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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111)화 (111/154)
  • #111

    급박한 상황, 뚝뚝 끊겨 들리는 최율 대장의 말이 심상치 않았다.

    권재진이 퍼뜩 고개를 들고서 최 대장의 홀로그램이 있던 언저리를 응시했다. 뒤집힌 테이블, 날아간 의자, 꺼진 홀로그램. 최율 대장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끊어질 듯 지직대는 목소리만큼은 아직도 띄엄띄엄 전송되고 있었다.

    “가…….”

    재진이 입술을 잠시 떼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눈알이 따가웠다. 혀는 돌멩이처럼 굳어 있었다.

    “방금…… 가족이라고…… 말한 겁니까?”

    ……가족?

    권재진의 가족?

    정신을 차려 보니 손끝의 피가 싸하게 식어 있었다. 붙든 서의우의 옷자락을 타고서 떨림이 전해져 왔다. 얼어붙은 권재진을 보고서 서의우가 멈칫거렸다.

    “…….”

    좌표 이동을 하고자 맺혔던 이능이 잦아들고,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을 것처럼 밝게 맺혔던 빛이 꺼졌다.

    흩어진 강대한 힘의 끝자락에서, 거꾸로 뒤집힌 송수신기가 최 대장의 목소리를 힘겹게 뱉어 냈다.

    “……자네 가족에게…… 보상금을 제공하도록 하지.”

    “…….”

    “특례를 인정한다고 하였…… 등급테스트를 거쳐…… S등급으로 확정된다면, 그에 따른 복지 제도…….”

    보상금. 그건 각성자를 낳은 부모에게 연금으로 지급되는 돈이었다.

    일반인들에게 아무리 각성자가 선망받는 직종이라 해도, 배 속에서 열 달을 품은 아이를 선뜻 내놓을 부모는 없다. 그렇기에 국가에서 보상금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추가로 각종 복지 혜택도 받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각성자의 등급에 따른 차등이 있다.

    S등급을 받으면 권재진에 가족에게 돌아갈 보상금은 얼마일까.

    위태롭던 통신이 끝내 끊어졌고, 적막해진 본부실에 바짝 메마른 웃음소리가 터졌다.

    “……푸하.”

    난장판이 된 본부실, 반쯤 기울어진 신정부의 국기를 보며 재진이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눈꺼풀이 천천히 여닫히다가, 나중엔 깜박이는 것조차 잊고 멈추었다.

    권재진은 가족을 모조리 잊었고,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그렇지만 최율 대장은 알 수 있었다. 그에겐 권재진의 주민등록을 열람할 권한이 주어져 있고, 재진의 태생부터 성장 과정 전반에 걸친 정보를 어렵잖게 알아낼 수 있었다.

    권재진도 모르는 혈연을 생판 남인 최율 대장이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니. 아이러니하지 않나?

    “……”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막막하고 어두컴컴한 감정을 집어삼킨 서의우가 광포한 눈을 느릿하게 내리깔았다.

    지금은 보상금을 주겠다는 협상의 내용이지만 만일 최 대장의 마음이 바뀐다면 상황은 반대가 될 터였다.

    서의우가 장성들을 인질 삼은 것처럼, 만약 최 대장이 권재진의 가족들을 인질 삼기라도 하면……?

    서의우가 장성들을 납치하려는 것처럼, 최 대장이 권재진의 가족들을 납치해 버린다면……?

    그때는…….

    …….

    세차게 혀를 찬 서의우가 장성들을 풀어 주었다. 실신한 인간 뭉치가 볼품없이 와르르 굴러떨어졌다. 다행히 최율 대장은 아직 우호적이다. 권재진이 가족을 잊은 줄도 모른다. 널브러진 인간들을 두고서 서의우가 성마르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임시 휴전이었다.

    ***

    잿빛 흙먼지가 자욱하게 깔린 황야. 대륙에서 내려온 한랭한 공기가 기온을 영하로 내렸다. 공기가 따갑도록 건조했으며 찝찌름한 냄새를 풍겼다.

    불모의 계절,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시기이지만, 황야의 풍경은 유독 괴이쩍었다. 지표의 능선이 부드럽지 못하고 울퉁불퉁했으며 곳곳에 검은 가지가 보였다. 얼핏 고드름 맺힌 나무같이 보였으나 사실은 삐죽이 솟은 철골이었다.

    붕괴한 건물과 고철 더미, 깨진 유리창과 뭉개진 아스팔트. 곳곳에 시멘트 조각이 떨어져 있으며 갈라진 도로에는 버려진 차가 즐비했다. 저것들은 게이트 임팩트가 벌어지기 전, 구시대 인류가 남긴 문명의 흔적이었다.

    거주지구의 외경계벽 너머, 확장 중인 개척지구보다도 더 먼 곳.

    크리처에게 빼앗긴 땅. 되찾아야 할 땅.

    이곳이 바로 미개척지구라 명명된 지역이었다.

    생명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썩지 않는 쓰레기로 가득한 곳이다.

    기울어진 빌딩 안에서 까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쓸모를 다한 삭은 플라스틱 블라인드 사이로 거뭇한 괴형들이 보였다. 고슴도치처럼 뾰족뾰족한 가시가 돋친 그것들은 콘크리트 벽을 물어뜯고 있는 크리처였다. 마물임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생명체는 소화할 수 없는 콘크리트를 까작까작 씹어 삼키고 있었다.

