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35)화 (35/154)
  • #35

    “그나저나 재진 씨 이젠 대답 잘 해 주네요. 무시 안 하고.”

    “예, 뭐.”

    “그럼 나 궁금한 것 좀 몇 가지 물어봐도 돼요?”

    “뭔데 그럽니까.”

    “4년 후에 말이에요. 내 어디가 좋았어요?”

    서의우가 재진을 안고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몸을 움직인 게 아니고 이능을 사용한 것이다. 오르골 위에서 움직이는 장식품처럼 바다 위에서 원을 그렸다.

    허공에서 두 사람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천천히, 즐기듯이 회전한다.

    “4년 후엔 내가 지금 모습과 많이 달라지나요?”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다.

    서의우가 하는 말은 대개 다 이상하고, 신기하고, 골 때렸다. 재진이 신중하게 답했다.

    “그렇군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르긴 합니다.”

    “아, 그렇게 말하니 확인해 보고 싶네요. 그때 좀 깊게 읽어 둘 걸 그랬나……. 재진 씨 머리 다시 보면 안 될까요? 이번엔 제대로.”

    “안 됩니다. 다신 허락 안 할 겁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다고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봐서 뭐 할 겁니까.”

    “야박하긴. 그냥 알고 싶을 수 있잖아요. 이것저것. 재진 씨는 이미 내 정보 대부분 알 텐데. 지금 내가 권재진 씨에 대해 아는 정보라곤 게이트에 휩쓸려 사망한다는 것뿐이에요.”

    “…….”

    “이 말랑한 팔다리가 제각각…… 잔인하던걸요, 아주?”

    서의우가 재진의 어깨에 턱을 파묻었다. 그를 몸으로 감싸 지켜 주기라도 하듯 힘주어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괴롭게 죽도록 놔두지 않을게요. 내가 제대로 지킬 테니, 날 그 안에 좀 더 들여보내 줘요.”

    재진이 커피를 연거푸 들이켰다.

    목이 탔다.

    서의우가 딱 달라붙어 끌어안고 있어 다행이었다. 이 자세라면 표정을 들키지 않을 테니.

    “……그래도 굳이 머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까? 알고 싶은 건 그냥 제게 물어보면 되잖습니까.”

    “궁금한 게 많으니 그렇죠.”

    “차례차례 하십시오. 간단한 거, 답하기 쉬운 것부터.”

    서의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질문을 시작했다.

    “재진 씨, 몇 살이에요?”

    “서르…… 아니, 지금은 스물여섯입니다.”

    “저보다 여섯 살 연상이네요.”

    “회귀하기 전에는 서른이었으니 정신 연령으로만 계산하면 열 살 연상인 겁니다.”

    지금 서의우는 고작 스물 먹은 애송이다. 이러니 서른 먹은 권재진이 애 키우기 해야지, 별수 있겠나?

    “그런 계산은 좀 치사하네요. 그럼 제6 거주지구에서는 무얼 하며 지냈나요?”

    “평범하게 회사 다녔습니다. 금융 관련 기업이었고.”

    “그럼 취미는요? 암벽 등반했었다면서요.”

    “아…… 운동 좋아했습니다. 러닝 뛰고 헬스 하고.”

    “요리는? 요리 왜 그렇게 잘하죠.”

    “허, 요리는 전적으로 서의우 씨 탓입니다. 4년씩이나 집 안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며 삼시 세끼 밥상 제 손으로 꼬박꼬박 차려 먹었는데 실력이 안 늘고 배깁니까? 뭣하면 서의우 씨가 좀 차려 주시든가요.”

    “뭐야, 그런 거였나. 나 때문이었구나……. 알겠어요. 이제라도 내가 요리 배워 볼게요.”

    “……됐습니다, 뭘 인제 와서 갑자기…….”

    “아녜요, 내가 배울게요. 그러고 싶어요.”

    “…….”

    “그리고 또? 미래의 나에게 뭐 불만 같은 거 없었나. 다 말해 봐요.”

    “하…….”

    권재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회차 서의우 이야기는 그다지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구태여 2회차 서의우에게 숨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싫었다.

    그래서 짧은 망설임 끝에 있는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답해 줬다.

    “서의우 씨는…… 너무 울었습니다.”

    “뭐라고요?”

    “울고불고, 매달리고 애원하고 정말…… 무릎은 왜 그렇게 자주 꿇던지.”

    “내가 그랬다고요……? 내가?”

    “그런 거에 마음 약해지는 걸 알기라도 했는지, 몇 번이고…… 저는 정말 서의우 씨가 그럴 때마다 난처하고 곤란했습니다.”

    “…….”

    “사람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다른 뜻이 아니고 진정으로 시간이 필요한 것인데, 서의우 씨는 그 잠깐을 못 참고 저를 들쑤셔서, 제가…… 후우, 끝내 서의우 씨 하자는 대로 넘어갈 수밖에 없게끔 그랬습니다.”

    “말도 안 돼.”

    서의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토끼 눈을 떴다. 그 얼굴을 보고서 권재진이 헛웃음을 삼켰다.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삼자대면을 해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1회차 서의우와 2회차 서의우를 한자리에 모아다 놓고 나란히 앉혀서 말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말이 안 되죠. 그 말이 안 되는 짓을 서의우 씨는 항상 해 댔습니다.”

