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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95)화 (95/154)
  • #95

    권재진은 한때, 4년에 걸쳐 이 서의우와 함께 살아갈 결심을 했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고 받아들였던 적이 있었다.

    하물며 연인 관계가 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연애는 아닐지언정, 어긋나고 망가진 형태일지라도 그조차 수용했다.

    이 서의우와 함께라면 돌연변이 가이드로, 일반인도 각성자도 아닌 반쪽짜리 혼종의 삶을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나, 그건 권재진의 과거였다.

    다 휩쓸려 지나가 버린 과거.

    부러져 버린 막대기처럼 토막 난, 막다른 길처럼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과거였다.

    ‘사실은 다 알고 있잖아요. 재진 씨의 표적이 무엇인지. 총구를 어디에 겨누어야 하는지.’

    ‘…….’

    ‘권재진이 새로운 인생을 살려면, 진정 무얼 해야 하는지…….’

    1회차 서의우를 기억하는 건 오직 권재진뿐이다.

    그러니 그를 잊을 수 있는 것도 권재진뿐이었다.

    그는 재진의 기억을 앗아 간 대가로, 재진의 기억 속에 외따로 남겨져 서서히 잊혀 사라지는 망각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권재진은 그를 홀로 두고, 2회차 서의우와 함께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다른 모습의, 새 인생을…….

    밝고, 눈부시고, 새로운…….

    제대로 된…….

    그래, 제대로 된…….

    머릿속에 어느 깨달음이 떠올랐다. 커다란 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데엥, 데엥 거리는 음파가 여운을 남기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검은 우주 끄트머리에서부터 서서히 흰 태양 빛이 번졌다.

    ‘아직도 도망칠 생각인가요?’

    ‘…….’

    ‘끝끝내 도망치는 길을 택할 거예요?’

    ‘…….’

    ‘기로에서 실수하지 말아요. 나처럼은 하지 마.’

    침묵으로 일관하던 재진이 맹렬한 기세로 총을 쏘았다. 눈빛에 주저함이 걷혔다.

    끝없이 보이는 크리처를 향해 발포하는 요란한 총포음이 깨우침을 축하하는 폭죽처럼 터졌다.

    탕! 탕탕!

    그건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망라한 총성이었다.

    타앙! 탕!

    탕!

    탕!!

    ***

    번뜩, 권재진이 눈을 떴다.

    조금 헐떡이며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꿈에서 벗어났다.

    우주가 아닌 침실로 되돌아오자 포근한 이불과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어슴푸레한 침실 내부를 익숙한 평온이 지배하고 있었다.

    권재진은 소리 없이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잠든 서의우를 보았다. 희고 청순한 앳된 얼굴이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깨어날 기미 없이 잠잠한 얼굴이 보기 좋았다. 마치 배부른 사자처럼 만족스러워 보인다.

    재진은 잠시 숨을 멈추고서 서의우를 지켜보았다.

    부드러운 곱슬 머리카락이 베갯잇에 사르르 흩어져 있고, 곱게 감긴 두 눈도 고요했다. 자연스럽게 살포시 벌어진 입술은 매력적인 데다가 무방비해 보였다.

    무심코 손을 뻗은 재진이 흠 없는 뺨을 손바닥으로 툭 누르고 엄지로 입술 끄트머리를 건드렸다. 엷은 색을 띤 입술이 늘어나며 촉촉한 안쪽 점막이 살짝 내비쳤다.

    “……흐.”

    서의우가 나른하게 색색거렸다. 재진이 손끝을 위로 올려 높은 코끝을 톡 스쳤다. 곧은 콧대를 따라서 슬슬 건드리다가 눈가에 이르러서 속눈썹을 조심스레 간질거렸다.

