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4)화 (4/60)

그 후로도 권 대표는 계속 칭얼거렸지만, 교원은 매정히 무시했다.

권 대표가 그날 밤을 잊은 것이 고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교원도 소소한 복수는 해 줘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책임을 따져 묻기에는 이 회사의 연봉이 높았고, 교원에게는 빚이 있었다. 그래, 날이 갈수록 이자가 붙는 어마어마한 빚.

다행인 건 교원이 그리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괘씸하긴 했지만 매일 밤 베개를 눈물로 적실 마음은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당장 제게 닥쳐 온 이 ‘오메가 발현’이나 신경 쓰는 게 옳았다.

운전기사와 경호원, 교원과 권 대표는 한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권 대표의 경계 가득한 눈빛을 받아야 했지만, 오늘은 뭘 더 할 생각은 없었다.

“다음 달이 명절이신 건 알고 계시죠?”

“아? 아아. 벌써 그렇게 됐어?”

“거래처에 보낼 선물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만, 직원들 선물은 생각하신 게 있으신가요?”

본래라면 이런 건 비서 1팀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일이다. 하지만, 제 직원들에게 의외로 관심이 많은 권 대표는 매번 직접 선물을 고르곤 했다.

“음…… 음, 음, 글쎄. 이 비서는 뭐가 좋은데?”

“먹을 거?”

“식상하다.”

“……그럼 다음 주까지 생각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랭.”

교원은 각 거래처에 보낼 선물들을 다시 한번 체크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외에도 할 일이 많다. 권 대표에게 넘길 서류들도 한가득이고.

“이 비서, 잠깐 나가지 말아 봐.”

“네, 시키실 거 있으세요?”

“그건 아니고…… 여기 앉아 봐.”

툭툭, 권 대표가 제 옆 의자를 가리켰다. 조그마한 간이 의자는 그가 다리를 올려놓는 용도로 쓰이곤 했다.

“꼭 앉아야 합니까?”

“응. 싫어?”

“대표님 맨날 여기 발 올리시잖아요.”

“발 아니야. 다리만 올려.”

“……그것도 그닥.”

떨떠름하게 고개를 젓자, 권 대표가 서랍에서 물티슈를 꺼내 의자를 박박 닦았다.

“됐지? 빨리 앉아 봐.”

“……후, 네.”

권 대표의 태도로 보아 분명히 일과 관련 없는 것이다. 교원은 또 어떤 개소리를 할까 싶어 의자를 권 대표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은 후 앉았다.

“왜 또 멀리 가.”

“그냥요. 말씀하세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자, 권 대표가 제 턱을 살살 긁었다. 뭘 시키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가 싶어 점점 더 불안해졌다.

요리 학원도 끊어 줬고, 이전에 오메가는 전근을 갔으니 데이트 장소 물색도 아니고, 새로 만나는 사람도 없다. ……명절이니까 부모님께 뭘 드릴까 고민하는 건가? 그런 것치곤 꽤나 진지한 얼굴이다.

“……나 고민 있어.”

한숨을 푹 내뱉으며 무겁게 연 입술에서 쓸데없는 소리가 나올 거라는 촉이 왔다. 교원은 당장 몸을 일으켜 도망가고 싶었지만, 묵직한 분위기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 인간, 성격은 꽤 활발하면서 가까운 친구는 하나도 없다. 집안과 연이 있는 친구들은 꽤 있었지만, 그가 마음을 놓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저 바쁩니다.”

“자기야, 그러지 말고 좀만 들어 줘. 나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

“……여자 얘깁니까?”

설마, 그사이 벌써 새 여자를 만들었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자 권 대표가 헛숨을 들이켜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니까 여자는 아니고…… 어, 음…….”

“……설마, 남자? 대표님 이젠 남자까지…….”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성 오메가만 골라 만나던 놈이, 남자를 만난다고?

“그으으……니까. 내 의지가 아니었어.”

권 대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의지가 아니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교원은 그의 생각을 살피기 위해 샅샅이 얼굴을 살폈지만 의중을 알 순 없었다.

“지지난 주에 있잖아. 사시미 먹으러 갔잖아, 응? 기억나지?”

“……기억나는데요.”

기시감이 든다.

교원은 곧바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권 대표에게 러트가 온 날의 얘기, 게다가 여자가 아닌 남자에 대한 이야기.

……눈치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 그날…… 집에 어떻게 갔어?”

교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날, 마지막까지 술을 마신 사람은 권 대표와 자신뿐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자리가 파하자마자 떠났고, ‘조금만 더’라며 조르는 말에 붙잡힌 건 교원뿐이었다.

“나 그, 그때 누구 만나지 않았어? 몸 대박 좋고, 키는 이 비서만 하고? 되게 야했어.”

수줍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권 대표가, 볼을 발그레 붉혔다. 교원은 역시, 라고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야했다고?

“미친 새끼…….”

“응?”

“아닙니다.”

