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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41)화 (41/154)
  • #41

    “나랑 재진 씨가 뭐가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든, 결국은 지금처럼 됐을 거예요. 3년은 싸웠더라도 4년이 되었을 땐 날 좋아했다면서요.”

    “…….”

    “나도 그래요. 뭐가 어땠든 재진 씨랑은 지금 같았을 것 같아요. 재진 씨가 돌연변이가 아니었어도, 정식 각성자로 태어나 더 일찍 내 가이드가 되었어도 결국은 이랬지 않았을까요.”

    “…….”

    “난 항상 재진 씨를 원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이뤘을 거고.”

    그런가…….

    둘은 결국은 이렇게 되었으려나……?

    권재진이 회귀했든 회귀하지 않았든, 돌연변이든 아니든, 무슨 일이 있었든…… 결국에는 함께하게 되었으려나……?

    아니. 아무래도 그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 같다만, 지금에 와서는 딱히 반론을 제기할 필요 없어 보였다. 서의우가 권재진을 얼마나 미친 지경으로 갈구하는지는 권재진도 뼈저리게 잘 안다.

    “예, 그럼 그냥…… 그렇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런 거예요.”

    서의우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안에 보이지 않는 격렬한 힘이 나선 형태로 모여들었다.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차츰 한점으로 응축되고 모여든다.

    “…….”

    권재진이 말없이 두 눈을 내리감았다.

    차라리 권재진의 기억을 서의우가 전부 읽어 버린다면, 지난날의 일을 온전히 터놓을 수 있어 더 편해질지 모르겠다.

    그러면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장벽도 없어질 것이다.

    서의우는 모르는 4년을 알아내려 할 필요 없겠고,

    권재진은 잃어버린 4년을 그리워할 필요 없겠고.

    ‘처음부터 진작…… 이랬어야 했을지도.’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려 잘된 일이다.

    온 집 안의 조명이 깜빡거리며 점멸했다. 뉴스 채널에 맞춰 켜 둔 TV도 지지직대더니 화면이 까맣게 꺼져 버렸다.

    마치 거실에 천둥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단단하게 뭉치고 모여든 이능이 대단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서의우와 함께 자라난 억눌린 괴물, 심연 속에서 꿈틀거리는 깊고 검은 것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그가 시간을 들여, 더욱 끈기 있게 이능을 이끌어 내자 전에 비할 수 없도록 강력하고 순수한 힘의 덩어리가 현존하는 어떤 보석보다 더욱 찬란하고 영롱하게 빚어졌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고, 알 수 없지만 두려운 힘이다.

    서의우가 길게 심호흡하며 권재진을 품에 안았다. 재진은 저항 없이 그에게 몸을 내주었다. 팔다리에 힘을 풀고 가만히 순응하며 곧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 서의우의 침입을 기다렸다.

    “들어갈게요.”

    그의 손끝이 이마 중앙에 닿았다. 곧, 기억 속으로 깊게 밀려 들어갔다.

    ***

    02. 1회차 서의우

    제6 거주지구. 달빛이 흐린 이슥한 밤.

    골목길을 비추던 가로등이 차례로 터져 나가고 불빛이 요란하게 점멸했다. 통제를 벗어난 이능이 요동치며 주변을 차례로 짓뭉갰다.

    서의우는 진즉 한계를 넘어 있었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희미한 이끌림이 느껴졌다. 그에게 맞는 가이드의 존재를 검고 불안정한 거대한 심연이 끈질기게 추적했다.

    각성자가 민간인 거주지역에 허가 없이 드나드는 짓은 해서는 안 될 금기 사항이었다. 본래라면 그렇지만 당장 서의우는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가 타고난 이능이 온몸을 뒤흔들며 전력으로 고함치고 있었다.

    저곳이다.

    저곳에, 그의 가이드가 있노라고.

    어둠을 틈타, 서의우는 맹금처럼 목표한 인물을 단박에 붙잡았다.

    거침없이 권재진의 목을 조르고 어두컴컴한 골목 깊숙이 밀쳐 넣었다.

    “커헉!”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지만, 상대를 제대로 찾았는지 한번 가슴을 눌러 보았다.

    권재진의 심장 안쪽, 작고 불완전한 핵이 느껴졌다.

    각성자만이 지닐 수 있는 핵이다. 대개는 타고나지만, 이렇게 뒤늦게 발현하여 돌연변이가 된 경우도 간혹 있다.

    “맞네. 당신이잖아.”

    “으, 큭……. 뭐가…….”

    “내 가이드.”

    권재진의 핵에 근접하자 서의우의 핵이 공명하듯 가슴 속에서 찌르르 떨렸다. 완벽했다. 폭포처럼 거센 환희가 쏟아질 정도로 완벽한 매칭이었다.

    “에, 스퍼님……. 뭔가, 착, 각하신 모양이십니다. 놔주십시오.”

    권재진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그다지 세게 목을 조르지도 않았는데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렇다지만 뭐가 어쨌든 서의우는 상관없었다. 그는 당장 그의 가이드와 가이딩 하고 싶어 심장에 박힌 핵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한시 빨리 점막을 빨고 좆을 쑤셔 넣고 싶어 눈이 벌겠다.

