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43)화 (43/154)
  • #43

    구멍 찢어지는 거야 가이딩 하다 보면 번번이 일어나는 일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뼈를 분지르는 건 좀…… 힐링 팩터를 쓰면 멀쩡해지긴 해도 미안하니까.

    부러뜨리는 것보단 재우는 게 낫겠지.

    서의우는 권재진을 아껴 주고 싶었다. 겨우 찾아낸 그의 가이드이니 당연히 소중할 수밖에. 권재진의 입장에서 들었다면 이게 뭔 정신 나간 개소린가 싶었겠지만, 서의우는 진심이었다.

    그렇게 서의우는 권재진을 무사히 기절시키고서 계속 구멍에 박았고, 한참 후 재진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자 또 목을 졸라 기절시키고 또 구멍에 박았다.

    밤낮없이 좆질만 해 대다가 긴급 호출이 울린 뒤에야 겨우 이성을 되찾고 가이딩을 멈출 수 있었다.

    ***

    지금으로부터 1세기 전. 최초의 게이트 임팩트가 벌어지고, 게이트 안에서 각종 마물의 형상을 한 크리처가 쏟아져 나왔다.

    이후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 현상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크리처에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했다.

    인류의 종말을 방불케 하던 끔찍한 구시대의 말로.

    세계 인구의 42.1%가 사망하고 지표의 절반 이상을 크리처의 서식지로 빼앗긴 쓰디쓴 패배의 역사.

    그 후, 기적처럼 크리처에 대항하는 에스퍼와 가이드의 존재가 나타나며 멸망을 앞두던 인류는 간신히 회생할 수 있었고, 혼란에 빠져 야만의 길로 접어들던 인간 사회도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살아남은 각국은 가까스로 정부의 형태를 갖추어 크리처의 피해가 적은 지역으로 앞다투어 자국민들을 이주시켰다. 좁아진 영토에 적어진 사람을 모으고, 새로운 체계의 거주지구를 만들어 내 자국민들을 보호한 것이다.

    각성자들은 비각성자들을 지키기 위해 거주지구 주변에 보호막을 생성했고, 그들의 안전을 위해 순찰과 전투를 계속해 나갔다. 점차 생활 수준이 회복되고 물자가 안정되어 가자, 각국 수뇌부는 각성자들이 거주지구를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크리처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아 주기를 원했다.

    그전까지는 거주지구 안에서 옛 문명을 보존하고 인간 사회를 지속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면, 이제는 개척지구를 넓히고 크리처를 말살하여 종말 전 구시대와 같은 풍요를 이룩하는 것이 다음 목표가 된 것이다.

    혼란의 시대인 지금, 더 강한 각성자를 육성하고 파견하여 자원이 묻힌 땅을 영토로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부국강병의 지름길이었다.

    그렇게 각국은 각성자로 이루어진 군대를 조직했고, 그들을 엄격히 통제‧관리하며 부와 명예를 대가로 주고 점점 더 멀고 척박한 땅으로 파견해 나갔다.

    실상,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영토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는 게이트가 발생하고 있을 테고, 그곳에서 크리처가 쏟아져 나오는 중일 터이니 말이다.

    각성자들이 좁다란 거주지구만을 수호한다면, 그 외의 땅은 모조리 크리처에게 잠식당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수 세기 후, 불어난 크리처들을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사태로 이어질 터였다.

    그러기 전에 각성자들은 가능한 싸우고, 크리처를 죽이고, 게이트의 코어를 파괴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더 인류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죽이고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도, 서의우는 그 전투의 선봉에 있었다.

    키에에에엑!

    고주파를 내뿜으며 달려드는 거대 박쥐 β크리처의 눈에 총알을 박아 넣으며, 서의우는 평소보다 월등히 빨라진 신체 움직임에 내심 감탄했다.

    전투에 나서자 제대로 된 가이딩 효과가 실로 체감됐다.

    미처 몸속에 억누르지 못하고 절로 새어 나오던 이능이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하게 잠잠해져 있었고, 심연 속에 붙들어 둔 새카만 괴물 녀석도 드러나지 않게 얌전히 또아리를 틀고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서의우는 실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염동력을 이용해 사방에서 날아드는 박쥐의 두개골을 연이어 부수었다. 뇌수가 폭죽처럼 터지고 살점이 사방에 흩어지자 까마득한 밑에서 전투 중인 다른 각성자들이 질색하며 오물을 뒤집어썼다.

    서의우는 스스로 하늘을 날아 편하게 전투하지만, 다른 각성자들은 땅에 붙어서 전투하느라 고생이 참 많다.

    -서 대위. 이능을 남발하지 마라.

    홀로그램이 떠 있는 고글 송수신기에서 중령의 지시가 들려왔다. 제1특임부대 지휘관 장태산 중령이다.

    그는 불혹의 나이가 지나도록 전사하지 않고 생존한 베테랑 A급 에스퍼였다.

