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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빛과 소금과 설탕과 버터 (2)(2권) (4/10)

Chapter 3. 빛과 소금과 설탕과 버터 (2)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도형에게서 뽀르르 전화가 왔다. 수현은 도형의 이름이 핸드폰에 뜨자마자 손을 휘휘 내저어 임원들을 내보냈다. 심기가 불편한 수현에게 사정없이 깨지느라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던 임원들은 자기들이 숨도 돌리고 점심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전부 도형 덕분임을 알까.

도형은 술주정 부려서 미안하다며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헛된 약속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했다.

-저 중간부터 기억이 띄엄띄엄 나는데, 혹시 이상한 소리는 안 했어요?

이상한 소리라기보다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는 했는데.

“음….”

-뜸 좀 들이지 말아요. 답답해서 숨넘어가겠네. 전기밥솥이야, 뭐야.

“어디서부터 말씀이실까요? 가게에서 나오기 전, 가게에서 나와서 댁에 가기까지, 댁에 들어간 후….”

도형이 조용해졌다.

“실은 저도 꽤 취해서요. 하나도 기억 안 납니다.”

조그맣게 “뻥 치시네.”라는 말이 들렸지만, 수현은 그냥 웃었다.

-저기, 고맙습니다.

“뭐가요?”

-도진이가 그러던데요. 선생님이 저 집까지 데려다주셨다고.

“아, 네. 제 옷에 뭐가 좀 묻어서 도진 학생 옷을 빌려 입었어요. 옷 돌려 드려야 하는데.”

-그거 버리래요.

“네?”

-도진이가 버리라고 말하면 알 거라고 하던데요?

“아.”

이겼다. 수현은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에 허물어진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도진 말대로 그 티셔츠는 버리고 아주 비싼 티셔츠를 새로 사 줘야지. 옷이 작아서 벗다가 찢어졌다며, 빌려 입은 옷을 망가뜨린 사과라면서 도형을 통해 새 옷을 전달하면 아무리 싫어도 함부로 내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선생님 셔츠 빨아서 싹 다려 놨어요. 다음에 가져다줄게요. 저기요…. 근데….

“네.”

-혹시 도진이랑 싸웠어요?

“처음 본 사람과, 그것도 형사님 가족과 싸웠을 리가요.”

-그렇죠? 근데 애가 펄펄 뛰더라고요? 얘가 원래 남 신경 쓰는 애가 아닌데 유난스럽게 난리를 쳐서 혹시 싸웠나 했어요.

이미 펄펄 뛰었군. 또 이겼다.

“뭐라고 하던가요?”

-아, 그게… 제가 집에 누구 데리고 온 게 처음이라서 도진이가 이상한 오해를 한 거 같은데…. 도진이랑 둘이 살기 시작하면서 약속한 게 있거든요. 집에 다른 사람 데리고 오지 않기.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나 데리고 오지 않기. 근데 강수현 선생님이 아무나는 아니잖아요? 도진이가 아직 애라서 그런지 샘이 많아요. 그런 거 있잖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가 다른 애랑 놀면 친구 뺏기는 줄 알고 울고불고 그러는 거. 걔가 어릴 때부터 그런 게 좀 심했어요. 제가 이제까지 집에 누구 데려오고 친하게 지내고 그런 적이 없어서 더 그랬을 거예요. 혹시 못나게 굴었더라도 선생님은 어른이니까 좀 봐줘요. 네? 제 얼굴 봐서라도.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이니 도진 학생과 빨리 친해져야겠군요.”

-뭘 자주 봐요? 왜?

“저희 연애하고 있지 않습니까. 연인의 가족이니까 자주 보겠지요.”

-아이 진짜. 내가 그런 말 좀 하지 말랬지! 그거, 그냥 나중에 누가 김도형이 강수현 선생님한테 청탁 받아먹었다고 밀고하면 우리 연애한다고 둘러대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흠. 아닌데요. 계약서에 쓰여 있는데요.”

-뭐요?

