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38)화 (38/60)

조금 전에는 많이 놀랐다. 교원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옷을 모두 갈아입고, 권 대표가 말한 ‘리본’도 스스로 묶었다. 모자는 머리에 쓰지 않았다. 흉측한 토끼 귀를 드러낼 마음은 없었다.

교원은 원피스가 어색해 제가 챙겨 온 허름한 잠옷 바지도 껴입었다. 그러니 조금 나은 듯도 싶었다.

방에서 나오자 권 대표가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뭔가 묻어 씻고 있는가, 했다. 그러다 교원은 바닥에 대충 문질러 닦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뭐야, 무슨…… 대표님!”

교원은 즉시 욕실로 달려갔다. 욕실 문을 꽉 닫혀 있었다. 문고리를 몇 번 돌리던 교원은 문을 주먹으로 세게 두들겼다.

“대표님! 이 비서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안쪽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교원은 그가 쓰러졌나 싶어 문고리를 마구 흔들다가, 아예 부술 생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때 뒤늦게 물소리가 사라지고, 자그마한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왜, 왜 불러……?”

“괜찮으십니까?”

“괜찮은데 왜, 왜.”

“거실에 피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대표님의 것 아닙니까?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서……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면 바로 구급차를……!”

“아, 아냐! 괜찮아. 그, 어, 별거 아니야. 그냥 조금 흘린 거야.”

“어딜 다치셨길래 그러신 겁니까?”

교원은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낸 의사에게 당장 따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피를 흘리고, 욕실까지 달려갈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각혈이라도 했을까?

교원의 머리에는 그가 코피를 흘렸을 가능성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 코피는 피곤할 때 터지는 것이 아닌가. 펑펑 놀기만 한 권 대표가 코피를 흘릴 리는 없었다.

권 대표는 샤워 부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입술을 질끈 물어뜯었다.

“입, 입술! 입술을 좀 뜯다가…… 피가 났어.”

있는 힘껏 입술을 찢자 그제야 피가 좀 나왔다. 권 대표는 휴지로 입술을 꾹꾹 눌러 지혈하면서 대답했다.

“나 진짜 괜찮으니까 소파에서 좀 쉬고 있어!”

“……하아, 입술은 또 왜, 뜯으신 겁니까? 그런 적 없으셨잖아요.”

“이 비서어어…… 나가서 얘기하자, 웅?”

“알겠습니다. 물로 적당히 적시고 나와 주세요. 소독도 해야 하니까요.”

교원은 한숨을 푹,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터벅터벅, 걷다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제 짐에서 구급상자를 가져와 소파에 앉았다.

룸 전체에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교원은 소파에 앉아 손에 닿는 담요로 제 무릎을 덮었다. 그리고 정자세로 앉아 멍하니 까만 TV 화면을 쳐다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권 대표가 나왔다. 입술에 피가 좀 난 것치고는 머리까지 새로 감은 듯한 축축한 모습이었다.

“또 씻으셨습니까?”

“어어…… 그냥, 음, 어, 그냥 또 씻고 싶어서.”

“…….”

교원은 의문을 가득 담은 얼굴로 권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권 대표는 정확한 이유를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교원은 소파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고 구급상자를 열어젖혔다.

이전에 했던 것처럼 소독약으로 입술을 적셨다. 밴드를 붙일 수 없는 자리이니, 빨간약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권 대표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거 싫은…….”

“싫다고요?”

“아니, 아냐.”

“내일이 미팅인데 입술을 다 찢은 양반이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내가 잘못했어. 나 그거 좋아, 발라 줘.”

교원은 콧바람을 뿜으며 권 대표의 입술 위에 빨간 약을 잔뜩 발랐다. 한 번 바를 때마다 권 대표가 발작하듯 허리를 움찔거렸으나 교원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다 발랐습니다. 오늘은 그냥 일찍 주무시죠. 영화는 마지막 날에 보고요.”

교원의 태도가 아까보다 차가워졌다. 그러나 권 대표는 더 조르지 못하고 저보다 작은 손이 구급상자를 정리하는 걸 빤히 쳐다보았다. 조그마한 상자에 소독약이며 빨간약이며 어찌나 오밀조밀 예쁘게 정리해 넣는지. 멍하니 보고 있자 상자가 탁, 닫혔다.

“그럼 저는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으응…….”

조금 전까지 밀어붙이던 양반이 우물쭈물거리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교원은 제 엉덩이와 뒤태를 훤히 보였던 것을 떠올리고 수긍했다. 저 인간도 관심이 있을 때는 이렇게 부끄러워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교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허리를 곧게 세워 제 방으로 걸어갔다.

그걸 뒤에서 보던 권 대표는 또다시 코를 막았다. 긴 토끼 귀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동그란 토끼 꼬리를 씰룩거리는 교원의 모습이 귀엽다 못해 폭력적이었다.

시발, 이 비서 성격이 만만찮아서 다행이다. 저렇게 귀엽고 예쁜 얼굴로 성격까지 말랑했다면 분명 노리는 놈들이 수없이도 많았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베타임에도 불구하고 노리는 알파, 오메가들이 좀 있었다.

권 대표는 교원이 회사에서 늘 칼 같고, 조금은 재수 없는 이미지를 고수하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다른 놈과 연애 중이었을 테니까.

