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17)화 (17/154)
  • #17

    “이 저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쉬움도 남습니다. 신축 주택으로 이사하고 싶습니다. 신축 아니더라도 어디든, 바닷가 말고.”

    그래. 이사.

    여길 벗어나 새집으로 멀리 떠나는 거다.

    사실은 회귀했다는 비밀을 감추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이사였다. 4년 후 이 집 앞마당에서 게이트가 터지는 걸 알고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떠나야지 않겠는가.

    권재진이 살기 위해서는 필수로 집을 바꿔야 했다.

    “으음.”

    서의우가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얇고 긴 속눈썹이 아름다운 공예품처럼 길게 쳐졌다.

    잠시 그의 호흡이 느려졌고, 주위에 깔린 수증기가 서의우가 내뿜는 압력에 짓눌려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그럴까요? 이사할까요, 우리……?”

    “예. 되도록 빨리 떠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재진 씨……. 방금 말 돌린 거죠. 그렇게 옛날얘기 해 주기 싫었나요?”

    “옛날얘기? 아뇨,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느라 못 들었나 보군요. 귀에 서의우 씨 목소리가 안 들어왔습니다.”

    “네…… 뭐, 그래요.”

    서의우가 피식거리고 웃었다. 뒤이어 탁한 한숨 뱉는 소리가 들렸다.

    “됐어요, 재진 씨가 말해 주기 싫다면야. 과거는 더 캐묻지 않을게요. 지금 난 재진 씨가 좋아하는 것만 해 주고 싶으니까요. 환심 사야죠. 잔뜩.”

    “…….”

    “그리고 왠지 좀…… 직접 알아맞혀 보고 싶기도 해서. 안 듣는 게 낫겠어요.”

    하얀 거품 묻은 손이 다리 사이로 내려갔다. 허리 위까지 다 씻겨 놨으니 허리 밑을 닦아 줄 차례였다.

    만지는 손길이 꽤 조심스러웠다.

    혹여 재진이 또 아프다고 할까 싶어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이는 모양이다.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든지. 서의우의 목소리가 조금 잠긴 것처럼 들렸다.

    “있잖아요. 우리가 이사할 집은 아예 토대부터 새로 짓는 게 어떨까요. 입지랑 구조, 인테리어, 문고리 하나까지 다 재진 씨 취향으로 맞춰 주고 싶어요.”

    서의우가 느릿하게 반복해서 재진의 허벅다리를 쓸어내렸다. 무릎 뒤쪽 오금에 닿은 손끝이 접힌 살을 부드럽게 지그시 눌렀다.

    “재진 씨가 아주 좋아하도록.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게끔…….”

    권재진은 서의우가 내키는 대로 만지도록 내버려 두고는 또다시 보이지 않는 물 아래서 발끝을 움츠렸다.

    “저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권재진 씨 웃을 줄 알긴 하는 거 맞죠?”

    “……저도 남들만큼은 웃습니다. 당장 웃을 일이 없어 그렇지.”

    “그거참, 쉽지 않네요. 난 당장 가만히 있어도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데…… 행복해서.”

    “누가 뭐랍니까…….”

    “재진 씨, 나 너무 좋아요. 이상할 정도로. 너무 좋아.”

    “예, 예…….”

    ***

    목욕까지 마치고 나니 이제는 견딜 수 없도록 수마가 몰려왔다.

    권재진은 헛손질해 가며 샤워가운을 걸치고 눈을 반쯤 감다시피 한 모습으로 침실까지 걸어갔다. 서의우가 거듭 자신이 옮겨 주겠다고 말했지만 단호하게 필요 없다고 뿌리쳤다. 온몸이 삐걱거렸다. 죽겠다.

    재진이 침대에 풀썩 엎어졌고, 뒤따라온 서의우가 늘어진 재진의 뒷모습을 웃으며 지켜보았다. 하얀 샤워 가운을 꽁꽁 싸매고 누운 모습이 포대기에 싸인 아기 같다고 생각했으나 또 한 소리 들을까 봐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재진 씨, 자요?”

    “…….”

    “이제 자는 거예요?”

    권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답할 정신이 없었다.

    서의우가 푸슬푸슬 웃으며 젖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잠시 멈춰선 채 권재진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려 침대 옆 협탁을 열었다.

    서랍 안에 수면제와 양주 병이 난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서의우는 수면제 통을 따고 알약을 손바닥에 와르르 털어 부은 뒤, 물 대신 테킬라와 함께 한입에 삼켰다. 그 모습을 권재진이 실눈 뜨고 보았다.

    “……뱉어.”

    재진이 웅얼거렸다. 똑바로 발음하려 했는데 너무 졸렸다.

    “뭐야, 재진 씨 안 잤어요?”

    “그거…… 뱉으라고…….”

    “응?”

    서의우가 테킬라 병을 쥐고서 재진의 옆자리에 누웠다. 서의우는 샤워 가운을 걸치지 않았고 대신 허리춤에 커다란 수건 한 장만 두른 모습이었다.

    “이미 삼켰는데 어떻게 뱉어요. 보세요, 아.”