“상대방의 가족에게 교제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전화 반대편에서 도형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계약서를 끝까지 읽는 게 중요합니다. 핵심 조항은 뒤에 있기 마련이거든요.”

-사기꾼!

“신의 성실의 원칙과 금반언의 원칙에 따랐을 뿐입니다.”

-민법 103조에 이런 계약은 무효라고 딱 쓰여 있거든요?

“저희 계약이 선량한 풍속 또는 사회 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지는 않지요. 계약 조항은 제가 형사님께 잘해 드리겠다는 약속이 대부분입니다. 깜짝 조항이 몇 개 있기는 한데, 그건 천천히 알려 드릴게요.”

수현은 도형과 대화하면서 도진이 이상하게 거슬렸던 이유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동족 혐오. 그는 도진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그는 메디컬 스쿨에 거액의 발전 기금을 쾌척하고 받은 탁상시계를 신경질적으로 뒤집었다. 시계 판에 커다랗게 박힌 ‘진리’라는 표어가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진리는 얼어 죽을. 그의 또 다른 모교의 표어는 ‘마음과 손’이다. 이왕 손을 쓰려면 마음을 다하라는 의미이지. 그럼 어른답게 마음을 다해 손을 써 보실까.

***

“김도진 여기 있어? 김도진 있으면 빨리 나와.”

담당 교수의 회진이 갑자기 취소되어 자습을 핑계로 삼삼오오 둘러앉아 수다를 떨던 본과 실습생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레지던트 선배의 호통에 눈알만 또르르 굴려 도진을 쳐다보았다.

“전데요.”

도진이 손을 들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뭘 잘못했더라. 어제 오후 회진 때 질문해서 잘난 척한다고 찍혔나. 설마 케이스 발표 당첨된 걸까. 도진의 잘생긴 얼굴이 긴장으로 바싹 굳었다.

“네가 김도진이었어? 의학개발혁신센터 1층 콜라보레이션 센터로 가라. 아니다. 너 거기 어딘지 모르지? 같이 가자. 따라와.”

“네? 저요? 저를 왜?”

“학장님이 찾으셔. 얼른 와. 빨리. 학장님 기다리시게 할 거야?”

“가운 벗어야…. 저 겉옷이….”

“아, 이 새끼 얼굴값 하네. 야, 시간 없어. 그냥 와.”

도진은 영문도 모른 채 허겁지겁 서두르는 레지던트를 따라 달렸다. 뒤에서 동기들이 MOU니, 발전 기금이니 수군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지만 그런 말에 귀 기울일 여유는 없었다.

“김도진 데려왔습니다.”

“최 선생, 수고했어.”

도진을 데려온 레지던트가 꾸벅 인사하고 나가 버리자 넓은 홀에 도진 혼자 남겨졌다. 사실 혼자 남겨진 건 아니었다. 홀에는 학장뿐 아니라 낯익은 교수와 임상 강사가 스무 명도 넘었고, 외부 인사며 병원 홍보 팀과 신문사에서 나온 기자, 카메라맨까지 북적북적했다. 아직 들뜬 분위기가 남아 있는 걸 보니 행사가 끝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황망하게 서 있던 도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굽혀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김도진 학생, 어서 와요.”

도진을 알 리가 없는 학장이 이상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도진을 불렀다.

“이 친구가 지금 임상 실습하는 3학년 중에서 제일 우수한 학생입니다. 입학 때부터 세 손가락 밖으로 나간 적이 없고요. 우리 교수들 이야기 들어 보니 성적만 좋은 게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장래가 유망하다고 하네요. 리더십도 좋아요. 아마 졸업까지 쭉 수석일 거로 예상합니다. 보시다시피 아주 훤칠하기까지 하지요.”

도진은 학장의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공치사가 낯 뜨겁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 학장의 건너편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어서….

“김도진 학생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여기서 천천히 말씀 나누세요.”

학장이 직접 도진과 남자를 안쪽 접견실로 안내했다. 자기 집 거실인 양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앉은 남자가 가만히 서 있는 도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불편합니까?”