    “아닌데요. 착각. 지금 확인해 볼까요? 당신이 나와 매칭되는 가이드가 맞는지, 아닌지.”

    빨리, 빨리, 어서, 빨리!

    “입 좀.”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권재진의 옷을 찢어발기고 덮쳐 누르고 싶었다. 그렇다지만, 이곳은 제6 거주지구다. 발각되면 권재진은 즉시 사살당하고 서의우는 징계를 면치 못할 터. 아니, 어쩌면 징계만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 또한 통제 불가능 판정을 받고 살처분당할지도.

    서의우가 강압적으로 권재진의 입을 비집었다. 혀를 빨아야 하는데, 눈앞의 돌연변이 가이드는 아직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를 악물어 저항하기에 서의우는 잠시 속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가이드가 가이딩을 거부하는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건 가이드의 의무이자 존재 의의였다. 각성자의 사명이다.

    아…… 음, 돌연변이라 그런가?

    서의우는 사소한 의문을 삼키며 장갑 낀 손으로 권재진의 턱관절을 비틀어 열었다. 억지로 혀를 밀어 넣어 입 안의 점막에 접촉하자 그의 본능이 새하얀 희열에 떨었다. 그건 멈출 수 없는 유혹이었다.

    살짝 확인만 하고 바로 특수 거주지구로 데려갈 생각이었다만, 도무지 입을 뗄 수 없었다. 상대의 혀를 빨고, 빨아서 죄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핥고 비비고 마찰해야지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 정도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으큭, 떨어져, 헉…… 하아!”

    “음…….”

    한참 재진의 혀를 물고 빨던 서의우가 느릿하게 떨어졌다. 혓바닥 사이로 점성을 띤 실이 이어지다 톡 끊긴다. 서의우는 그것조차 아깝다는 듯 입 안으로 낼름 삼켜 먹었다.

    “봐, 되잖아요. 가이딩…….”

    서의우가 가로로 길게 뻗은 눈을 휘며 읊조렸다.

    저릿한 열락에 들떠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기세다.

    온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고, 자연히 입가에 벅찬 미소가 맺혔다. 얇고 긴 미려한 속눈썹을 떨면서 이제야 권재진의 모습을 똑바로 살폈다. 좀 전까지는 경황이 없어 권재진의 얼굴 생김새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권재진은 딱 맞는 정장에 넥타이 차림이었고, 검고 단정한 직모였으며, 소리 없이 빛나는 눈동자 또한 어둠처럼 새까맣고 단단했다. 이목구비 형태가 분명했고, 또렷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참 흔들림 없이 꼿꼿한 사람이었다.

    숨을 거칠게 헐떡거리면서도 서의우를 쏘아보는 표정 자체는 큰 변화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무표정한 모양이다.

    과연, S급 가이드는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처음 봤다.

    현존하는 가이드의 정점. 최초의 S급 가이드.

    그가 하필 돌연변이로 각성한 것이 통탄할 따름이었다.

    “내게 맞는 가이드는 당신이에요. 여태 이런 구석에 박혀 있었다니, 그러니까 줄곧 못 찾았지.”

    서의우는 흡족하게 속살거리며 권재진의 목을 틀어쥐었다. 혹여 소리를 지르거나 하면 곤란해지기에 이성이 남아 있는 지금 어서 순간 좌표 이동으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아닙니다. 크흑, 가이드라니, 그럴 리 없, 헉……. 우선, 그윽, 이 손 좀 놓, 놓아주십시오! 숨이…….”

    권재진이 몸을 비틀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시도했다. 서의우는 재진의 가슴을 골목길 벽에 짓누르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을 주었다. 권재진이 서의우를 걷어차려 발길질했지만, 당연히도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하하. 맞다니까요 글쎄.”

    서의우는 마음먹으면 권재진을 한 손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더욱 마음먹으면 손을 쓰지 않고 염동력만으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도 딱히 그렇게까지 억압하고 싶진 않았다.

    이제야 겨우 만난 그의 가이드인 데다가, 조금 전에 스치듯 했던 가이딩만으로도 너무도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내 가이드. 당신 내 가이드야…….”

    서의우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좌표 이동 했다. 어둠으로 물든 골목에 플래시가 터지듯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우리 얼른 가이딩 해요.”

    좁은 관을 통과해 넓은 공간에 나간 것처럼 단숨에 시야가 바뀌었다. 특수 거주지구, 벽과 천장이 모두 통유리로 둘러싸인 서의우의 바닷가 저택 침실이다.

    서의우는 좌표 이동에 익숙했기에 태연히 침대 위에 권재진을 덮쳐 눌렀지만, 권재진은 그렇지 않았다. 좌표 이동을 처음 경험한 탓에 어지럼을 느끼는 모양이다. 몇 번 겪어 보면 금세 적응한다만 처음이면 뒤집힌 신체 감각이 생경해서 힘겨울 수 있다.

    “으, 아아…….”

    권재진이 초점 없는 눈으로 침실을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갑자기 장소가 바뀐 건지 상황 파악이 덜 됐고, 게다가 어지럽기까지 해서 얼이 빠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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