마태오 대위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박 중위의 등급이 낮았던 모양인지, 아니라면 마태오의 이능이 정말 대단히 향상된 건지, 둥근 보호막은 깨지지 않았다.

    저걸 달걀껍데기처럼 으스러뜨려 버린 서의우가 대단한 거였구나, 긴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들 즈음 박 중위의 핵에 마태오가 쏜 총알이 들이박혔다.

    깊게 명중해 구체를 박살 냈다.

    그리고 핵이 깨져 버린 에스퍼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했던 이능이 흙먼지처럼 바스러져 버리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쓰러졌다.

    검은 시체만 남았다.

    불균형한 이능으로 검게 얼룩덜룩해진 시체.

    목과 얼굴 절반이 까맣게 물들어 있고, 나머지는 본래의 모습으로 박 중위가 죽었다. 폭주가 심화하기 전에 사망했기에 그나마 저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헉.”

    멈췄던 숨이 겨우 토해졌다.

    그제야, 권재진은 자신이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서의우가 권재진을 붙들고 좌표 이동을 사용했다. 시야가 빙글빙글 뒤집히고 몸이 어디론가 쑥 딸려 들어갔다. 어지럼증을 느끼며 권재진이 서의우를 껴안았다. 이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

    우주 한복판이었다.

    눈부신 은하수, 화려한 토성 아래. 권재진 혼자다.

    매일같이 몰려오던 크리처 군단도 없고, 24살의 성숙한 서의우도 없었다.

    그저 고요했다.

    ‘하.’

    재진이 힘겨운 숨을 삼켰다.

    다 끝난 걸까.

    이제는 정말…… 다 끝이 난 걸까?

    손을 뻗어 얼굴에 쓴 고글을 벗었다. 땀으로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두 눈을 차근히 내리감았다.

    당장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서의우가 보고 싶었다.

    이 꿈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곧바로 서의우를 끌어안고 뒹굴 것이다. 침대에 누워서, 아니면 나란히 욕조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의우와 함께 숨만 쉬고 싶었다.

    그의 체온, 그의 숨결, 그의 모든 게 필요했다.

    특유의 회색 눈동자를 응시하고 싶었다. 흰자와 경계가 뚜렷한 그 반지르르한 눈을 보고서 안심하고 싶었다.

    참으로 휴식이 간절했다.

    ‘재진 씨.’

    그러나 뒤쪽에서 느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권재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번 한 번만, 딱 하루만, 넘어가고 싶었다.

    꿈에서 마주하는 24살의 성숙한 서의우, 1회차 서의우의 낌새가 수상쩍은 건 명백하다만 그냥 오늘만이라도 모른 체하고 싶었다.

    그를 붙들고 추궁하거나, 들쑤시거나, 파헤치는 짓을 하기에 권재진은 꽤 지쳐 있었다. 얼굴도 창백했고, 피곤했다.

    ‘재진 씨…….’

    24살 서의우가 등 뒤까지 바로 다가왔다. 낮게 떨어지는 집요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뒤이어 허리께에 그의 손길이 닿았다.

    권재진이 퍼뜩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굵은 팔뚝이 권재진의 몸을 낚아채고서 단단히 끌어안았다. 등에 밀착하는 존재감이 대단했다.

    묵직하고 맹렬했다.

    ‘치워. 놔.’

    권재진이 서의우의 팔을 끌어내며 긁었다. 서의우는 떨어질 생각도 않고 귓바퀴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조금만요.’

    ‘싫습니다. 놓으라고.’

    ‘그냥 있어요. 나도 아직 이러고 싶지 않아.’

    ‘뭐?’

    ‘근데 재진 씨가 고글 써 줬잖아요. 그거 기뻐서. 그래서…….’

    ‘…….’

    그야 당연히도,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이 꿈은 대체 무엇이고, 자꾸만 나타나는 서의우의 정체는 무엇인지.

    의심도 든다.

    권재진은 정말로 혼자서 회귀한 것일까.

    4년 후, 저택 마당에서 게이트가 터지고 권재진이 사망한 뒤 서의우는 무엇을 했을까.

    실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권재진이 죽은 후 1회차 서의우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한다고 해서 권재진이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1회차 서의우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 끝난 마당이니까.

    그냥 이따금, 막연하게 잘 지냈으면 하고 바랄 따름이었다. 이제는 권재진 같은 돌연변이 가이드 말고, 제대로 된 정식 S급 가이드를 만나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귀게 되었고 가까스로 연인 관계가 되었지만, 제대로 된 연애는 시작도 할 수 없었고 관계 자체가 불안했으니까……. 차라리 권재진을 다 잊고 지내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차피 1회차 서의우는 권재진의 기억을 지웠다.

    권재진의 가족, 유년기, 과거, 그 뿌리를 지워 버렸으니…….

    서의우도…….

    서의우 그 자신도…… 권재진의 기억을 지우고, 둘이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 잊고 멀쩡하게 살았으면, 차라리 그랬으면, 그냥 그렇게 바랄 따름이었다.

    지나치게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홀로 괴로워하지도 말고, 후회거나 자책하지도 말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며 잊고 털어 냈으면 했다.

    그렇게 쉽게 정리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서의우가, 권재진의 기억을 지우든 수갑을 채우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려서 곁에 묶어 두는 저 집착뿐인 새끼가, 사지가 찢긴 권재진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미쳐 버렸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넌 나를 어쩌려는 건데.’

    권재진이 저 바닥에 묻어 둔 상자를 꺼냈다. 2회차 서의우와 제대로 연애하기로 한 순간부터, 자물쇠를 채워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상자였다.

    이제는 자물쇠를 풀고, 상자를 열어, 마주하고 싶지 않은 1회차 서의우와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 묻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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