* * *

교원은 눈을 뜨자마자 약부터 챙겨 먹었다. 그러다 약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발견했다. 생각해 보니, 의사가 약을 넉넉하게 주긴 했지만 한 달 뒤 즈음에 다시 방문하라고 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병원에 갈 생각이었지만, 조금 이상했다.

의사는 한 달이면 스스로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을 거라 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아직도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했다. 어제 있던 일의 경우는 사고였으니 그렇다 쳐도, 저번 주에도 페로몬을 능숙하게 조절하지 못했다.

형질이 변화하는 게 우성 알파와 관계를 가지면 종종 생기는 일이라 해도 아주 잦은 일은 아니다 보니 이런저런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닐까. 교원은 의사에게 말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 두었다. 보통은 수첩에 적긴 하지만, 누가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교원은 꽤 따뜻했던 핑크 잠옷을 벗고, 방에 딸린 작은 화장실에서 몸을 씻었다. 그리고 머리를 말리고, 싸구려 젤로 머리를 적당히 고정하고 빗으로 정돈했다.

그 후 숙소에 오자마자 세팅해 두었던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깔끔하게 맸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방 밖으로 나오자 당연하다는 듯 권 대표가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근래 저를 데리고 출근한다고 일찍 일어나더니, 몸에 습관이 밴 모양이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어어…… 벌써 갈아입었어?”

“근무 시간이니까요. 조식은 아래서 드시겠습니까?”

“아니, 방에서 먹으려고 내가 미리 말해 놨어.”

“네, 알겠습니다.”

교원은 부엌으로 가 물을 끓이고 준비돼 있는 티백을 꺼냈다. 작은 트레이에 유리 찻잔을 올려 두고, 티백을 뜯어 걸어 두었다. 티백을 뜯자마자 달콤한 향기가 확 올라왔다. 딸기향의 홍차인 듯싶었다.

다 끓은 물을 잔에 적당량 붓고, 티스푼으로 살살 저어 티백이 우러나도록 한 뒤, 티백을 한쪽에 치워 두었다.

“딸기 홍차입니다.”

“땡큐. ……이 비서는 안 마셔?”

“저는 물이면 됩니다.”

교원은 한 손에 들린 물병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권 대표가 앉은 소파가 아닌, 통창에 가까이 붙은 테이블로 가 앉았다.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시자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목구멍으로 벌컥벌컥 넘어갔다.

교원은 아침에 늘 찬물을 마시고 출근했다. 권 대표의 일은 대충 처리해선 안 되는 중요한 사항인 경우가 대다수였고, 최근에는 조금 나아졌다지만 이전의 경우엔 교원이 권 대표를 대신해 처리하는 일도 많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을 마시다 창밖을 보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그 방향으로 눈동자를 돌리자 권 대표가 휙, 티가 나도록 세차게 고개를 틀었다. 교원은 속으로 ‘왜 저래.’라고 생각하며 다시 창밖을 보며 물을 마셨다.

얼마 안 가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오늘 조식은 프렌치토스트와 계란 프라이, 베이컨과 싱싱한 샐러드, 부드러운 커스터드푸딩이었다. 그리고 빨간 체리가 아래에 잠겨 있고, 위에는 산뜻한 허브가 얹어져 있는 체리 에이드가 함께 나왔다.

「프렌치토스트는 이쪽에 있는 생크림 혹은 꿀과 함께 발라 드시고, 베이컨도 함께 드시면 더욱 맛이 좋습니다. 샐러드는 소스를 원하시는 만큼 넣어 드시면 됩니다. 즐거운 식사 되시길 바랍니다.」

직원은 깔끔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다시 숙소 밖으로 나갔다.

권 대표도 교원이 있는 테이블로 와 건너편에 앉았다. 그는 어쩐지 조금 발간 뺨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프렌치토스트를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추우십니까?”

“응? 아니…… 왜?”

어쩐지 눈치를 보는 듯한, 아니…… 눈치보다는 수줍어하는 듯한 태도가 낯설었다. 교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권 대표를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빨갛습니다. 혹시 열이 오르신 걸 수도 있으니, 내려가실 때 의무실에 가서 체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으, 으으응…….”

교원도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프렌치토스트를 자르고, 도톰한 베이컨도 잘라 그 위에 얹었다. 소스는 일절 올리지 않고 그대로 포크로 집어 야금야금 먹었다. 샐러드도 소스 없이 먹던 교원은 조용히 제 소스 그릇을 권 대표 테이블로 밀어 주었다.

체리 에이드는 상큼하고 적당히 달콤했다. 시중에서 파는 달기만 한 체리 에이드와는 달랐다. 교원은 식사에 집중하며 혹여 배탈이 나지 않도록 천천히, 여러 번 씹어 삼켰다. 그때 또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은 조금 짜증이 나서 눈동자를 치켜들자 권 대표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펄쩍 일으켰다. 의자가 반쯤 뒤로 넘어갔다. 교원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팔을 뻗었다. 그리고 권 대표의 의자 등받이를 손으로 받치고, 반대 손으로 권 대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대체 오늘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한숨을 쉬며 핀잔하는데도 권 대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놀란 얼굴을 숙여 감추기 바빠 보였다. 교원은 의자를 제대로 세운 뒤, 권 대표의 얼굴 아래로 제 얼굴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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