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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112)화 (112/154)
  • #112

    “만일 그가 제 가족들을 해치려 든다면, 그 신념마저 꺾였다는 뜻일 겁니다. 그때는…… 죽어도 쌉니다.”

    “응, 네. 그렇게 되면 내가 최 대장 죽여 버릴게요. 기필코.”

    권재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서의우가 맥박 뛰는 자리에 입술을 묻었다. 그대로 조금 헐떡였다.

    “편하게 끝내 주지 않을 거예요. 팔다리 자르고, 힐링 팩터 써서 도로 붙여 놓고, 또 자르고, 반복해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게요.”

    ……그러라고 있는 힐링 팩터가 아닐 텐데.

    하지만 권재진은 딱히 서의우를 만류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비인도적인 효율 중시 가이딩이 딱 그런 것이니까. 상처 입고 치료당하길 반복해 보면 최 대장도 느끼는 바가 좀 다를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때는 저도 서의우 씨 말리지 않겠습니다. 맘대로 하세요.”

    “네. 나만 믿어요.”

    “저, 일단 말해 두겠는데, 저는 이런 방면으론 단 한 번도 서의우 씨 의심한 적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믿음직해서 탈이지…….”

    권재진이 피식 웃으며 서의우에게 기대어 안겼다. 위에서 쏟아진 뜨거운 물이 뺨과 턱을 타고 끊임없이 흘렀다. 눈가가 축축한 이유는 물을 맞고 있기 때문일 터다.

    재진이 길고 나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서의우의 품에 조금 더 파고들어선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쁜 결과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계획한 대로 장성들의 뇌를 조작해 군 수뇌부를 단숨에 장악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뒤쫓던 수색부대는 해체되었고, 서의우는 사면받았으며, 권재진은 특례로 정식 각성자가 될 것이다.

    “적어도 숨어 지낼 필요는 없어졌잖습니까. 저는 공식적으로 서의우 씨의 가이드가 될 테고. 아, 이제는 그 협곡에도 걱정 없이 함께 갈 수 있겠습니다.”

    “협곡이요…….”

    “예. 거기서 데이트 못 하면 억울할 것 같다고 말했잖습니까. 다행히 이제 억울할 일은 없겠군요. 잘됐습니다.”

    “…….”

    “최 대장이 뱉은 말을 얼마나 지킬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의우 씨의 이능을 똑똑히 봤으니 섣부른 짓을 하진 못할 겁니다. 그러니 저도 음, 까짓 이 기회에 한 번쯤 정식 각성자의 삶을 체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권재진이 하나하나 손을 꼽아 가며 현 상황의 이점을 읊었다.

    그럴수록 서의우의 눈빛은 무섭도록 가라앉았다.

    불 꺼진 어두운 욕실, 물을 흠뻑 머금은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내려와 기다란 눈가를 가린 모습임에도 선명한 안광이 칠흑빛 어둠을 뚫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송곳으로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서의우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아 있었다.

    냉정한 분노가 그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재진 씨가 자유롭진 못하잖아요.”

    뜨거운 물줄기가 연신 쏟아 내리고 있는데도 싸늘한 기색이 걷히지 않았다. 서의우가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그의 입가로 서늘한 입김이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마음 놓고 안심할 수도 없을 테고.”

    “그건…….”

    “군부를 전복하러 간 건데, 되레 군부에 편입한 꼴이 됐다고요.”

    권재진을 껴안은 그의 팔뚝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다. 흥분했는지 서의우가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억눌린 몸통이 괴롭고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지만, 권재진은 내색하지 않고 서의우의 등만 끌어안았다.

    “……예, 그 말이 맞긴 합니다.”

    넓은 등짝에서 툭 불거진 날개뼈를 손끝으로 느릿느릿 쓸어내려 주었다. 젖은 피부가 매끄러웠다.

    “저도 이제 호출당할 때마다 불려 가고, 직급에 따라 상명하복 깍듯하게 그래야 하려나요. 귀찮긴 하겠습니다.”

    “재진 씨.”

    “아, 그렇지. 서의우 씨는 대위니까 저보다 한참 위겠군요. 앞으로 볼 때마다 경례해야 합니까?”

    “하, 그만해요. 자꾸 멀쩡한 시늉 하지 말라고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권재진이 입술 양 끝을 끌어 올렸다. 고개를 들어서 부러 미소 짓는 얼굴을 서의우의 눈앞에 보여 주며 침착하게 말했다.

    고요한 목소리가 넓은 욕실에 울렸다.

    “사실은 저도 궁금했습니다. 서의우 씨처럼.”

    “나처럼? 뭐가요.”

    “제6 거주지구. 궁금했다고 했잖습니까.”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제6 거주지구 가는 거 많이 기대했어요.>

    <재진 씨가 어떤 곳에서 자랐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다 궁금했고. 재진 씨가 잊어버린 가족, 알게 해주고 싶었으니까요.>

    <심지어 거기서 보는 하늘은 좀 다르려나, 공기는 더 맑으려나, 빨리 봄이 오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도 했어요.>

    “서의우 씨가 살아온 곳이니까. 센터. 거기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말로 듣기는 했어도 제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다를 테니까. 생각해 보면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기회는 무슨……!”