“당연하죠.”

“참아요.”

“뭐라고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수 있나요.”

남자는 긴 다리를 쭉 뻗었다가 오른쪽 다리를 우아하게 들어 왼쪽 무릎 위에 겹쳐 올리고 도진을 향해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개수작이시죠.”

“개수작이라니. 앰브레이스와 한국대 병원은 작년부터 전략적 파트너십을 준비해 왔어요. 설마 몰랐나요? 오늘은 MOU 체결식으로 왔어요. 우리 파트너십 목표 중 하나가 장기적 인재 육성이거든요. 학장님께 본과 3학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과 면담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도진은 대답 대신 눈살을 찌푸리고 수현을 노려보았다.

“저를 실망하게 하지 않은 점은 칭찬해 드리지요. 다른 사람이 여기에 서 있었으면 기분이 몹시 상할 뻔했어요.”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수현은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리고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우리 도형이가.”

‘우리’를 특히 강조해서 말하자 도진이 험상궂게 인상을 썼다.

“청춘을 갉아서 키운 동생인데 한국대 의대 수석 정도는 되어야지요. 도형이 청춘에 그 정도 가치는 있잖아요?”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우리 학교에 투자했어요?”

“적당한 자의식은 건강한 자존감 유지에 도움이 되지만 과하면 병입니다. 김도진 학생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냥 도형이 부록 같은 사람인데.”

도진은 제법 날카로웠다. MOU는 오래전부터 준비한 일이 맞지만, 장기적 인재 육성이니 발전 기금이니 하는 것은 전부 수현이 며칠 전에 불쑥 제안한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거금이 굴러 들어오는 거라 학교와 병원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수현의 갑작스러운 변덕은 부랴부랴 정식 협약서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도진이 옳게 지적했듯이, 발단은 수현의 심술이었다.

“이제부터 김도진 학생은 정식으로 앰브레이스의 후원을 받게 될 거예요. 멘토링은 제가 직접 담당할 겁니다. 여권 있어요? 없으면 빨리 만들고 ESTA 신청해요. 조만간 미국으로 콘퍼런스 가야 하니까.”

“꺼지세요. 그딴 거 하나도 필요 없으니까.”

“착각하지 말아요. 김도진이 아니라 수석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니까. 정 싫으면 다음 학기에는 차석 하시든지. 그런데 김도진 학생, 어른 상대로 말버릇이 영 고약하네요.”

도진이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어른다워야 어른 대접하지. 나한테 어른 대접 받을 생각 하지도 마, 변태 자식.”

“애새끼가 예의가 없군.”

“뭐?”

“어른이 아닌 나에게 어른의 품위 같은 건 바라지 마. 네가 나에게 어떤 대우를 받을지 방금 네가 직접 선택했어.”

얼굴이 벌게진 도진이 수현의 건너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 돌리지 말고 무슨 속셈인지 똑바로 말해.”

“속셈은 무슨. 말했잖아. MOU 체결식 겸 후원 대상자 면접하러 왔다고.”

“그러니까 왜 하필 우리 학교 3학년 대상이냐고 물었잖아. 나 찍어서 온 거 맞잖아? 저번에 형 술 꼴아서 들어온 날, 나 전체 수석 했다고 한턱 쏘느라 그런 거였다면서. 형이 다 얘기했어.”

“신기하네. 보통은 환심 사려고 이따위 짓 했냐고 묻지 않나? 너를 엿 먹이고 싶어서 수백억 규모로 지랄을 하는 거냐고 묻다니. 참신해. 확실히 우수해. 신선한 시각이야. 나쁘지 않아.”

도진은 엇나간 대화에 새겨진 날카로운 이물감을 묵묵히 되새겼다. 수현의 비아냥거림에 배어 있는 조용한 위선과 꾸며 낸 무관심을 들으며 버릇대로 통찰했다.