    “시정하겠습니다, 장 중령님.”

    서의우가 웃음기를 내리누르고 답했다.

    남발이라니, 무슨 소리.

    감추어 둔 본연의 힘은 조금도 끌어내지 않았고, 겉으로 새어 나오는 부분만 아주 조금 사용한 것인데도 바로 지적이 들어온다. 장태산 중령은 감이 좋아 각별히 주의할 상대였다.

    -폭주 위험도는?

    “20% 미만입니다.”

    -꽤 적은 수치로군.

    “이번 분기 지급된 신약 효과가 탁월합니다. 상성이 맞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희소식이로군. 그렇다 해도 가이딩 대체 약물에 너무 의존하진 마라. 물자가 떨어지는 상황에 항시 대비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 중령님.”

    물론, 이런 장 중령조차도 서의우의 새빨간 거짓은 간파하지 못했다.

    맞지도 않는 신약 효과가 탁월하다는 둥, 이런 거짓말 축에도 못 끼는 사소한 것 말고.

    서의우에게는 훈련 교육생 시절부터 목숨을 걸고 지속해 왔던 뿌리 깊은 거짓말이 몇 가지 있었다. 남들처럼 먹고, 자고, 멀쩡한 척 시늉했던 것도 그렇고, 사실은 그보다 더한 폭탄도 숨겨 두었다.

    서의우가 사실은, 겉으로 넘치는 이능만으로 S급 에스퍼 판정을 받았고, 캄캄한 심연 속에 가라앉힌 거대한 힘은 등급 테스트 때 단 한 번도 끄집어내지 않았다는 비밀이 발각된다면…… 센터 측에서 과연 어떤 조처를 할지.

    서의우가 이십 년 동안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했어도 폭주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그가 본연의 힘을 단 한 번도 끄집어내 사용한 적 없기 때문이었다.

    끝을 헤아릴 수 없도록 불길하고 사특한 괴물 같은 권능을 꺼내 다루려 했다가는 필연적으로 S급 가이딩이 필요해질 테니. 제대로 된 가이딩 없이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서의우는 본신에 깃든 그의 진정한 이능이 아닌 미처 억누르지 못하고 조금씩 새어 나오는 적은 힘만을 사용했고, 올바른 선택을 한 덕에 지금껏 맞지 않는 가이딩이나 대체 약물로도 어찌어찌 감당하며 대처해 올 수 있었다.

    그것도 이제는 옛일이 되겠지만.

    ‘……권재진.’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빗나가지 않고 정확히 박쥐에 총알을 박아 넣으며, 서의우는 권재진의 생각을 했다.

    한시라도 빨리 게이트 코어를 부수로 귀가하고 싶었다.

    그의 가이드, 권재진이 기다리고 있을 그의 집으로.

    한번 권재진의 생각을 하기 시작했더니 견딜 수 없도록 초조해졌다. 긴급 호출을 받고 경황없이 서둘러 나오느라 재진의 뒤처리를 해 주지도 못했다. 몸을 씻겨 주지도 못했고 기절한 상대를 그냥 침대에 방치해 둔 채 떠났다.

    아마 지금쯤 깨어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신경 쓰였다.

    ‘보아하니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던데.’

    완전히 미소를 지운 서의우가 소리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메마른 회색빛 눈동자가 고요하다 못해 삭막했다.

    감각이 과민해지며 심장 박동 소리, 맥박 뛰는 소리, 숨소리, 하물며 눈 깜빡이는 소리마저 또렷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몸 상태가 좋다고 느꼈는데, 지금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부족하다. 한참은 더 부족하다.

    서의우는 권재진의 얼굴과 눈빛, 목소리를 떠올려 보다가 자연스레 재진의 몸을 생각했다. 붉게 벌어지는 혀와 입, 품에 안기 좋은 말랑하고 모양 잡힌 근육, 올라붙은 엉덩이, 비좁고 빠듯했던 안쪽 구멍……. 한번 처박을 때마다 속살이 뭉그러져서 달라붙는 게 끔찍스럽게 좋았다.

    권재진과, 그의 가이딩에는 단순히 기분이 좋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서의우는 지금 이 순간조차 임무고 게이트고 때려치우고 권재진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좌표 이동으로 날아가서, 권재진의 입이든 엉덩이든 가리지 않고 온갖 구멍을 비집고 자신을 쑤셔 박는 것이다. 긴급 호출이 있기 전까지 내내 가이딩만 하다 왔는데도 또 가이딩 생각을 하니 아랫배가 묵직해지고 다리 사이가 불편해졌다.

    ‘하. 내가 왜 이러지…….’

    서의우가 어금니를 짓씹으며 상념을 털어 내려 했다. 다른 각성자들은 아래에 있고 그 혼자 허공에 떠 있는 상황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전투 도중에 발기한 사실을 들키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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