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16)화 (16/154)

#16

“미치셨습니까? 대놓고 맛이 가기로 작정한 건지. 뭔 노래를 부르는 겁니까, 지금.”

서의우 이 새끼, 뇌가 상했나? 무더운 여름철도 아니고 겨울이 오고 있는데 왜 맛이 간 걸까.

권재진이 경악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데도 서의우는 미려한 눈을 휘어 웃기만 했다. 물세례를 받고 젖은 머리칼을 느긋이 쓸어 올린다. 길고 얇은 속눈썹에 투명한 물방울이 장식처럼 맺혀 있다.

“왜 그래요, 농담 아니에요. 놀리는 것도 아니고. 권재진 씨 살성은 정말 말랑하고 쫀득한걸요.”

“뭔…… 개씹…… 또라이…….”

“자, 만져 봐요.”

서의우가 재진의 손목을 잡아끌어 자신의 팔뚝에 닿게 했다. 따뜻한 바위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겉보기엔 복숭아인데 속은 돌이다.

‘서의우는 딱복이군.’

그나저나 서의우의 몸이 단단하다 못해 딱딱한 건 권재진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와 살 붙이고 산 세월이 얼만데. 굳이 건드리지 않더라도 잘 안다.

“보세요. 각성자들은 어려서부터 전투 훈련하며 상처 입고 회복하길 반복하니 자연히 피부며 뼈대가 굳어요. 재진 씨처럼 부드럽지 않아요.”

알아. 안다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란 생각은 안 하는 거냐.’

일반인으로 살아온 권재진은 아무리 운동이 취미였고 암벽 등반을 즐겨 하여 근육질 체형이라고 해도 서의우가 보기엔 그저 무른 몸일 뿐이었다.

각성자는 특수 거주지구에 모여 살고, 일반인과 교류할 기회 자체가 없으니, 처음 만난 일반인 태생인 권재진의 몸이 신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건 이해하겠는데, 그렇대도 아기니 어쩌니 주절대는 건 예나 지금이나 거부감이 치민다.

“그럼 그냥 다른 부드러운 어떤 것에 비유하십시오. 함부로 아기에 대지 말고. 세상 아기들은 무슨 죄입니까? 그 어린것들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그치만 재진 씨는 그만큼 귀여운데……. 말랑말랑하고…….”

“닥쳐요. 입 다물어.”

“난 너무 좋아요.”

“어쩌라고! 썅! 그만 손 치우십시오. 내가 알아서 씻을 테니까.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십시오.”

“아, 알았어요, 이제 안 할게요. 재진 씨 화났어요? 안 해요, 진짜 안 해.”

때아닌 몸싸움이 벌어졌다.

권재진은 서의우가 못 건드리게끔 강하게 밀어 냈고, 서의우는 웃는 낯으로 재진을 붙잡아 껴안았다. 팔뚝에 힘을 주고, 심지어는 체중까지 다 실어서 옭아매자 권재진은 꼼짝없이 붙들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복싱이나 주짓수를 배워 두는 건데.’

물론 격투술을 안다고 서의우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염동력으로 붙잡아 짓뭉개면 끝이니까. 그렇대도 지금보다 조금은 상대가 되지 않았을까. 여러모로 빡친다.

“이보세요.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습니까? 서의우 씨야말로 애새끼라고…….”

“응, 말했어요. 똑똑히 기억해요.”

“그럼 뭡니까. 아는데 왜 아직도 애같이 굴지요? 내 환심 사기로 한 건 이제 관두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재진 씨가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있잖아요. 뭐든 말만 해요. 의우야가 다 들어줄게요.”

“뭐든, 다……?”

“네. 다음번에 가이딩 받을 때는 더 핥아 줄게요. 시간도 더 들이고, 공들여서 살살…… 응? 좋죠?”

서의우가 권재진의 뺨에, 이어서 턱에도 입술을 비볐다. 쪽쪽거리며 붙잡힌 재진의 팔뚝을 하나씩 들어 계속해서 씻겼다. 겨드랑이 안쪽을 거품 낸 손으로 문지를 때는 유독 한 부분에 정성껏이라 움직임이 느렸다.

권재진은 간지러움을 참으며 보이지 않는 욕조 물속에서 발가락 끝을 움찔거렸다. 얇은 피부에 서의우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아, 그렇지…… 의우야라고 하니 말인데요. 이제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줘도 되지 않나요?”

서의우가 권재진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가슴을 닦아 주었다. 크게 근육 잡힌 가슴골에 정액이 끼어서 깨끗이 해야 했다. 밑 가슴 접힌 부분을 들어 올리니 안쪽이 찐득찐득했다.

서의우는 권재진의 가슴을 조금 멋대로 주무르며 채근했다.

“재진 씨가 날 어떻게 아는지. 말해 줘요. 암만 생각해도 난 짚이는 기억이 없단 말이죠. 그런데 내가 어떻게 재진 씨의 의우야가 된 걸까…….”

