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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37)화 (37/154)
  • #37

    정신없는 며칠이 지났고, 일단은 이사 준비부터 하기로 했다.

    언제까지고 거실 터진 집에서 지낼 수도 없으니, 급한 대로 필요한 짐만 챙겨 임시 거처로 옮길 계획이었다.

    신축 주택은 완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그동안은 적당한 집에 머물기로 했다. 물론, 서의우 기준에서 적당한 집이라고 해 봐야 호화 저택일 테지만 말이다.

    권재진이 산도 좋다고 말해서 그런지 서의우는 순식간에 인적 드문 산꼭대기에 하나 있는 프라이빗 별장을 구매했고, 계약과 동시에 잔금을 일시불로 치렀다.

    집을 무슨 슈퍼에서 과자 사듯 하는 그를 보고서 권재진은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어쨌든 이사는 결정 사항이었고, 이젠 옮겨 살 집도 생겼으니 짐만 싸면 할 일은 끝났다.

    재진은 2층 자신의 방에서 충동구매로 샀던 물건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일단, 러닝 머신을 비롯한 운동 기구는 모두 가져갈 것이고 쓸데없이 과소비한 이백칠십만 원짜리 빨간색 강아지 목줄이나 백육십만 원짜리 강아지용 물그릇 등은 어디 좋은 단체에 기부할 생각이었다.

    권재진이 하나씩 짐을 정리해 나가는 동안, 서의우는 재진의 옆에 떡하니 달라붙어 있었다. 강아지 목줄을 들어 재진의 목에 슥 대 보았다가 거센 질타를 받는 등 평온한 시간을 함께했다.

    “슬슬 더 어려운 요리 도전해 보고 싶은데. 재진 씨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뭔가요?”

    “전 가리는 거 딱히 없습니다. 재료 비싼 거 사용하면 여간해선 다 맛있더군요. 아……. 매운 음식은 잘 못 먹는 편이긴 합니다.”

    “매운 거라. 알겠어요. 근데, 그래도 한식이 좋은지 양식이 좋은지 정도는 있을 거 아니에요.”

    “굳이 꼽아 보자면 한식인데…… 비 오는 날에 부침개가 먹고 싶긴 합니다.”

    “부침개구나. 해 볼게요.”

    권재진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향수를 칙 뿌려 보았다. 향이 그다지 취향이 아닌지라 옆으로 치워 두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서의우가 슬그머니 물었다.

    “입맛 취향은 알겠고, 다른 취향은?”

    “다른 취향?”

    “뭐…… 선호하는 향이라거나, 불호하는 색이라거나.”

    “아.”

    권재진이 티 나지 않게 눈을 내리깔았다. 순간 이상한 걸 묻는 줄 알았다. 서의우라면 능히 그럴 것 같았다.

    “음, 제6 거주지구 있을 땐 남성 향수 우디 계열 썼습니다. 색은 뭐, 글쎄요. 무채색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날씨는 뭐가 좋나요.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당연히 맑거나 흐린 날 아니겠습니까. 하늘에서 뭐 떨어지는 날은 출근하기 힘듭니다. 교통 막히고.”

    “뭐야, 이제는 출근할 필요도 없으면서.”

    “……그러면 아무 날씨든 상관없습니다.”

    “계절은요? 무슨 계절이 좋죠?”

    “……봄. 또는 가을.”

    “어째서?”

    “냉방비, 난방비가 안 듭니다.”

    단조롭게 대꾸하는 재진의 옆모습을 보고서 서의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쿡쿡거리며 벽에 기대어 팔꿈치를 짚고 턱을 괴었다.

    “아,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다. 권재진 씨는 현실적인 사람이네요.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가이딩에 보수를 요구하기도 했죠.”

    이런 실없는 대화를 하며 저런 즐거운 표정을 짓는 서의우는 정말 스무 살처럼 보였다. 평범하게 살아온 평범한 스무 살 말이다.

    “정당한 대가를 요청한 겁니다, 그건.”

    권재진은 서의우의 대화에 장단을 맞춰 주고 있는 자기 자신을 알아채고선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하고 앞날이 꽉 막혀 보였는데, 지금 이렇게 아무 긴장 없이 풀어져 서의우와 시시콜콜한 질의응답 놀이나 하고 있다는 게 이상할 따름이었다.

    “알아요. 재진 씨에게 준 카드, 한도 없는 거니까 마음껏 써도 돼요.”

    “예예. 지금도 충분히 마음껏 쓰고 있습니다.”

    “지금이요? 내역 보니 뭐 쓰지도 않던데. 찔끔?”

    “저는 서의우 씨처럼 고급스럽고 잘난 취향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미술품이니 와인이니 하는 건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보석 같은 데 관심 있는 것도 아니고. 써 봤자더군요.”

    “아하, 재진 씨는 내 취향도 알아요?”

    “…….”

    “얼마나 아는데요. 나 다 알아요?”

    서의우가 자신의 턱을 괸 손 검지로 하악 관절을 툭툭 두드렸다. 느릿하고 규칙적인 리듬으로 치며 기다란 눈을 슬쩍 접었다.

    “다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그냥?”

    “그냥…… 알 만큼은 아는 것 같습니다.”

    권재진은 제게로 내리박히는 시선을 애써 모른 척 무시해 가며 휘황찬란한 명품시계들을 케이스에 쑤셔 넣었다.

    “그렇구나. 그럼 말해 봐요.”

    “뭘 말입니까.”

    “서의우에 대해서. 재진 씨가 아는 만큼.”

    “그런 걸 왜 시킵니까? 안다는 대도.”