“네가 사고 싶은 건 내 환심이 아니라 형 환심이잖아. 그리고 형은 돈 같은 거로 회유되는 사람 아니야. 네가 그 정도도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돈으로 우리 학교, 병원, 교수님 전부 휘두르는 거 아니야. 내가 아무리 날뛰어 보아야 네 손바닥 위라고 조롱하면서 빡 치게 만들려는 거겠지.”

“역시 훌륭해. 우리 회사로 스카우트하고 싶을 정도인데.”

수현이 도진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상냥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지만, 도진은 도형이 아니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친형제가 아니지?”

도진이 대답 없이 수현을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흰 피부 탓인지 눈동자가 유난히 검어 보였다. 눈빛이 수현의 심장을 바로 찌르는 것 같았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잖아.”

수현은 꼬아 앉았던 다리를 풀었다가 이번에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 위로 올리고 가볍게 웃었다. 도진은 그 찌르는 듯한 눈으로 누군가가 암호를 걸어 놓은 듯 수수께끼 같은 수현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폭발하듯이 물었다.

“뒷조사했어?”

“그런 걸 해야 아나?”

도진의 이상한 열기 앞에서도 수현은 침착함을 잊지 않았다.

“김도진 군. 대체 뭘 하고 싶은 겁니까?”

수현은 차분하게 앉아 길고 매끄러운 검지로 도진을 가리켰다.

“의대생이 하고 싶은 게 의사 말고 또 있어?”

“눈치 없는 척 나한테는 안 통해.”

“돌았어? 하기는 뭘 해, 형제끼리. 미친 소리 하고 있어.”

“형제라고 생각하기는 해?”

도진은 수현이 앞에 있다는 걸 잊은 것처럼 침묵했는데, 수현의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도진이 고개를 들어 수현을 보았다.

“우리가 형제가 아니면 뭔데.”

“네가 뭐가 되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왜 남의 집 일에 참견인데? 사기꾼 같은 게.”

“사기꾼이라. 네가 나를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사기꾼, 강도, 소, 돼지 아무렇게나 불러. 네가 나한테 미친놈이든 변태든 욕을 한다고 내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넌 아니지. 위태롭고 불안해. 남의 시선, 남의 평가에 끊임없이 휘둘려. 바탕이 약하거든.”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헛소리야!”

“맞아. 나는 아무것도 몰라. 대충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던졌는데 네가 혼자서 버둥거리다가 침몰했지. 그러니 넌 아직 멀었다는 거다.”

“형한테 수작 부리지 말고 꺼져.”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진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도진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털어 수현의 손을 털어 내려 했지만 커다란 손은 도진의 어깨를 오히려 더 세게 잡았다. 수현의 손이 닿은 자리로 열기가 아른아른 흘러들어 왔다.

“머리가 자주 아프시다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인데 호르몬 이상도 없고 경추도 멀쩡하고. 그러면 뭘까. 만성 편두통? 젊은 남성 편두통 환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뇌혈관도 신경도 멀쩡한 네가 그렇게 자주 두통에 시달리는 건 역시 이해하기 어려워. 범불안증이나 폐쇄성 수면 무호흡증도 없고, 오심, 구토, 시야 흐림도 없이 딱 머리만 아픈 신기한 케이스. 게다가 만성 두통 환자치고 키도 너무 크고 덩치도 너무 좋아. 특유의 무기력한 표정도 없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렇게 형 관심을 받고 싶었어?”

도진이 내리깔고 있던 눈길을 들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허풍선이 남작 각하. 뮌하우젠 증후군은 어릴 때나 귀엽다고 넘어가지, 그 나이에 그러면 병입니다.”

“아까는 애새끼라더니 이제는 어리지 않다고? 하나만 하시지?”

수현이 히죽히죽 웃었다. 눈가에 짓궂음이 배인 웃음이었다.

“왜? 네가 어린지 아닌지 결정하는 데에 내 판단이 필요해?”

“미친.”

