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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64)화 (64/154)
  • #64

    서의우가 재진을 부축해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주변을 돌아볼 정신이 든 재진이 상황을 확인해 보았다.

    이곳은 별장 저택의 복도고, 바닥에 탄피가 흩어져 있었다. 언뜻 내다보니 거실 쪽에는 아직도 쓰러진 크리처 사체와 깨진 유리 조각이 낭자했다.

    “저건 내가 치울게요. 재진 씨부터 씻어요. 몸이, 굉장히, 차가워서…… 윽.”

    어지러운 눈빛을 내비치며 서의우가 권재진을 욕실로 이끌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번민하고 있었다.

    이 집에는 이제 둘뿐이고, 무엇도 둘을 위협하지 못하는데도 서의우는 무언가와 홀로 투쟁하듯 어금니를 으스러지도록 세게 짓씹고 있었다.

    “차가워서? 왜 그럽니까.”

    “차가워서, 힘들어요.”

    “그게 왜……. 겨울이라 별수 없잖습니까.”

    “……시체 같잖아.”

    서의우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담으며 권재진의 옷을 벗겨 주려 했다. 티셔츠 가슴 쪽에 인위적으로 찢긴 흔적을 보고서 그가 또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나이프로 찢어 낸 흔적이라 미쳐 돌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뭐예요. 왜 이래, 옷.”

    “아…… 그러게 말입니다. 다짜고짜 그래 놨습니다.”

    “뭐?”

    “제 핵을 확인하려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각성자라면 누구나 핵을 갖고 있다.

    심장 안쪽, 깊은 곳에 자리해 있다. 가까이하면 공명하는 파장이 느껴진다고 한다.

    물론, 권재진은 이 정보를 1회차 서의우에게 들었을 뿐, 직접적으로 공명이니 파장이니 느껴 본 적은 없었다.

    후천적으로 발현한 돌연변이는 선천적으로 태어난 각성자와 달리 핵이 미성숙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히, 권재진은 지금까지도 제 몸속에 핵 같은 게 자리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진 않았다.

    또한, 핵은 각성자의 치명적인 급소다.

    게이트를 파괴할 때 그 핵인 게이트 코어를 부수는 것처럼, 각성자도 핵이 부서지면 간단히 죽어 버린다.

    힐링 팩터로 심장은 소생할 수 있을지언정, 핵은 결코 소생할 수 없다.

    핵이 상처 입으면 힐링 팩터로도 복구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각성자의 약점인 핵의 존재는 일반인들에겐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파장이니 공명이니 느낄 수도 없는 권재진은 아직도 그저 낯설 따름이었다.

    “그걸, 옷을, 옷까지 벗기고 확인했다고? 누가?”

    서의우가 권재진의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커다란 손아귀로 밑가슴 근육까지 세게 쥐어짜듯 붙잡았다.

    “누가 재진 씨 가슴 만졌어요?”

    “윽.”

    재진이 좀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대답해요. 여기, 이렇게 만졌냐고.”

    “예, 그랬, 긴 합니다.”

    “하…… 그 새끼 에스퍼였어요? 아님, 가이드?”

    “아, 에스퍼…….”

    “씨발.”

    자제할 생각도 없이 욕을 내뱉은 서의우가 광분해서 권재진을 추궁했다.

    “누군데요. 이름 알아요? 무슨 이능 사용했어? 얼굴은? 그냥 아는 거 전부 다 말해 봐요.”

    욕조 물이 다 받아져 가는데도 서의우는 추궁을 멈출 기미가 없었다. 이러다 물이 욕조 밖으로 넘칠 것 같았다.

    이걸 말해 줘도 되나 모르겠다.

    아니, 말하긴 할 거지만……. 아무것도 안 숨기긴 할 건데.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나. 서의우가 심상치 않았다.

    “……좀, 씻고 말하면 안 됩니까. 가슴도 좀 놓고. 그거 아픕니다.”

    재진이 일단 한발 물러섰다.

    “제 몸, 차가워서 시체 같다면서요.”

    “…….”

    “힘들다면서……. 저도 춥습니다. 아프고. 씻고 합시다.”

    “……하.”

    서의우가 언짢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글거리는 성난 눈빛으로 권재진을 위압하다가, 기어이 욕조 물이 밖으로 넘치기 시작하자 픽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서느렇게 중얼거린다.

    “하여간, 권재진 씨 사람 피 마르게 하는 데 뭐 있어요.”

    서의우가 권재진의 옷을 벗겼다. 성마른 손길로 조급하게 구는 모습에서 그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 보였다.

    재진은 기분 저조한 서의우의 심리를 알기에 빨리 욕조에 들어가고자 손을 뻗어 그의 옷을 마주 벗겨 주었다.

    권재진이 걸친 옷은 넝마 조각이나 다름없어서 벗길 게 그리 많지 않았다. 너덜대는 상의가 순식간에 몸에서 떨어져 나갔고, 흙 묻은 바지도 금세 벗겨졌다.

    반면, 서의우는 퇴근 직후 무장한 차림 그대로라 벗기는 데 손이 많이 갔다. 권재진이 그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하네스 고리를 풀고 팔을 하나씩 빼도록 도왔다. 그런 뒤에는 전투복의 여밈을 젖혀 차근히 지퍼를 내려 주었다.

