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34)화 (34/154)
  • #34

    아.

    또다시 우주다.

    적막하고 광활한 공간, 토성 주변을 돌고 있는 82개의 위성이 보였다. 타이탄, 엔셀라두스, 미마스, 디오네, 이아페투스, 테티스, 히페리온, 에피메테우스…… 권재진의 꿈. 무의식의 발현.

    재진은 이번에도 우주로 도피하고 있었다.

    <죽을 예정이던 사람이 살게 되었는데, 다른 예정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일까요?>

    <말끔히 잊어버리는 게 나을 거예요.>

    <서의우가 아직도 권재진 씨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우주를 빌려 권재진의 내면이 외치고 있었다.

    이것으로 해결된 것 같냐고.

    서의우에게 회귀 사실을 밝힌 것만으로 권재진의 열망을 모두 이룰 수 있을 것 같으냐고.

    가까스로 기억은 지켜 냈다만, 문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권재진이 미래를 바꿔 놨다는 본질.

    서의우는 달라졌다.

    좋은 쪽으로 변한 건지, 나쁜 쪽으로 변한 건지 아직 판단할 수 없겠다만. 확실한 건 이전의 서의우는 이미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2회차 서의우는 1회차 서의우와 너무도 달라졌고, 권재진은 싫더라도 한 번은 실연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앞날을 모르겠다.

    무의식이 불안을 외치고 있었다.

    권재진은 잠든 내내 뒤척이며 우주와, 토성과, 82개의 위성을 꿈꾸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간밤의 꿈이 잔상처럼 희미해져 곧 잊었지만, 무의식의 저편에 가라앉은 불안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권재진은 아직, 사라진 서의우를 그리워했다.

    지나가 버린, 애증으로 점철됐던 4년의 세월을…….

    ***

    이럴 수가. 권재진은 할 말을 잃었다.

    ‘휘발유는 성능이 다르군…….’

    거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묘사하자면, 창문 유리만 빼놓고 다 탄 것 같다.

    아이보리 색 가죽 소파가 까맣게 익었고, 나비 주름 커튼과 순면 카펫은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게끔 잿더미로 변했다. 바닥에 깔린 마루도 타서 푹 꺼졌고, 벽지나 문틀, 문도 마찬가지다. 어디가 벽이고 어디가 문인지 구분이 안 되게끔 죄다 새까매졌다. 천장까지도 불씨가 튄 흔적, 스프링클러가 터진 흔적 등으로 난장판이고…….

    복도 앞에 선 재진이 거실을 보고서 하, 하곤 헛숨을 내뱉었다.

    이 폐허를 도저히 맨발로 지나갈 수 없겠다.

    슬리퍼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권재진을 따라 침실 밖으로 나온 서의우가 하품하며 물었다.

    “뭐 찾아요?”

    “……슬리퍼.”

    간밤에 권재진을 작살내 놓고 아주 단잠을 주무신 모양이었다. 제물을 희생양으로 바쳐 영생을 얻는 주술처럼, 가이딩으로 정기를 쪽 빨아 가 쾌적한 수면이라는 위업을 이룩했나 보다.

    개새끼.

    어째 서의우는 날이 갈수록 잘 자는 것 같은데, 권재진은 날이 갈수록 잠을 설치는 것 같다. 목덜미 뒤로 서늘한 냉기가 파고들었다.

    “슬리퍼 신어도 발 더러워질 것 같은데. 그냥 내가 옮겨 줄게요.”

    서의우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와 손잡자 두 사람이 나란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늘을 난다.

    염동력으로 온갖 물건을 들고 나르는데 사람이라고 못 그럴 이유 없었다. 서의우는 공중에 떠 있는 것이 걷는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디 가고 싶어요?”

    권재진은 만사를 체념하고 피곤한 표정으로 답했다.

    “……드레스 룸입니다. 옷 좀 입읍시다.”

    “아. 그래요.”

    서의우와 입씨름하기도 힘들다.

    옮겨 주면 옮겨 주는가 보다, 하늘을 날면 나는가 보다, 기분 좋아 보이면 기분 좋은가 보다, 쾌적한 숙면을 취했구나, 우리 애가 해냈다, 장하다…… 하고, 그냥 넘어가야지. 뭘 어쩌겠나.

    권재진은 풍선이 된 기분으로 두둥실 날아 드레스 룸에 도착했다. 아무 티셔츠와 아무 바지를 두 벌씩 꺼내 하나씩은 서의우에게 던지고 나머지는 자신의 몸에 걸쳤다.

    서의우는 항상 가이딩 후에 씻겨 주기만 하지 옷을 입혀 주진 않는다. 맨살끼리 접촉하는 걸 선호해서 그런지 꼭 나체로 두고 껴안아 잠을 청했다. 그래서인지 눈뜨자마자 옷을 챙겨 입는 게 권재진의 아침 일과가 됐다.

    아래위 다 입고 보니 연청바지에 흰색 후드티다. 서의우도 다 입었는지 돌아보는데, 그는 옷을 손에 들고서 느긋이 서 있기만 했다. 권재진이 옷 입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모양이다.

    “안 입습니까?”

    넌지시 재촉하자 서의우가 쿡쿡거리고 웃으며 끝없이 기다란 다리에 천을 꿰었다. 재진이 입은 것과 비슷하게 진청바지에 흰색 후드티였다.

    옷 종류별로 정리된 선반에서 두 벌씩 꺼내서 그런 모양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커플룩을 입은 기분이라 재진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서의우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는 일반인들 연애에 대해 무지하고, 서로 사귀어 애인이 된다는 것이 대체로 어떤 행위를 뜻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1회차 서의우도 권재진이 알려 주기 전까진 전혀 몰랐으니까.