    “그리고 센터 소속이 되면 월급도 줄 텐데. S급이면 상당한 고액일 것 아닙니까. 그것도 기대됩니다.”

    “돈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 아니, 그냥 재진 씨가 다 가져요!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했잖아요.”

    서의우가 으르렁댔다.

    막상 권재진은 돈 쓸 줄도 모르고, 딱히 탐욕스럽거나 사치스럽지도 않은 성향인 줄 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가진 것 다 버리고 무일푼으로 도망칠 계획까지 세웠었다. 그랬던 주제에 이제 와서 고액 월급에 즐거워하는 척해 봐야 의미 없다.

    “그럼, 서의우 씨는 조금도 기쁘지 않은 겁니까? 제가 정식 각성자가 되어서 이제 공적으로 떳떳하게 서의우 씨와 매칭되는 가이드가 될 수 있는데.”

    “기뻐요.”

    단호하게 대답한 서의우가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권재진을 응시했다. 주위가 어두운 와중에도 이목구비는 훤히 보였다.

    “솔직히 기쁘긴 해. 내가 예전 같았다면 지금쯤 흥분해서 아주 숨이 깔딱깔딱 넘어갔을 거예요.”

    한때, 서의우는 왜 하필이면 권재진이 돌연변이로 태어난 건지 원망하기도 했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냥 평범한 가이드로 태어나 주지 그랬어요……. 다른 각성자들처럼 정규 교육 수료 받고, 정식 가이드로서 저랑 매칭되면 안 됐던 건가요? 그랬으면 나도, 널리고 널린 흔해 빠진 에스퍼들처럼 잘 지냈을 테고, 아무 걱정 없이 재진 씨랑 마음껏 가이딩 했을 테고, 이딴 처참한 기분…… 맛보지도 않았을 텐데…….>

    <하, 저희가 둘 다 각성자였다면 이런 일 없었겠죠.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로 서로와 단일 매칭되어서, 어떤 새끼도 감히 끼어들 수 없게끔 굳건하게 그랬을 텐데…….>

    “난 재진 씨랑 같이 있을 수만 있으면 뭐든 좋아. 그렇지만, 그렇긴 해도…… 아니에요. 재진 씨가 다 가르쳐 줬잖아요.”

    이건 최선이 아니라고.

    비유하자면 노멀 엔딩. 트루 엔딩이 아니다.

    “난 이제 이런 거론 만족 못 해요.”

    참다못한 서의우가 분을 터트렸다. 그의 희고 앳된 아름다운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우린 제대로 살 거예요.”

    “…….”

    “제대로. 자유롭게. 그렇게. 완벽히 해낼 때까지 포기 안 한다고요.”

    서의우가 눈을 내리감고 권재진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물기 맺힌 피부에 접촉하는 건, 마른 피부와 맞닿을 때와는 또 다른 설렘과 끌림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가이딩 효과 없는 접촉을 할 때마다 서의우는 에스퍼로서의 본능이 아닌, 온전한 그 자신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그런 일이 벌어질 린 없겠지만, 설령 이제는 권재진이 가이딩 능력을 잃고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 버린다고 해도 하등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런다고 한들 이 진득하고 맹목적인 감정엔 조금의 변화도 없을 것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인정해요. 이번에는 내가 섣불렀어요. 최 대장이 자리에 없는 것부터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 하나 때문에 모든 게 꼬여 버렸죠. 다음번에는 철저하게 할게요. 크리처 웨이브…… 그것만 지나가면.”

    서의우가 재진의 뺨에 이어 눈가에 키스하고, 또 고갤 들어 이마와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장성들 뇌 조작, 재진 씨도 동의하는 거 맞죠? 사실 이미 한 명은 해 뒀어요.”

    “예, 예……?”

    해 뒀다니.

    “설마 그 잠깐 사이에…….”

    권재진이 눈을 크게 떴다. 놀란 얼굴에 대고 서의우가 입술을 핥았다. 혓바닥이 젖은 점막을 양껏 맛보았다.

    “제일 먼저 머리 건드렸던, 오 준장이요.”

    육군 작전사령관 오성화 준장.

    서의우가 정신계 이능을 사용했던 장성이다. 그 후에 최율 대장의 홀로그램이 켜져서 도중에 중단하고 이능을 흩어 버린 줄 알았지만, 사실은 이미 사고 조작을 마친 상태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오 준장 통해서 지켜보자고요. 최 대장이 협상안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재진 씨에게 허튼 짓거리 하려 들진 않는지. 혹시라도 수상한 정황이 보이면 크리처 웨이브고 나발이고 관계없이 바로 뒤엎어 버릴 거예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시퍼렇게 눈을 번뜩인 서의우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재진의 아랫입술을 갈구하듯 빨았다. 권재진은 뭐라 대답해야 할까 잠시 주저하다가, 그냥 입맞춤에 응하는 길을 택했다.

    사지 오장육부에 피로가 그득그득 쌓여 있었고 감기라도 들 모양인지 뜨끈한 머리가 핑핑 돌았다. 다 씻고 난 다음엔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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