    “…….”

    “더 듣고 싶으십니까?”

    권재진이 조용히 손을 뻗어 서의우의 뺨을 그러쥐었다. 살짝 두드린 뒤, 바닷바람이 우아하게 휘날려 주고 있는 그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슬슬 춥군요. 들어갑시다.”

    서의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빛이 번뜩이지도 않았고, 주위 풍경이 바뀌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 손을 들어 권재진이 하던 것처럼 재진의 뺨을 쓸어 올렸다. 살짝 굳어 있는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이목구비 형태를 그려 보듯 손끝으로 하나하나 짚었다.

    “재진 씨의 4년 후 얼굴이 보고 싶네요. 어떻게 바뀌었을지 세세히 뜯어보고 싶어요.”

    “…….”

    “4년 전 얼굴도요. 그러니까…… 나를 전혀 모르고, 우리가 정말로 처음 마주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해요.”

    그가 검지로 눈썹을 쓸었고, 광대뼈를 따라 얼굴 윤곽을 훑었다. 입술을 툭 건드리더니, 권재진조차 처음 보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내가 모르는 권재진 씨가 너무 많아요. 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서의우의 여간한 얼굴은 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보지 못한 얼굴이 남아 있었나 놀랍다.

    “난 가뜩이나 여섯, 열 살이나 어린데.”

    “…….”

    “이걸 언제 다 따라잡지?”

    느른하고 묵직하게 내리깔려 읊조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사방에 빛이 퍼졌다.

    거실이 새까맣게 탄 서의우의 저택 주방으로 돌아왔다. 두 발이 서서히 땅으로 내려왔고, 발끝부터 시작해서 발꿈치까지 느릿하게 마룻바닥 위에 안착했다.

    “재진 씨, 나 요리할래요. 가르쳐 줘요.”

    서의우가 후드 소매를 걷으며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권재진은 오도카니 서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서의우는 정말로 요리를 배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자긴 먹지도 않을 거면서 가르쳐 달라는 게 황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래. 애가 알려 달라는데, 알려 줘야지 그럼…… 뭘 어째?’

    어차피 곧 있으면 아침 식사 시간이 된다. 상 차릴 겸 서의우를 조수로 부려 먹어야겠다. 가장 쉬운 것부터 가르치면 되겠지. 판단을 마친 재진이 서의우에게 손을 씻게 하고 유리 볼과 날달걀을 넘겼다.

    “그릇에 달걀을 까 보십시오. 이렇게.”

    권재진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달걀 하나를 쥐어 그릇에 톡톡 치곤 깔끔하게 껍질을 반으로 갈랐다. 샛노란 노른자와 투명한 흰자가 그릇에 쏙 들어갔다.

    “네, 이렇게?”

    서의우가 달걀을 쥐었다. 그릇에 툭 치자마자 껍질이 와그르르 뭉개지며 깨졌다.

    “어, 이게 왜.”

    “서의우 씨는 힘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그렇지, 힘 조절. 그걸 터득해야 제 몸도 편하겠군요. 거기 있는 달걀 다 깨 보십시오.”

    “…….”

    그때부터 서의우가 달걀과 싸우기 시작했다. 권재진은 고군분투 중인 서의우를 오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중에는 서의우도 식사를 하게 된다지만, 이렇게 주방에 들어와 요리하려 했던 적은 없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권재진을 위해 뭔가 해 보려는 것 같아 나름 기특했다.

    “아, 잠시만. 서의우 씨 앞치마 두르고 합시다.”

    재진이 검은색 앞치마를 가져와 서의우의 허리에 둘러 주었다. 그의 등 뒤에서 손을 넣어 앞치마를 매 주려니 백허그한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권재진이 손을 멈칫거렸다.

    그의 넓은 등과 두꺼운 흉통에 시선이 내리박혔다. 눈길을 옆으로 돌리자 소매 걷은 야성적인 팔뚝이 시야에 들어왔다.

    회귀한 후로는 전투복 차림, 혹은 나체, 두 모습만 주로 보아 그런지 이런 평상복을 입은 서의우가 새삼스레 낯설어 보였다. 하물며 앞치마를 맨 서의우라니…….

    “재진 씨?”

    “아. 예.”

    멍하니 멈춰 있던 재진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다시 움직였다. 반으로 접은 검은색 앞치마가 서의우의 허리에 알맞게 감겼다. 재진은 그의 등 뒤에 매듭을 매 주고서는 멀찍이 떨어졌다.

    “이거 봐요! 성공했어, 벌써.”

    서의우가 달걀 세 개 만에 힘 조절을 터득했다. 좀 더 걸릴 줄 알았건만 습득력 빠르고 요령 좋은 녀석이다. 권재진이 슬쩍 칭찬을 던졌다.

    “잘했습니다.”

    “네. 하하.”

    “이제 거품기로 저어 보십시오. 달걀 물 풀어지게.”

    “젓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예. 한 방향으로 저어요.”

    달걀 요리는 가짓수가 많다. 계란말이, 계란찜, 계란국……. 하지만 서의우가 할 수 있을 만한 것을 떠올려 보면 스크램블드에그 정도가 적당할 터다. 권재진이 냉장고에서 우유와 생크림을 꺼내 왔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