“정신적인 불안이 육체 증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

검지로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건드리며 수현이 도진을 향해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정 불편하면 말해. 앰브레이스 최신 기술로 스캔해 줄게. 도형이가 네 유전자 검사해 줄 수 있는지 묻던데. 혹시 두통이 유전 질환인가 싶어서 그렇게 걱정이 되나 봐.”

도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네가 꾀병 부릴 때마다 도형이가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도형이가 대체 무슨 마음으로 만사 제쳐 놓고 네 곁에 붙어 있는지 상상이라도 해 본 적 있냐고.”

“나는….”

도진이 입술을 악물었다.

“너는 뭐.”

“나라고 언제까지 형의 짐이 되고 싶은 줄 알아?”

“짐? 너는 너 자신을 도형이의 짐이라고 생각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내가 도형이 형 부록이라면서.”

“나한테 그렇다는 말이지. 난 도형이 말고는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부록을 받고 싶어서 본품을 사는 사람도 있어. 다시 묻지. 넌 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거야?”

도진이 계속 문을 흘끔거렸다. 나가고 싶은 건가. 누가 들어와 줬으면 하는 건가.

“너는 몰라도 돼. 무슨 상관이야?”

“왜 없어. 도형이가 말 안 해?”

“무슨 말?”

“그러면 나도 말 안 해. 도형이한테 들어.”

마치 수현의 멱살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진이 제 가운 자락을 콱 움켜쥐었지만,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하면서 금세 맥이 풀렸다.

“형 마음 가지고 장난칠 생각 하지 마. 그랬다간 죽을 줄 알아.”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왜 다들 내 평가에 이렇게 박한지.”

수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도진의 안색을 살폈다. 납덩이처럼 차갑고 딱딱한 얼굴이었다.

“그쪽 행실이나 돌이켜 보세요.”

“늘 여유 있고 배려심 넘치는, 김도형 형사가 마음 놓고 의지하는 근사한 어른 강수현입니다.”

“지랄하시네.”

“너 이렇게 말끝마다 욕인 거 도형이가 알아?”

“알면 뭐?”

“모르는 거 같아서 알려 주려고.”

“말하기만 해 봐!”

수현이 과장되게 웃었다. 언뜻 보이는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유쾌했으나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아 기묘한 부조화가 어딘지 모르게 오싹했다.

“그래서 네가 애새끼라는 거야.”

“뭐?”

“애새끼는 보통 자기가 뭘 가졌는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 부러워하지. 그러다가 제 손에 쥔 것마저 으스러뜨려.”

“무슨 개소리야.”

“나였으면 “형이 너 이렇게 뻔뻔한 개새끼인 거 알아?”라고 받아쳤을 텐데. 아무튼, 나와. 펠로우십 마무리 지어야지.”

“싫어.”

“김도진. 왜 이래? 네 선택 사항 아니야. 그리고 앞으로 계속 볼 사이인데 친하게 지내자고.”

“웃기지 마. 내가 왜 너랑….”

“말했지. 넌 선택권 없다고. 내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거야.”

***

수현은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무서운 꿈을 꾸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 달콤한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도형아.” 하고 도형의 귓가에 이름을 속삭였더니 도형이 수현의 목에 매달려 헐떡거렸다. 심지가 절로 허물어지는 다디단 숨결. 손이 닿은 곳마다 발긋하게 달아오르는 고운 살결.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그대로 누운 채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꿈을 뒤적였다.

그래 봐야 꿈이라고 치부했지만 그 꿈은 며칠이나 수현의 눈꺼풀 안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바쁘게 일하는 동안에는 대체로 잊고 지낼 수 있었지만 혼자가 되면 어김없이 꿈에서 본 도형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차를 타거나 길을 걸어도 그 얼굴이 떠올랐다. 어째서 도형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은 수현이 실제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수현은 도형의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니 방 안이 캄캄했다. 희끄무레한 정원등 불빛이 커다란 창문 너머로 비쳐 들어와 천장 가운데에 어슴푸레한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였다. 몇 시쯤 되었을까. 망연해진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는데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화면을 건드리니 메시지 알림이 떴다.

빛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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