    “다 입었어요.”

    “참 잘했습니다. 이제 주방으로 갑시다.”

    “네. 손잡아요.”

    서의우가 또 손을 내밀었고, 재진이 그 손을 잡았다. 옷을 걸쳤더니 문명인이 된 것 같아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주방에 도착했다.

    “요리하려고요? 재진 씨 배고픈가요?”

    “아니, 커피입니다.”

    샷 추가해서. 진하게.

    아무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아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진은 샷을 내리고 각얼음을 잔뜩 넣어서 뒷골이 당길 정도로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제조했다.

    빨대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켜는 재진의 모습을 서의우가 옆에서 또 유심히 쳐다봤다. 시선이 노골적이었지만 재진은 신경 쓰기 싫어서 대충 무시했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어디 또 가고 싶어요?”

    서의우가 손을 맞잡자 권재진이 커피를 든 채 위로 턱짓했다.

    “옥상.”

    “옥상이요? 거긴 왜.”

    “바다 있잖습니까. 위에.”

    “네, 그런데요.”

    “파랗던데.”

    서의우는 군소리 없이 눈을 휘었다. 사르르 휘어지는 유순한 눈매가 보기 좋았다.

    “조금 어지러울 수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배꼽이 빙그르르 돌았다.

    사방에 빛이 환했고 번쩍거리는 플래시가 연이어 터졌다. 눈이 부셔 고개를 돌렸는데,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권재진이 느릿하게 눈을 떠 보자 어느새 옥상이었다.

    탁 트인 하늘과 파도치는 푸름이 소리 없이 관람객을 반겼다.

    두 사람 주위로 자그만 빛 방울들이 반딧불이처럼 춤을 추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좋아요?”

    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저 먼바다 위를 가리켰다.

    “저기에.”

    “응?”

    “저기로 가 봅시다.”

    권재진이 서의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하늘을 날 수 있고, 순간 좌표 이동도 할 수 있다면, 바다 위를 날아 볼 수도 있지 않나? 밖에 나가면 안 된다지만 바다라면 보는 사람도 없고 들키지도 않을 거다.

    서의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그 나이 또래들처럼 평범하게 들렸다.

    “날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빠트리면 어쩌려고.”

    “빠트릴 겁니까?”

    “아뇨, 절대 아니죠.”

    다시금 빛이 환했다.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망망대해 한복판 위였다. 눈부신 햇살이 여러 빛깔로 산란하며 파도를 비추고, 하얗게 일어난 포말이 아름답게 넘실대며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에 튀었다.

    정말로, 빛이 환했다. 순간 좌표 이동의 흔적으로 환한 건지 아니면 이 광경이 눈이 부신 건지 구분할 수 없도록 밝고 밝았다.

    권재진은 일생일대의 특별한 경험에 내심 만족하며 가져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최고의 맛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며 먹어 본 커피 중 1등.

    재진의 입꼬리가 스르르 풀어졌다. 대개 무표정, 아니면 찡그린 표정만 짓는 직장인의 찌든 얼굴이 좀 부드러워졌다. 살며시 미소를 띤다.

    서의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재진 씨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권재진의 누그러진 얼굴을 망막에 새겨 넣었다.

    “이사 갈 집. 바닷가 말고, 그래서 바다는 별론가 했는데. 순전히 오해였네요.”

    “……알다시피 게이트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멀어지려고.”

    “그럼 그냥 또 바닷가로 갈까요? 다른 해변으로.”

    “딱히. 산도 좋습니다. 암벽 등반도 취미로 했고.”

    “아, 그런 걸 스포츠라고 하던가요? 일반인들이 하는, 익스트림 스포츠?”

    “예. 서의우 씨에겐 훈련의 일종이었겠지만…….”

    서의우가 팔을 뻗어 재진의 허리를 안았다. 권재진은 그냥 그러도록 놔두었다. 커피나 한 모금 더 삼켰다.

    “정했어요. 집을 여러 채로 해요. 산에도 살아 보고, 바다에도 살아 보고. 저랑 같이 옮겨 다니면 되잖아요.”

    “…….”

    “좌표 이동 할 수 있는데 어려울 거 없죠. 아침엔 산에 가고 저녁엔 바다 가고…… 재밌겠다, 그쵸?”

    권재진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곱씹어 보니 정말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다. 별장처럼 여러 채 갖춰 두고, 날마다 철마다 돌려 가며 집을 바꾸는 것이다.

    서민 출신인 권재진은 내 집 마련 자체를 기적이라 생각해서 다주택의 길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이건 월세살이 안 해 보면 모른다.

    어차피 줄곧 야근하느라 회사에만 사는데, 매달 월세로 월급이 뚝뚝 사라진다. 그뿐만이랴? 관리비는 또 어떻고. 식비, 교통비, 경조사비, 보험비, 통신비로 월급 구멍 뚫고 나면 남는 거 하나도 없고, 적금이나 쬐끔 드는 게 고작이다.

    있는 돈 없는 돈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대출로 자가 주택 구매 꿈을 이루려 해도 금리가 천장 꼭대기에 붙어 있고, 집값 시세는 이미 구름을 뚫고 저 하늘을 날고 있다.

    이런 서민의 삶을 서의우가 알까.

    모르겠지.

    권재진의 취미가 별다른 장비 없이 맨몸으로도 할 수 있는 런닝과 암벽 등반이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값비싼 도구를 갖추기엔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