    언제 봐도 길고, 얇고, 흠잡을 곳 없는 속눈썹이었다. 홀려 버릴 것 같다. 종일 간질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얼마간 속눈썹 근처를 어른대던 권재진의 손이 이번에는 서의우의 머리카락 위로 올려졌다. 손빗을 만들어 투명한 흑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가르마 방향대로 빗어 주다가 손동작을 거꾸로 해서 역방향으로 가르마를 바꾸어 두었다. 꿈에서 본 24살의 서의우가 떠올랐다. 권재진은 서의우의 가르마를 되돌렸다가 바꾸고, 다시 되돌렸다 바꾸길 실없이 반복하다가 피식, 바람 빠진 소릴 내며 웃어 버렸다.

    이제는 애써 구분할 필요조차 없다.

    한눈에 이 서의우가 어느 서의우인지 알아볼 수 있다. 가르마 따위 진즉부터 무의미해졌다.

    “므…… 우, 재진 씨?”

    부스스 깨어난 서의우가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은 회색 눈동자로 권재진을 몽롱하게 응시했다.

    코앞에서 서로 시선이 마주치자, 서의우는 행복을 녹여 만든 환상에 흠뻑 빠진 사람처럼 달게 미소 지었다. 유려하게 접히는 눈매와 휘어지는 입꼬리가 푸르른 들판을 묘사한 풍경화처럼 화사했다. 오늘따라 서의우가 더 발그레한 것 같았다. 늘 그렇듯 분홍색이었고.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아직 해도 덜 뜬 것 같은데.”

    “……그냥, 어쩌다 보니 시끄러운 꿈을 좀 꿔서.”

    “아…… 무슨 꿈이었는데요?”

    “…….”

    “내 꿈이었어요?”

    서의우가 권재진의 담백한 뺨을 끌어다 입술을 찍었다. 체온이 겹치며 상대의 맥이 느껴졌다. 두근거리는 박동이 느릿하고 규칙적이었다. 이불을 부스럭거린 서의우가 재진의 목까지 잘 덮어 주었다. 그대로 껴안고 도로 눈을 감았다.

    “내 꿈 아니었나 보네……. 애인 사이에는 상대방 꿈을 꿔야 한다거나, 커플 꿈? 꿈 데이트? 일반인들 그런 관습은 없나요……?”

    “그야 당연히, 예, 그런 건 없습니다.”

    “왜 없지. 빨리 하나 만들자고 건의해요. 난 꿈에서도 재진 씨 보고 싶으니까…….”

    나른하게 웅얼거린 서의우가 다시 잠든 것처럼 잠잠해졌다.

    권재진은 깊게 심호흡하고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축포 같던 총성이 아직도 들리는 것 같았다. 연이어 터지는 발포음이 권재진의 마음을 데웠다. 조금씩 뜨거워지더니만 종국에는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절절해졌다.

    <어때요. 아직도 도망칠 생각인가요?>

    <끝끝내 도망치는 길을 택할 거예요?>

    권재진은 기로에 서 있었다.

    보아야 할 방향이 있고, 쏘아야 할 목표가 있었다.

    실수하지 않고 택해야 하는…….

    일출이 끝나고 붉은 아침 해가 선명하게 떠오를 때까지도 재진은 꿈을 곱씹으며 뜨겁게 달아 있었다. 우글거리며 몰려오는 크리처가 생각났고, 그에 속속들이 들이박히던 총알이 떠올랐다. 애착소총의 무게감과 탄약 냄새가 생생했다.

    바로 그때.

    어려운 한숨을 토해 내는 순간.

    시끄러운 경고음이 무참히 귀청을 때렸다.

    ‘아니, 뭐야……?’

    권재진이 홱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택 보안 시스템이 일제히 울리고 있었다.

    ‘보안 시스템이…… 설마.’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쾅, 하고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잠에서 깬 서의우가 권재진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재진 씨! 이리 와요!”

    손힘을 조절할 겨를조차 없이 권재진의 몸뚱이를 거칠게 품에 안고 이능을 끌어 올렸다. 두 사람을 감싸는 보호막이 형성되어 안전을 보장했다.

    곁을 돌아보니 그의 눈빛이 스산하게 굳어 있었다. 콧등에 언짢은 주름이 심각하게 잡혀 있었고, 짙은 눈썹도 매섭게 날이 서 있었다.