서의우가 고개 숙여 권재진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권재진의 어깻죽지를 따라 도르륵 흘렀다. 서의우가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흘긋 시선을 내렸다.

“혹시 긴박한 전투 상황에 마주쳐서 기억을 못 하는 걸까요? 일반인과 만나려면 그때뿐이니까요. 게이트가 터지거나 크리처가 침범하는 위기 상황에 구호 활동하면서 스치듯이요.”

지금껏 서의우가 구출한 일반인들 수만 따져도 천만 명에 육박할 터다. 어쩌면 그중에 권재진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상념에 빠진 서의우가 눈을 좁혔다. 쌍꺼풀 없이 기다란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곧 고개를 내젓는다.

“음, 아니다.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확신이 서의우의 뇌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렇게 스치듯 지나간 인연이라면 서의우가 권재진의 의우야일 리 없으므로.

“재진 씨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고집 있고 까탈스럽죠. 제가 고작 목숨 한 번 구해 줬다고 자길 기억 못 하냐는 둥, 의우야라는 둥, 친근하게 굴 리 없어요.”

권재진과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확언을 하나 모르겠다만, 서의우는 퍽 자신이 있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권재진은 몹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자신이 정한 기준에서 벗어난 오차 범위를 용납하지 않는, 심지가 곧고 꼿꼿한 사람이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며 아기처럼 칭얼칭얼…… 아, 실수. 그러지만, 그건 다 권재진 씨 머릿속에 정해진 정답이 있기에 부리는 투정이잖아요. 제가 정답을 맞혀 주면 재진 씨는 싫어하지 않아요.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요.”

그러니 권재진이 서의우를 안다는 건, 필시 둘 사이에 확고한 교감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내 말…… 맞죠?”

서의우의 반지르르한 회색 눈동자가 권재진의 모습을 빤히 응시하며 집요하게 훑었다.

몽글몽글 거품 묻은 가슴부터 보기 좋게 갈라진 근육과 갈비뼈, 오목한 배꼽, 옅게 털이 난 사타구니와 물에 잠긴 하체까지 자세히 살폈다. 하얀 허벅지와 멍든 무릎, 툭 불거진 복숭아뼈까지 시선이 닿다가 발등에서 멈추어 되돌아왔다.

시선만으로 피부를 녹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권재진은,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더운 숨을 뱉으며 두 눈을 내리깔았다.

“……집.”

수증기 가득한 욕실에 나직한 권재진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마치 오랫동안 골몰한 끝에 정답을 찾은 사람처럼 다시금 중얼거렸다.

“집이 좋겠습니다. 신축 주택.”

“응? 주택이요?”

“방금 아까. 뭐든 말만 하라고 했잖습니까. 다 들어 준다면서. 저는 새집을 갖고 싶습니다.”

권재진이 태연한 목소리를 꾸며 내어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었다.

서의우가 품은 의문은 아직 재진이 풀어 줄 수 없는 문제기 때문이었다. 저 질문에 답해 주려면 필연적으로 권재진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만, 지금은 시기상조였다.

‘너무 일러.’

물론 권재진은 언젠가 모든 진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권재진이 죽어서 회귀했다는 사실, 그리고 1회차 인생에서 서의우와 애인 사이였다는 사실 모두 끝까지 숨길 마음은 없었다.

서의우에게 그것들을 감추려 한다고 해서 감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서의우에겐 어떤 거짓말을 해도 결국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때가 되면 있는 그대로 사정을 말하고 서의우의 협력을 구할 심산이었다.

다만 그 언젠가가 지금이 아닐 뿐이다.

‘지금 진실을 밝힌다고 서의우가 믿을지도 모르겠고, 설령 믿는다 해도 내겐 득이 아닌 실이지. 지금도 가뜩이나 서의우 상대하기 벅찬데, 회귀 사실까지 알게 되면 얼마나 더 휘둘리겠냐고.’

벌써 미래가 보인다.

‘재진 씨가 4년이나 제 가이드로 지낸 경력이 있었다니요……. 그런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봐줄 필요도 없었던 거네요. 힐링 팩터 사용법도 익숙할 거 아녜요? 그렇죠? 하고 설레게 웃으며 뒷구멍 찢어 놓겠지.’

그러니 당장은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겨 볼 생각이다.

비장의 패 하나 정도는 품고 있어야 권재진의 정신 건강에도 이로울 테니.

‘아마 서의우의 뿌리 깊은 불균형 3가지를 전부 고쳐 놓은 뒤라면…… 그때쯤엔 얘기해도 될 것 같긴 하지만…… 도통 언제가 될지 모르겠군.’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재진이 연기를 이어 갔다.

한 치의 동요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고, 목소리도 떨림 없이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권재진은 연기에 꽤 재능이 있었다.

“서의우 씨도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앞으로 평생을 숨어 지내야 하는 처지입니다. 밖에 나가면 사살당할 테니까요. 그러니 오랜 시간 지낼 집만큼은 제가 욕심을 좀 부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아…….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서의우가 욕조에 기대어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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