    서의우의 목에 건 각성자 인식표 하나만 남겨 두고 모든 것을 벗겨 낸 뒤, 두 사람이 함께 욕조에 들어갔다. 물이 생각보다 너무 뜨거웠다.

    아니, 권재진의 몸이 냉골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내내 극한에 몰려 싸늘하게 식어 있던 피가 차츰 따뜻하게 데워졌다.

    욕조 속에 잠겨 시간이 흐를수록 곤두섰던 재진의 마음이 진정되어 갔다.

    크리처에게 쫓겼던 일, 생살이 찢기고 상처 입었던 일, 각성자 특수부대원과 조우해서 사살당할 뻔한 일……. 그때 느낀 불안과 공포가 서서히 흐려졌다.

    지금 돌이켜 봐도 일반인이었던 권재진이 감당하기엔 난데없고 끔찍한 사건들이었다. 나름대로 의연히 대처한답시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역시, 훈련받지도 않은 일반인이 혼자 총을 쏘며 싸우고 죽음과 대적하는 건 버거운 경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일들을 서의우에게 설명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대화를 뒤로 미룬 것 같기도 했다. 일단 구속부터 풀어 달라고 하고, 씻고 난 다음 말해 준다 하고. 그런 식으로 미적미적 말이다. 재난 피해자가 당시 상황을 알리려고 마음먹는다 해도, 조금은 진정한 뒤에야 할 수 있는 법이니까.

    그래도 이젠 괜찮다. 서의우가 곁에 있으니 괜찮아질 수 있다.

    권재진은 서의우의 곁에서 안정을 찾아 갔다. 서의우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의우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권재진은 안정되는데 서의우는 더욱 불안해했다.

    서로 함께 껴안고 있는데도, 안심할 수 없다는 듯 거듭 권재진을 더듬고 붙들어 존재를 확인하려 들었다.

    그는 재진의 머리칼을 움키고, 팔을 연신 자기 쪽으로 잡아끌고, 허리를 단단히 옥죄어 안으면서, 권재진을 곧 없어질 환상처럼 취급했다. 불안하고 초조하게. 안달 내듯.

    서의우는 마치, 권재진과 함께 있는데도 함께 있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재진 씨.”

    권재진을 자꾸 헤집던 서의우가 끝내 버티질 못하고 그를 불렀다. 강한 힘으로 품 속에 가두어 누르며 무너지듯 속살거렸다.

    “이제 말해 봐요.”

    참담하게 가라앉은 그의 회색 눈동자가 어두웠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쪽방 속에 갇힌 것처럼.

    “말하라고요, 뭐라도 좀. 나한테. 응?”

    권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요했던 마음이 많이 가라앉아서 지금은 충분히 얘기를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의우가 자리를 비웠을 때 권재진에게 벌어졌던 끔찍한 일과, 느꼈던 감정을.

    “……그러니까, 시작은 크리처가…… 저기 거실에 쓰러져 있는 저놈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왔습니다. 서의우 씨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보안 시스템 고장인지 오질 않아서, 제가 서의우 씨 총으로 어떻게든 쏴서 죽였습니다. 운이 좋았어요. 정말.”

    재진이 차근차근 겪은 일을 풀어놓았다. 서의우는 재진을 껴안은 팔뚝에 힘을 주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크리처를 잡고 끝인 줄 알았는데, 창밖에서 한 마리가 더 나타나 저를 기습했습니다. 그대로 내동댕이쳐져서 협곡 언저리까지 굴러떨어졌고, 크게 다쳤습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젠 모든 사실을 다 말해 주고 있는데도, 이야기를 들을수록 서의우는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흥분하는 것 같았다.

    다 끝난 일인 것도 알고, 권재진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음을 눈으로 몸으로 확인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팔에 핏줄이 솟고 근육이 움찔대며 반응했다.

    서의우가 주먹을 단단히 쥐며 형형한 눈빛을 흩뿌렸다.

    뭘 어떻게 해도 그를 진정시킬 길이 없어 보였다. 권재진의 무사 안위를 확인해도 진정이 안 되고, 곁에 함께 있어도 진정이 안 되고, 얘길 들어도 진정이 안 되고……. 어떤 수단으로도 잠재울 수 없는 격정만이 그를 뒤덮고 지배했다.

    “그때, 게이트 근처를 수색하던 각성자들이 저를 발견했고……. 같은 각성자라고 오해해서 제게 힐링 팩터를 놔 줬습니다. 그 힐링 팩터 덕에 목숨은 구했지만, 금세 또 돌연변이임이 들통나 버려서…….”

    “그래. 그때였겠네요. 그때 재진 씨 가슴 만지고 안 거잖아요.”

    “……예.”

    “이, 씹…… 그 새끼 진짜 누구예요? 어?”

    서의우가 으르렁대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무의식중에 이능이 들끓었다.

    평소에는 억눌러 두기만 했던 심연 속 힘을 조금 전 제대로 분출한 여파 때문인지, 그가 감정적으로 흥분하자 전보다 더 농도 짙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이러다간 협곡 부근 지형이 깡그리 날아간 것처럼 이 집도 기둥까지 뽑혀 날아갈 판이었다.

    재진이 한숨을 삼키며 듣고 보았던 내용을 아는 대로 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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