    브륵, 브륵, 브륵!

    콘크리트를 아무리 먹어 치우더라도 그들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샛노란 눈을 번뜩인 그것들이 빌딩 밖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과거엔 창문이었던 통로를 앞발로 헤집고선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내달리는 걸음이 날쌨다.

    키에에에에-!

    그리고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또 다른 크리처 무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날고 있는 그것은 거대한 독수리를 닮은 형태의 마물이었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두꺼운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이 기괴했다.

    형태가 다른 크리처들이 한 종처럼 뒤섞여 먼 곳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 세찬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

    그 후, 짧은 뒷수습이 이어졌다. 쓰러진 장성들은 의무실로 이송되었고, S급 돌연변이 권재진 생포 임무는 공식적으로 철회되었으며, 수색부대도 그대로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크리처 웨이브나, 체제 개편, 최 대장, 잊어버린 가족 등……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젯거리들이 뒤로 줄줄이 늘어서 있기는 해도, 적어도 예전처럼 무턱대고 습격당할 걱정 하나는 사라지긴 했다.

    일단은 반쪽짜리 평화를 손에 넣은 셈이다.

    돌연변이로 타고난 권재진의 운명을 뒤엎었다고 말하기엔 부족하지만, 첫발을 내디뎠다고 치면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서의우와 권재진, 둘 중 누구 하나 크게 다친 사람 없이 무사해서 다행스럽다.

    권재진은 정식으로 등급 테스트를 받기로 했고, 그 말은 이제 그가 정규 각성자로서 센터에 소속될 것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재진이 S등급 가이드임이 증명된다면, 유일한 S등급 에스퍼인 서의우와 매칭되는 게 당연했다.

    각성자들은 철저한 등급제로 나뉘어 구분되기 때문이다. A등급 각성자는 A등급끼리, B등급 각성자는 B등급끼리. 그런 식이다.

    ‘당초에 계획한 것과 완전히 달라지긴 했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 없겠지.’

    그렇게 등급 테스트 일정을 잡아 놓고, 두 사람은 폐허가 된 해변 저택으로 되돌아왔다.

    좌표 이동을 끝마치고 집 안에 들어섰는데도 서의우는 권재진을 감싼 보호막을 풀지 않았다.

    사실, 안심할 만한 집 안 꼴이 아니긴 했다.

    벽이고 바닥이고 터지고 갈라져서 난장판이었고, 전기마저 끊겼는지 센서등도 켜지지 않았다. 권재진이 1층 거실을 조금 태워 먹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도록 엉망이었다.

    “……이거 손해배상 청구할 수 없습니까?”

    재진이 허탈하게 중얼거리는데, 서의우한테서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그는 전등도 안 켜지는 캄캄한 복도에 우두커니 멈추어 서 있을 따름이었다. 폭발 흔적이 남은 벽면, 부서진 틈으로 쉴 새 없이 외풍이 들이닥쳤다. 차가운 바람에 서의우의 검은 머리칼이 아른아른 흩날렸다.

    “미안해요…….”

    그가 참담하게 속삭였다. 거친 목소리가 상처 입은 짐승이 내는 소리 같았다. 잘못한 것 하나 없는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재진 씨 가족, 미안해요.”

    “뭐…… 됐습니다.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권재진이 서의우를 지나쳐 복도 안쪽에 자리한 욕실로 들어갔다. 여기도 센서등이 반응하지 않았고, 전등이 켜지지 않았다. 캄캄한 욕실을 감으로 더듬거린 재진이 세면대에 수도꼭지를 들어 보았다. 다행히 온수는 잘 나온다.

    “지금은 기억도 못 하는 가족 신경 쓸 때가 아니잖습니까.”

    “…….”

    “오히려 다행입니다. 다 잊어서. 제가 지금 냉정해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냐…… 그러지 말아요. 나한테는 거짓말하지 말라고요.”

    서의우가 욕실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권재진이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씻겨 줄게요.’ 하고는 샤워기를 틀었다. 천장에 높게 붙은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

    “거짓말……은 아닌데.”

    재진은 옷을 벗지도 않은 채 샤워기 아래에 섰다. 어차피 서의우가 벗겨 줄 것이란 사실을 피차 알고 있었다.

    물에 젖어 늘어지는 옷가지를 서의우가 공들여 하나씩 벗겨 주었다. 겨울 날씨에 외출하기엔 턱없이 얇은 실내복만 걸치고서 하루를 꼬박 돌아다녔다. 심지어 맨발로.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피곤한 게 당연했다.

    “만약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면 지금 꽤 동요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기억이 없으니까…… 그리고, 결론은 보상금을 지급해 준다는 거잖습니까. 좋은 일인데요, 뭘.”

    권재진의 옷은 아주 신경 써서 벗겨 줘 놓고, 서의우 자신의 옷은 홱홱 잡아채듯 벗었다. 구깃구깃한 목폴라와 바지를 벗어 던지고 맨몸이 된 그가 재진을 품 속에 가두듯 껴안고 달라붙었다. 둘이 함께 엉겨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한참 맞았다.

    “최 대장은 민간인에게 손댈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민간인들을 지키는 데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협상에 응했던 겁니다. 적어도 신념은 있어 보였으니까.”

    “…….”

    “만일 그가 제 가족들을 해치려 든다면, 그 신념마저 꺾였다는 뜻일 겁니다. 그때는…… 죽어도 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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