    “들어 보고, 재진 씨가 모르는 내가 있으면 알려 주려고요. 어디 말해 봐요.”

    “됐습니다. 그만하죠.”

    “하, 나 이건 확실히 알겠어요. 권재진 씨가 제일 많이 하는 말. 2위는 분명 됐습니다일 거예요.”

    “…….”

    “1위는 싫습니다고.”

    서의우가 고개를 높이 치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곧게 뻗은 목선이 하얀 자작나무처럼 유려했다.

    회색 눈동자가 한결 건조하게 식는가 싶더니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한 투로 물었다.

    “재진 씨, 나 눈 핥아 봐도 돼요? 눈꺼풀 안쪽, 잠깐만.”

    권재진이 숨을 삼키며 즉답했다.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눈 점막은 무척…….”

    “예, 효율적인 가이딩 스팟이죠. 압니다. 싫습니다. 천지가 개벽하더라도 싫습니다.”

    어째 서의우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마침 짐 싸기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기에 권재진은 손을 툭툭 털고 방에서 일어났다.

    “다 끝났으니 그만 나갑시다. 이것들만 옮기면 될 것 같군요.”

    방을 벗어나는 권재진의 뒤에 서의우가 느긋하게 따라붙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뒤에서 재진의 허리에 팔뚝을 감고 손까지 잡았다. 그냥 자동이다.

    “그래도 미래의 나한테는 핥게 해 줬겠죠?”

    “아니요. 끝까지 허락 안 했습니다. 그렇게 원하면 눈꺼풀 도려내고 핥으라고 개지랄 떨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도려냈나요?”

    “미쳤습니까?”

    “아, 난 또.”

    재진이 서의우를 옆구리에 달고 2층 복도를 터벅터벅 가로질렀다.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데, 서의우가 층계참에서 돌연 멈춰 섰다.

    휘감은 팔뚝이고 붙든 손이고 놓아주지 않고 저 혼자 걸음을 멈추니 권재진마저 따라 브레이크가 걸렸다.

    “뭡니까?”

    억지로라도 핥아 댈 생각인 건가?

    권재진이 서의우를 쏘아보았다. 새까만 동공에 그가 한가득 담겼다. 위기감이 인다.

    서의우는 군침을 삼키는 개처럼 권재진의 눈알을 탐내고 있었다. 이질적으로 빛나는 뜨거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서의우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대뜸 재진의 턱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을 비집고 혀를 밀어 넣었다.

    난데없이 키스당한 재진이 난색을 보이며 고개를 피했다.

    “아니, 뭐냐고.”

    거듭 묻자 서의우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답했다.

    “눈 싫은 건 알겠고, 혀는 아니잖아요. 내가 혀 빨아 주는 거 나쁘지 않죠?”

    서의우가 재진을 뒤로 몰아세웠다. 층계참은 공간이 상대적으로 좁았고 그 좁은 벽면 전체에 커다란 유리창이 붙어 있었다.

    서의우는 권재진의 등을 유리창에 기대게 하고서 얼굴을 근거리에서 세밀하게 바라보았다. 속눈썹 한 오라기까지 다 들여다보일 것 같았다.

    “나도 조금은 알아요. 내가 뭘 하면 재진 씨가 어떤 반응 하는지.”

    서의우가 권재진의 뺨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매끄럽고 모양 좋은 입술이 광대뼈 아래에 꾹 파묻혔다. 그 상태로 서의우가 속살거렸다.

    “재진 씨는, 내가 입술 문지르는 건 어지간하면 다 받아들여요. 특히 이런 곳은.”

    뺨에 이어 턱, 목, 그리고 귀에 연이어 그의 입술이 닿았다. 머리카락에도 입 맞추곤 권재진의 손을 들어 손바닥과 손등에도 키스했다.

    부드럽게 입술을 떼어 낸 서의우가 정답지를 체크해 보듯 권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재진은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근데, 이를 세우거나 혀로 핥으면 조금 피해요. 움찔댄다고 해야 하나……?”

    서의우가 목덜미를 깨물었다. 조금 힘주어 잘근거리자 권재진이 흠칫거렸다. 그가 말하는 대로 똑같이 반응해 버린 것 같아 찝찝했다. 다짜고짜 물려서 놀란 탓에 그런 거지, 움찔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참으로 대단하군요. 권재진 박사 납셨습니다. 그러니 슬슬 그만하고 치우……”

    “아직요. 손으로 만지면 또 다르거든요. 유독 피하려 드는 곳이 몇 군데 있어요.”

    권재진이 말을 하는 틈에 벌어진 입 안에 서의우가 손가락 두 개를 꾹 밀어 넣었다. 검지와 중지로 혓바닥을 누르고 손끝에 힘을 주어 촉촉하고 말캉한 속살을 슬슬 문질렀다.

    “입 안쪽. 여기. 손가락 비집어 넣으면 항상 피하려 해요. 민감한 건가, 혓바닥 비비면 특히 힘들어하고.”

    “윽, 우!”

    “이상하죠, 혀를 빨아 주는 건 받아들이면서 혀를 손으로 건드리는 건 왜 거절하는 걸까요. 이렇게 살살 만지는데도.”

    서의우는 계속해서 혓바닥을 만지작대는 채 반대 손으로 후드티를 걷어 올렸다. 손목으로 옷을 젖히고 커다란 손을 옆구리를 딱 붙여 갈빗대를 쓸어 올렸다. 잘 짜인 근육과 그 속에 박힌 뼈 하나하나 집중해서 매만지고는 커다란 가슴과 팔뚝 사이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었다.

    겨드랑이 안쪽, 여린 살갗을 감질날 정도로 느릿하게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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