권 대표는 그날을 회상하는지, 말랑한 표정으로 몽롱하게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날 밤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있는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그 사람 찾아 주면 안 돼? 응? 내가 경호팀 실장님한테 물어보니까, 그날 이 비서랑 나랑 마지막까지 남았다고 했단 말이야.”

정말 원치 않았었다. 술에 푹 절어 있는 남자와 단둘이 술자리를 하는 건. 끈질기게 저만 붙들고 징징대지만 않았어도 귀한 금요일을 그리 보내진 않았을 터다.

게다가 그다음 날, 홀로 집에 가 끙끙대며 약을 사 와 바른 것도…….

“그날…… 전, 대표님 택시에 태워 드리고 집에 갔습니다.”

한 템포 쉬고, 겨우 말을 뱉었다. 사실 마음만 같아선 그게 저라고, 누구와 그 짓을 했는지 기억도 못 하는 게 어디서 찾으려 드냐고 따지고 싶다.

하지만 교원은 이성적이고,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연애할 마음도 없을뿐더러, 하게 된다 하더라도 권 대표는 늘 그렇듯 얼마 가지 않아 질릴 것이 뻔하다.

그런 가벼운 감정으로 이 비싼 연봉의 회사를 놓칠 수야 없다. 안 그래도 누구 때문에 오메가가 됐는데……!

“진짜? ……누구 같이 탄 사람, 없어?”

“제가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을 대표님과 태울 거라고 보십니까?”

“어어, 그러네. 이 비서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

“그 후의 일이니, 아마 도착하시고 나서 만난 분이시겠지요. 대표님 댁 근처에 계시던 분일 수도 있겠습니다.”

교원은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성욕이라곤 일절 없던 자신도 그날 밤은 잊기 힘들 만큼, 격정적이고 혼란스러운 사건이었다. 제게 그런 욕구가 있는 줄 그날 처음 알았을 정도로.

“그렇네. 역시 물어보길 잘했다.”

“그럼 일하러 가도 됩니까?”

“그럼, 그럼. 아, 맞다. 이 비서 말이야.”

“……네?”

바로 몸을 일으켰다가, 팔뚝을 잡아 오는 것에 멈칫했다. 교원은 권 대표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이제 와 하는 말인데 말야. 맨날 생각했거든.”

“……그런 말은 안 듣는 게 좋던데요.”

“아니, 이 비서 알파였으면 인기 많았을 거 같아. 지금도 많겠지만?”

지랄이네.

이유 모를 통증이 가슴 한구석에서 느껴졌다. 권 대표를 만난 후로 자주 겪는 일이었다. 어쩌면 스트레스성 통증일지도 모른다. 교원은 권 대표의 팔을 꾹 밀어냈다.

그와 보낸 밤은 그저 사고였고, 없었던 일로 치고 싶었건만. 왜 자꾸만 들쑤시는 것인지……!

“그리고 말야, 이 비서가…….”

“오늘 파티, 비서 1팀 팀장이랑 가세요.”

“어어?”

교원은 서늘한 낯으로 인상을 구겼다. 본래도 차가운 이미지였던 얼굴이 더욱 매서워 보였다. 꼭, 한겨울 칼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 가기 싫습니다.”

충동적으로 뱉은 말에 권 대표가 입을 벌린 채로 얼어붙었다.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교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대표실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홀로 남은 권 대표는 머쓱한 얼굴로 제 볼을 살살 긁었다.

“근데 오메가였으면 이 비서, 좀 위험했겠지.”

조금 전 다 하지 못했던 말을 중얼거리던 권 대표는 혼자 배시시 웃었다. 이 비서도 참 귀엽단 말이지.

* * *

새벽 6시. 기상하자마자 빠릿빠릿 출근 준비를 마친 교원은 잠시 소파에 걸터앉았다. 잊기 전에 페로몬 조절제를 먹고, 저녁 약과 함께 의사가 긴급 시에 먹으라던 ‘필요 시’ 약을 챙겼다.

긴급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지만 인생은 영화보다 더 파란만장하고, 개연성 없이 굴러가기 마련이니 챙겨서 나쁠 건 없다.

[차의겸: 확인했다~ 꼬박꼬박 보내는 걸 보니 살기 좀 편한가 보네]

메시지를 확인하던 교원은 익숙한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몇 번이나 제 손으로 저장하려는 걸 지우고 지웠건만. 언제 또 저장해 두었는지.

교원은 다시 놈의 번호를 삭제하고 핸드폰을 가방에 처박았다.

차의겸. 교원의 기억이 시작할 즈음부터 얼굴을 알고 지냈던 놈은 소꿉친구도, 혈연관계도 아니었다. 빚쟁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관계였다.

〈너, 빚쟁이라며?〉

〈…….〉

〈아빠가 그러던데, 너 부모도 없고 돈도 없는 불쌍한 애라고.〉

과거의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교원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출발할 시간이었다.

“아…… 회사 가기 싫다.”

언제쯤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교원은 찬 기운이 남은 방 안을 한번 둘러보고, 심드렁한 얼굴로 현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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