    서의우가 입을 벌려 깨끗한 입 안을 보여 줬다. 권재진은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서의우를 제대로 재워야 하는데, 재워서 불면을 해소해 줘야 하는데, 저 새끼는 아무것도 모르고 약이랑 술이나 처먹는다.

    졸린 기색 역력한 투로 재진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아서 서의우가 귀를 가까이 댔다.

    “뭐야.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은 잠을 잘…… 겁니다.”

    “하하, 잠꼬대해요? 아니, 잠투정인가?”

    “……자자……고.”

    “알았어요. 재진 씨 재워 줄게요, 내가.”

    서의우가 테킬라 병을 협탁 위에 치워 놓고 권재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이 규칙적이고 나른했다. 다정하기도 했고.

    이게 아닌데.

    권재진이 서의우를 재워 줘야 하는 건데.

    서의우가 권재진을 재워 주는 게 아니라…….

    아…….

    결국은 곯아떨어지고 만 재진의 얼굴을 보고서 서의우가 쿡쿡 웃었다. 무방비하게 풀린 얼굴을 숨죽인 눈으로 지켜보다가 그의 뺨을 손등으로 슥 쓸었다.

    피부와 피부가 닿을 때마다 가이딩으로 인한 쾌감이 소리 없이 번졌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손이지만 가이딩이 아예 차단되는 건 아니라서 기분이 좋았다.

    “후으.”

    작게 앓는 소리를 낸 서의우가 권재진을 세게 품 안에 끌어안았다.

    온몸이 꼭 겹쳐지도록 밀착하고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술과 함께 삼킨 수면제 약효가 도는 탓인지, 아니면 제대로 된 가이딩의 효과 덕인지, 혹은 그 둘 다 때문인지. 이대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와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불면의 성벽이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차츰 호흡이 가라앉고, 곤두서 있던 촉각에 경계가 풀렸다. 깎아지른 다이아몬드 조각상처럼 단단한 신체에서도 힘이 풀어져 느슨해졌다.

    권재진과 한데 얽혀 잠에 빠져들며, 서의우는 들끓는 희열을 느꼈다. 온 정신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참아 내야 했다. 서의우는 제 어깨에 걸린 생명의 무게를 알았다.

    어느 때건 그가 이성을 잃거나, 폭주하는 재앙이 벌어져선 안 됐다.

    정식 각성자가 아닌 돌연변이 가이드를 숨겨 주거나, 하물며 그 돌연변이에 필요 이상 의존하는, 이런 행위도 사실은…….

    해선 안 될…….

    이윽고 의식이 흐려졌고, 잠들어 모든 생각이 끊어졌다.

    ***

    몇 주쯤 시간이 흘렀다.

    만약 권재진의 삶이 소설이었으면, 지금쯤 ‘작가님! 제발 재진이 밥 좀 제대로 먹여 주세요! 애를 왜 자꾸 굶기시나요!’ 하는 댓글이 달리지 않았을까.

    기대에 부응하고자 재진은 쌀밥을 고봉으로 퍼 담았다. 새로 끓여 하루 동안 제대로 숙성해 둔 갈비찜은 젓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뼈가 쏙 빠지게끔 잘 물렀다. 간장 양념이 속까지 진하게 배어서 조금 짭짤했지만, 찰진 쌀밥과 함께 먹을 테니 괜찮다.

    밑반찬으로 가볍게 명란 계란말이에 전복 버터구이 만들고, 국물도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된장 두 숟갈에 고추장 반 숟갈 넣고 찌개도 간단히 끓였다. 거기에 배달시킨 포기김치와 파김치까지 정갈하게 썰어 놓으니 훌륭한 한 상 차림이 완성됐다.

    ‘2회차 서의우가 아니라 13회차 서의우가 온대도 이 밥상은 다 비우고 말 테다.’

    권재진이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다이닝 룸의 문을 걸어 잠갔다. 이번만큼은 제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본 게 언제쯤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지경이다.

    ‘잘 먹겠습니다.’

    재진이 수저를 들었다. 크게 한술 떠 올린 쌀밥에 큼직한 갈빗살을 떡하니 올렸다. 고슬고슬한 밥이 살짝 촉촉해지도록 숟가락으로 갈비 양념 국물을 톡 찍고 입으로 가져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미칠 듯 식욕이 당겼다.

    “재진 씨! 여기 있었네요.”

    에라이 시팔.

    문을 걸어 잠근 보람도 없이 다이닝 룸이 벌컥 열리고 서의우가 나타났다. 하기야 염동력으로 잠금장치를 풀어내는 건 서의우에겐 일도 아니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녀석 얼굴이 참 해맑고 청순해 보였다.

    “…….”

    권재진은 서의우가 제게로 오든 말든 보이지 않는 척 무시하곤 밥숟가락을 입에 욱여넣었다. 오늘은 정말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서의우보다 밥.

    가이딩보다 밥.

    오늘은 밥!

    권재진은 탐욕스러운 햄스터처럼 양 볼 가득 소갈비를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서의우가 방해하기 전에 한술이라도 더 뜨려는 강인한 의지가 보이는 저작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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