    방금까지 평화롭던 침실에 싸늘하고 섬찟한 공기가 들이찼다. 두려움의 냄새가 풍겼다.

    곤두선 본능이 불온을 감지했다.

    “서, 서의우, 지금 이건…….”

    “쉿.”

    다음 순간, 폭약이 벽과 창문을 부수었고, 깨진 틈으로 연막탄이 들어왔다. 매캐한 연기가 바닥에서부터 높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발각당한 건가?’

    권재진이 사색이 되었다. 여태 잠결이었던 서의우가 돌변해서 눈을 번뜩였다. 삭막한 회색 눈동자가 단숨에 광포한 살기를 띠었다.

    “내 옆에 딱 붙어. 떨어지지 말아요.”

    짓씹어 내뱉는 듯한 당부가 들리는 동시에, 저택 내부로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대형을 이루어 우르르 들이닥치는 군홧발 소리가 났다. 정예 특임부대원들이 저택을 급습했다.

    수색부대가 기어이 권재진의 잔흔을 찾아내고 만 것이다.

    산사태까지 일으켜 별장 저택을 흙과 바위에 매장해 버렸는데도, 끈질기게 흙더미를 파헤쳐 내려가서 단서를 얻고, 추적계 이능으로 뒤쫓아 여기까지 도달하고야 말았다.

    눈이 뒤집힌 서의우가 심연 속에 억눌러 둔 막대한 이능을 끌어냈다. 한계를 계측할 수 없을 정도로 광연한 힘이 흉흉하게 날 선 살기에 뒤섞여 사방으로 뻗쳤다. 침실을 발원으로 삼아 거실부터 복도, 건물 전체의 골조와 지반까지 미친 듯이 뒤흔들렸다. 저택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비명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봄이 오기까지 시간이 남았다고 여유 부릴 일이 아니었다. 아직 손가락 마디에 반지도 걸지 못했는데, 짧던 평화가 예기치 못하게 끝을 고했다.

    ***

    특수 거주지구 북서부. 문제의 협곡.

    “여기, 밑에, 뭔가 묻혔습니다.”

    그 후, 몇 날 며칠간 지속된 시추 작업 끝에 흙더미 아래 파묻힌 건물을 발굴해 냈다.

    마태오 소령은 그 즉시 수색부대 전원을 투입하여 이 잡듯이 잔흔을 뒤졌다. 고된 이능 사용 끝에 벽면에서 미세하게 튄 혈흔과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발견했고, 그 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추적계 이능력자들로 구성된 수색부대에 이어, 공조하던 제1 특임부대와 다른 육군 특임부대까지 합세하여 S급 돌연변이 가이드를 맹추격했다. 특수 거주지구 절반을 가로지른 끝에 해안가에 당도했고, 절벽 끝에 그림 같은 저택 한 채를 발견했다. 오 준장에게 보고를 올리자마자, 곧바로 습격 및 포획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목표는 S급 돌연변이 가이드. 지령은 생포.

    이번 임무의 총책임자인 마태오 소령과 직급이 가장 높은 제1 특임부대 지휘관 장태산 중령을 필두로 해변 저택을 에워싸는 포위망을 구축했다. 쥐새끼 한 마리조차 빠져나갈 수 없도록 촘촘한 포위망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돌입을 알리는 적색 신호탄을 터트렸다.

    파앙!

    동서남북, 네 방위에서 폭약을 사용해 3천 평 대저택의 벽면을 부수었다. 무너져 내린 틈새로 일제히 연막탄을 살포했고, 고글을 열화상 모드로 조작한 특임부대원들이 무리 지어 내부로 돌격했다.

    압도적인 작전이었다.

    고도의 전투 훈련을 받은 각성자라 할지라도 도망칠 구멍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데, 불과 넉 달 전까지 일반 거주지구에서 일반인 생활을 해 온 돌연변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붙잡는 건 시간문제다. 논란의 S급 돌연변이 가이드는 이제 곧 무력하게 끌려 나올 운명이었다. 일단 권재진을 생포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간단해진다. 그자의 머리를 파고들어 기억을 조사하면 끝날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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